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시는 꿈을 꾸었다. 새 집으로 이사 간 꿈이었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디자인된 모던한 집이었다. 천장이 낮긴 했지만 모든 것이 신식이었다. 집에는 빈 공간이 많았다. 빈 공간마다 누군가의 짐이 들어 차 있었다. 전에 살던 사람의 짐이었을까. 하지만 트리시는 상관 없었다. 이 넓은 집을 혼자 쓰게 되었다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기분이 좋아 집을 여러 번 돌았다. 뒷문을 열고 나갔다. 푸른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전망 좋은 집. 트리시는 이 집이 자신이 꿈꾸던 집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지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애타게 트리시를 불렀다. 준 언니일까? 트리시는 꿈에서 깼다.
트리시가 피부에 얼룩을 발견한 것은 꿈을 꾸고 난 뒤였다. 아침에 일어나 팔 안 쪽이 가려워 긁었더니 이끼가 나 있었다. 온라인에 올라온 이끼 피부 이야기는 전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때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지만 이제는 그 불이 자신에게 옮겨 붙었다.
그때 인터넷에서 본 수기들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끼 피부를 갖게 된 사람들은 “태몽”을 꾸게 된다고.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태몽을 꾸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성폭력 피해 상담사로 일하던 어떤 여자의 태몽이었다. 남자들을 강간하는 꿈이었다고 했다. 남자들을 강간한 뒤에 그들의 생식기를 자르고 목졸라 살해하는 꿈이었다고. 아마도 수십명을 그렇게 죽인 것 같은데 깨어 보니 목에 붉은색 이끼가 자라 있었다고.
대부분의 태몽이 그랬다. 폭력적이고 잔인했다. 황당하거나 끔찍하거나 충격적이거나 - 평소 꾸지 않았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꿈들이었다. 트리시처럼 평범한, 평화로운 태몽을 꾼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꿈을 꿨다고 안전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무서운 사건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이끼 피부 보유자들은 특별 관리 대상이다. 뭐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앰버로부터 하루 최고 매출을 2배 갱신했다는 축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당연한 결과다. 인플루언서 리뷰가 좋았으니까. 애초에 그들 취향에 맞는 제품으로 디자인한 것이 주효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을지 모른다. 트리시의 사업은 원래 잘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지 몰랐다. 어제까지 하루 매출 등락에 정신없이 일희일비 하던 트리시는 무관심해졌다. 지금 당장 내 목숨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에 그깟 하루 매출이 신경 쓰일 리 없었다.
트리시는 준 언니에겐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언니를 너무 괴롭힌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언니에게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아빠는 요즘 나만큼 바쁠 것이다. 모두가 병원으로 달려 왔을 테니까. 아빠가 유능한 의사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빠라면 분명 치료약을 개발해 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자신의 딸에겐 분명 그렇게 해줄 것이다.
트리시는 문득 자신의 이름이 원래 캐런 리즈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절한 그의 고모 캐런 리즈를 기리기 위해 가족들이 캐런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아빠의 반대로 트리시로 바뀌었다고 했다.
트리시는 어릴 때 아빠가 자신에게 냉랭했던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친절하고 다정한데 자신에게만 냉정했다. 트리시는 어릴 때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아빠가 서재에 앉아 있을 때마다 달려 가 무릎 위에 앉으면 아빠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아빠는 한번도 어린 트리시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트리시가 가까이 있으면 자리를 피해 버렸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트리시는 엄마의 기억이 없었다. 엄마는 트리시를 낳고 몇 달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고 했다. 제임스는 엄마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트리시 너에겐 다정하지 않았겠지만 모두를 좋아하는, 모두가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아빠는 달랐을까. 딸을 외롭게 만들지 않는 다정한 아빠였을까.
트리시는 이 모든 것이 모리스의 캐런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모리스는 캐런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딸에 캐런의 이름을 붙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모리스는 자신이 캐런에게 욕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조크처럼 웃어 넘길 수 없었다. 모리스는 트리시의 생김새가 캐런을 닮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저러다 성격도 닮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모리스는 트리시의 뇌가 캐런과 정반대로 자란 것에 내심 안도했다. 그게 낫기 때문이다. 집에 또 다른 캐런이 존재해선 안 될 일이었다.
트리시는 그날 밤 늦게 아빠 방에 갔다. 아무도 몰라야 했다. 자신의 이끼 피부는 아빠만 알아야 할 비밀이었다. 트리시가 몰랐던 건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빠의 방에는 불이 커져 있었다. 과중한 업무로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빠는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 밤을 샌 적도 있었고, 넥타이만 풀어 놓은 채 침대 아래 누워 있다 아침에 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아빠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
트리시는 귀가 밝았다. 아빠의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준 언니 목소리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었다. 준 언니는 아빠와 특별한 관계였다. 성적 관계를 맺는 사이였다.
트리시는 자기도 모르게 집 밖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멀어 버린 듯, 장님처럼 정신없이 걸었다. 혹시 다른 사람 아니었을까? 준 언니 목소리랑 비슷한 다른 여자 아니었을까? 울음이 쏟아졌다. 트리시의 머리는 필사적으로 준 언니일 리가 없다고 부정했지만 그의 본능은 알고 있었다. 그건 준 언니였다. 아빠와, 한밤중에, 부부 사이인 것처럼, 함께 있었던 사람, 준 언니였다.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 밀려 왔다. 내게 냉정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준 같은 여자가 좋아서? 트리시는 서러웠다. 딸에게 주었어야 할 사랑을 엉뚱한 사람에게 주고 있었다니.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어떻게 자기 여동생 딸에게 그럴 수 있어!
준은 모리스의 방에서 트리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트리시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트리시 때문에 앞으론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순간 준은 문 밖에 트리시의 냄새를 맡았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 했다. 모리스에게 이제 가 보겠다며 손을 쥐어 주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트리시의 냄새를 맡았다. 트리시의 냄새를 따라 갔다.
트리시는 정원에 혼자 서서 미친 사람처럼 흐느껴 울고 있었다. 준은 트리시의 등 뒤로 다가가 조용히 트리시를 불렀다. 트리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트리시는 뒤돌아서 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침이 준의 오른쪽 입가에 맞았다. 트리시는 더 크게 울었다. 그리고 손목으로 준의 입에 묻은 침을 닦아 주었다. 준은 트리시를 안았다.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트리시와 준은 정원 풀밭에 누워 있었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정원 꽃밭에 누워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정원은 매주 하워드 아저씨가 와서 관리한다. 아저씨는 고양이에게 해로운 꽃이 있으니 고양이를 키워선 안 된다고 했다. 사람에게 해로운 꽃도 있어요? 물어 봤지만 사람에게 해로운 꽃은 없다고 했다. 하워드 아저씨는 지금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준은 트리시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 이야기, 엄마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 준은 트리시에게 약속했다. 이끼 피부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자신이 꼭 낫게 해줄 거라고. 준은 모리스를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모리스에게 접근한 것이고, 모리스는 끝까지 관계를 거부했다고 했다. 절대로 트리시 네 아빠를 탓해선 안 된다고 했다.
트리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다. 이 모든 일들이 오늘 하루동안 다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밤에 꾼 꿈이 더 현실 같았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이 다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트리시는 아직도 배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준 언니의 약속도 믿기지 않았다. 준 언니는 정말 내 편일까. 아빠와 결혼하려는 건 아닐까. 나와 결혼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던 걸까. 하지만 준 말고는 달리 믿을 사람이 없었다.
트리시는 자신의 인생이 준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배신감에 화가 나도, 트리시는 지금 감정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았다. 나란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거 잘 알았다. 얇고 가벼운 인간. 팔랑팔랑 종잇장 같은 인간. 트리시는 이런 일을 당하고도 그래도 여전히 준 언니를 좋아한다는 게 제일 화나고 속상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언니에게 꼭 붙어 살 수 밖에 없는 제 자신이 슬프고 처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