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19
브로디는 쿡스타운에서 괴한이 떨어뜨린 볼펜을 다시 살펴봤다. 볼펜 촉은 길고 날카로웠다. 독을 주입하기 좋게 돼 있었지만 독이 없었다. 지문 감식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단서가 될만한 냄새도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엔 로리 맥닐리가 고용한 축구 선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축구 선수를 기용할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맥닐리가 고용한 자객에게서 그런 아마추어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그냥 겁을 주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길 가던 불량배였을 수도 있다. 거친 장난을 좋아하는.

쿡스타운에서 누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냄새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냄새는 의도를 알려주지 않는다. 대런이 아니었다면, 볼펜에 독이 주입돼 있었다면, 브로디는 죽었거나 심각한 상태였을 것이다. 

직원들은 이게 경고의 의미라고 했다. 영화 같은 데 보면 내부고발자 집에 피묻은 칼을 보내는 것 같은 거라고 했다. 하지만 브로디는 이런 행동이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브로디는 자기 검열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브로디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짓을 한 적도 없었다. 이런 짓을 한다고 겁을 먹을 이유도 없었고, 하던 일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맥닐리의 축구 선수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대런이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살인귀다. 왕년에 헤비급 무패 복서로 이름을 날렸던 양조장 사장 레오 맥클로스키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맥닐리의 축구 선수였다. 브로디는 대런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다. 대런이 그런 놈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브로디는 대런이 실제 싸우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러고 보니 대런을 원래 무슨 생각으로 고용한 것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브로디는 생각이 없었다. 그때 그냥 대런을 고용하고 싶어서 고용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심사숙고 할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 언젠가부터 모든 결정이 즉흥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대런이 중국에서 돌아온 건 두 달 뒤였다. 대런은 목표를 정해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어딘가 쓸모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위험한 일을 즐기는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대런의 목에 붙은 거즈의 크기로 보아 꽤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지만 별 것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순탄한 거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먼저 중국에 갔던 아일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건 대런의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혼자 목표물을 가져올 수 있을만큼 그쪽 보안이 허술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정성주는 원래 종이에 볼펜으로 정보를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기록이 너무 많아져서 컴퓨터에 내용을 저장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종이 기록을 볼 수 있는 사람도 정성주의 딸이고, 그 기록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사람도 그의 딸이었다. 

중요한 내용, 그러니까 상업적 가치가 있는 내용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언어로 돼 있었다. 브로디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냄새를 알고 분자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해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규칙으로 만들어진 언어인지, 냄새 분자식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누구는 한국어와 비슷하다고 하고, 누구는 고대 중국어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둘 다 아니었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대런이 복사해 온 파일 중에 이해가 가능한 건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로 쓰여진 기록 뿐이었다. 상업화 가치가 없는, 혹은 상업화 전 단계인, 실험적 호기심의 목적으로 남겨진 기록들이었다. 대런이 가져온 파일들은 컴퓨터 본체에 저장된 기록이 아닌 - 아마도 그 정도로 보안이 허술하진 않았을 것이다 - 저장 매체에 저장된 “임시” 기록들이었다. 그 중에 “아일랜드 백인 여성 Irish, caucasian, female, 98年生, 43kg”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록이 있었다. 

2년 전 회사 직원이 정성주에게 에린의 샘플을 전달한 적이 있었다. 에린의 혈액과 머리카락 샘플, 그리고 현재와 과거 상태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에린 몸에 기생하는 곰팡이의 정체와 치료법을 요청했지만 정성주는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을 쥐어줬더라도 돈만 받고 답변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성주는 에린의 기생체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일랜드 백인 여성” 파일엔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에린과 유사한 곰팡이에 감염되었던 어느 중국 여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길림성 출신 29세 여자 쉬징. 패혈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환 발생. 패혈증에서 살아 남았지만 피부 호흡기 질환, 기력 감퇴, 고열 지속, 급격한 체중 감소. 약을 써도 듣지 않음. 특이점은 식욕. 고열량 고지방 음식에 과도한 집착. 자다깨서 냉장고 속 음식을 모두 주워 먹을 정도로 하루종일 광포한 식욕에 시달림. 그럴수록 증상은 더 심해짐. 

.............곰팡이 감염이었지만 병원에서 진단 불가. 곰팡이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처럼 사람 몸 속에 기생하는 사례를 보지 못한 것. 

.............곰팡이는 체내 지방을 양분으로 삼는 것으로 추정. “먹지 않아야 낫는 병”이라고 진단하고 수분 외 모든 양분 공급을 중단. 심각한 금단 증상. 열량 축적이 어려운 해조류만 공급. 몸의 지방이 완전히 소모되고 정상 체온 회복. 신체 기능 정상으로 돌아옴. 몸에 축적된 지방이 없으면 감염 증세는 나타나지 않음. 곰팡이는 쉬징의 몸에서 지방 외 다른 에너지원을 찾지 않음. 

.............지방을 양분으로 삼는다면 뇌에서도 양분을 취해야 할 것이나 곰팡이는 뇌에 접근하지 않음. 이론적으로 몸의 지방보다 뇌의 지질 성분이 양분으로 삼기 더 용이함에도. 

이후 곰팡이가 어째서 동물의 뇌에 기생하지 않는지에 관한 길고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곤충의 뇌에 기생해 곤충의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졌던 곰팡이 역시 뇌에는 침투하지 않는다. 곤충도, 동물도, 사람도, 뇌는 곰팡이에게 일종의 성역이었다. 지금까지 왜 그런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정성주는 이걸 알아낸 것으로 보였다. 

정성주는 곰팡이를 치료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쉬징이 처음 정성주의 병원을 찾았을 때 정성주는 쉬징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성주는 쉬징의 곰팡이를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성주는 쉬징을 실험체로 썼다. 곰팡이를 제거하는 대신 곰팡이가 쉬징의 뇌를 파먹게 만들었다. 

.............체내 지방을 소모할 때와 다른 양상. 감염 증세 최소화. 가벼운 발열 증상이 거의 대부분. 

.............뇌 감염 2주만에 운동 신경에 이상 발생. 걸을 때 무릎이 꺾이고 주저 앉는 증상. 젓가락질 하지 못함. 숟가락, 물컵 등을 쥐는데 곤란 겪기 시작. 발음이 어눌해지고 의사 전달 능력 심각하게 퇴보. 기립 불가능. 음식 섭취와 배변 기능은 정상. 인지력, 사고력, 이해력, 기억력 등은 뇌 감염 후 4달 동안 정상 유지. 

.............운동 능력이 소멸되고 더 이상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졌음에도 쉬징은 스트레스나 우울 증세 보이지 않음. 뇌 조직이 소멸하고 몸의 기능이 퇴보하면서 쉬징의 몸에는 세로토닌 호르몬 수치가 증가. 스트레스와 고통, 우울에 면역 상태. 때때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대화 시도. 기대했던 행동이 이뤄지지 않아도, 원하는 피드백을 얻지 못해도 좌절이나 불안 증세 보이지 않음. 

.............인지력이 감퇴하고 지능이 퇴화하면서 쉬징의 행복감 증가. 사람들과 인터렉션 없이 혼자 지속적 행복의 무아지경에 빠져듬. 감염 6개월만에 뇌의 부피가 70% 이상 줄어 들었고, 대뇌의 거의 모든 사고/인지 기능 소멸. 생명 유지 기능엔 변화 없음. 호흡, 섭취, 소화, 배변 기능 정상 작동. 곰팡이는 숙주를 사망에 이르게 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임. 숙주가 다시 살아나 예전처럼 활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임. 

이후 쉬징은 식물 인간 상태로 일년을 더 살았다. 쉬징은 사람들과 의사 소통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도 간간히 미소를 지었고, 때때로 사람들을 빤히 바라 보며 기억을 더듬는 듯한 시선을 보이기도 했다. 정성주는 쉬징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고지하고 사망 선고를 내리려 했으나 가족들은 쉬징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로 일년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에린의 이야기는 쉬징 이야기 다음에 나왔다. 쉬징 에피소드는 에린 이야기에 추가된 합본이었다. 둘이 의학적으로 “동일 케이스”로 묶인 거였다. 정성주는 에린에게 감염된 곰팡이도, 쉬징의 곰팡이도, 모두 흙에서 서식하던 종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테리아와, 식물 뿌리와, 벌레의 몸뚱이에 기생하던 곰팡이는,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 원을 찾은 거였다. 아주 우연히, 면역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의 몸에 들어와 살 길을 찾은 거였다. 

곰팡이가 어째서 쉬징의 몸에서는 금방 에너지원을 찾았고 에린의 몸에서는 그렇지 않았는지는 설명돼 있지 않았다. 에린이 몸이 쉬징과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곰팡이가 사람의 뇌에 기생하게 만들었는지, 곰팡이는 에린의 몸에서 무얼 취하려 하는지, 정말 알고 싶은 부분은 정성주의 암호로 쓰여 있었다. 

곰팡이의 입장에선 쉬징의 몸도, 에린의 몸도, 새로운 외계의 세상이었을 것이다. 흙에서 천만년을 살던 곰팡이가 처음 사람 몸에 살게 됐을 때,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무엇을 찾게 될까. 이게 정성주의 파일에 남은 유일한 실마리였다. 

흙에 살던 곰팡이가 인체에 침투했을 때 겪는 가장 큰 난관은 체온이다. 남극에 살던 펭귄이 적도 기후에 살게 된 것과 비슷한 셈인데, 펭귄은 고통을 느끼지만 곰팡이는 그렇지 않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곰팡이는, 전멸하지만 않으면, 잠복하며 적응을 모색할 수 있다. 

곰팡이에겐 눈과 귀와 코가 없다. 눈과 귀와 코가 없는 건 혼돈을 의미한다. 정해진 길도, 예측 가능한 패턴도 없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의 나도 없고, 앞으로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곰팡이의 정체성이다. 그게 곰팡이를 적응의 대가로 만든다. 쉬징의 몸은 곰팡이 감염에 대응하기 위해 체온을 극한대로 끌어 올렸지만 곰팡이는 쉬징의 지방 세포를 이용해 바뀐 환경에 적응했다. 

에린의 몸은 곰팡이 감염에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같은 종의 곰팡이가 같은 면역 결핍 신체에 감염됐지만 증상은 완전히 달랐다. 둘 사이엔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 쉬징은 후천적 면역 결핍이었고, 에린의 선천적 면역 결핍이었다. 쉬징의 몸은 고통의 기간이 길지 않았고, 에린은 길었다. 그게 근본적 차이였을까?

혹시, 선택의 주체가 달랐던 건 아닐까? 쉬징은 몸은 곰팡이에게 선택된 것이고, 에린의 곰팡이는 에린의 몸에 의해 선택된 게 아닐까? 곰팡이가 쉬징의 몸에서 살길을 찾은 것처럼, 에린의 몸도 곰팡이를 통해 살길을 찾은 건 아닐까? 왜냐하면, 그만큼 절박했을 테니까? 

브로디는 에린과 곰팡이가 공생 관계였다고 확신했다. 에린의 몸은 곰팡이를 자신을 위한 항생제로 삼고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둘 사이 공생엔 조건이 있었을 것이다. 서로 죽지 않고 상생하기 위한 조건. 최근, 무엇가에 의해,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조건이 깨졌을 것이다. 곰팡이가 최근 에린의 몸에 창궐하기 시작했다면, 둘 사이 조건이 처음과 달라진 탓일 것이다. 

작품 등록일 : 2026-03-15
최종 수정일 : 2026-03-15

▶ Brody’s files #20

▶ Brody’s files #18

과연 브로디는 부친의 암호를 해석해낼것인가...!

미치겠다 미치겠어
흥미진진
진미오징어   
무서워라 곰팡이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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