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은 린다의 등 위에서 석양을 바라 보고 있었다. 린다와 친해진 주은은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석양이 질 것 같은 날이면 주은은 만사 제치고 일찍 집에 와 린다와 함께 석양을 보았다. 린다가 석양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린다는 낭만을 아는 말이었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미동도 없이 하염없이 가만히 지는 해를 바라 보고 있었다. 주은은 린다 몸에 안장을 올리지 않았다. 린다가 안장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맥기 아저씨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주은은 안장 없이 말을 타는 게 더 좋았다.
린다와 함께 석양을 보고 있으면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와 함께 캄보디아 유적지의 석양 속에서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던 때가 생각 났다. 엄마, 벳시, 린다, 그리고 나. 주은은 린다와 함께 석양을 보며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추억은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은은 린다가 달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석양을 향해, 지는 해를 향해 달리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생각이지만 주은은 그렇게 믿었다.
.............나는 화살. 자멸하는 이슬. 충동과 하나 되어, 붉은 눈, 아침의 용광로 속으로.
엄마가 좋아했던 시인의 마지막 시도 그랬다. 시인은 죽기 전 말을 타는 상상을 했다. 해 뜨기 전 새벽녘, 스스로 목숨을 끊기 몇분 전, 좁다란 부엌 테이블에 앉아, 말을 타고 일출을 향해 달리는 상상을 했다. 그때 정말 말을 탔다면 시인은 죽지 않았을까. 그는 죽기 위해 말을 탔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시 살고 싶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말을 타면 말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니까.
맥기 아저씨는 주은에게 말 달리는 법을 가르쳐줬다. 은퇴한 뒤로 이런 걸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주은은 가볍고 날렵하니까, 운동 신경이 뛰어나니까, 다칠 위험이 적을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말을 사랑하니까, 말들과 쉽게 친해지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안전할 거라고 했다.
맥기 아저씨는 말이 달리고 싶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줬다. 말을 달리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 사람의 뜻에 따르는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다.
말을 강제로 달리게 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말이 사람과 함께 달리고 싶어야 해. 말이 자기 등에 올라탄 인간에게 자기를 내맡기게 하는 거야. 사람이 가자고 하면 가는 거고, 멈추자고 하면 멈추는 거야. 둘이 한 몸인 것처럼.
일종의 최면이야. 네가 말에게 최면을 거는 거지. 그러려면 너도 최면에 빠져야 해. 나는 말의 머리가 되고, 말은 나의 몸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말과 생사를 함께 한다, 나는 말의 인생을 살고, 말은 나의 인생을 산다. 그렇게 믿는 거야. 네가 그렇게 믿으면 말도 그렇게 믿어. 둘이 한 몸이 되는 거야.
주은은 맥기 아저씨에게 물었다. 다시 말을 타고 달리고 싶지 않으시냐고. 왜 요즘엔 승마 안 하시냐고. 맥기 아저씨는 자기는 이제 너무 늙었다고 했다. 말을 달릴 때 느꼈던 희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최선의 직장을 찾은 거야. 젊을 때는 젊음을 불 태울 일을 한 거고, 늙어서는 늙은이가 제일 잘 하는 일을 찾은 거지.
주은은 한때 조안 할머니와 맥기 아저씨의 관계를 의심했다. 할머니가 아저씨와 너무 친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말도 동물도 좋아하지 않는데 맥기 아저씨와는 웬만한 친구 사이보다 가까웠다. 주은이 할머니에게 맥기 아저씨는 왜 결혼을 안 하시냐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은데 왜 혼자 사시냐고 묻자 할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맥기 아저씨가 게이인 걸 아직도 몰랐냐고 의아해했다.
그랬다. 주은의 할아버지 헨리는 맥기 아저씨가 게이라서 집에 들인 거였다. 최소한 여자 가족들과 성적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맥기 아저씨가 집을 비울 때마다 임시 관리인으로 온 이들이 전부 젊고 잘생긴 청년들이었던 이유가 있던 거였다. 트리시는 맥기 아저씨가 집을 비울 때를 기다렸다. 이번엔 어떤 예쁜 남자가 올지 룰루랄라 기대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린다가 정 그렇게 달리고 싶다면 승마장에 데려가는 방법도 있어. 내가 승마장 전화번호랑 주소 알려줄게. 하지만 거기까지 이동하는게 스트레스야. 돈이 드는 건 이 집 사람들 입장에선 문제가 아니지만, 사람과 말이 모두 스트레스 받는 게 문제지.
맥기 아저씨가 준 승마장 목록에는 테오의 집에서 운영하는 승마장도 있었다. 워낙 큰 곳이라 리스트에서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테오 네 집 사람들과 맥기 아저씨는 서로 안면도 있을 것이다. 말을 달리게 하려면 이곳으로 가야 하겠지. 하지만 맥기 아저씨 말을 들어 보니 과연 거기 린다를 데려 가는 것이 좋은 생각일까 망설이게 된다.
나도 젊을 때는 동물들을 자유롭게 풀어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 마구간에 갇혀 있는 말들이 안 됐다고 동정심도 느꼈지. 우리를 열어 놓으면 동물들은 대부분 자유를 찾아 떠나거든. 하지만 그게 정말 본인들에게 이득일까? 자유가 모든 걸 보장해주는 걸까?
나는 준 네가 이런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해. 캐런은 현명한 선택을 한 걸까? 자유를 찾아 떠난 걸 후회하지 않았을까? 자유 대신 안정을 택한 모리스는 어땠을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까?
나도 젊을 때는 캐런 같았어. 그렇게 사는 게 멋있어 보였지. 근데 나이 들고 보니까 그게 아닌 거야. 모리스가 아니었다면 이 집은 어떻게 됐을까? 조안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유를 포기하고 안정을 택한 모리스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이 집의 모두를 살렸어. 린다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해. 나도 린다도 스티븐슨도 언젠가 달리게 하고 싶어. 근데, 지금 와서 보면 그건 그냥 기분인 거야. 지나가 버리고 마는 거야. 스티브는, 굳이 달리지 않았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어. 화려한 인생, 업적을 이룬 인생, 의미있는 인생, 그런 거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인생은 그런 게 아닌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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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의 병원은 임페리얼 칼리지 의대 협력 병원이었다. 의과 4학년들이 실습을 하는 장소로 지정돼 있다. 모리스 병원과의 협력 관계는 30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랜 협력 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 방송국에서 병원장과 인터뷰를 했다. 학교 관계자들이 모리스를 인터뷰하기 위해 모였다.
실습생 자격으로 주은도 함께 왔다. 주은은 카메라 앞에 선 모리스에게 손 하트를 그려 보여주었다. ‘원래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트리시에게 배운 걸 따라 한 것이다. 모리스는 트리시가 애를 이상하게 물들여 놓았다고 속으로 혀를 찼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병원이에요. 1차 대전 끝나고 설립된 병원이잖아요.
예, 1925년에 설립됐으니까요.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고 조부께서 병원을 매입하셨고요.
예.
조부님이 굉장히 유명한 전쟁 영웅이세요. 뉴스에도 나오셨고, 훈장도 한 두개가 아니신데, 어떻게 병원을 매입하게 되신 거죠?
조부님 집이 원래 사업을 해서 돈이 많았는데, 앞으로 계속 전쟁이 있을 거라고, 팔다리 없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 테니 병원 사업을 해야 한다고…
인터뷰 하던 여학생이 푸풋 하고 옷음이 터진다. 웃으면 안 되는데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진 것이다. 모리스의 표정과 말투는 진지한데 말하는 내용은 그렇지 않아서 더 웃긴 것이었다.
저 죄송한데요, 지금 하신 말씀은 오해하실 분들이 있을 거 같아서…
아닙니다. 조부가 실제로 한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의도로 한 말이고요.
모리스는 사람들을 웃길 의도가 없었다. 모리스는 자신의 조부가 어떤 인간인지 사실대로 알리고 싶었다. 모리스는 조안과 캐런의 편이었다. 소니 리즈가 남긴 허울 뿐인 영광 더 이상 기리고 싶지 않았다.
인터뷰어는 방송국 사람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방금 한 말은 편집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뒤로 병원장님 가족들이 전부 저희 학교 의대에 진학해서, 이 병원으로 실습을 나왔다는 거에요.
예. 제 아버지 헨리부터 해서…
병원장님도 저희 선배님이시고,
예, 제 여동생도 그랬고, 오늘 같이 온 조카도…
카메라가 주은을 비추자 남학생들이 환호하며 박수 친다. 주은은 학교의 인기인이다. 주은이 부끄럽다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린다. 그게 귀엽다고 남학생들이 깔깔대고 웃는다.
인터뷰는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서로 공생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는 모리스의 병원이 최근 런던에서 가장 우수한 병원 톱5에 선정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병원장의 능력을 치켜 세웠다. 모리스가 별 필요 없는 의료 장비에 엄청난 비용을 쓴 건 이 때문이었다. 병원 평가에서 상위권을 차지해야 더 많은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대출을 받을 수 있어야 더 많은 투자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더 오래 병원이 번창하기 때문이다.
주은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모리스의 전공이 신경외과였다는 점이었다. 지금껏 모리스는 가족이고, 삼촌이고, 가장일 뿐이었다. 무슨 전공이었는지, 어떤 의사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주은에겐 가족이 밖에서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참고 사항일 뿐이거나, 어쩌면 참고할 필요조차 없는 정보였다.
인터뷰도, 실습도 끝났다. 학생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주은은 모리스와 같이 집에 가기 위해 남았다. 모리스는 주은에게 코코아를 타줬다. 맛있는 코코아라고 자랑했다. 자기와 친한 의사가 이태리에서 사온 거라고 했다.
삼촌은 왜 재혼 안 해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코코아 잘 타서.
처음 여기 왔을 때는 군인처럼 무뚝뚝했던 여자애가 이제는 여자 아이 티가 난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걸까. 확실히 그때보다는 지금이 나은 것 같다. 지금 보니 트리시가 아니라 캐런인 것 같다. 트리시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캐런의 유전자가 작동한 것 같다. 저 표정 억양 화법 모두 캐런을 빼닮았다.
재혼은 왜 안 했을까 그의 지인들 중에는 이혼을 2번 했어도 금방 또 여자를 만나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이혼이든 사별이든, 아내를 잃고 십년 가까이 독수공방 하는 남자는 드물었다. 병원 일이 바빴다면 거짓말이다. 두번 세번 재혼한 지인들 모두 모리스보다 더 바쁘면 바빴지 한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제 여자를 만날 이유가 없지 않나. 애들도 다 키웠고,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정정하시던데요.
‘무슨 말이야 정정하다는 게’ 모리스는 주은이 지금 빈정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너는 남자 친구 없니?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주은이 고개를 젓는다. 주은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관계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주은은 자신이 엄마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남자들과 쉽게 사귀었다. “학교 생활 더 했으면 총장하고도 사귀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엄마의 남자 편력은 전설적이었다. 주은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남자 한명 잠깐 사귀는 것도 극히 신중했다. 어쩌면 남자 사귀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가족들과 관계가 돈독하니까, 트리시와 여보 당신 하는 유사 애인 관계라 더 그런 것인지 몰랐다.
집에 돌아가는 차에서 주은이 재잘재잘 떠든다. 앞으로 2년 안에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데 아직 뭘 할지 정하지 못했다면서 오늘 삼촌이 신경외과라는 말을 듣고 자기도 그걸 선택하기로 했다는 둥 아무 말이나 생각없이 늘어 놓는다.
모리스는 전공에 애착이 없었다. 그는 다시 의술을 행할 생각이 없었다. 의술을 직접 행하는 의사의 삶은 스트레스와 두려움, 고통 뿐이었던 것 같았다. 의사란 직업이 과연 좋은 직업일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모리스는 회의적이었다.
신경외과가 장사는 잘 되는데… 힘들어. 완치되는 경우도 드물고, 온갖 고통 다 받아줘야 하니까.
주은은 아버지의 전공도 신경외과였다고 생각했다. 고통은 신경의 작용이다. 아버지는 신경의 작용을 통제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는 세상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보았다. 아버지의 사명은 고통의 지배였다. 고통의 원인을, 고통을 잠재울 방법을 찾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는 동물의 가장 불완전한 장기는 뇌라고 했다. 고통의 시작과 끝,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면서 동시에 고통을 생성하는 기관.
뇌는 왜 생긴 걸까요?
주은의 질문에 모리스는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른쪽에서 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휴우 가슴을 쓸어내린다. 모리스는 신호가 바뀌는 걸 무시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도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면 멈추기 위해 뇌가 있는 것 아닌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더 오래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뇌는 동물의 움직임을 정교화 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적시적소 필요한 행동을 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하지만 주은은 그런 뻔한 질문을 한 게 아닐 것이다. 뇌의 운동 피질 앞뒤로 붙은 어마어마한 영역을 말한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그 과도하게 비대해진 영역을 뜻한 것이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고통에 대한 과민반응 때문에 뇌가 고통의 원인이 됐다고.
음.
너무 많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너무 정교해진 거죠. 그래서 자기가 고통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거에요. 악당을 잡던 정의의 사도가 악당이 된 것처럼, 악마를 잡던 천사가 악마가 된 것처럼.
일종의 자가 면역 질환이네.
맞아요. 학교에서 교수님도 그랬죠. 자가 면역 질환은 인간 면역 체계가 너무 고도로 발달한 결과라고.
응.
아버지가 그랬어요. 고통이 없는 삶과 뇌가 있는 삶. 둘 중 어느 걸 선택하겠느냐고.
오호.
아버지가 그랬어요. 말기 암 환자 같은 경우 아니면 백이면 백 전부 후자를 선택한다고. 뇌가 존재하는 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100% 뇌가 있는 삶을 선택한다고. 고통이 없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모리스는 주은의 아버지를 지금껏 이상한 사람,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은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달리 생각하게 된다. 그는 어쩌면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무책임한 사람도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골몰했던 사람이었을까? 학문에 파묻혀 사느라 가정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던 걸까?
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주은은 뇌 무용론을 이야기했다. 뇌가 없는 생명들도 생존하고 번영한다, 예술을 하고, 수학을 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은 그걸 답습할 뿐인데 답습하지 못하거나 질적으로 더 저열한 수준에 그친다, 그렇게 볼 때 뇌로 인해 겪는 그 많은 고통들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냐, 의문을 제기했다.
모리스는 차를 집에 주차시켜 놓고 주은과 집 정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4년 전 주은의 입학식 날과 같았다. 해가 일찍 져 날이 어두웠지만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은 그렇게 해석했어. 뇌는 캐릭터를 저장하는 신체 기관이라고.
캐릭터요?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얘기야. 뇌가 없는 개체는 기능만 수행하잖아. 기계처럼. 뇌가 발달할수록 개체는 기계적 특성에서 멀어지고 개체 고유의 개성이 생기는 거지. 사람마다 표정이 다르고 말투가 다르고, 성격과 버릇이 다른 게 뇌가 있어서 그런 거야. 뇌가 각자의 개성을 정교하게 만들어주는 거지. 뇌가 없거나, 덜 발달할수록 각자의 개성은 무뎌지는 거고.
교수님은 인간의 뇌를 “내부화 된 공작새 깃털”이라고 했어. 뇌도, 공작새 깃털도, 둘 다 잉여 자원을 개체의 개성 추구를 위해 쏟아 부은 거야. 둘 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이 필요한 신체 기관이거든. 인간의 뇌가 몇 배 더 많은 자원을 잡아 먹으니까, 공작새 깃털이 럭셔리 세단이라면, 인간의 두뇌는 최첨단 슈퍼카인 셈이지. 개체의 개성을 극대화 하기 위해 그런 낭비와 희생을 감수한 거야.
“뇌는 쾌락을 극대화 하기 위한 장기.” 아버지의 관점과 상통하는 견해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같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같은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일까. 그게 세상의 진리인 걸까.
그런데 나는 그거랑 좀 다르게 생각해.
어떻게요?
얼마 전에 뉴스를 봤는데, 고등학생 아들을 둔 부부였는데, 얘가 자랄수록 자기들이랑 하나도 안 닮은 거야. 그게 이상해서 몰래 조사를 했더니, 자기들 애가 아니었던 거야. 갓난아이 때 병원에서 아이가 바뀐 거지. 자기들이 낳은 아이는 엉뚱한, 가난한 집에 가 있고, 그 가난한 집 애가 자기들 밑에서 자란 거야. 이 부부는 근데, 그 사실을 알고도, 그 아이를 그냥 키웠어. 지금껏 키운대로 계속 키워서 대학 보내고 셋이 잘 살아. 병원에 소송도 하지 않고, 자기들이 낳은 진짜 자식 얼굴도 보지 않고, 그쪽에 절대 알리지도 말라고 하고, 영원히 그렇게 살기로 했대.
기계적 판단을 하자면 애를 바꿔야 되잖아. 자기 유전자를 번성시키는 게 생물의 기계적인 목적이니까. 감정적 판단을 해도 그렇잖아. 내가 낳은 애가 보고 싶을 거 아니야. 가난한 집에 간 것도 안쓰럽고. 하지만 그 부부는 그런 걸 모두 끊어낸 거야. 윤리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구 때문에 지금 와서 아이들에게 못할 짓을 할 수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 때문에.
뇌는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결과였다고 생각해. 인간의 문명은 예측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해왔어. 안정성을 위해 욕구를 억제하고 자유를 속박했어.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안정적인,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 이성적 판단을 한 거지. 뇌가 없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선택이었어.
도덕, 윤리, 질서, 정의 같은 개념도 안정성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생각해. 이런 개념들이 통념으로 자리 잡은 종은 인간 밖에 없어. 인간의 뇌는 예측 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수많은 시도를 해왔어. 범죄, 일탈, 학살, 전쟁은 자연 본능이라고 생각해. 대자연이 심어 놓은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지. 뇌는 그걸 억제하기 위해 발달해 왔어. 예측할 수 없는 불행한 이벤트들을 최소하기 위해 인간의 뇌는 지난 수십만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진화해 왔어. 그게 지금의 인간 문명으로 발전한 거야.
주은은 생각했다. 모리스가 그 부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임스나 트리시가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면. 물론 모리스는 고민 없이 계속 키웠을 것이다. 설사 제임스와 트리시가 모두 장애인이었다고 해도 모리스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이들을 책임졌을 것이다. 자신이 낳은 진짜 아이는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리스의 뇌 이론은 본인의 이야기다. 모리스는 항상성의 인간이다. 예측 가능한 인간. 예측 불가능한 선택은 할 수 없는 인간. 그가 재혼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안정성을 추구하는 본능 때문에. 변수는 선택하지 않으려는 본성 때문에.
엄마는 모리스와 있어야 했다. 모리스의 영향을 받으며, 모리스의 보호 아래 살았어야 했다.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거란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도 모리스를 사랑했으니까. 비록 다른 선택을 했지만, 엄마의 뇌는 모든 걸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날이 추워졌다. 말을 마친 모리스가 몸을 떨고 있다. 주은은 자기도 모르게 모리스의 손을 잡았다. 마주 쥐는 모리스의 손이 차다. 주은 손의 온기에 모리스의 떨림이 잦아든다.
“he likes me, likes me not.” 디즈니 만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꽃잎 점을 보던 장면이 생각난다. 다른 여자들은 저렇겠구나, 남자 마음을 알고 싶어 애간장 태우겠구나. 주은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자의 성적 반응은 냄새로 확인 가능했다. 꽃잎 점은 필요 없었다.
삼촌.
응.
엄마 좋아했죠.
응.
저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