Brody’s files #28
아버지는 복수를 금기시했다. 복수는 가장 비현실적인 자기 만족 행위라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병원에서 행패를 부리던 무리들은 아버지에게 복수를 당해 죽은 게 아니었다. 돌림병이 돌았을 때 아버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거였다. 아버지는 직원들의 보복 행위를 금지시켰다. 너희들이 정의라고 여기는 강박관념은 감정적 화풀이일 뿐이며 모두에게 손해되는 행동이라고 교육시켰다. 주은은 엄마가 죽은 후 매일 복수를 꿈꾸었다. 피트는 매일 밤 주은의 머리 속에서 도륙 당했다. 하지만 주은은 아버지의 말을 어길 수 없었다. 주은은 아버지의 현실주의를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후 피트를 찾아 간 건 안부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복수를 하려던 게 아니라 과거의 인연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 인명 피해가 발생한 건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피트는 그동안 살이 많이 쪄 있었다. 그의 집은 전보다 넓었고 직원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피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은을 집에서 부리는 수십명의 가정부 중 한명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주은이 가까이 다가가자 피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티졸과 노르피느프린 호르몬이 쏟아졌다. 동공 확장. 심장 박동 수 증가. 왼손 뻗어 위협 자세. 주은은 인간의 몸 어느 부위를 때리면 입이 가장 크게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벌어진 피트의 입 안에 몽둥이처럼 생긴 기구를 틀어 박았다. 호흡 곤란을 겪겠지만 질식사 하진 않을 것이다. 호흡기의 고통은 소화기의 고통에 비하면 경미하다. 피트는 몽둥이를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팔과 손이 말이 듣지 않았다. 그의 손과 팔의 인대는 끊어져 있었고 다리도 움직이지 못했다. 끈이 잘린 도르레가 된 기분일까.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아무것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무용지물 도르레. 
 
피트는 바닥에서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몽둥이를 제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고통은 지속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호흡 곤란으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마 외로울 것이다. 수십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대저택에서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는 게 서러울 것이다. 

양밍 아저씨가 주은에게 가르쳐 준 것은 목숨을 방어하는 법이었다. 양밍 아저씨는 자기가 가르쳐 준 기술을 복수하는데 쓰지 말라고 했다. 딸을 잃은 양밍은 주은을 자기 딸처럼 여겼다. 그는 주은에게 생존법을 가르쳤다. 남자에게 붙잡혔을 때, 주먹질을 당할 때, 흉기 위협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그는 해부학자였다. 인간의 어느 부위를 건드리면 쓰러지는지, 숨이 멈추는지, 통증이 극대화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수업은 실전이었다. 양밍은 주은의 몸에 피멍이 들도록 몰아쳤고, 주은도 양밍의 몸에 피멍이 들도록 받아쳐야 했다. 양밍이 말했다. 남자에게 동정심을 갖는 여자는 죽은 목숨이라고.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라도, 그게 지금 너를 가르치는 나 양밍이라도, 절대로 동정심을 느껴선 안 된다고. 주은에게 양밍은 아버지였다. 아버지 정성주가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않는 동안 주은은 양밍을 아버지 삼아 생존을 위해 배워야 할 것을 배웠다. 

목적을 이루는 최단거리. 주은은 양밍 아저씨의 수업을 그렇게 이해했다. 아버지의 삶의 방식도, 양밍의 수업도, 결국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목적을 이루느냐 마느냐 였다. 목적이 정해지면 0.1초의 망설임 없이 기계처럼 최단거리를 달린다. 그게 최선의 생존법이다. 아버지는 목적의 성격을 판단했지만, 주은은 그러지 않았다. 목적의 성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현실주의는 다분히 동정적이었다. 아버지의 현실주의는 분명 주은이 생각하는 현실주의와 달랐다.

런던은 오래 된 도시였다. 인공의 구조물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중국의 도시는 인공의 도시였다. 반감기를 겪지 않은 인공 구조물의 냄새는 부자연스럽다. 중국에 살 때는 몰랐지만 런던에 와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가 그랬다. 냄새는 소모를 의미한다고. 냄새가 난다는 건 그 냄새 인자가 소모되고 있다는 걸 의미하며, 그 냄새 인자는 언젠가 소멸될 것이라고. 냄새로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건 대상의 나이라고 했다. 냄새로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정보는 나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모든 물질은 반감기를 겪는다. 세월이 흐르면 불안정한 탄소 분자는 소모되고, 안정적인 탄소 분자는 남는다. 인간이 지은 구조물도 그렇다. 세월 따라 불안정한 분자는 소모되고, 안정적인 분자는 자연에 동화된다. 이 냄새가 도시의 나이를 말한다. 런던은 오래 된 도시였다. 

주은이 엄마의 집에 대해 아는 것은 주소 뿐이었다. 주은은 영국에 오기 전 엄마의 집 주소로 우편을 보냈다.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자신이 캐런의 딸이라는 것,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이제 그곳으로 가겠다는 간략한 메시지, 그리고 도착 예정 시각을 적어 보냈다. 전화번호를 알았더라도 전화를 걸진 않았을 것이다. 그쪽으로부터 가타부타 답변을 받을 일은 없었다. 양쪽은 서로에게 용건이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리치몬드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택시를 타야 했지만 주은은 이곳의 냄새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생소한 환경은 언제나 생소한 냄새를 풍긴다. 냄새엔 언제나 사연이 담기기 마련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은 주은에게 새로 발간된 책 같았다. 냄새에 담긴 과거와 현재는 주은에게 끝없는 미지의 신세계였다.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 갈아 타고 나니 탁 트인 동네가 나왔다. 드넓은 녹지대와 아기자기 예쁜 집들. 오래된 런던보다 더 오래된 느낌. 엄마가 낳고 자란 곳. 

엄마의 기억은 오랜 연인에 대한 기억 같았다. 주은은 지금껏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애착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엄마이자, 친구이자, 말벗이자, 생의 동반자.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 주은은 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결혼하지 않고 엄마와 함께 살 것이라고. 

종이에 적힌 주소로 보이는 집이 보이자 주은은 가슴이 설랬다. 집은 주변 집들에 비해 크진 않았다. 외딴 곳에 위치한 넓은 땅 위에 세워진 집이었다. 말 냄새가 났다. 엄마의 집에는 말이 있었다. 주은은 말을 좋아했다. 중국에서 말 농장을 본 적이 있었다. 말을 만져 보고 싶어 아버지를 바라 보았지만 아버지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선 말을 만져 볼 수 있겠지. 주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초인종을 누르자 가정부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문을 열어준다. 주은을 보더니 큰 소리로 집 안 사람들을 부른다. 40대 남자와 70대 여자, 그리고 10대 남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달려 나온다. 주은은 이들이 엄마의 혈족임을 알았다. 부모 형제 그리고 조카. 가족 구성원의 냄새는 지그소 퍼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조각을 찾을 때마다 느껴지는 잔잔한 희열. 

엄마는 지그소 퍼즐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그소 퍼즐을 좋아하는 주은을 위해 의무감으로 놀아주었던 것 같다. 하루에 지그소 퍼즐 12개를 완성한 적도 있었지만 엄마는 한번도 먼저 그만 하자고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주은을 그만큼 사랑했던 걸까. 엄마는 지그소 퍼즐에 푹 빠진 주은을 보고 말했다. 너는 학자 유형이구나 나는 날라리 유형인데. 

네가… 준이니? 

여자 노인이 말을 꺼낸다. 주은은 이 사람이 자신의 외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각은 포장이고 냄새는 본질이다. 인간은 시각의 동물이다. 다른 인종의 외모가 섞인 경우 쉽게 이질감을 느낀다. 주은은 이들이 자신의 피붙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40대 남자가 주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와락 끌어 앉는다. 이 사람은 엄마의 남자 형제다. 엄마의 오빠일 것이다. 그는 내게서 엄마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아니면 닮은 꼴을 발견했거나. 엄마의 오빠는 주은을 끌어 앉고 서럽게 운다. 엄마의 딸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다행이었다. 

엄마의 집은 19세기 영국 소설에 나오는 집 같았다. 돌로 만든 3층집. 벽난로와 사냥 트로피, 그리고 카페트. 실제로 19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다. 수많은 개증축을 거쳤지만 한번도 집을 허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 구조물의 냄새가 자연 환경에 의해 반감기를 겪듯, 집의 냄새도 거주인에 의해 반감기를 겪는다. 집은 거주인의 냄새에 동화돼 그들과 동일한 냄새를 공유한다. 이 집에서 5대째 대를 잇고 있는 리즈 일가는 자신들도 모르는 새 자신들의 유전자를 이 집과 공유하고 있었다. 

40대 남자는 모리스였다. 엄마의 오빠, 주은의 외삼촌이다. 여자 노인은 조안 리즈, 주은의 외할머니다. 10대 남자 아이는 제임스, 주은의 외사촌. 여동생 트리시도 있지만 지금 집에 없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다고 한다. 

모리스의 부인, 외숙모가 없었다. 냄새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 사별했거나 이혼한 것이다. 

편지는 잘 받았어. 그럼 올해 17살이겠구나. 제임스는 17살이고 트리시는 16살이야. 모두 같은 터울이네. 

주은은 가족들을 빤히 바라 보았다. 가족들은 주은이 뭐라고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은은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가족들은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임스는 동양인 혼혈을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동물원에서 난생 처음 본 동물을 본 것 같은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다. 제임스는 주은의 양쪽 눈 색깔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망막의 색은 이제 다른 쪽 망막과 거의 비슷해졌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 이제 가족이니까… 준? 여기가 앞으로 네 집이야. 네 방도 만들어 놓았어. 음...그러니까… 방으로 같이 갈까? 

주은은 아무 말없이 가방에서 엄마의 유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엄마의 사진, 일기, 그리고 사리. 조안이 엄마의 사리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뭐냐고 물었다. 

(중국어로) 엄마 화장하고 몸에서 나온 거에요.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지난 8년 동안 중국어로 말을 했으니 버릇처럼 여기서도 중국어를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가족들 반응은 좋지 않았다. 조안이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혹시 영어 할 줄 모르니? 

주은은 영어를 모르는데 여길 어떻게 찾아왔겠어요 되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모리스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그는 주은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편지에 쓴 영어는 본인이 직접 쓴 것이다. 대학 교육 이상 받은 사람이 쓴 것 같은 교양 있는 영어였다. 모리스는 주은이 일부러 중국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모를 뿐이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각자의 사정이라고 생각했다. 모리스는 주은의 등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제 방으로 올라가자. 

2층 방이었다.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넓고 환한 방이었다. 빈 방이 아니었다. 책장과 책상, 침대와 테이블 모두 누군가 쓰던 것이었다. 누군가 아주 오래 전, 아주 오래 살았던 방이었다. 모리스가 말했다. 

캐런이 쓰던 방이야. 

방에는 엄마 냄새가 없었다. 무기물은 남지만 유기물은 남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 방은 주인을 잃고 수십년 적막한 세월을 보냈다. 모리스에게서 엄마 냄새가 났다. 주은은 자신의 몸에서도 엄마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방의 주인이 절반만큼 살아 돌아온 느낌. 울컥 감정이 붇받쳐 올랐다.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된다면 엄마는 이 방으로 돌아왔을까? 엄마는 내가 여기로 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선 주은을 본 모리스는 격심한 기시감을 느꼈다. 20년만에 여동생이 살아 돌아온 느낌. 20년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캐런.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캐런. 모리스는 십여년 전 캐런을 찾기 위해 혼자 네팔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캐런이 머물렀던, 이미 몇 달 전 떠나 버린 텅빈 호텔 방 창문 앞에서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모리스는 눈물을 참았다. 아까 울었는데 또 울 수는 없었다. 잠시 당황하다 물었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왔니? 

주은은 중국어로 대답하다 영어로 바꿔 말했다. 

학교는 다니지 않았어요. 

모리스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당연히 중국에서 정규 교육은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모리스는 주은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주은의 애비가 어떤 사람이었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주은은 모리스의 표정을 살피다 영어로 말했다. 

엄마가 졸업한 학교를 다니고 싶은데요. 진학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요? 

“엄마가 졸업한 학교를 다니고 싶은데요.” 모리스는 귀를 의심했다. 이 여자 아이는 방금 희망 사항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나 여기 다니기로 했으니 다니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어 본 것으로 보아 그곳을 공짜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아는 것 같았다. 

임페리얼 칼리지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해. 고등 교육 인정 시험을 먼저 봐야 하겠지. 

학비는 얼마나 드나요? 

글쎄… 지금은 적어도 연간 5만 파운드 정도 들 걸. 

저…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삼촌? 모리스? 

모리스라고 불러도 돼. 

거기 의대에 입학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종이에 적어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리 부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여자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여자 아이의 말투는 절대로 17살 소녀의 말투가 아니었다. 이 여자 아이는 조카가 아니라 모리스의 동년배 같았다. 이 집에 부양을 받으러 온 미성년자가 아니라 함께 비즈니스를 하러 온 동업자 같았다. 17살 소녀 같지 않은 말투와 태도와 표정. 전생 체험을 완료한, 인생 2회차인 사람의 모습이었다. 

모리스는 환생에 대해 생각했다. 이 아이는 혹시 캐런의 삶을 살고 온 것이 아닐까. 캐런의 모든 기억이 이 아이에게 대물림 된 게 아닐까. 스스로도 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리스는 이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 망상에 빠져 들었다. 사실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작품 등록일 : 2026-03-20

▶ Brody’s files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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