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웰런은 영국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살인 혐의 중범죄자를 소환하지 않는 게 말이 되는 입장인지 화가 치밀었다. “몇 가지 조사 더 해 보고.” 영국 측의 소환 지연 이유였다. 무슨 조사를 한단 말인가? 로리 맥닐리는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 인을 죽였다. 영국에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에 피해를 입힌 것이다. 혹시 그게 아직까지 소환되지 않고 있는 이유인가?
그렉은 조급해졌다. 지난 십수년 동안 끈질기게 쫓아 다닌 사냥감이 코너에 몰려 있다. 아무도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초거대 괴수급 사냥감, “어쩌면 네가 그 놈한테 잡아 먹힐지도 몰라”라고 했던, 모두가 두려워 했던 사냥감. 이제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엉뚱한 놈이 길을 막고 잡아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렉은 최근 검찰의 보고를 받았다. 로리 맥닐리의 암살 조직을 운영하는 자금줄을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런던의 샌드위치 가게였다. 우드포드 주택가에, 장사를 접은 것처럼 보이는, 가게 간판 글자도 희미해 안 보이는, 내부에 박스만 잔뜩 쌓아 둔 가게에, 현금을 쌓아 두고, 지령을 받은 고용인에게 돈을 주고 있었다. 이번엔 영국 검찰의 협조가 있었다.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 압수 수색 집행을 3달이나 미룬 끝에 거둔 성과였다. 자금을 운영하는 주체와 장소, 은행 계좌를 소탕했으니, 로리 맥닐리가 다시 암살 조직을 운영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돈을 받아간 인물들도 검거했으니 실제 암살에 가담한 인물들도 오래지 않아 검거될 것이다.
말하자면 로리 맥닐리는 이빨과 발톱이 뽑힌 신세였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일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다시 범죄 조직을 재건하기 전에 잡아 들여야 한다. 로리 맥닐리에겐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조직들이 아직 남아 있다. 특히 그 정신지배 연구 기지. 그 곳을 빨리 박살내야 한다.
그렉은 로리 맥닐리의 사고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성주의 연구를 왜 생산적인 방향으로 쓰지 않았을까?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쪽을 마다하고 왜 반인륜적 범죄에 활용한 것일까? 정성주의 연구는 원래 다이어트 약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부 잘하는 약 같은 걸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 걸 개발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것 아닌가?
그렉에겐 2명의 자녀가 있었다. 아들은 공부를 잘하는데 비만이었고, 딸은 날씬한데 공부를 못했다. 그렉은 정성주의 약이 간절한 잠재 소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정성주의 연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게 실제 가능하다는 걸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렉은 정성주의 약이 출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누구보다 안타까웠다.
그렉은 이제 그만 퇴근하기로 했다. 이번주까지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국 검찰에서는 더 이상 로리 맥닐리 소환에 협조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렉은 다른 경로를 찾기로 했다. 이번엔 공무원이 아닌 정치인을 알아 봐야 할 것이다. 오라일리 말로는 로리 맥닐리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다고 했다. 영국 정치인 중에 로리 맥닐리와 상호 이익을 공유하는 자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편 정치인과 접촉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쪽 정치적 영향력을 우회할 수 있는 다른 실력자를 찾아야 한다.
더블린의 금요일 밤거리는 축축했다. 가로등 불빛이 뿌연 대기로 인해 연무 효과를 냈다. 어떤 이에겐 시적 감상에 빠지는 분위기일지 몰라도, 그렉 같은 이들에겐 지긋지긋 우울한 날씨다. 아일랜드의 이런 날씨가 아일랜드를 문학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말, 그렉은 정말 듣기 싫었다. 문학 강국이 돼서 뭐가 좋아졌단 말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국민들 삶이 뭐가 나아졌는가? 이런 우울한 날씨로 세계적 시인을 얻는 것보다 밝고 건조한 날씨로 질 좋은 올리브와 포도를 얻는 게 백배 낫다.
빨리 집에 가서 제습기를 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습기를 풀가동해서 집안을 빨리 뽀송뽀송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내는 집안 일에 지나치게 느긋했다. 새로 사준 제습기도 스타일러도 거의 쓰질 않는다. 그냥 생긴대로 살면 안 돼? 아내의 이런 태도에 큰 맘 먹은 가장은 맥 빠진다. 어쩌면 그렉 본인 혼자 조급한 것일지도 몰랐다. 일을 할 때처럼 집안 일에도 조급증을 느끼는 것일지 몰랐다.
뒤에서 누군가 빠르게 접근해 왔다. 충돌할 듯 빠르게 달려 오고 있었다. 재빨리 몸을 피해 뒤돌아 보았다. 젊은 여자였다. 누구지? 하는 순간 여자의 품 안에서 기다란 칼날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왔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그렉은 이 여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훈련 받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칼을 저렇게 다루는 경우는 없다. 아주 오래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칼을 저렇게 휘두르지 못한다. 로리의 마지막 남은 축구 선수일까? 하지만 로리의 축구 선수 중에 여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렉은 재빨리 가까운 빌딩 안으로 뛰어 들었다. 칼을 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선 칼에 대응할 도구가 필요하다. 의자, 액자, 가죽 제품...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소화기다. 소화기는 사용이 불편하지만 법적으로 어디나 의무 구비돼 있다.
빌딩 1층 복도 끝에 소화기가 있었다. 그렉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상대가 가까이 따라 붙게 했다. 재빨리 소화기 손잡이를 쥐고 미끌어지듯 스윙, 여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퍽 소리와 함꼐 여자가 바닥에 개구리처럼 납작 쓰러진다. 그렉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경찰을 부른다.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중 그렉은 깨달았다. 여자가 로리의 축구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자는 일어서 있었다. 머리가 깨져 있었다.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죽지 않았다. 움직임의 변화가 없었다. 시선이 그렉에게,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처럼, 꽂혀 있었다. 여자는 실험체였다. 정신 지배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오라일리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정성주의 정신 지배는 뇌를 지배하는 게 아닙니다. 몸뚱이를 지배하는 겁니다. 척추 신경계를 지배하는 것이지 뇌를 지배하는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몸이 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뇌를 제거해도, 어쩌면 머리가 파괴되거나 통째로 날아가도, 정신지배 결과물은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다시 칼날이 날아 든다. 소화기로 방어하지만 그렉은 코너에 몰려 있었다. 그렉의 팔에 칼날이 꽂혔다. 팔을 내주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렉은 팔의 조직이 찢기는 걸 무시하고 복도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여자는 빨랐다. 아까는 고의적으로 천천히 따라 온 거였다. 사냥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을까. 특수 근육으로 다져진 남자의 움직임조차 우습게 보일 정도로 여자는 초인적 스피드로 그렉의 등 뒤에 순간이동 하듯 가까이 따라 붙었다. 그렉은 찰나의 순간 깊은 절망과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지금껏 알파로 살았다. 지금껏 한번도 누군가에게 밀리거나 꿀리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인간의 운동 능력의 한계는 뇌에서 비롯됩니다. 몸이 망가지는 걸 막기 위해, 부상을 회피하기 위해, 뇌는 몸에 끊임없이 명령을 내립니다 - 하지 말라, 그만두라, 위험하다. 뇌의 지배를 받는 몸은 위축되고 원래 능력이 제한됩니다.
…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순간 몸은 자유로워지죠. 능력이 극대화 되는 겁니다. 뇌에 지배에서 벗어나는 순간 몸은 모든 족쇄에서 풀립니다. 정성주의 정신지배 연구의 무서운 점입니다. 맥닐리 측에선 이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겁니다.
여자의 칼날이 그렉의 뒷목을 뚫었다. 실험체는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칼을 어디에 어떻게 꽂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렉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죽었다.
경찰차가 요란한 소음과 함께 달려 왔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경찰차의 사이렌 음향을 감지한다. 품 안에서 작은 캔을 꺼낸다. 머리 위에 캔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붓는다. 불을 붙인다. 펑하는 화염과 함께 몸이 불길에 휩싸인다. 여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자리에 선 채로, 미동도 없이, 화염이 몸을 지탱하는 근육을 완전히 태워 없앨 때까지, 성냥개비처럼 불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