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도 있을까.
모리스가 말했다. 준과의 관계는 처음은 실수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또 일을 저질렀다. “내가 일방적으로 유혹한 것”이라는 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모리스는 준에게 빠져 있었다. 준이 먼저 모리스를 도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두번째 관계에서 모리스가 고백했다. 캐런에게, 네 엄마에게,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꼈다고. 욕구를 중단하기 위해 별 짓을 다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캐런이 집을 떠나 버린 뒤에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뒤에도, 그래도 여전히 캐런에게 욕구를 느꼈다고 했다.
캐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리스는 얼굴에 뼈가 녹아 내리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것처럼 온 몸이 산채로 녹아 내리는 느낌이었다고. 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도 그만 두고 가장의 책임도 그만 두고 싶었다고.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 몰랐다고 했다.
…그때 깨달았지. 인간의 몸은 머리로 어쩌지 못한다는 걸. 인간에겐, 어떤 인간에겐, 유전자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 있을 모른다고 생각했어.
전부 더러운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현실이었다. 변명도 정당화도 아닌, 모리스의 생물학적 진실이었다. 모리스는 준을 캐런의 분신으로 여겼다. 아마도 같은 냄새가 났을 것이다. 캐런과 동일한 말투와 행동, 그리고 동일한 눈동자를 준에게서 보고 불가항력적 성욕을 느꼈을 것이다.
모리스가 이해하지 못한 건 준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가였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어떤 남자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가 왜 하필, 그 많은 남자들 중, 가족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준은 모리스에게 성적 거부감을 느껴야 했다. 그게 근친 교배를 막기 위한 자연의 섭리다. 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준은 분명 제임스에 대해선 근친 교배에 기인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데 왜 모리스에겐 없었을까?
여자는 남자보다 냄새에 대한 호불호가 강해야 한다. 아이를 낳기 때문이다. 장애아 출산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과 상반된 유전자와 번식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냄새가 나는 남자, 자신과 유전적으로 가장 상이한 남자와 번식하는 것이다. 준은 모리스의 냄새로부터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준은 모리스의 냄새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간의 관점에서 준의 선택은 무분별한 것이었다. 하지만 준의 관점에선 그렇지 않았다. 준의 선택은, 비록 최선은 아니었을지라도, 생물학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모리스는 가족들에게 집 지하실에 지하 피난로 설명하고 있었다. 소니 할아버지가 70년 전 만들어 놓은 지하 갱도였다. 전쟁은 다시 일어날 것이니, 전쟁이 나면, 그러니까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곳에 숨어야 한다고. 이곳에 숨으면 안전하다고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피난로는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이곳에서 몇달 동안 생존할 수 있도록 환풍구와, 화장실과, 금속 용기에 밀폐된 물과 식량이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갱도로 더 가면 리즈 가문이 소유한 다른 땅이 나온다고 하는데 모리스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가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거든. 지하수가 터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았고 그냥 지었어. 가족들이랑 군대 동료들이랑 같이. 몰래.
소니 할아버지의 동료 중에는 토목 전문가가 있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아마추어가 모르고 지었다기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난처로만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치밀하게 지은 지하 공간이었다.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 전기와 물도 쓸 수 있었다. 준은 이곳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준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곳은 우리 가족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야. 제임스와 트리시는 와 본 적이 있지만 준은 처음이지? 절대로 이곳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외부 사람들에게 이곳에 대해 언급하면 안 돼.
준은 트리시의 표정이 흐려지는 걸 보았다. 트리시는 아마 밖에서 누군가에게 이 곳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지금 와 보니 세상의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소니 할아버지 뿐이었던 걸까.
모리스는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준의 말을 100% 이해했다. 모리스는 준에게 다시 성적 접근을 기대하지도, 과거의 일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모리스는 분명 트리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모리스는 그것조차 없는 일로 간주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이니까.
준이 모리스를 사랑한 이유였다. 모리스는 맺고 끊길 잘했다. 어떤 경우에도 과도하거나 지나치지 않았다. 엄마가 모리스에게 키스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준은 엄마답다고 생각했다. 모리스는, 준의 관점에서, 지금껏 본 남자들 중, 가장 매력적인 남자였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감이었다.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엄마가 모리스에게 키스한 건 그런 의미였을지 모른다.
모리스는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또 다시 준에게 열병을 앓겠지만 그건 참고 외면해야 할 일이다. 모리스는 제임스가 걱정이었다. 제임스에게 가장의 절제력에 대해 그렇게 훈계를 늘어 놓고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두려운 건 제임스가 준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모리스는 제임스가 준에게 강한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와, 근친 관계였다는 사실을 제임스가 안다면, 어떤 정신적 타격을 받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병원은 사실상 업무가 마비된 상태였다. 정신과 입원실은 이미 수용 인원의 15배가 예약돼 있으며, 의사와 간호사들 중에도 “환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모리스는 곧 사회가 무너질 것이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지금은 아직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관성적 학습 효과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 것이다. 만에 하나, 정말로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더 이상 지금의 불확실성을 인내할 수 없을 경우,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모리스는 준으로부터 트리시의 상태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들었다. 피부 지의류 병원체의 기원은 아버지 정성주의 연구소일 가능성이 높으며, 현재 아버지의 파일에 있는 정보로 치료약을 개발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준은 휴학 상태다. 트리시를 치료하기 전에는 학교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모리스도 곧 병원장직을 사임할 생각이다. 가족이 우선이지 그깟 사업장이 먼저일 수는 없다.
모리스는 그때 그 정보부 요원들의 방문을 다시 받았다. 그들은 지금의 증상이 꽃가루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꽃가루를 만든 꽃은 펨브록셔 해안에서 처음 발생해 내륙으로 이동했으며, 편서풍을 타고 날아왔다는 가설도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도 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만간 준의 소지품을 검사할 것이다. 모리스 집에 대한 압수 수색을 벌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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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출신 29세 여자 쉬징. 패혈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환 발생… 감염 6개월만에 뇌의 부피가 70% 이상 줄어 들었고, 대뇌의 거의 모든 사고/인지 기능 소멸. 생명 유지 기능엔 변화 없음. 호흡, 섭취, 소화, 배변 기능 정상 작동. 곰팡이는 숙주를 사망에 이르게 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임. 숙주가 다시 살아나 예전처럼 활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임.
아버지의 파일을 전자 문서로 옮기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고집대로 종이 문서로 보관했다면, 준은 아버지의 파일을 여기까지 들고 오지도, 찾아야 할 문서를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게 준이 아버지의 과학에 기여한 유일한 공헌이었을까.
이끼 피부의 기원은 중국의 어느 패혈증 환자였다. 30년 전 일이었다. 그 후로 20년 뒤 아버지는 아일랜드의 어느 면역 결핍증 환자로부터 같은 기원을 찾는다. “Irish, caucasian, female, 98年生, 43kg”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암호화 돼 있었다. 브로디 버크는 암호를 푼 것이다.
암호는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걸 푸는 건 그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연구 결과를 어떻게 응용했느냐는 것이었다. 아일랜드 여성의 사례는 수백억분의 일 확률로 발생한 우연이었다. 이걸, 의도적으로, 필연으로 만드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준은 이것이 자신에게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은 지의류가 식물과 어떻게 다른지도 몰랐다. 어떻게 다른 생명체가 자랄 수 없는 곳에서 지의류가 자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균류와 공생 관계 - 그건 그저 물리적 설명일 뿐이다. 그게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이런 불가능한 결과를 가능케 하는 것일까.
준은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냄새로 보는 세상은 상대적 우월감을 보장해주었다. 남이 모르는 걸 안다는, 세상만물의 본질을 안다는 선민의식. 하지만 환상이었다. 냄새는 그저 냄새일 뿐이었다. 세상을 전부 알기엔 어림 없었다.
곰팡이는 지의류와 공생하던 균류의 자손일 것이다. 그때의 형질을 인간의 몸에 갖고 와 인간의 몸에도 지의류를 자라게 한 것이다. 지난 2억년 동안 해왔던대로 곰팡이는 지의류부터 양분을 얻고자 했지만 실제 양분을 취한 쪽은 인간이었다.
특이점은 곰팡이가 인간을 숙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동물을 숙주로 삼는 곰팡이는 동물을 번식의 도구로 사용한다. 숙주는 일회성 소모품이다. 하지만 이 곰팡이는 인간을 번식의 도구로 여기지도, 일회성 소모품으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이 곰팡이는 꽃가루로 번식하며, 인간을 공생 파트너로 삼는다. 곰팡이는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인간을 살린다. 인간이 죽지 않도록 방어한다. 다만 뇌를 먹을 뿐이다.
모리스는 곰팡이가 진심인 것 같다고 했다. 인간의 뇌를 먹기 시작한 곰팡이는 인간의 생존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더 이상 해당 부위를 먹지 않았다. 곰팡이가 뇌에 침투한 감염자들 대부분은 초기에 운동 신경 장애를 겪는다. 하지만 운동 장애로 부상을 입고 생존에 위협을 겪으면 더 이상 운동 기능이 퇴화되지 않는다. 반대로 퇴화됐던 운동 기능이 회복된다. 곰팡이는 자신의 감염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곰팡이의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곰팡이가 백인에게만 감염된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인도와 아랍계도 감염되고 있으나 백인 감염률의 절반에 그친다. 흑인과 황인종에겐 아직 발생 사례가 없다. 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백인도 흑인도 동양인도 동일한 면역 체계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같은 종이다. 이 곰팡이는 어떻게 감염 대상을 차별하는 것일까?
아버지의 파일에 기록된 인종차별적 감염은 힌트였다. 예방적 차원에서 이럴 가능성이 있다는 언급이었지 어떻게 하면 된다는 제조법은 아니었다. 브로디 버크는 아버지의 이론적 가능성을 현실화 한 것이다.
준은 브로디 버크를 찾아갈 생각을 했다. 지금 당장 아일랜드로 날아갈 비행기 편이 있는지 알아 보았다. 아일랜드 행 모든 비행기 편은 매진 혹은 결항이었다. 배 편 역시 모두 매진이거나 운행 중지였다. 영국 사는 사람이 지금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면 자가용 비행기를 타거나 쪽배를 타고 노 저어 가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치료법이 있을까? 그가 설령 자신과 트리시를 위해 기꺼이 치료법을 내어줄 의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정말 존재할까? 준이 올리의 어머니를 보고 절망했던 까닭은 이것이 복구 불가능한 병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 증상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론적으로 이건 질병이 아니다. 감염으로 고통을 받는 쪽은 감염되지 않은 정상인들이지 감염된 사람들이 아니다. 감염자들은 고통받지 않는다. 이들은 아픔도 슬픔도 절망도 겪지 않는다. 단지 사고 능력을 잃을 뿐이다. 다른 종류의 동물이 되는 것이다. 고통도 기쁨도 느끼지 않는 새로운 동물로 태어나는 것이다.
…혹시 사랑이 아닐까.
모리스는 곰팡이가 사랑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상대를 정복하고 남용하고 수탈하는 게 아니라 진심인 것 같다고 했다. 모리스도 이것이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병이 병이 되는 이유는 관계가 일방적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빼앗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모든 것이 동등하게 공유된다. 동등하게 공유된 자원으로 서로가 서로를 보호한다. 완벽한 공생 관계를 맺는다.
혹시 곰팡이가 뇌를 먹는 것도 그런 이유일까? 몸의 다른 장기는 손상될 경우 심각한 고통을 유발한다 - 생존에 치명적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뇌는 아니다. 뇌는 손상되거나 사라져도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 운동 기능에만 문제가 없다면 생존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부위는 놓아 두고 뇌를 먹은 것일까?
아니면 혹시, 뇌가 인간 생존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일까? 대자연의 원시적 관점에서, 인간의 뇌는, 굳이 필요치 않다고 본 것일까?
준은 브로디 버크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어떤 세상을 연구했기에 이런 결과물을 만든 것인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직접 배운 것도 아니고, 단지 그걸 참고해서 여기까지 왔다니. 준은 지금껏 외면했던 본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준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세상은 준이 원하는대로 살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아버지는 인간의 운명은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예측한 인간의 운명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