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스힐에 처음 지어진 것은 수감 시설이었다. 석상병 발병 초기 증상발현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의도된 바는 아니었지만 이곳에 수감된 개체들 대부분은 교정 시설 출신이었다. 수감 중이던 중범죄자들이 감염 증상을 보이면 이곳으로 이송돼 왔다. 수감 시설은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 시설로 개축되었고, 영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가장 진일보한 석상병 연구 시설이 되었다.
수감 시설 건립 당시 “뇌가 있을 때도 짐승이었는데 뇌가 사라지면” 같은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 뇌가 잠식된 이들이 다른 증상발현자들보다 더 강한 폭력성을 보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소는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한 곳이었지 증상발현의 양태를 연구하는 곳은 아니었다. 연구소 입장에서 실험체의 전과는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수감자들은 그저 획득이 용이한 실험체일 뿐이었다.
연구소에 어떤 “재난”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비원이 살인을 저질렀다, 연구원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실험체에 반인륜적 실험을 했다, 등등 확인되지 않은 추측만 난무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건 연구소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연구소에서 정상인이 살아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연구소는 알 수 없는 “재난” 이후 100일 가까이 세상과 격리된 공간이 되었다.
준이 연구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30분이었다. 석양이 빨갛게 지고 있었다. 린다는 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석양을 보며 준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이다. “곡스힐에서 생존하는 유일한 길은 곡스힐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 하는 것.” 준은 서둘러야 했다.
연구소는 거대했다. 모리스의 병원 크기와 비교해 보았다. 모리스 병원 환자 수용 인원이 800명 정도니까 이곳은, 독방만 있다고 가정할 때, 400명 정도일 것이다. 연구소는 정문이 외부를 향해 있었고, 후문은 마을을 향해 있었다. 문제는 후문에 생체 인식 잠금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입문 옆에 차고가 있었지만 차고 출입문에도 생체 인식 잠금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연구소는 새 건물이었다. 지어진 지 2년도 안 됐을 것이다. 건물은 다양한 종류의 화학 물질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최루와 마취 성분이 일반인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건물 전체에 자욱했다.
후문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준은 다시 건물을 돌아 정문으로 갔다. 트럭과 버스 여러 대가 출입 가능할 정도로 큰 정문 안에 격납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아마도 여기로 실험체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강철 출입문이 있었다. 출입문 안으로 들어 가보니 검색대가 있었다. 검색대는 작동하지 않았다. 검색대 뒤에 다시 강철 출입문. 출입문에 사람이 끼어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엎어져 죽어 있었다. 이곳을 빠져 나려다 죽은 것처럼 보였다.
준은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시체는 방부 처리되지 않았음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미생물은 이 시체를 먹이 삼지 않았다. 자연 상태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건 산소나 수분 부족 같은 환경적 요인 때문이다. 이건 환경적 요인이 아닌 생물학적 요인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에 부패한 유기물의 냄새가 없다. 건물이 3개월 이상 방치됐으니 당연히 시체와 배설물의 냄새가 진동해야 했다. 어떻게 된 걸까?
출입문을 열고 시체를 넘어 들어가니 플라스틱 밀폐 공간이 있었다. 멸균 시설일 것이다. 멸균 목적을 위해 이 공간은 앞 뒤로 밀폐돼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앞 뒤 출입문 모두 열려 있었다. 앞쪽 문에는 이번엔 팔을 위로 치켜들고 얼굴을 하늘로 향한 시체가 누워 있었다. 역시 방호복을 입은 시체였고 부패하지 않았다. 이곳 경비원이었을 것이다. 헬멧이 벗겨져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여자였다.
여기 출입문은 외부 전자 잠금 장치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경보 장치도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닫혀 있어야 하는 문을 억지로 열어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다음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검진 시설이 있었다. 신체 지수를 측정하고 혈액 샘플을 채취하는 곳이다. 멀리 보이는 앞쪽 입구도 열려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시체가 문에 끼어 있었다. 시체는 발을 입구 쪽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엎어진 채 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양 옆으로 벌리고 있었다.
준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환자복 시체는 시체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감염자였다. 감염자는 극히 낮은 생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동물의 생체 기능은 호흡으로 확인 가능하다. 호흡의 냄새로 개체의 건강 상태와 신진대사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저 감염자는 동면 상태였다. 호흡, 맥박, 신진대사률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화 상태였다. 일반인들은 당연히 시체로 인식할 것이다. 준조차 주의 깊게 냄새 맡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인간에겐 동면 기능이 없다. 저 감염자는 신체 기능에 이상이 있는 것도, 병에 걸린 것도, 노화된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상태가 된 것일까?
준은 칼을 꺼냈다. 지금 숨통을 끊어야 할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할까? 문득 지금까지 본 3구의 시체들이 궁금했다. 왜 사람을 저렇게 배열했을까? 지금 보니 단순히 문을 고정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시체를 끼워 놓은 게 아닌 것 같다. 한 팔만 든 시체, 두팔 모두 든 시체, 양팔 벌린 시체… 어떤 의도를 갖고 배열한 것 같다. 이런 짓을 정상적인 사람이 했을 리는 없다. 증상발현자들이 한 짓이다. 증상발현자들은 생각이 없다. 생각이 없으니 의도도 있을 리 없다. 뇌가 없는 이들은 생각이 없는데 뇌가 있는 이들은 생각이 많다. 할 필요가 없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도 하고야 만다.
준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을 따르지 않고 몸을 따르기로 했다. 준은 감염자의 왼쪽 아킬레스 건을 끊었다. 발목 근육이 잘린 감염자는 실험실 개구리처럼 잠깐 움찔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감염자에게서 꾸역꾸역 흘러 나오는 피에서 정체불명의 유기 화합물 냄새가 났다. 효소 냄새다. 인공적으로 주입된 것이다. 아마도 주사액이나 음식물, 식수, 혹은 기체를 통해 주입됐을 것이다. 준은 이것이 시체가 썩지 않는 이유, 배설물의 냄새가 나지 않는 이유일 것이라 직감했다. 하지만 이건 동면 상태와 관련이 없다. 그리고 동면 상태든 무엇이든 자극을 받으면 생체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이 감염자는 발목이 잘리고 피가 흐르는데도 호르몬 분비에 변화가 없다.
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혹시 감염자가 움직일 경우 목을 찌를 것이다. 목 정가운데를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다. 기도를 찔러야 호흡이 어려워지고 호흡이 어려워져야 움직임이 더뎌진다. 문을 열고 한참 기다렸지만 감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이 개체가 위험하지 않다 해도 다른 증상발현자가 있을 것이다. 냄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옆에 다가와도 눈치 채지 못할 수 있다.
4층 높이의 건물은 수백개의 감금 시설로 이뤄져 있었다. 일반 교도소와 다른 점은 철창이 아닌 투명 유리벽으로 돼 있다는 점이었다. 유리벽은 기계 장치에 의해 열리게 돼 있었고, 건물 가운데 놓인 레일 위로 전동차가 오고 가며 전동차 위에 설치된 사다리 차로 실험체를 하나씩 넣거나 꺼내는 시스템이었다. 인력 개입을 최소화 해 사고 위험을 낮추려는 것이다. 전자동 로봇 시스템. 아마 음식도 식수도 통제 장치에 의해 자동 배급됐을 것이다.
준은 증상발현자들의 냄새를 맡았다. 열다섯? 열일곱? 냄새로 확인 가능한 개체수는 그 정도였다. 냄새가 나지 않는 장소에 있거나 동면 상태인 개체수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아무리 육안으로 확인해봐도 살아 움직이는 건 없었다. 냄새로는 분명 눈에 띄는 거리에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시체가 일곱에서 여덟 구. 저들 중 일부는 증상발현자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선 냄새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연구실 입구까지 달릴까. 연구실까지 약 200m. 전력질주하면 30초면 도착할 수 있다.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준은 달리기 시작했다. 양밍 아저씨가 그랬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건드릴 수 없다고. 사람이 뭔가에 꽂히면, 뭔가에 꽂혀 미친듯 질주하면 모두 길을 비킨다고. 인간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건 무력이 아닌 정신력이다. 다른 건 보이지 않아야 한다 - 도달해야 하는 목적만 보여야 한다. 연구실 출입문이 가깝다. 코 앞에 있다. 연구실의 냄새가 상상된다. 문이 열리고 냄새가 쏟아진다. 필요한 것의 냄새가 느껴진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너 낳으려고.
준은 엄마와 게를 먹고 있었다. 엄마는 게 껍데기를 벗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먹을 것도 없는 게 껍데기만 많아” 우악스럽게 껍데기를 벗기던 엄마는 손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엄마 피 나” 준은 엄마 손을 닦아 주려고 했지만 엄마는 필요없다고 했다. “피 좀 먹으면 어때 이것도 영양분이야.”
준은 피 냄새를 맡았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 온 몸이 피범벅이 돼 있었다.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런 데서 엄마 꿈을 꾸다니. 이런 곳에서 달콤한 꿈을 꿨다니.
준이 정신을 잃기 직전 맡은 냄새는 충동성의 냄새였다. 극한의 충동성에 휩싸인 남자에게 나는 냄새. 아드레날린, 테스토스테론, 아포크린 샘에 폭발한 호르몬, 그리고 급격히 연소된 탄수화물의 냄새. 준은 열차에 치였다고 생각했다. 레일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좌우로 가로 지르는 보이지 않는 레일이 있어 거기로 열차가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준은 치이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에 와 있었다.
준은 몸에 흥건한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이건 다른 사람의 피였다. 이곳은 시체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썩지 않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어째서 이곳 시체들은 부패하지 않는 걸까. 이 기이한 냄새의 효소는 연구소에서 개발한 걸까.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것이 그렇게 빠르게 달려 왔는데 어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 그건 분명 인간의 냄새였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그렇게 정숙하게 달릴 수 있는 걸까? 자기 부상 열차처럼?
“열차”가 부딪친 어깨에 통증이 심했다. 뼈가 부러졌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냄새로 알 수 있는 건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뿐이다. 아버지 병원에서 지겹게 맡았던 죽은 자와 산 자의 냄새. 살아 있는 자가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여자였다. 이곳 직원도, 증상발현자도 아니었다. 브래드가 말한 순례자일까. 준처럼 이곳에 들어왔다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아마 오늘이었을 것이다. 준이 이곳에 들어오기 불과 서너시간 전일 수도 있다.
여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준은 여자의 출혈 지점을 찾아 지혈을 시도했다. 출혈이 문제가 아니다. 여자는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뇌가 심각하게 부어 생존 유지가 어려웠다. 의식을 잃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떤 사연이길래 여기까지 온 것일까. 가족을 위해 왔을까. 부모일까 남편일까.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물들도 있었다. 살아 있는 염소가 있었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 새끼는 어미의 젖을 찾았고 어미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어미는 젖을 만들기 위해 먹을 걸 찾고 있었다. 어미는 죽은 사람의 찢겨진 옷을 입으로 더듬고 있었다. 군인의 시체였다. 흉부가 갈라져 있었다. 간, 허파, 심장, 그 밖의 내장들이 제거돼 있었다.
준은 이곳이 뭘 위한 곳인지 깨달았다. 이곳은 식량 창고였다. 사냥한 고기를, 배 불러 먹지 못한 경우, 먹다 남은 경우, 여기 던져 넣는 것이었다. 이곳 유기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환기구를 통해 공급되는 기체 때문이었다. 여기에 미생물의 활동을 억제하는 물질이 있었다. 미생물을 죽이는 화학 물질이 아닌 미생물의 신진대사를 방해하는 물질이었다. 이곳 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다. 이곳은 유명무실하게 운영된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다른 곳에서 불가능했던 생물학적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준은 출구를 찾았다. 증상발현자들은 문을 잠그지 않는 습성이 있을 것이다.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증상발현자가 잠금 장치를 쓴다고? 어째서.
다른 출구는 없었다. 천장 환기구를 통해 나가는 방법이 있지만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어깨 통증으로 무리한 동작을 취하는 것도 어려웠다. 준은 문 사이로 냄새를 맡았다. 누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이곳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이곳에 식량을 넣었다면 이곳에서 식량을 꺼내가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 이곳을 들어올 때는 노려야 한다. 저들이 나를 사냥했으니 이번엔 내가 저들을 사냥할 차례다.
하지만 왜 저들은 사냥감을 죽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저들은 준의 소지품을 뺏지도 않았고 옷을 벗기지도 않았다. 준을 습격한 이는 남자였다. 어째서 강간하지 않은 걸까? 사냥 욕구와 번식 욕구는 동시에 발현된다. 사냥감이라서 성욕을 느끼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도 혹시 연구소에서 취한 안전 조치의 결과일까. 썩지 않는 효소의 부작용일까. 이곳에선 식수도 자동 공급될 것이다. 화학 물질을 섞은 식수 공급을 통해 실험체들의 욕구를 통제한 것일까.
문 밖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준은 코와 입을 손을 가렸다. 저들도 냄새로 존재를 인식한다. 코와 입만 막아도 냄새 인식이 쉽지 않다. 저들 중 준과 같은 수준의 후각 능력을 가진 개체는 없을 것이다. 문 밖에서 익숙하게 전자식 자물쇠에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증상발현자에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걸까? 혹시 정상인일까? 이곳 직원이었을까? 이곳에 증상발현자만 있다는 생각은 혹시 착각일까? 준은 주저했다. 증상발현자와 비발현자를 냄새만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곰팡이에 감염된 것과 증상이 나타난 것은 자연적 관점에서 차이가 없다. 둘 다 곰팡이가 인간 몸에 서식하고 있는 것 뿐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남자였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이곳 직원이다. 정상일까? 증상발현자일까? 준을 발견한 남자는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선제 공격 타이밍을 잃었다. 저 쪽에서 먼저 공격하길 기다려야 한다.
준은 생각했다. 생각하는 자가 패배한다. 뇌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다. 고통을 주고 위험을 자초한다. 준은 생각하지 않는 법을 떠올렸다. 양밍 아저씨가 말했다. 물처럼 공기처럼 움직인다고. 머리의 명령에 따르면 죽는다고. 머리없이. 물처럼. 공기처럼.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준을 발견하는 순간 움직임이 절지 동물처럼 바뀌었다. 머리와 몸은 고정된 채 팔다리가 지네 다리처럼 끊김없는 연속 동작으로 땅을 짚으며 빠르게 전진해 왔다. 준은 그제서야 알았다. 인간이 소리 없이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퀴벌레처럼 극히 미세한 소음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남자의 움직임에 겁을 먹었을 것이다. 그의 이질적 행태에 움츠러 들었을 것이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남자가 준의 목을 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남자의 공격 타이밍을 기다릴 수 있었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남자가 방어할 수 없는 타이밍에, 남자가 방어할 수 없는 공간으로 칼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증상발현자의 호흡기를 공격해야 한다. 방금 그런 움직임은 엄청난 양의 산소를 소모한다. 호흡을 막으면 더 이상 그런 동작을 할 수 없다. 칼이 2개였던 것도 다행이었다. 호흡을 막고 팔다리 근육을 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증상발현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고 있었다. 칼집이 난 기도 사이로 피가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클럭클럭 컬륵컬륵. 조만간 그의 폐는 피로 가득 찰 것이고 머지 않아 익사할 것이다. 준은 생각하지 않는 법을 떠올렸다. 앞으로 무엇을 보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을 하는 순간, 연민에 빠지는 순간,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식량 창고 문이 열렸다. 이 문은 자동으로 닫히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식량 창고 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 준은 냄새를 맡았다. 다수의 증상발현자들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준을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준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저들은 빈틈을 노릴 것이다. 아까 메인홀에서 그랬던 것처럼 준이 방어하지 못하는 틈을 노릴 것이다.
이곳은 지하다. 창문이 없다. 계단을 찾아야 한다. 건물 지도는 없을까. 왜 이렇게 넓은 걸까. 무수히 많은 냄새가 끝없이 넓게 흩어져 있었다. 화학물질과 유기물을 보관하는 창고들, 컴퓨터와 사무용품들, 폐기물 보관실, 식품 보관실, 식당, 매점, 그리고 영안실도 있었다. 개미굴처럼 복잡한 구조에 안내 표지판이 없었다. 여기 직원들은 어떻게 길을 찾은 걸까? 이 건물 직원들은 일반적 상식과 다른 방식으로 길을 찾았던 것 같다. 지도를 받고 보물 찾기 하듯 길을 찾았던 걸까. 중국에 있을 때 병원 근처 새로 생긴 상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상가 건물도 이랬다. 어디 뭐가 있는지 죽어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놓은 미로 같은 구조. 하지만 거긴 최소한 안내 표지는 있었다.
일단은 벽 끝까지 가서 한바퀴 돌아보자. 보통은 제일 외곽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기 마련이니까.
준은 천천히 걸었다. 증상발현자들의 냄새의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며 가만히, 침착하게 걸었다. 준은 눈을 바닥에 깔았다. 저들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면 늦는다. 시각은 무용지물이다. 후각에 의존해야 한다. 냄새의 물리 형질에 집중해야 한다. 냄새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미리 감지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까처럼 무작정 뛰는 순간, 저들을 찾느라 두리번 거리는 순간, 빈틈을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소음이 나지 않는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다행이야,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따각따각 소리가 들렸다. 염소 모녀였다. 창고 열린 문으로 염소 모녀가 먹이를 찾아 더듬더듬 불편한 몸을 끌고 준을 따라 나왔다.
양밍 아저씨의 말이 기억났다. 절박함에 연민을 갖는 자는 죽은 목숨이라고. 준은 단지 잠시 망설였던 것 뿐이었다. 염소 모녀를 향해 숨으라고 손짓 할까 1초 정도 망설인 것이 전부였다. 그 1초 사이 공격이 들어왔다. 아마도 폐기물 창고 옆 모퉁이였을 것이다. 증상발현자 하나가 무릎보다 낮은 자세로, 집게벌레처럼 소리없이 빠르게 접근, 준의 옆구리 쪽을, 아마도 신장이 있는 부위였을 것이다, 3개의 손가락으로 후벼 팠다. 팔꿈치로 방어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준의 살 속을 파고 들었다.
칼을 휘둘렀지만 맞지 않았다. 증상발현자는 치고 빠지기에 능했다. 준은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눈 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반쯤 주저 앉았다. 증상발현자는 준의 다음 움직임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는 칼에 맞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칼에 맞으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염소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피의 냄새가 자욱히 번졌다. 어미를 젖을 먹고 싶었던 새끼는 어미의 피를 뒤집어 쓰고 죽었다. 세상이 잔인한 이유는 우리가 광합성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잡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의도라고 했다. 세상을 유희 가득한 지옥으로 만들기 위한 누군가의 계획이라고 했다.
준은 돌아 보지 않았다. 연민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준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것 뿐이다. 지금은 그마저도 자신할 수 없었다. 준은 구석에 몰린 사냥감이었다. 9시와 4시 방향에서 다른 증상발현자가 준을 노리고 있다. 생각을 비워도, 물처럼, 공기처럼, 초인적 움직임을 행해도, 이들의 공격을 모두 막는 건 불가능하다. 옆구리 통증이 심하다. 방금 전까지 준을 괴롭힌 어깨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통증이 격심했다.
“곡스힐에 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해” 브래드의 말이 떠올랐다. 마구간에서 준을 기다리고 있을 린다가 생각났다. 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트리시, 제임스, 그리고 모리스가 떠올랐다. 준은 함성을 질렀다. 인간이 아닌 짐승의,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사냥감이 아닌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 사냥꾼이 가장 두려운 건 사냥감의 반격이다. 내가 죽더라도 너를 죽이고 가겠다는 마음가짐이다.
9시 공격을 방어한 것은 준의 척추 반사 신경이었다. 준의 목을 향해 날아온 손을 칼로 쳐낸 뒤 다른 칼로 경동맥을 베었다. 그 사이 공격해 들어온 4시 증상발현자의 인중을 박치기로 받았다. 틈이 생겼지만 준은 도망치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증상발현자의 목에서 피가 펌프질 하듯 솟아 나고 있었다. 피가 빠지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줄어든다. 조만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아까 옆구리를 공격한 증상발현자의 동작에서 배운 것이다. 치고 빠지기. 제자리에서 방어하면 후속 공격에 당한다. 공격도 방어도 끊임없이 치고 빠져야 한다.
준은 그제서야 장진졔 아저씨가 가르쳐 준 게 생각났다. 전부 아저씨가 알려준 것이다. 칼을 쥐었을 때는 절대로 찌르는데 정신을 팔아선 안 된다고. 찌르고 빠지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칼잡이가 찌른 뒤 빠지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라고. 물처럼, 벼락처럼, 때리고 빠지고, 베고 흘러야 한다고. 그게 칼을 다루는 법이라고.
4번째와 5번째 증상발현자들이 합류했다. 준은 냄새로 이들의 DNA 구조를 이해했다. 이들의 가계와 유전적 형질과 건강 상태를 파악했다. 준은 지금 상황에서 후각이 얼마나 쓸모없는 감각인가 깨달았다. 후각은 뒤늦은 감각이다. 후각은 성찰을 위한 감각이지 임기응변을 위한 감각은 아니다. 준은 후각 의존을 중단해야 했다. 척추 반사 신경에 의존해야 했다. 대뇌로부터 전달되는 명령을 차단해야 한다. 대뇌 신경 자극을 기다리면 죽는다. 척추 신경 조직의 본능에 따라야 한다. 척추 신경에 모든 생존 정보가 있다.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대자연의 기억이 있다.
머리로부터의 통신을 끊었다. 몸에 긴장을 풀고 팔을 내려뜨렸다. 순간 12시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온다. 같은 방향으로 맞받아쳤다. 증상발현자의 손톱이 준의 광대뼈를 스치는 사이 칼로 증상발현자의 왼쪽 눈을 찢었다. 준은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대고 다시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찌르고 빠지기. 베고 흐르기. 테스토테론과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통증이 멀게 느껴졌다. 증상발현자들의 호르몬 수치가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사냥꾼들은 사냥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계가 역전되었다.
준은 선제 공격을 날렸다. 왼쪽 눈이 찢긴 증상발현자를 노렸다. 오른쪽 칼을 들고 돌진, 맞받아 치려는 증상발현자의 손목을 왼쪽 칼로 끊었다. 곧바로 자세를 낮추고 발목 인대를 끊었다.
포위를 뚫었다. 준은 재빠르게 코너를 돌아 달렸다. 준의 척추 신경 본능이 알리고 있었다. 저 앞에 계단이 있다고. 긴장이 풀리자 통증이 돌아왔다. 뜀박질이 둔해졌다. 순간 9시 방향에서 돌진해 들어온 증상발현자과 충돌, 바닥을 뒹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공격이 들어온다. 준은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이 열린 문 안으로 굴러 들어가 재빨리 발로 문을 닫았다. 잠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다렸다. 문 밖에 대여섯의 증상발현자들이 모여 들었지만 저들 중 비밀번호를 아는 개체는 없는 것 같았다.
옆구리에서 피가 많이 나고 있었다. 지혈제를 꺼내 상처에 발랐다. 칼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충격을 받고 바닥을 뒹구는 사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준은 안도감을 느꼈다. 칼을 쓰는데 드는 정신적 비용이 너무 컸던 것이다. 다른 생명을 파괴하며 느낀 감정은 쾌감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주변을 둘러 보니 영안실이다. 준이 아버지 병원에서 제일 오래 일했던 곳이 영안실이다. 연어의 회귀 본능 같은 것인가. 준은 어이 없어 혼자 웃었다. 죽을만큼 아프진 않은 걸 보니 치명상은 아닌 것 같다. 영안실로 굴러 들어온 건 운이 좋았다. 저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해도 숨을 곳이 많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여기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점이었다.
영안실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건 어디선가 시체를 자주 쓸 일이 있다는 얘기다. 엘레베이터는 연구실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다. 아마도 윗층에 엘리베이터를 켜고 끄는 장치가 있을 것이다. 윗층과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터폰이 있었다. 인터폰을 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차피 최악의 상황이다. 숨을수록, 도망 다닐수록 생존 확률은 떨어진다. 양밍 아저씨도, 장진졔 아저씨도, 똑같이 말했다. 방어적이면 죽고 공격적이면 산다고. 인터폰을 눌렀다. 알아 듣든 못 알아 듣든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엘리베이터 전원을 켜라고. 못 알아 듣는 것 같아서 서너번 욕을 섞어 가며 전원 켜라고 했더니 전원이 들어왔다.
윗층에 뭐가 있든 상관없다. 준은 지금 당장 연구실에 가야 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을 찾아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다. 준은 씩씩대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분노다. 앞 길을 가로 막는 모든 것에 대한 맹목적 분노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유기물 냄새가 났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여기서 냄새 따위 붙들고 심사숙고할 시간 없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B1과 F1 2개 뿐이다. 몇 층이 연구실이라든가 영안실이라든가 그런 설명 따윈 없었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복잡한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기 편한대로 일필휘지 후회없이 건물을 지은 것이 틀림없다.
잠깐. 준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안실 시체 보관함을 열어 시체를 꺼냈다. 하나, 둘, 셋… 여섯 구의 시체를 엘레테이터에 태웠다. 그리고 F1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 병원 영안실에서 일할 때였다. 새로 들어온 시체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시체 중 하나에 범죄 피해자의 반지를 삼킨 놈이 있을 것이니 찾아 달라는 공안의 요청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시체를 늘어 놓고 씩씩대고 있는데 성격 급한 공안 직원 대여섯이 영안실에 들이 닥쳤다. 이들은 시체들 위에서 화가 잔뜩 나 있는 준을 보고 일시에 겁을 먹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뇌가 있든 없든 동물이다. 동물은 기계일 수 없다. 저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물은 없다. 서열과 경쟁에서 자유로운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분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칼도 총도 대포도 아닌 분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증상발현자들의 냄새가 쏟아져 들어왔다. 네다섯의 증상발현자들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준은 내리지 않았다. 한참 그대로 자리에 서 있었다. 준을 발견한 증상발현자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먹을 게 왔구나 생각으로 어기적 어기적 엘리베이터에 모여 들었다가 여섯 구의 시체 위에 서 있는 준을 보고 움츠러들었다.
준은 제일 가까이 다가온 증상발현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증상발현자들은 확실히 감정 변화가 없다. 그래서 흔히 이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다고 착각한다. 증상발현자는 분명 준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준이 시선을 꽂은 채 천천히 걸어오자 눈을 피했다. 준은 다른 증상발현자들을 천천히 하나씩 쏘아 보았다. 이들은 영장류에 속한 또 다른 종의 동물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로 여기면 미움도 두려움도 없다. 개 개량종이라고 생각하자. 영국은 개 품종 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나라니 사람 닮은 개가 개발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름도 붙여주자. 좌로부터 팻 찰리 포세 앤디 그리고 마이크.
준은 이곳이 연구실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이곳은 사망한 실험체를 폐기 혹은 재활용하는 장소였다. 연구실은 오른쪽이었다. 준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온 몸 가득 차 오른 분노를 씹어 삼킨 듯, 미움도 두려움도 없이, 느릿느릿 걸었다. 양밍 아저씨를 떠올렸다. 모두가 자동으로 길을 비켜주던 양밍 아저씨의 움직임 그대로, 그 표정과 자세와 리듬을 몸에 실었다.
연구실 문이 열려 있었다. 문 사이에 연구원 옷을 입은 시체가 끼어 있었다. 이번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 있었다. 준은 연구실 문 사이에 걸린 시체의 발목을 걷어 차 버리고 문을 닫았다. 잠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안도의 숨을 작게 쉬었다. 이곳엔 아무도 없다. 인간도, 동물도, 아무도. 하지만 식물들이 있다. 식물들?
준은 연구실을 둘러 보고 깜짝 놀랐다. 연구실 벽에 엄청난 수의 식물들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인공재배실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식물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식물에서 치료 방법을 찾고 있었다.
구근 식물들이었다. 수십 종의 서로 다른 구근 식물들이 같은 종끼리 배열돼 있었다. 같은 종의 구근 식물들이 동일한 배양액에 담겨 재배되고 있었다. 동일 종의 구근 식물들은 다시 군집으로 세분화 돼 격리 재배되고 있었다.
준은 심장이 뛰었다. 이 사람들,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준이 생각한 것과 같은 것, 개체가 아닌 종이어야 한다는 것, 너와 내가 아닌 우리여야 한다는 것, 그게 치료의 단서라는 사실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감염은 종이라는 장벽에 가로 막힌다. 곰팡이는 종으로 분화되지 않은, 서로 이질적인 군집 사이의 장벽에도 가로 막힌다. 감염된 군집과 감염되지 않은 군집과의 차이를 확장하면 치료법에 도달할 수 있다.
준은 연구소의 모든 단말기가 접속 가능한 상태임을 알았다. 데이터를 저장 삭제하지 못할 뿐 연구소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그동안 저장된 연구 결과를 열람할 수 있었다. 당연한 얘기다. 군사 무기 개발이 아니니까. 연구소에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연구 결과는 공유되어야 하니까. 외부 어딘가에서도 이곳의 연구 결과는 공유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순례자들은 헛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준은 단말기에서 가장 최근 연구 기록을 찾았다.
.............곰팡이는 식물 뿌리에 균사를 감아 통신망을 구축한다. 이 통신망은 신경과 혈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개체였던 식물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든다. 균사 통신망은 개체 간 평등한 배급제를 제공한다. 양분이 부족한 개체에 양분을 지원하고, 병충해의 위험을 경고해 집단 방어 체제를 형성한다. 인간 뇌에 곰팡이의 균사가 형성된 걸 보고 이것도 혹시 식물 같은 통신망 역할을 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실제 그랬다. 뇌 안에 균사가 형성된 인간 개체는 다른 개체와 비청각/비시각 의사 소통을 한다. 이들은 소리, 언어, 제스처, 눈빛 등 전통적인 소통 방식과 관련 없는 원격 의사 소통에 의존한다 - 멀리 떨어진 개체와 실시간 정보를 주고 받는다 – 각각의 개체들이 인지한 생존 정보를 공유하고 위험을 경고한다. 각자였을 때 무력했던 감염자들은 보이지 않는 곰팡이 통신망을 통해 전지전능한 집단 유기체, 슈퍼오거니즘으로 단합한다.
.............곰팡이에 의해 단합한 슈퍼오거니즘은 어떤 외부 공격도 막아 내는 무적의 방어 체제를 갖는다. 감기 바이러스 같은 외부 공격 뿐 아니라 파킨슨병 같은 퇴행도 막는다... 우리는 이를 역이용하기로 한다. 이 난공불락의 방호 시스템을, 뚫는 것이 아니라, 미러링 하는 것이다. 곰팡이 감염을 막는 집단 방어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돌곰팡이에 감염된 동일종의 구근 식물 중 특정 군집은 돌곰팡이에 저항력을 갖는다. 어떤 군집은 숙주가 되길 거부하고, 어떤 군집은 감염이 발생하지 않는다. 돌곰팡이는 특정 군집에서 번식 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생명 활동을 중단한다. 우리는 인종 사이 감염률이 다른 것이 이와 비슷한 원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곰팡이에 대한 연구는 종의 분화와 결속에 대한 연구다. 미생물에 의해 종이 분화하고 결속하는 것에서 치료법을 발견한다. 종의 분화와 결속을 미생물 감염을 막는 궁극의 방어책으로 활용한다.
기록 작성자는 데이빗 샤프, 식물학자였다. 화려한 프로필의 소유자였다. 최연소 큐 식물원장이자 최장 역임자, 식물 변이와 식물병에 관한 수백 건의 논문과, 십여권의 책, 대여섯 곳의 대학 명예 교수직까지. 화려한 경력이었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았다. 그는 공무적 목적 이외의 언론 인터뷰는 하지 않았고 세속적 이윤 추구나 학문적 외도 없이 평생 직장과 식물 사이만 오간 인생을 살았다. 데이빗 샤프는 아마도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이곳에 자진해서 들어왔을 것이고, 그리고 아마 이곳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곳에 남겨진 치료법의 작성자였을 것이다. 그는 아마 치료법 개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의 평생 그랬듯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데이빗 샤프 박사는 도움이 되고자 했다. 누구나 치료 샘플을 가져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였다. 군인들이 이곳에 침입했던 이유였다. 연구 결과를 파괴하지 않고 샘플을 취하기 위해 그 많은 희생을 감수한 것이었다.
안내 및 경고:
연구실4의 C-22 섹션에 재배 중인 크로커스에 “섬island”이라 부르는 곰팡이 배양 중. “섬”은 구근 식물에 기생하던 곰팡이로 돌곰팡이에 대한 집단 방어 체제를 형성함. 이 집단 방어 체제를 인간 군집에 재현 - 돌곰팡이가 넘지 못하는 종의 장벽, 군집의 장벽을 세움. 크로커스 개체 하나 당 하나의 캡슐에 담겨 있으며, 이 캡슐을 개봉해 항곰팡이 생태를 배양함. 충분한 임상 시험을 거치지 않은 관계로 효과 확신 불가, 예상치 못한 부작용 발생 가능. 가설에 불과 하지만 검증 가치가 충분한 가설. 섬 곰팡이는 이곳에서 배양된 크로커스에만 기생하며 다른 식물이나 외부 환경 이식 어려움. 캡슐 개봉 상태가 3시간 이상 지속되면 본래 기능을 잃거나 폐사할 수 있음.
프로세스:
1) 곰팡이에 감염되지 않는 둘 이상의 인간 종이 필요하다.
2) 곰팡이가 창궐한 지역에서 곰팡이에 감염되지 않은 2명 이상의 인간 종, 곰팡이의 침입을 받았지만 곰팡이에 감염되지 않은 샘플이어야 한다. 이 샘플 둘 이상이 있으면 돌곰팡이에 저항하는 군집을 형성할 수 있다.
3) 이 군집에 “섬island” 곰팡이를 감염시킨다.
4) 둘 이상의 비감염자가 함께 있는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캡슐을 연다.
5) “섬”은, 수분 내, 아마도 10분 내, 해당 군집을 위한 고유 방어 체제를 형성한다.
6) 방어 체제를 형성한 “섬”을 다른 인간 개체에 감염시킬 경우 해당 개체에 동일한 방어 체제를 형성한다. 해당 개체는 같은 인간 종일 경우, 인종과 상관없이,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동일한 방어 체제를 갖는다. 드물게는 일부 증상발현자도, 섬 곰팡이의 관점에서 같은 인간 종으로 인지하는 경우, 방어 체제를 형성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7) 단, 이 방어 체제는 해당 개체가 해당 군집에 물리적 접촉이 가능한 상태여야 유지된다. 호흡이든 피부 접촉이든, 개체 간 생물학적 소통이 가능한 범위 내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접촉이 하루 이상 끊어질 경우 방어 체제는 사라진다.
인간의 몸이 뇌를 포기하고 곰팡이를 선택한 것은 그게 몸에 더 유리하다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자연적” 판단 때문이었다. 개체의 판단이 아닌 종이라는 군집의 판단이었다. 샤프 박사는 이를 역이용한 것이다. 곰팡이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곰팡이에 감염되지 않는 반대편 군집을 형성한 것이다. “곰팡이에 감염되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군집 생태계를 만든 것이다.
이 치료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이라면 아일랜드에 감염자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 가능하다. 라나-아이먼 농법이 도입된 땅에 석상병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 역시 항곰팡이 균류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아일랜드 전역에 돌곰팡이에 저항하는 집단 방어 체제가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준은 이제 감염되지 않은 샘플을 찾아야 했다. 흑인이나 동양인, 누구라도 한 명만 있으면 된다. 브래드. 브래드가 있었다. 그에게 “섬”을 감염시킨 뒤 효과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임상 시험을 통해 효과를 확인해야 했지만 준은 냄새로 바로 확인 가능하다.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브래드와 치료제를 만들고, 린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준은 데이빗 샤프 박사가 남긴 다른 기록들을 살펴 봤다. 다음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특이점은 집단에 속하는 개체가 선별된다는 점이다. 어떤 개체가 포함되고 어떤 개체가 제외되는지 기준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의 선택이 아닌 곰팡이의 선택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균사 통신망으로 얽힌 식물 집단 중 소외되는 개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껏 단순한 “통신망 오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것이 곰팡이 네트웍의 취사 선택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곰팡이가 백인종을 취사 선택한 원인일 수 있다는 가설로 연결된다.
.............돌곰팡이를 제조 혹은 발견한 이는 인간과 식물 간 생물학적 유사점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생각케 한다. 원래 식물에 기생하던 곰팡이를 인간에게 기생하게 만든 것은 인간과 식물이 동일한 생물학적 특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인간을 “식물화” 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식물이 곰팡이 통신망을 통해 평등한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 인간 증상발현자들은 엄격한 계급 구조를 지향한다. 흰개미들이 호르몬을 통해 슈퍼오거니즘 계급 구조를 구축하는 것처럼, 저들은 곰팡이 통신망을 통해 슈퍼오거니즘 계급 구조를 구축한다. 한 명의 알파를 중심으로 집단적 생존을 추구한다.
준은 불길한 냄새를 맡았다. 감염자였다. 감염자가 증상이 발현되면 인간의 냄새에서 한발짝 멀어진다. 증상 발현이 오래 될수록 인간의 냄새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 감염자는 인간이 아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감염자는 인간의 시체와 함께 있었다. 시체와 감염자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한때 인간이었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지 오래된.
준은 재빨리 짐을 챙겼다. 이곳을 빨리 빠져 나가야 했다. 문을 찾았다. 준은 뒷목에 뻐근함을 느꼈다. 구토증을 유발하는 긴장감. 코르티졸 과다 분비. 움직임이 둔하다 싶었다. 그때 묵직한 열기가 한뼘 거리로 다가 왔다. 준의 몸은 후각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지독한 냄새의 정체를 외면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준의 몸은 감당키 어려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준의 앞을 가로 막은 감염자는 키가 2m에 가까운 거인이었다. 그는 몸에 시체를 두르고 있었다. “고기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옷을 기워 입은 듯, 아무렇게 찢어 발긴 인간의 사체를 온 몸에 묶어 놓았다.
무심, 평정, 분노, 시위를 떠난 화살… 지금껏 준을 이곳에서 생존케 했던 필살의 주문들은 힘을 잃었다. 준은 이 감염자 앞에서, 마치 코 앞에 맹수를 마주한 초식 동물처럼, 꼼짝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칼이 있었으면 도움이 되었을까. 그랬다면 이미 목숨이 날아가지 않았을까. 감염자는 준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준을 먹이로 삼을지, 장식으로 삼을지, 아니면 노리개로 삼을지, 판단하는 것 같았다.
다른 연구실에서 다른 감염자들이 나타났다. 한명 두명 세명… 여섯 일곱명. 흑인과 동양인이 있었다.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유색 인종 감염자였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백인종을 위한 치료제 개발이다. 하지만 지금 준이 보고 있는 건 반대의 결과였다. 종의 장벽으로 병을 막은 것이 아니라 종의 장벽을 무너뜨려 병을 확산시킨 것이다. 백인종을 위한 구원을 찾아야 할 곳에서 감염되지 않아야 할 다른 인종에까지 저주를 내린 것이다.
준은 아까 영안실에서 본 시체들 중 왜 그렇게 많은 수의 흑인과 동양인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들은 구근 식물에서 찾은 실마리를 바탕으로 인간 실험을 한 것이다. 식물에게 했던 실험을 인간에게 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식물처럼 대하는데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을 구하기 위한 실험이었지만 실험실의 인간들은 예외였을 것이다. 준이 영안실에서 본 시체들은 자연사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험쥐였다. 그건 동물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해로운 실험이었다. 실험쥐에게도 하기 어려운, 죄의식에 몸서리 쳐야 할 실험이었다. 이곳 시체들은 그런 실험을 반복적으로 당한 뒤 폐사했다.
하지만 정말 연구소에서 이걸 의도한 것일까? 지금까지 본 기록 어디에도 그런 것에 대한 힌트는 없었다. 그런 시도도, 상상도, 호기심도 언급되지 않았다. 혹시 군사적 목적의 독립된 연구였을까. 이곳에 그 많은 군인들이 들이닥쳤던 것도 혹시 이것 때문이었을까. 다른 나라를 공멸케 하기 위한 생물학 무기를 구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연발생적 부작용이었을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멸하기 위한 곰팡이의 카운터 펀치였을까.
감염자의 손이 준의 머리로 날아 들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기울였지만 감염자의 손톱은 준의 이마를 긁고 지나갔다. 스친 한방에 고개가 완전히 꺾일 정도로 강한 훅이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한방. 아무 예비 신호도, 요동도 없이 마른 하늘에 벼락처럼 날아 들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사냥을 한다. 어쩌면 지금 공격은 사냥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벌레가 죽었나 살았나 건드려 본 것이었을지 모른다. 다음 공격은 살생의 의도를 가질 것이다. 살의를 품은 공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공격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전에,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확실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몸이 붕 떠올랐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새가 된 것처럼, 몸이 감염자들로부터 멀어져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몸을 이동시킨 것이다. 준은 그제서야 자신을 물고 천장 환풍구에 매달린 존재의 냄새를 맡았다. 그도 감염자였다. 증상발현자였다. 얼굴이 붉은 수염으로 뒤덮인 백인 남성. 이 남자는 무리의 일부였다. 고기 옷 감염자와 같은 곰팡이에 감염돼 있었다. 이들은 같은 집단 소속 - 곰팡이에 의해 하나 된 슈퍼오거니즘의 조직원이었다. 이탈자였다. 군집에서 이탈한 변이 개체였다.
붉은 수염은 준의 옷을 이빨로 물고 있었다. 옷 뒷덜미를 문 채 준을 헝겊 인형처럼 환풍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준은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근거없는 직감이었지만 준은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준은 공포 대신 안도감을 느꼈다. 준은 붉은 수염에게 몸을 내맡겼다. 축 늘어진 몸으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붉은 수염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연구소 밖으로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