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월시는 꿈을 꾸었다.
시골 오두막이었다. 오랜만에 꾼 틀림없이 꾸는 꿈. 대런의 꿈에는 언제나 시골 오두막이 나왔다. 평생 도시의 시궁창을 전전한 대런은 시골 오두막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꿈에는 언제나 시골 오두막이 나왔다. TV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런은 인생의 암흑기에 항상 시골 오두막 꿈을 꾸었다. 브로디의 회사에 취직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이 된 뒤로 시골 오두막은 한동안 꿈에 나오지 않았다.
하얗게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겨울이었다. 오두막엔 불이 피워져 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오두막에 사람이 있었다. 브로디였다. 브로디가 식탁에 앉아 감자와 빨간 채소를 먹고 있었다. 새빨간 양념으로 범벅된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는 채소였다. 감자와 채소를 입에 잔뜩 넣은 브로디가 음식물으 ㄹ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자네 아버지를 찾았어.
왜지. 어째서. 대런은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보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당연히 아버지는 더더욱 그랬다. 어디선가 고기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두막 지하에서 고기 썩는 냄새가 올라 오는 것 같았다. 대런은 지하로 내려가 냄새를 찾았다.
무덤이 있었다. 생몰년도가 적혀 있지 않은, 길에서 죽은 동물을 파묻은 것 같은, 대충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비석에는 브로디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지? 브로디는 위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데?
깨어 보니 새벽 5시였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대런은 오늘이 토요일이란 사실이 더 기분 나빴다. 토요일에는 할 일이 없었다. 늦게까지 자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클럽이나 격투기 노름판에 가서 술 퍼먹는 것이 전부였다. 대런은 쉬는 날보다 출근하는 날이 더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어딘가 갈 데가 있다는 것, 해야 할 일을 부여받는다는 것, 대런에겐 축복이었다. 대런의 직속 상관은 브로디였고, 그에게서만 업무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서 했다. 사내 “잡역부”를 자처하며 벌레를 잡고, 변기를 고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고, 회사에 처들어온 진상 고객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대런 월시가 뭐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버크 오거닉스에 오래 근무한 임원들 뿐이었다. 이들은 직원들이 대런 월시에 대해 물어 볼 때마다 정확히 이야기해줬다. 사장님 보디가드라고. 하지만 대런은 어떻게 봐도 보디가드처럼 보이지 않았다. 키도 작고 왜소한 대런은 보디가드가 아니라 보디가드를 고용해야 할 사람처럼 생겼다. 직원들은 대런 월시의 보직을 자기들 멋대로 상상하곤 했다. 다른 회사에 몰래 잠입해 기밀을 빼내는 산업 스파이 같은 것이 아닐까 자기들끼리 그렇게 결론 내렸다.
대런은 지금의 안락한 삶이 생소했다. 긴장과 불안이 지배하던 삶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이상했던 인생.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던 인생. 그에게 사회란 없었다. 그에겐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친구도 없었다. 그에겐 생존 본능 뿐이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매일 뭔가를 배달해야 했다. 매일 뭔가를 배달하기 위해 뭔가를,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했다. “피묻은 DHL” - 대런의 고객 중 한 명이 했던 농담이었다.
그때가 불과 며칠 전 같은데 이제는 아침에 출근 버스를 놓치는 것이 유일한 불안이다. 20년 동안 뒷골목 야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출퇴근을 하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나 같은 사람을 아무 검증 없이 채용한 브로디는 제 정신이었을까.
대런은 사회에 소속감을 느꼈다. 사회의 적이었던 그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야생에 살던 들개도 경우에 따라 쉽게 길들여지는 법이다. 하지만 대런은 여전히 혼자였다. 가족을 이루기 위해, 여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 대런은 많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한번은 스토킹으로, 다른 한번은 성추행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다. 두번 모두 브로디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다시 감방 구경을 할 뻔 했다.
여자들은 대런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대런은 여자들에게 호감 사는 외모가 아니었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외모에 반감이 없는 여자도 그와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반감을 느꼈다. 그의 표정 말투 시선 모든 것이 여자들 비위를 거슬렸다. 에이바는 대런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대런은 사람을 볼 때 사냥감을 보는 것 같다고.
꼭 쥐가 된 기분이에요. 매한테 사냥 당하는 기분?
브로디는 대런을 흘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대런은 에이바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움직임을 읽는 버릇이 너무 깊숙히 뿌리 내린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러고 있으니 상대방 입장에선 거부감이 드는 거였다.
대런은 클럽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클럽에서 사람을 기분 나쁘게 쳐다 봤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었다. 대런은 바운서에게 잡혀 나가면서 이번엔 바운서와 시비가 붙었다. 바운서는 대런에게 사적 감정이 있었는지 대런의 몸을 거칠게 밀었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도발한 대런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무릎이 꺾이고 바닥에 드러눕는 굴욕을 당했다. 대런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이걸 본 다른 바운서가 대런에게 또 달려 들었다는 거였다. 대런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게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었다. 바운서 혼자 제풀에 나자빠진 거였다. 다른 바운서는,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든 게 아니라, “나라면 저 놈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달려든 거였다. 대런은 왜 싸움 경험이 없는 놈들이 더 그렇게 성급하게 주먹을 휘두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왜 싸움을 못하는 놈들이 더 그렇게 승부욕에 불타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 있으면 모두가 무사할 것을, 왜 남자들은 그렇게 죽을 짓을 골라 하는지, 왜 수명을 재촉하는 짓을 반복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운서들과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런은 클럽에 출입 금지되었다. 다시 한번 클럽에 출입하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대런은 그날 처음 여자를 만났다. 그동안 대런이 만난 여자는 성매매 여성들 밖에 없었는데 이날 처음 사적 관계의 여자를 만난 것이었다. 클럽에서 자주 보던 여자였다. 한번 시선이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여자는 대런을 보고 웃어 주었다. 아는 사이였을까? 대런이 나중에 물어봤는데 그때부터 호감이 있었다고 했다. 그날 대런이 바운서들의 부당한 행동을 제압하는 걸 보고 사귀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여자의 이름은 리사였다. 몸에 문신과 피어싱이 있었다. 예쁘고 날씬한 여자였다. 클럽에서 많은 남자들이 눈독 들이던 여자였다. ‘세상 참 넓다 나 같은 놈이 취향인 여자도 있다니.’ 처음엔 특수 목적을 품은 꽃뱀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곧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리사는 폭력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리사가 초등학생일 때 집을 나갔고, 남자 형제는 고등학생일 때 집을 나갔다. 리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남자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리사를 좋게 본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버젓한 회사에 취업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의 삶을 살았다. 리사는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다. 자신을 안정적으로 부양해 줄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리사 본인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리사는 불안했다. 관계에 자주 불안감을 느꼈다. 리사는 좋은 배우자 감이 아니었다.
대런과 리사는 둘 다 원하는 것이 같았다. 안정적 가정. 하지만 리사는 그걸 줄 수 없었다. 리사는 관계에 집착하며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대런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던 리사는 대런의 회사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대런은 관계를 포기했다. 그가 원하는 건 지속 가능한 인생이었다. 말초적 쾌락을 위해 고통 받는 인생은 아니었다.
대런은 인간 관계의 복잡다단성에 대해 생각했다. 뒷골목 야인 시절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때의 관계는 이진법이었다. 죽이거나 튀거나.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중대 변수가 있긴 했지만 관계 때문에 고통 받는 일은 없었다. 리사와의 관계는 이진법이 아니었다. 대런은 튀고 싶었지만 처음 가져 본 이성 관계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대런은 리사와 헤어지기까지 적지 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대런이 제일 싫었던 건 인간적 연민이었다. 대런은 리사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대런이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 인간적 연민은 죽음을 의미했다. 다른 사람 대신 내가 죽는 걸 의미했다. 대런은 리사에 대한 감정을 끊기 위해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쳤다. 리사에 대한 서글픈 마음을 죽이기 위해 악착 같이 일에 매달렸다. 그가 중국 출장을 간 것도, 일부러 위험한 임무를 맡은 것도 이때였다.
두 사람은 밥 먹을 때 왜 한 마디도 안 해요?
에이바가 말했다. 에이바는 관계에 불안이 없을까. 좋은 아내감일까. 어쩌면 에이바가 좋은 여자를 소개해 줄 지도 모른다. 에이바는 대런이 결혼하면 잘 살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그랬다. 비록 지난번 소개팅은 실패했지만, 에이바는 앞으로도 대런에게 여자를 소개해 줄 것이다. 대런은 브로디를 믿는 것처럼 에이바도 그렇게 믿었다.
대런이 성추행으로 두번째 경찰 조사를 받았을 때 회사의 누군가 브로디에게 말했다. 사람 안 변한다고, 저 사람 또 그럴 거라고. 또 범죄를 저지르고 회사에 피해를 줄 거라고. 브로디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브로디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아닐걸.
브로디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런이 어떤 삶을 살아 왔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대런은 브로디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 말은 없지만 통하는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지금 사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런은 브로디가 준 책이 기억났다. 대런은 그 책이 입사 시험 과목 같은 것인 줄 알고 열심히 읽었다. 내용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다 읽었다. 대런에겐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용들이 있었다. 가끔 리사 생각이 날 때마다, 아주 가끔 인생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대런은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감당이 어려운 고통이 발생할 경우 식물은 신체 일부를 포기하고 고통을 중단시킨다... 동물의 비극적 삶을 개선하기 위해 인간은 식물의 삶을 답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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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 메이시는 생전 1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는데 2005년 출간된 “인간 종의 역사”가 그의 마지막 책이었다. 어떻게 인간 종이 탄생해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으로, 그의 이전 출판물과 마찬가지로 편향적 주관으로 가득했다. 곤충학과 식물학에서 시작된 그의 학문 여정은 인류학으로 마무리 되었다. 과격하고 거친 언행으로 주류 학계로부터 배척 받았던 콤 메이시는 뜻 있는 학자들의 도움으로 말년에 세상의 빛을 보았지만 이 책 출간 1년 뒤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구약성서의 에덴 동산은 인간의 조상이 나무 위에서 과일을 따먹던 시절에 대한 은유일지 모른다. 인간 종이 분화하기 전, 직립 보행이 아닌 나무 위 긴팔 원숭이로 살 때의 안락함을 그렸다고 생각하면 흥미롭다. 그때는 사냥이나 경작의 고행이 없었다. 나무에 매달려 나무에 매달린 과일을 따 먹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가끔 나무 위로 기어 올라오는 고양이과 포식자들을 피하거나, 하늘 위에서 습격하는 맹금류만 조심하면 될 일이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인간이 독립된 종으로 분화한 것을 의미한다. 땅으로 내려와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사시사철 매달려 있는 과일로는 성이 차지 않게 된 것이다. 고기를 먹기 위해, 고열량의 먹이를 섭취하기 위해, 인간은 뙤약볕 아래 서너 시간을, 어쩌면 수십 시간, 어쩌면 이틀 이상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오래 달려야 했고, 오래 달리기 위해 털을 잃었다. 고기를 잡기 위해 연장을 만들어야 했고, 연장을 만들기 위해 직립 보행을 했다.
.............진실로, 어떤 이유로, 인간은 고기를 먹게 된 것일까. 인간보다 강한 흉폭성을 보이는 침팬지도 고기가 주식이 아니다. 인간은 고기를 사냥하기 위한 송곳니도, 부리도, 발톱도 없으며, 심지어 고기를 과다 섭취할 경우 단백질 중독증으로 사망한다. 이런 인간이, 대체 어떤 계기로, 고기를 먹기 위해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일까. 고기를 먹어서 뇌가 커지고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사후약방문 결과론은 집어 치우자. 애당초 인간이 무엇 때문에 고기를 먹게 되었는지 원인을 밝히는 것이 과학의 본분 아닌가.
.............인간이 고기를 처음 먹게 된 계기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인간이 고기에 탐닉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육식은 쾌락이었다.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고기의 맛에 인간은 비상식적인 선택을 했다. 고기를 먹기 위해 죽을 위기를 감수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했다. 고기를 쫓은 것이 아니라 쾌락을 쫓은 것이었다. 인간의 뇌는 스스로를 비대하게 만들기 위해 고기가 쫓은 것이 아니라, 쾌락을 갈구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기를 쫓은 것이었다. 생존을 위해 고기를 먹은 것이 아니라, 단지 고기가 더 맛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하며, 고기를 먹은 것이었다.
.............인간의 뇌는 쾌락지향적이다. 인간은 고기의 맛만 즐긴 것이 아니라 사냥도 즐겼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냥의 고행은 인류의 조상에겐 더 없는 오락거리였다. 사냥을 위해 동료를 모으고, 역할을 분담하고, 도구를 제작하고, 사냥감을 몇날 며칠 스토킹 하는 행위 자체에 중독적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의 뇌는 쾌락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한다. 인간에게 섹스는 번식을 위한 행위가 아닌 쾌락을 위한 행위다. 섹스 행위에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쾌락이지 번식이 아니다. 동물의 뇌가 발달할수록 섹스는 번식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고 쾌락이라는 말초적 목적에 가까워진다. 뇌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보다 다양한 형태”의 섹스 행위를 즐긴다. 인간은 그런 면에 가장 극단적이다. 섹스의 쾌락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기 때문이다. 성적 쾌락 행위로 도태되는 인간 개체의 수는 다른 어떤 종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많다.
.............인간은 석기 시대 이전부터 곰팡이와 효모가 생산한 환각 물질에 중독돼 있었다.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독버섯과 효모 발효 물질을 채집하고 직접 재배한 행적이 거의 모든 역사에 기록돼 있다. 인간이 경작을 시작한 이유 역시 더 많은 알코올을 더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의도였다. 더 많은 효모를 키우기 위해, 더 많은 술을 마시기 위해, 과일과 곡물을 계획적으로 대량 생산한 것이다. 고기라는 쾌락을 위해 사냥의 종족으로 진화한 인간은, 이번엔 술이라는 쾌락을 위해 경작의 종족으로 진화했다.
.............인간 뇌의 쾌락 추구 성향은 무한대로 확장한다. 노래, 춤, 그림, 창작, 공연, 스포츠, 패션, 도박, 성매매 등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이 쾌락 추구욕에 기반하고 있으며, 학문 예술 자선 같은 비경제적 활동조차 쾌락의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인간은 선행으로도 쾌락을 추구하지만, 반대로 비난, 욕설, 차별, 폭행, 고문, 살인 같은 악행으로도 쾌락을 추구한다.
.............인종 차별은 쾌락 추구의 가장 대표적 행위다. 미국와 유럽의 학자들은 20세기 중반까지 흑인과 동양인이 다른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다른 종”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이비 과학을 창작했다. 과학이란 학문은 본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쾌락 행위인데, 이 사이비 과학은 호기심 충족이 아닌 “상대적 우위”라는 쾌감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누구도 과학/철학적 신념이나 공동체적 정체성 때문에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종 차별을 하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성차별, 지역 차별, 계급 차별… 모두 이런 저런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를 내세우지만 결국 원인은 하나 뿐이다. 재미. 모두 말초적 쾌락을 쫓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인 것이다.
.............문제는 쾌락 행위가 중독적이라는 점이다. 인종 차별 사이비 과학은 “과학”이라는 명패를 잃었을 뿐, 그에 대한 지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열렬하다. 인간의 쾌락 추구 본능은 논리나 이성, 양심을 따르지 않는다. 입으로 아무리 정치적 올바름을 부르짖어도 실제 본능은 백년 전과 동일하다. 서양인의 무의식은 지난 수천년 동안 바뀐 적이 없다: 사하라 사막 이남 인종들과 우랄 알타이어 산맥 동쪽 인종들은, 서양인의 관점에서, 같은 인간 종이 아니다. 그들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오크”, “트롤”, “드워프” 종족이지 서양인과 같은 인간 종족이 아니다.
.............정책이나 교육, 캠페인 때문에 인종 차별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이유는 인종 차별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이 근절되기 위해선 인종 차별이 재미 없어야 한다. 인종 차별 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야 인종 차별이 사라진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쾌락을 추구하는 생명체다. 쾌락 앞에 논리, 이성,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쾌락을 쫓기 위해 만들어진 장기이지 공공의 선을 쫓기 위해 만들어진 장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