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 하지만 나를 판단할 권리는 없다.
제프리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 팬이었다. 최소 열번은 본 영화였다. 제프리는 커츠 대령의 모든 대사를 빠짐없이 외웠다. “우리는 가치 판단으로 패배한다”는 대사는 제프리가 오랫동안 곰씹었던 대사였다. 심대한 의미를 담은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제프리가 그 대사의 의미를 깨달은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더 이상 정상적인 인간일 수 없는 때였다.
제프리는 사립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반이었다. 그는 성적 최상위자였다. 원하는 대학을 골라 갈 수 있었으나 그는 대학 대신 임상 실험 연구소에 들어갔다. 자진해서 임상 실험자로 들어간 것처럼 돼 있었으나 사실은 강압적 조치였다. 그의 허리에 이끼 피부가 난 것을 본 체육 교사가 당국에 신고, 정부에서 파견된 보건의들이 제프리를 임상 실험에 참가하도록 강제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제프리에게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제프리의 부모는 맨체스터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제프리는 부모의 사업이 조직 폭력배들의 이해 관계와 얽혀 있다는 말을 몇 번 들었다. 사람들은 제프리 부모의 죽음이 조직 폭력배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했지만 경찰은 적극적인 수사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부모의 친척들은 제프리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지 않았고, “가족 없는 이끼 피부 샘플” 확보에 혈안돼 있던 보건 당국의 쉬운 타겟이 되었다. 제프리도 미련이 없었다. 처음엔 부모님의 억울한 죽음에 집착했으나 현실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 받는다 해도 자신의 상태가 치료되지 않는 한 소용 없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 기대 없는 임상 실험에 피험자로 참여했다.
연구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제프리는 외로움을 느꼈다. 세상에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이 뼈 속 깊이 사무쳤다. 이것이 사회에서의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새까만 해저 깊은 곳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감옥 같을 줄 알았던 병원은 생각보다 밝았다. 모든 것이 새로 지어졌으며 고급 기숙사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각자 독방이 주어졌고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체육관, 운동장, 도서관, 식당, 심지어 영화관도 있었다.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휴대폰, PC, 전자 기기 등 개인 소지품을 갖고 들어올 수 있었으며, 외부와 연락도 가능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허용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었는데, 동료 피험자들끼리 교제하거나 섹스를 하는 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예전의 삶과 다른 점은 외출이 금지돼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운동신경, 시력, 청력, 촉감, 뇌파, 성욕 등, 신체의 모든 기능이 매일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뭘 먹는지, 뭘 싸는지, 잠은 어떻게 자는지, 피부색의 변화도, 입 냄새도, 머리카락 하나 빠지는 것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
제프리는 자신도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그는 일기를 썼다. 자신의 일기를 보게 될 사람은 기껏해야 병원 사람들이겠지만 그것도 의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또 모른다. 내가 죽은 다음이라도 치료약이 개발될지. 나에 의해 남겨진 기록들이 치료약 개발에 도움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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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 사람들끼리 가장 먼저 나누는 이야기는 꿈 이야기다. 무슨 태몽을 꾸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다들 특이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다.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함께 밥을 먹는 꿈을 꾸었는데 그건 태몽과 상관 없는 전에도 꾸었던 꿈이다. 여기 사람들은 태몽이 그 사람의 미래라고 한다. 태몽이 정말 그 사람의 미래라면 병원에서 태몽을 받아 적고 따로 관리하지 않았을까. 입소 당시 어떤 이들은 태몽을 물어 봤지만 나 같은 경우 물어 보지 않았다. 병원 사람들은 태몽에 큰 관심이 없다. 솔직히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처럼 사립 학교를 다니며 유복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없다. 다행인 건 범죄 전과가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시설에서 따로 관리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에 제일 오래 있었던 사람은 다니엘이다. 그는 일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뒤로 아무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랑 비슷한 때 들어왔던 사람들은 전부 증상을 일으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다니엘에 따르면 짧게는 3개월만에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부분은 6개월에서 10개월쯤 되면 이곳을 나가게 된다고 한다. 증상이 언제 나타나는지, 거기에 무슨 기준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자기도 이제나 저제나 끌려 갈까 불안해 했는데 이제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사형수의 딜레마 같은 걸까. 무사한 날이 길어질수록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파라독스가 생각났다. 사형수의 파라독스가 너무 재미있어서 삼일 동안 그 생각만 했던 적도 있다. 생각해보니 아직 나는 고등학생이다. 대학 진학을 몇 달 앞두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들 말대로 일년 일찍 대학에 갈 걸 그랬다. 죽기 전 대학 경험이라도 해 보걸 그랬다.
.............다니엘은 이곳 신참들에게 도움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첫째, 뇌가 없어진다고 죽는 건 아니라는 것.
둘째, 증상이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셋째, 증상은 식욕, 배설욕, 번식욕, 수면욕으로 나타난다는 것.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게 기본 증상이다. 과식을 한다, 똥오줌을 아무데나 싼다, 성적 공격성을 드러낸다,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든다, 모두 전형적인 증상이다.
.............제일 먼저 증상을 보인 사람은 에냐였다. 내가 여기 온 지 이주 째 되는 날이었다. 에냐는 똥오줌을 싸지도 않았고, 성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대신 포크를 먹었다. 갑작스러운 증상 발현으로 다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모든 식기는 부서지기 쉬운 플라스틱으로 돼 있다. 에냐는 밥 먹을 때 플라스틱 포크를 먹은 것이다. 실수로 먹은 게 아니라 일부러 씹어 먹었다. 플라스틱 식기도 검열 대상이다. 식기가 파손된 걸 발견한 병원 직원들은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에냐의 증상을 발견했다. 에냐는 겉보기 멀쩡했다. 끌려 나가면서 너무 서럽게 울길래 사람들이 아직 더 두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직원들을 둘러 싸서 못 가게 했다.
.............피험자들 중에는 여기 병원에서 일하던 직원도 있다. 원래 병원 직원은 이곳 피험자가 될 수 없는데 신디는 예외였다. 달리 갈 데가 없기도 했고 이곳 사람들과 친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디는 “나는 아니겠지” 생각하면 100% 걸린다고 했다. 백인이면 99.9%의 확률로 피부에 이끼를 갖게 된다고 했다. 그 말도 무서운 말이다. 99.9%라고 해도 0.1%는 안 걸린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천만명이면 무려 만명은 무사하다는 얘기다. 사람은 여기에 희망을 건다. 여전히 나는 아니겠지 생각하게 된다.
.............스펜서는 학교에서 생물을 가리치던 교사였다. 피부에 생긴 지의류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의 체질에 따라 서로 다른 지의류가 자란다고 했다. 모두 새로운 종이라고 한다. 보통 땅이나 바위, 나무에서 자라는데 동물의 피부에 자란 건 아마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인간 몸에 털이 없어서 지의류가 자라기 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피부 지의류에 관한 책들이 이미 많이 출판됐는데 그 중에 자신이 공동 저자로 낸 책도 있다고 한다. 스펜서는 이곳에서도 이끼 피부 사진을 찍고 있다. 내 몸에 난 건 검은색이다. 검은색은 보라색과 더불어 가장 희귀한 종이라고 했다. 스펜서는 특수 카메라를 썼다. 조명이 장착된, 사물을 확대해서 찍을 수 있는 고해상도 카메라였다. 내 이끼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너무 예뻐서 소리 지를 뻔 했다. 윤기가 흐르는 광물 같았다. 이런 게 내 몸에 있었다니, 화보로 남겨 간직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전에는 그저 무서운 낙인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스펜서는 지의류의 외양이 사람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증상과 혹시 관련이 있는지 등을 연구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그런 연구가 많이 진행됐을 것이라고 했다. 단지 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누구에겐 이끼 피부가 사형 선고인데 스펜서 같은 사람에겐 새로운 희열이다. 나도 그처럼 긍정적인 사람이면 좋겠다. 나도 그처럼 뭔가에 몰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옆 방 로니가 똥을 쌌다. 방 안에서 싼 건데 내 방까지 냄새가 났다. 똥 냄새가 나자마자 신고했는데 똥이 치워지기까지 거의 한나절이 걸렸다. 예전엔 누가 저렇게 밖에다 똥을 싸면 화가 났을텐데 이제는 무섭다. 나도 로니처럼 될 것이란 생각에 무섭고 우울한 감정에 휩싸인다. 로니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제 발로 직원들을 따라 나갔다. 그는 의연한 척 했지만 그와 친했던 앤드류와 작별 악수를 할 때 조금 울었던 것 같다.
.............뇌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들 여기 오면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병원에선 이런 저런 식단을 조절하고 이런 저런 약물을 투여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다니엘 말로는 이런 시설이 영국 전역에 수백개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은 가진 돈을 몽땅 이끼 피부 연구에 쏟아 붓고 있다고 했다. 이 정체 모를 시설이 생긴 지 1년이 다 됐지만 아무 성과도 없는 것 같다.
.............마크는 뇌를 죽지 않게 하려면 운동이 제일이라고 주장했다. 뇌가 죽으면 제일 먼저 영향 받는 게 운동 신경이라고 매일 미친듯이 운동을 하고 있다. 마크는 이곳에 도움되는 피험자인 것 같다. 자기가 직접 나서서 치료법을 찾으려 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마크의 주장에 회의적이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어느날, 어느 새인가, 뒷목에 금속 조각이 심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탈출할 경우 추적해서 도로 잡아 오기 위함일까. 하지만 이곳에서 탈출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두가 이곳이 자신들의 마지막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곳을 나가게 되면 더 이상의 사회는 없는 것이다. 기억도 의식도 없이 야생에 내던져진 야생 동물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에서 퇴출되기 전에 사회가 먼저 없어져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는 사회 붕괴에 관한 소식들 뿐이다. 방송 채널마다 결방 공지가 수시로 뜨고 있다. 이제는 임시 편성 방송이 정규 방송보다 더 많다. 병원 직원들도 자고 일어나면 바뀐다. 업무가 점차 마비돼 가고 있다. 누가 식당에서 똥을 싸도 하루종일 치우질 않아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치운 적도 있다.
.............마리가 나갔다. 마리는 나와 친분이 있었다. 사실 이곳 모든 남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마리는 섹스 중독자였다 – 아마 그런 것 같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왔다는데 정확히 언제 들어온지는 잘 모른다. 마리는 이곳을 좋아했다. 밖에 있을 때보다 여기가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밖에서 그림을 그렸다는데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른다. 마리는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리는 내 방에 왔었다. 한참 동안 자기 이야기를 했다. 마리 부모님도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뒤로 친척 집에서 지냈는데 그 집 아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기숙사가 제공되는 대안 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별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지루해하자 마리는 갑자기 말을 끊고 물었다: 내 이끼 볼래? 마리의 이끼는 가슴에 있었다. 이끼는 평범했지만 가슴이 예뻤다. 초록색 이끼가 가슴을 잔뜩 덮고 있어서 슈퍼 영웅 코믹스에 나오는 여자 빌런 같았다. 가만 보고 있으니 마리가 원래 예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예쁘게 보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여자에 관심이 없었거나. 마리는 그 뒤로도 자주 내 방에 왔다. 기분 내킬 때마다 찾아 왔던 것 같다. 올 때마다 마리는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마리는 항상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들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섹스는 할 때도 있었고 안 할 때도 있었다. 섹스 하지 않고 그냥 둘이 서로 안은 채 잠을 잔 적도 있었다. 마리는 내 똘똘이 만지는 걸 좋아했다. 마리가 내 똘똘이를 만지면 잠이 쏟아졌다. 마리가 어떤 일로 나가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마리의 방은 내 방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병원 직원이 마리의 소지품을 내게 주었다. 직원은 거기 마리의 일기가 있으니 읽어 보라고 했다. 마리는 글을 잘 썼다. 그림도 잘 그렸다. 밖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게 빈 말이 아니었다. 마리는 이곳을 나가기 싫어했다. 이곳에서 나가는 걸 두려워 했다. 마리는 일기에서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병원 직원이 마리의 소지품을 내게 준 거였다. 나도 마리를 좋아했을까? 좋아했으니 섹스를 한 게 아닐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마리가 결혼하자고 했으면 했을 것 같다. 둘이 평범하게 살았을 것 같다. 나는 밖에서 먹을 걸 사오고 마리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마리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고 나는 맥주를 마시며 마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런 삶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잠을 너무 오래 잤다. 병원에서 준 약 때문이었을까? 식당 음식이 새로 준비돼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없다.
.............스펜서가 죽었다. 살해됐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검진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정신을 잃고 폭주하는 걸 막기 위해 이 병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 의미를 잃은 병원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병원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뇌를 잃지 않기 위해 키운 근육이 사람들을 죽이는데 쓰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걸까. 마크는 살인마가 되었다. 마크는 군인들에 의해 죽었다. 병원 사람들이 대피소로 숨은 뒤에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쳐 마크를 죽였다. 대여섯명의 군인이 마크 한명 잡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린 것 같았다. 마크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헐크 같았다고 했다. 사람을 거의 10m 밖으로 내던지는 걸 봤다고 했다. 다 같이 미친걸까. 그런 능력도 증상의 일부일까.
.............병원에 남은 사람은 열명 정도 될까. 수를 세는 것이 의미없다는 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 죽어 사라질지 모른다. 문제는 누구든 제2의 마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병원 직원들도 각자 제 살 길 찾기 바쁘다. 우리는 더 이상 피험자가 아니다. 지금까지 병원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각자 알아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다. 시각 청각 후각 모두 날카로워졌다. 작은 불빛 소리 냄새에 쉽게 잠에서 꺤다. 매일 잠을 뒤척이고 있다. 잠깐 잠이 들면 여지없이 꿈을 꾼다. 엄마가 하얀색 옷을 입고 꿈에 나왔다. 엄마를 얼싸 안고 오래 울었다. 엄마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똥 냄새가 난다. 증상 발현자를 찾아야 하는데 병원 직원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니엘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이곳에 제일 오래 된 사람은 브룩스다. 그는 노숙자에 무기력증 환자다. 나이도 많다. 기대할 게 없는 사람이다. 똥 냄새보다 무서운 건 시체 썩는 냄새다. 똥 냄새 사이 시체 썩는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정말 시체가 있는 걸까 환각일까. 후각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잠을 더 편히 잘 것 같다. 사람은 왜 이렇게 냄새가 나는 걸까. 이런 게 꼭 필요한 걸까.
.............이곳에 유일한 유색 인종은 파텔이다. 인도계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증상을 보여 자기 혼자 여기 들어왔다고 했다. 파텔은 목에서 얼굴까지 파란색 이끼로 뒤덮여 있다. 그는 증상이 나타나면 자결을 하기 위해 방에 흉기를 두고 있다. 하지만 흉기를 과연 자신에게 사용할까. 마크처럼 다른 사람에게 쓰는 건 아닐까.
.............남아 있는 병원 직원들과 증상자를 감금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구속복을 입히는 건 전문적 영역이라 쉽지 않다. 감금실에 가두는 방법이 제일 안전할 것 같은데 똥을 한번 잘못 쌌다고 감금실에 순순히 들어갈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감금실에 들어가면 그곳 관리는 누가 해야 할까. 거기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들어가려고 할까.
.............열 명의 인디언 인형 중 제일 먼저 증상이 나타난 사람은 병원 직원 티모시였다. 동료 직원 헤디를 덮치다가 사람들에게 제압됐다. 그는 사타구니에 이끼가 난 걸 감추고 있었다. 병원은 처음부터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는 격리되어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남자들도 헤디를 노리고 있다는 걸. 티모시는 병원 밖으로 쫓겨 났다. 헤디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은데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밖은 여기보다 더 위험하다고 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넘었다. 사형수의 딜레마. 불안감이 깊어졌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황급히 아랫도리를 확인한다. 혹시 증상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증상 여부를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왜냐하면 안 하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안 하던 행동을 간절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리 생각이 났다. 마리를 강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똘똘이가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하는 것 같다. 마리 소지품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마리는 지금 어디 있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벽에 오줌을 싸고 있었다. 다행히 방 안이었다. 오줌을 치웠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얼까. 하지만 이제 20살도 안 된 놈에게 버킷리스트가 있을까.
.............이 병이 무서운 까닭은 나 혼자 망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 명만 망가져도 모두 같이 망가진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칠 기세다. 병원 직원들이 그리웠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이곳은 조만간 무너질 것이다.
.............브룩스와 제이콥이 나갔다. 증상이 나타났고 자신들도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갔다. 증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분이 좋은 사람들은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다. 무서운 사람, 우울한 사람은 증상이 없는 사람들이다. 벽에 오줌을 싸기 전까지는 나도 무섭고 우울했다. 꿈을 꾸며 자주 울었다. 그런데 벽에 오줌을 싸고 난 뒤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우울증이 사라졌다. 이유없이 즐겁다. 자꾸 뭔가 하고 싶어졌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이제 6명만 남았다. 증상은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나는 분명 증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아직 기억력도 정상이고 수도쿠 퍼즐도 풀 수 있다. 일기를 쓰고 있기 때문일까? 일기를 쓰는 것이 증상 진전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파텔이 죽었다. 자신의 수술용 칼에 찔려 죽었다. 자살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등을 찔렸기 때문이다. 증상이 나타난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누군가 파텔을 의심한 것이다. 조만간 흉기를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혹시 재미로 죽인 것일까. 칼로 사람을 찔러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안 하던 짓을 해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혹시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일까.
.............이제 내가 이곳 가장 오래 된 사람이다. 한 명이 더 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시체를 밖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누구였더라.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체를 끌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시체를 밖에 두면 누군가 와서 시체를 먹는다고 했다. 썩은 시체는 먹지 않으니 반드시 시체가 썩기 전에 밖에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다. 뇌가 녹고 있다. 신디가 눈치 챈 것 같다.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남자들은 모두 죽거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왜 아직 여기 있는 걸까.
.............아직도 전기와 물이 들어오고 있다. 밖에 사람들 다 죽은 건 아닐까. 사람이 사람을 사냥하는 세상이다. 왜 전기와 물은 계속 되고 있는 걸까.
.............여자 2명 남자 한명.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신디가 하라고 하는 것만 하고 있다. 그 외 시간엔 아무데나 쓰러져 자고 있다. 자지 않으려 해도 계속 잠이 쏟아진다.
.............신디가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자기가 찍은 동영상이라고 했다. 동영상에 내가 있었다. 철봉 위에 새처럼 앉아 있다. 전선 위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일어난다. 한발로 균형을 잡는다.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처럼 펄쩍 뛰어 철봉을 잡는다. 한바퀴 빙글 돌더니 착지를 한다. 이게 나일리 없다고 아무리 눈 씻고 봐도 내가 맞았다. 나는 이런 걸 할 줄도 모르고 이런 걸 한 기억도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신디에게 혹시 내가 사람을 죽였는지 물어 보았다. 신디는 아니라고 했다. 그럼 혹시 내가 똥을 싼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똥을 싼 적은 있다고 했다. 왜 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신디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 웃었다.
.............잠에서 깨보니 방 안이다. 영화관에서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 있었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나지 않는 시간이 늘고 있다. 기억 나지 않은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신디에게 물어 보기 무섭다. 신디가 나를 피하는 것 같다. 나머지 여자 한 명은 어디 있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커츠 대령이 물었다. 진정한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냐고.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 커츠 대령은 말라리아에 걸렸다. 말라리아도 혹시 같은 병 아닐까. 그도 뇌가 녹았던 건 아닐까. 왜냐하면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진정한 자유란 술에 취한 상태일까. 알코올 중독자들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일까.
.............신디는 최후의 문명이다. 마지막 남은 인간 양심이다. 나는 정말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까.
.............꿈. 물 속이다. 물고기 없는 망망대해. 둥둥 떠 있다. 발 아래 물이 깊다. 무섭지 않다. 햇살이 비친다. 물 속에서 숨 쉰다. 물이 두렵지 않다. 물 속을 걷는다. 바다가 넓어졌다. 바다가 커졌다. 나는 새까만 점이 되었다.
.............신디 무섭지 않다. 신디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가치 판단으로 패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