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뇌에만 저장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건 몸 신경 조직에 우선적으로 전달돼. 경험에 의한 자극이 뇌에 저장되는 되는 게 아니라 몸의 신경 조직에 남는 거야. 우린 그걸 경험의 잔상이라고 해. 어떤 잔상은 금방 사라지지만 어떤 잔상은 지속돼. 잔상이 반복되면 신경 조직은 그에 맞춰 구조를 바꿔. 뇌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거야.
모리스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의사가 된 건 아버지 병원 때문이었고 원래는 자유로운 학문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모리스는 인생은 굴레라고 했다. 태어나자마자 굴레에 얽힌 삶을 사는 법이라고, 유전적 사회적 프로그래밍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했다.
모리스는 인생에서 뭔가를 기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성공한 인생도, 부유한 삶도, 쾌락의 삶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유일한 “인생”은 캐런에게 욕정을 느낄 때였다. 하루종일 캐런을 생각하며 희망과 좌절과 부끄러움에 시달릴 때, 그때가 유일하게 굴레에서 벗어난 삶이었다고 했다.
모리스는 병원장을 그만 두지 못했다. 병원을 뒤 이어 맡겠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리스가 필요한 곳은 가족이 아닌 병원이었다. 모리스는 준과 다시 만나지 않기 위해 병원 일에 매달려야 했다. 모리스와 준은 함께 치료제를 개발했지만 모든 대화는 이메일로 사무적으로 이뤄졌다. 모리스는 준과 관계하며 다시 한번 인생을 살았지만 그건 그에게 허락된 삶이 아니었다.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일탈을 경험하고 모리스는 다시 굴레의 삶으로 돌아갔다.
모리스가 이야기한 경험의 잔상. 아버지가 했던 말과 동일하다. 아버지는 경험의 잔상이 반복되면 진화의 방향을 결정 짓는다고 말했다. 사냥에 대한 잔상, 불에 대한 잔상, 도구에 대한 잔상, 굶주림에 대한 잔상, 병에 대한 잔상, 각 개체의 몸에 새겨진 잔상들이 진화의 나침반이 된다고 했다.
모리스는 이 곰팡이가 정말 새로운 것일까, 인간의 몸이 처음 경험한 종류일까 의심했다.
…대기 중엔 수백만 종의 곰팡이 포자가 날아 다녀. 지난 수백만년 동안 수백수천만 종의 곰팡이를 흡입하면서 이에 대한 잔상을 기록해 왔을 거야. 뇌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기억 용량이 적지만 몸에는 기억 용량이 존재하지 않아. 뇌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몸에, 무의식의 영역에 남기는 거지.
베넷 교수도 같은 말을 했다. 지금 이 곰팡이는 인간의 몸이 처음 접촉한 종이 아닐 것이라고. 수백만 년전부터 유사 종의 침입을 받았을 것이며, 그에 대한 방어 체계를 갖춰 놓았을 것이라고. 베넷 교수는 인간 몸 어딘가에 이 곰팡이에 대한 기억이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이 곰팡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 살아 왔다고. 인간은 이 곰팡이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으며, 이 곰팡이를 체내에서 몰아낸 적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의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베넷 교수의 증상은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새파란 이끼 피부가 그의 목과 머리를 덮고 있었다. 베넷 교수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능과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남자다움을 잃지 않았다. 치매 증상이 나타난 뒤에도 베넷 교수는 폴로를 즐겼다. 가끔 상대편과 우리편 골대를 착각했지만 팀원들을 도움으로 무사히 경기를 완주할 수 있었다. 베넷 교수는 증상이 나타난 뒤로 오히려 운동 능력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운동 신경도, 체력도, 상황 판단력도 더 좋아졌다고.
…뇌의 지배력이 약화되면 무의식이 살아나기 마련이지. 뇌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어쩌면 몸 어딘가 저장된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몰라.
베넷 교수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죽음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물방울의 증발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만으로 복받은 인생이었다고. 백년 전에 태어났어도, 천년 전에 태어났어도, 꼼짝없이 징집돼 진흙 속에서 피 흘리며 죽었을 거라고. 징집되지 않았더라도, 굶주림에, 범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을 확률이 90%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 몸에 저장된 기억은 우리 몸이 만든 게 아닐지도 몰라. 개체나 종이 아닌 생태계가 만든 것일지 몰라. 생태계의 한 축으로 수백만년을 살면서 각인된 기억이겠지. 내가 만약 치료제를 찾는다면 생태계의 관점에서 찾을 거야. 곰팡이에 저항하는 다른 생명종, 그 종과의 공생에서 치료법을 찾을 거야.
베넷 교수의 말을 들으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영혼이 둘로 갈라져 베넷 교수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넷 교수에게 아버지의 후각 능력이 있었다면 그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을까. 기존 질서에 혐오를 느끼고, 부조리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만의 세상을 추구했을까. 그랬다면 엄마와 맺어질 수 있었을까.
아버지와 산에 올랐던 기억이 났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와 단 둘이 외출을 했던 게 두어번 뿐이었다. 아버지와 둘이 산에 올랐던 기억이 아득히 오래 전 꿈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산 아래 연분홍 빛으로 가득 핀 꽃밭을 보며 말했다. 대기 중 흩날리는 꽃가루에 의해 인간의 면역 체계가 달라진다고. 꽃가루는 벌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벌들은 수확의 운명을 좌우하기에, 인간의 몸은 꽃가루의 분포에 따라 다른 생존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인간 면역의 기억은 꽃가루의 분포에 따라, 대기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몸은 문명이 아닌 공생의 지배를 받는다... 준은 아버지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경쟁과 공생이 진화의 머리다.
.............자연은 개체를 위한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
.............번영, 쇠락, 희노애락은 시간을 구성하는 흐름이다. 삶과 죽음은 명멸하는 빛의 연속이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준은 깨달았다. 인간의 몸이 어떻게 뇌를 포기하고 곰팡이를 선택하게 됐는지. 어째서 기존 관계 대신 새로운 공생을 선택하게 됐는지. 지금껏 지엽적인 문제만 물어 뜯고 있었다. 자연이 아닌 개체를 보고 있었다. 너와 나의 문제에 얽매여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윗층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제임스와 트리시가 지하실로 급하게 내려왔다. 제임스는 다급하게 준을 불렀다. 목소리가 잔뜩 낮춰져 있었다.
준! 집에 사람들이 처들어 왔어!
준이 윗층으로 올라가려는 걸 제임스가 막았다.
할머니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어. 절대 올라오지 말라고 했어.
조안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중국어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백인들 나라가 망하면 중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는 것 아니냐며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그랬다. 집에 중국어 네이티브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준에게 매일 중국어 수업을 받았다. 할머니가 원래 저렇게 중국어를 잘했던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네이티브인가 싶을 정도로 할머니는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중국어로) 이곳은 당신들이 올 곳이 아닙니다. 빨리 나가 주세요.
부인, 저희는 준 리즈와 모리스 리즈에 대한 체포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수사 협조를 위해 이 집 다른 모든 분들도 동행해 주셔야 합니다.
윗층에는 완전무장한 여섯 명의 군인이 있었다. 왜 무장을 한 걸까? 준은 계엄령이 뭔지 몰랐다. 계엄령 선언문에서 알아들은 부분은 사회가 공멸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 뿐이었다. 준이 이해한 것은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에게서 차가운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무기물의 냄새였다.
............. 무기물은 안정이고 유기물은 불안이다. 무기물은 냉정하지만 유기물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냄새로 보는 세상은 이분법적이다.
할머니는 중국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척 하고 있었다. 무장 군인들은 할머니를 뒤로 하고 집을 수색했다. 한참 동안 쿵쿵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견했다”는 말이 들렸다..
열어!
지하실 통로를 발견한 것이었다 준과 제임스, 트리시는 본능적으로 지하 통로 깊숙한 곳으로 내달렸다. 군인들의 소음이 멀어졌다.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총 소리가 들렸다.
준은 달리기를 멈췄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에게 아까 중국어 멋졌다고, 상류층이 구사하는 중국어 같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준을 제임스가 붙잡았다.
제임스는 말 없이 준을 다그쳤다. 준의 절망 가득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단호한 표정으로 억눌렀다. 제임스는 준을 끌고 빗장이 쳐진 곳으로 넘어갔다. 제임스는 빗장을 치고, 준과 트리시를 붙든 채, 다시 통로 더 깊숙한 곳으로 달렸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뭔가 내동댕이 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트리시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통로는 어둡고 축축했다. 준은 울지 않기로 했다.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준은 살기로 했다. 트리시는 울고 있다. 트리시는 정상이다. 증상발현자는 울지 않는다. 트리시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준은 앞장 서 걸었다. 트리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준은 눈이 아닌 냄새로 길을 찾았다. 날 따라 와 저 앞에 출구가 있어.
출구는 먼 곳에 있었다. 냄새는 가까이 느껴졌지만 그건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빗장을 치고 최소 1시간은 걸어 온 것 같았다. 군인들의 냄새는 1시간 이상 먼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빗장을 여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준의 연구실에서 뭔가를 찾는 것일지 몰랐다. 그들은 준의 노트북에 저장된 파일이 암호화 된 것이란 사실을 발견하는데 하루 이상 걸릴 것이다. 그걸 풀고 나면 아버지의 문자를 해독해야 한다. 그건 아마 일년 정도 걸릴 것이다.
내리막이 나올 때는 불안했다가 오르막이 나오면 마음이 놓였다. 냄새가 이제는 정말로 가까워졌다. 녹슨 금속 냄새가 났다. 이제는 정말 출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사다리가 있었다. 처음 만들어진 이후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출구가 열리긴 할까? 출구를 덮은 아치형 금속 뚜껑은 의외로 상태가 좋았다. 오래 됐지만 열릴 것 같았다. 준은 이 모든 것이 즉흥적으로 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군사 시설이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수백년의 혹독한 환경을 버틸 수 있는 시설이었다. 소니 할아버지는 불법 공사를 강행한 거였다. 남 몰래 집에 군대 인력을 데리고 와 오랫동안 밥 먹이고 재우며 이걸 지었던 것이다.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대피 시설이 영국군의 침입을 받은 사실을 소니 할아버지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기껏 목숨 걸고 지켜줬더니 이런 짓을 해? 내가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새끼들이 내 가족에게 복수를 해? 소니 할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저항군이 됐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었다면 소니 할아버지는 조안 할머니와 서로 마음이 맞는 동맹군이 되었을 것이다.
지렛대처럼 생긴 열개가 있었다. 열개를 당기자 출구가 열렸다. 70년만에 처음 열린 문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공기에서 준은 반가운 냄새를 맡았다. 말들이 있었다. 맥기 아저씨와 맥기 아저씨가 데려 온 말들이 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기 아저씨는 아이들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조안은?
맥기 아저씨는 말 셋을 데려 왔다. 린다. 도이. 스티븐슨. 2명 2명 1명이 타고 갈 수 있도록 - 하지만 1마리는 이제 필요 없었다. 조안 할머니는 같이 오지 못했다.
준이 몰랐던 건 이것이 원래 계획된 것이란 사실이었다. 모리스는 첩보를 들었다. 군인들이 모리스의 집을 수색할 것이란 첩보였다. 첩보를 전한 이들은 이것이 문제 해결이 아닌 분풀이를 위한 것이란 사실을 모리스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은 수색 대상자를 신사적으로 대우할 계획이 없으며, 그들에게 순순히 협조할 경우 얻는 것은 거짓 강요와 생존의 위험 뿐이란 점을 이해시켰다.
모리스는 아버지 헨리의 친구들을 알고 있었다. 국방부에서 일한 퇴역 군인들. 그들은 모리스를 친자식으로 여겼다. 그들은 조안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모리스는 모른 척 했다. 그건 각자의 사생활이다. 어머니는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가족을 끔찍히 여기는 사람이다. 어머니와 친구라면 모리스와도 친구이고, 어머니와 가족 같은 관계라면 모리스와도 가족 같은 관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게 된 기밀 사실을 모리스에게 알려주었다. 그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모리스는 대비해 놓고 있었다. 군인들이 들이 닥치면 지하 통로로 피신한다. 출구에서 맥기가 말과 함께 대기한다. 개울을 건너 은신처로 간다. 모리스가 몰랐던 건 어머니 조안이 계획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조안은 계획을 바꾸었다. 자기 혼자 잡혀 가기로. 조안이 군인들 앞에서 중국어를 한 건 그 때문이었다. 중국 음모론 때문이라면 자신이 잡혀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조안 할머니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 지금껏 70평생 그랬듯, 본능적 선택을 내린 것이었다.
맥기 아저씨는 준에게 나무 조각을 주었다. 열쇠라고 했다. 여기에서 북서쪽, 340도 방향으로 가라고 했다. 가다 보면 열쇠의 냄새와 같은 냄새를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맥기 아저씨는 준에게 개의 후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맥기 아저씨는 자기가 굳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맥기 아저씨도 계획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맥기 아저씨는 스티븐슨의 등 위에 올라 타고 말했다.
조안은 내가 데려 올게. 준이랑 트리시가 린다 위에 타고, 제임스는 도이 위에 타. 도이는 린다 꽁무니만 따라 갈 거야. 허튼 짓만 하지 않으면 돼.
뭐라 대꾸할 틈도, 인사를 건넬 시간도 주지 않고 맥기 아저씨는 황급히 집 쪽으로 달렸다. 스티븐슨이 순간 이동 하듯 멀어졌다. 아저씨 이제 레이싱은 안 하세요 라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맥기 아저씨는 아직 현역이었다. 말을 타고 화살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멀리서 총격 소리가 들렸다. 교전이었다. 준은 영국이 전시 상황임을 깨달았다.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총을 쏘고 있었다. 폭파음도 들렸다. 준의 집만 특별 취급을 당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영국군은 다른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맥기 아저씨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을까.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조안 할머니는 괜찮을까. 정말 총을 쏜 건 아니겠지. 경고 사격을 한 거겠지. 모리스의 계획대로였다면 지하실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어야 했다. 군인들이 집에서 폭력을 쓰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그게 원래 계획이었다. 군인들은 지하실 통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고 찾은 것이다. 누군가 지하실 통로에 대해 말한 것이다.
준은 뒤 안장에 앉은 트리시가 흥분 상태라는 걸 알았다.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준은 트리시를 안정시켜야 했다. 뇌에 계속 부하가 걸리면 언제 또 졸음이 쏟아질지 모른다.
트리시.
응.
맥기 아저씨가 할머니 데려 올 거야.
…응.
집에서 못 가져 온 거 있으면 얘기해, 내일 가져올게.
언니.
응.
집에 지하실, 내가 얘기했어.
무슨 얘기.
앰버한테 얘기했어.
…
우리는 전쟁 나면 거기로 도망갈 거라고 얘기했어.
…
그래서… 내가…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트리시는 준이 할머니를 데려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준이라면 6명의 무장 군인들을 전부 처지하고 할머니를 되살려 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지금껏 그랬듯, 자신의 이번 실수도 준이 어떻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총격 소리가 멀어졌다. 개울을 건너 숲으로 들어섰다. 준은 냄새를 맡았다. 아저씨 말대로였다. 나무 조각에선 특이한 나무 냄새가 나고 있었다. 동물 냄새의 지문보다 나무 냄새의 지문이 열배 노골적이다. 동물의 냄새가 달빛이라면 나무의 냄새는 햇빛이다. 동물의 냄새는 겨우 한뼘 거리에서 인지되지만 나무의 냄새는 조금 과장해 지구 반대편에서도 구분 가능하다. 이 이름 모를 나무의 냄새는 분명 전에 맡아 본 적이 있다. 나무의 잎과 껍질과 생김새가 기억난다. 언제 어떤 꽃과 열매를 맺는지도 기억난다. 나무에 어떤 곤충이 사는지, 어떤 곰팡이와 공생하는지도 기억난다. 준이 기억 나지 않는 건 나무의 이름 뿐이다. 나무에 이름이 필요한 걸까? 아버지가 왜 병명을 붙이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냄새로는 모든 걸 알 수 있지만 이름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은신처는 숲 한가운데 있었다. 나무 열쇠와 같은 나무로 지어진, 버려진 지 30년은 됐을 것 같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건조물이었다. 지도로도, 설명으로도, 도무지 찾기 힘든, 냄새가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곳이다. 하지만 이곳도 결국 발견될 것이다. 이곳은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치료제를 만들 시간. 그들과 관계 우위에서 협상할 수 있는 시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에 있던 지하실과 동일한 형태의 지하실이 있었다. 완벽하게 작동하는 발전기와 지하수 펌프, 화장실도 있었다. 소니 할아버지는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군대에서 영웅 대접을 받은 건 미친 짓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니 할아버지는 전쟁이 또 있을 것이란 생각에 누구보다 진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생존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모리스는 이곳을 완전한 거주 환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안의 모든 것이 새 것이었다. 침구와 옷가지, 컴퓨터, 통신 장비, 그리고 환자 식량… 트리시는 자기 회사에서 새로 나온 보습제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걸 보고 울먹였다. 여자 물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모리스는 트리시의 물건들을 무작정 최대한 많이 갖다 놓았다. 모리스는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한밤중에 무거운 짐을 지고 이곳까지 서너번 이상 왕복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편히 살 수 있게 며칠 밤 중노동을 한 것이다. 모리스는 트리시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트리시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아빠가 얼마나 딸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리스의 메모가 있었다.
…도착하는대로 모든 휴대폰 유심칩은 빼놓아야 한다. 외부와의 통신은 이곳에 설치된 위성 통신망만 이용해야 한다. 요리나 배달 음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환자식을 먹는다. 4명이 최대 90일 섭취 가능.
모리스는 어디에 있을까. 병원에도 군인들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모리스는 처음부터 집에 올 계획이 없었다. 자기 혼자 잡혀갈 계획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을 따돌릴 계획이었을까. 모리스는 준을 믿고 있었다. 자기가 없어도 준이 가족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준이 이제 이 집의 가장이다. 제임스는 똑똑하지만 세상 경험이 없다. 트리시는 세상 경험이 있지만 철이 없다. 트리시가 우물쭈물 다가온다.
언니.
응.
치료제 언제까지 만들 수 있어?
왜, 화장실이 마음에 안 들어?
응.
이런 상황에서 화장실 투정을 하는 걸 보니 트리시는 아직 건강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증상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냄새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두렵다. 준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치료제를 빨리 만드는 것 뿐이다. 그게 우리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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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병 음모론에 중국 정부는 이렇게 반응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앵글로색슨 족 국가들은 언제나 대화와 타협이 아닌 파괴와 살육을 최우선 해결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폭력적 문제 해결 방식은 지난 수천년의 역사와 더불어 그들의 DNA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지난 백년 간 “신사의 나라”를 자처하며, 문명의 선도국인 것처럼, 이성의 방패인 것처럼 스스로의 얼굴에 분칠을 해왔으나, 작금의 고난의 시기에 분칠은 여지없이 벗겨져 버리고, 이제와 다시 한번 폭력과 파괴의 DNA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일고의 가치 없는 터무니 없는 음모와 허위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살육의 명분으로 정당화 한 것은 이들 국가가 지난 오랜 세월 동양인에 대해 얼마나 뿌리 깊은 혐오와 차별 의식을 키워 왔는지 깨닫게 합니다. 중국 정부에서 해당 허위 사실에 대한 반박 증거를 지속적으로 제공했음에도, 진실이 아닌 거짓을, 이성이 아닌 감정을, 이해가 아닌 혐오를, 과학이 아닌 미신을 믿기로 한 그들의 미개함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중국 정부는 백인에게만 발생하는 감염 사태에도 지금껏 그들의 생존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당국의 관용적 조치를 노골적으로 배신하고, 중국인에 대한 모욕적 인권 파괴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영국 국민들과 백인들에 베풀고 있는 정책적 배려가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판단, 더 이상 그들에 대한 보호 조치를 유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 영국에 대한 모든 인도적 지원을 중단할 것이며, 영국의 국가 정상화와 미래에 대해서도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중국 정부는 영국에 요구 사항이 없었다. 중국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더 이상 얻어낼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 정부는 영국이 더 이상 이성적 대화가 가능한 문명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중국은 영국에 대한 모든 구호 활동을 중단했다. 영국에 파견됐던 치안 병력과 의료 지원 인력 및 모든 자국민들을 비행기와 배로 실어 왔다. 중국 정부는 선언했다. 앞으로 영국 땅에 중국인은 없으며, 중국인에 의한 어떤 도움도 없을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중국 땅에 영국인은 없을 것이며, 영국인과의 어떤 교류도 없을 것이라고.
그와 동시에 중국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외부 질병 인민 구호 조치”를 시행했다. 사회 안전을 명분으로, 수용 시설을 건설해 그곳에 백인종을 가두는 것이었다. 수용 시설 수감 대상에 대한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 백인종처럼 보이면 무조건 수감 대상으로 지정되는 무작위 방식이었다. 백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 혈통 중국인도, 단지 백인과 비슷한 피부색 혹은 체형을 가졌다는 이유로, 수용 시설에 억지로 끌려와 감금되었다. 공포는 공포를 낳고, 혐오는 혐오를 낳았다. 석상병에 의해 촉발된 인종 전쟁은 석상병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국가로까지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