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53
주은은 베넷 교수가 준 유전학 개론서를 읽고 있었다. 책에는 파란 눈 돌연변이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전세계 인구 10%를 차지하는 파란 눈의 인간들은 단 한명의 조상을 공유한다. 약 1만년 전 지금의 동유럽 어딘가에서 태어난 이 단 한명의 조상이 오늘날 8억명에 달하는 파란 눈 자손들을 생산한 것이다. 이 단 한명의 파란 눈의 시조는 자신의 파란 눈 돌연변이 형질만큼이나 드문 수준의 번식력과 생존력을 자랑했다. 

파란 눈은 열성인데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간의 눈동자 색깔은 갈색이 기본이고 파란 눈 유전자는 남녀 모두 모두 파란 눈이어야 유전된다. 하지만 파란 눈의 개체는 줄어들긴커녕 급속히 늘었다. 이는 유전 형질이 기계적 온/오프 스위치 원리로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단 하나의 유전자가 아닌, 여러 유전적 변수에 따라 발현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파란 눈 돌연변이는 흔한 변이가 아니었다. 파란 눈의 인간 개체가 모두 같은 조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100만년 인류 역사 동안 파란 눈 돌연변이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드물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버지도 이 파란 눈 돌연변이 같은 경우일까? 수천억 분의 일 확률로, 백만년에 한번 발생하는 돌연변이였을까? 과거에 아버지와 같은 변이가 또 있었더라도, 왕따를 당했거나, 도태됐거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일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진 것일까? 후각은, 파란 눈과 달리, 눈에 띄지 않으니까? 아버지의 후각 형질은 파란 눈의 유전자처럼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주은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은의 후각 능력은 아버지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한 세대만 대물림 돼도 능력이 크게 희석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유전에도 적용된다. 어떤 존재도 물리 화학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혹시, 파란 눈 형질이 열성 유전 법칙을 뒤엎은 것처럼, 아버지의 후각 유전자도 그럴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했겠지. 아버지는 언제나 항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했으니까. 

삐삐 메시지가 왔다. 

“집앞, 부릉부릉, 준비?” 

앰버였다. 모임에 같이 가기로 돼 있었다. 사교 모임이었다. “사교 모임보다 지옥에 먼저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은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게 다 트리시 때문이었다. 트리시가 앰버와 너무 친해진 탓이었다. 지난주에 앰버는 자기 빌딩으로 트리시를 데려가 놀았다. 앰버 빌딩에 세입자가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거기 트리시를 초대한 거였다. 여행 사업이었다. 사업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2달인데 벌써 예약이 꽉 차서 대기를 받고 있었다. 일반인이 예약할 수 없는 초고급 해외 여행지를 예약해주는 서비스였다. 여행 코스 중에는 원래 외국인을 받지 않는데도 있었다. 앰버가 직접 가서 처음으로 외국인 예약을 받도록 설득했다고. 앰버는 확실히 사업 수완이 있었다. 앰버도 인정했다. 자기네 가문 사람들 원래 전부 병신인데 돈 버는 건 잘한다고. 

트리시는 앰버 회사에서 신세계를 경험하고 온 것 같았다. 앰버의 회사는 앰버가 직접 아는, 혹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거나, 재력 인증을 한 사람들만 방문할 수 있었다. 아주 많은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손님을 가려 받았다. 인테리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현지에서 기장 비싼, 현지에서만 살 수 있는 자재로 꾸민 인테리어였다. 그곳 여행 상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전통차, 전통주, 과자, 간식, 공예품, 온천물, 식물, 이끼, 바위까지, 다른 곳에서 살수도, 구경도 할 수 없는 희귀 품목들을 직접 관람할 수 있었다. 트리시에 따르면 한번 보면 도저히 그 자리에서 예약을 안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앰버는 트리시에게 “너도 우리 회사 고객이 될 것”이라면서 기념품과 과자류를 싸주었다. 트리시는 그걸 주은에게 들고 와 반반씩 나누며 그랬다. 역시 돈이 좋은 거라고, 이 다음에 언니도 돈 많이 벌어서 자기 호강시켜줘야 한다고. 

주은은 앰버를 홀대할 수 없었다. 사.교.모.임.이라니, 트리시 아니었으면 단박에 “바쁘다”고 거절했겠지만, 트리시한테 잘 해준 게 고마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주은은 무슨 사교 모임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 모임에 최근 가입한 사람 중 한명이 주은 집 증조 할아버지를 안다고, 자기네 할아버지도 2차 대전 때 같은 부대에 있었다고 꼭 만나고 싶다는 말만 들었다. 원래는 트리시를 데려 가려고 했는데 미성년자는 받지 않는 모임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집 앞에 세워진 앰버의 차는 지난번에 본 컨버터블 스포츠카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점잖아 보이는 차였다. 앰버 같은 이들에겐 자동차가 용도별로 여러 대 있다는 사실을 주은은 처음 알았다. 

예쁜 옷 입었네. 

앰버가 주은의 옷차림을 보고 놀란다. 평소 거적대기 같은 옷만 입고 다니던 애가 정장을 차려 입었다고 코멘트를 한다. 

트리시가 사 준 거야. 

메이크업도 걔가 해준거지? 

주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차림 뿐 아니라 메이크업, 액세서리, 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트리시가 해준 것이다. 트리시는 인형 놀이 하는 것 같다며 주은을 꾸미는데 며칠 동안 열을 올렸다. 손발톱과 속옷도 새로 해준다는 걸 말리느라 힘들었다. 

트리시가 센스 있어. 

맞아. 

주은은 사실 아무것도 몰랐다. 패션 센스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겨우 눈치껏 아는 수준이었다. 

트리시는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게 좋을 거 같애. 

우리 회사?

친구가 하는 패션 매장 있어. 돈 좀 있는 애들 상대로 하는 럭셔리 샵이야. 거기서 물건 홍보하는 일 시키면 잘 할 거 같애. 

애가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는데 어쩌고 엄마 잔소리가 나올 뻔한 걸 반사적으로 눌러 참았다. 엄마 노릇을 하려고 했다니. 하지만 그러고 보니 트리시도 주은도 엄마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엄마 노릇을 해주는 걸까? 

앰버의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이었다. 오래된 성이 아니라 최근 지어진 성이었다. 시멘트로 지은 건축물이 아닌 암석을 쌓아 만든, 옛날 방식 그대로 지은 건축물이었다. 누군가 돈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누군가 그랬지, 시간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100년 걸릴 일도 돈을 100배 더 쓰면 1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이 성은 그렇게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넌 여기가 어딘지 묻지도 않아? 내가 너 인신매매 회사에 팔아 먹으려고 데려 왔으면 어쩌려고 그래? 

앰버의 말에 주은은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라도 주은은 겁먹지 않을 것 같았다.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지 않았다는 건, 나쁜 점도 있지만, 이로운 점도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나는 네가 뭘 물어 보는 걸 한번도 못 봤다. 

엠버는 푸념하듯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성 입구에는 입장 홀이 있었다. 양복을 입은 청년들이 입장객을 확인하고 있었다. 앰버가 여기 원래 천장에 기관총이 있어서 초대 받지 못한 사람에게 총알이 발사된다고 했다. 주은이 무표정으로 엠버를 빤히 바라보자 엠버가 또 푸념하듯 말했다. 

안 속네, 똑똑한 여자애. 

성 안은 천장이 높았다. 진짜 오래된 문화 유적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이는 게 아니라 안에는 더 작정하고 진짜처럼 만들었다. 성 안은 사람들로 가득 했다. 40-50명 정도 되는 사람들. 모두 20대로 추정되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층에 있고, 2층에도 십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후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감지하는 능력은 편리한 것 같다. 주은에겐 적외선 탐지기 같은 게 필요 없었다. 냄새로 누가 어디에 몇 명 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성 안 사람들은 주은의 출현에 의아해 하는 분위기였다. 동양인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평상시에는 봤겠지만 지금 이 모임에선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곳은 백인들 뿐이다. 백인 외의 인종은 없으며, 주은처럼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인 사람도 없었다. 

모두 세련되게 옷을 차려 입었다. 값비싸 보이지만 튀지 않는 옷들이다. 다들 얼마나 고급스럽게 단장할지 연구하고 온 것 같았다. 주은의 평소 차림이었다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모임이었다. 옷을 이렇게 입혀 준 트리시가 대단한 것 같았다. 저 사람들 틈에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하지만 불편했다. 트리시와 같이 가서 제일 편한 옷으로 고른 건데 그래도 불편했다. 왜 이렇게 허리가 조이는 거지. 옷이 가랑이 사이로 너무 달라 붙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들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걸까? 취업하고 사회 활동하면 매일 이렇게 입어야 하는 걸까? 

앰버가 저쪽에서 남자를 데리고 온다. 키 크고 잘 생겼다. 여기 사람들 다 키 크고 잘 생겼지만 쟤는 특별히 더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냄새도 좋다. 냄새보다 사람의 외모를 먼저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테오 로스. 오스틴 로스의 증손자다. 오스틴 로스는 주은의 증조 할아버지 소니 리즈와 같은 대대 소속이었다. 둘은 2차 대전 당시 함께 공훈을 세워 함께 훈장을 받은, “피를 나눈 전우”였다고 한다. 오스틴 로스의 증언에 따르면 소니 리즈는 “미친놈”이었다고 했다. 참호 안으로 수류탄이 떨어졌는데, 소니가 그걸 발로 차서 내보낸다는 게 장애물에 맞고 다시 참호로 떨어졌다고. 그 순간 소니는 “씨발?”이라는 비명을 지르며 수류탄을 자기 애처럼 감싸 안았다고. 하지만 수류탄은 불발탄이었고 그 일은 대대의 전설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니 리즈는 “미친놈” 에피소드를 수없이 많이 남겼고, 그 이야기들이 남의 집에 4대에 걸쳐 전설처럼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때 소니 할아버지가 발로 찬 수류탄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참호 밖으로 나가더래. 근데 그게 하필 망원경 폴대를 맞고 도로 참호 안으로 떨어진 거지.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결승전을 보는 것 같았던 거야. 결정적 순간 폴대 맞고 안 들어간 골 같은 거지. 운동 신경이 대단하신 분이었대. 수류탄 핀을 뽑은 뒤에 한번 저글링을 하고 던져서 적군 머리 위에 떠뜨리는 미친 묘기도 자주 보여주셨다더라. 

테오는 소니 리즈의 증손자가 남자이길 바랐다고 했다. 군대 이야기, 전쟁 이야기 하고 싶어서. 하지만 대신 이렇게 아름다운 증손녀를 보게 된 것도 못지 않게 기쁜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테오는 정작 주은 네 집 사람들은 증조 할아버지의 무공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 

…우리집이었으면 카톨릭 성당처럼, 벽에 예수 십자가의 길 있잖아, 그것처럼 할아버지의 일화들을 액자 사진이랑 벽화로 기렸을 거야. 

원래 그랬다고 들었다. 준은 자신의 집 거실 벽면이 원래 소니 할아버지 관련 사진과 기사들로 도배돼 있었다고 했다. 그랬던 걸 조안 할머니가 다 치운 것이었다. 조안 할머니는 리즈 집안의 우두머리가 된 뒤로 지금 가족들과 관련 없는 장식물을 전부 거둬 다락방에 고이 감춰 버렸다. “전쟁 끝난 지가 언젠데.” 소니 할아버지 기념물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조안 할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조안 할머니는 현실주의자였다. 테오는 조안 할머니와 다른 것 같았다. 낭만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 보는 주은이 신기했다. 테오는 여자의 시선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에게 겁 먹지 않았다. 인종적, 성격적, 문화적 이질성에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한 캐릭터에 호감을 느꼈다. 테오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테오는 주은의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다. 

앰버랑 같은 학교 다닌다고 들었어. 취미 활동은 안 해? 운동? 스포츠? 

생각해 보니 주은은 취미가 없었다. 지그소 퍼즐은 엄마가 죽은 뒤로 한번도 한 적이 없고, 책 읽는 게 유일한 취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 있었다. 말을 타는 것도 스포츠 아닌가? 

승마? 

테오의 표정이 크게 밝아졌다. 

맞아! 소니 할아버지 집이 종마 사업을 했다고! 우리집에는 승마장이 있어! 그래서 두 분이 그렇게 죽이 잘 맞았다고 그랬지. 

둘은 말 이야기로 열띤 대화를 나눴다. 말의 종류와, 성격과, 능력치, 빠르기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은은 우리집 종마업은 더 이상 비즈니스가 아닌 취미 사업처럼 운영 중이다, 하지만 말을 달릴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 가끔 말들을 어디론가 데려 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테오는 자기 집은 그 반대라면서, 더 많은 말들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 많다고, 말은 많지만 좋은 말은 희귀하다고 그랬다. 테오는 할아버지들은 서로 이런 얘기 많이 했을텐데, 그 세대가 사라진 뒤로 서로 교류가 끊긴 것 같다고 아쉬워 했다. 

중간중간 탄산수를 많이 마시는 바람에 오줌이 마려워진 주은은 이제 그만 대화를 마치고 싶었다. 앰버는 없었다. 아마 다른 지인과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테오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지금 보니 테오가 무얼 하고 있는지, 어디 살고 있는지, 지금 이 모임엔 어떻게 오게 됐는지, 엠버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하나도 물어 보질 않았다. 주은이 오늘 처음 본 이 잘생긴 남자에게 처음 물어 본 건 “여기 화장실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화장실은 믿을 수 없이 컸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함일까? 정말 쓸데없이 많은 공간을 차지한 화장실이었다. 오줌을 싸기 위해 바지를 벗는데, 바지를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 몰라서 난감했다. 여는 데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 와중에 탄산수랑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안 그래도 조이는 옷이 더 조인다. 빨리 바지를 열지 못하면 옷이 찢어질 것 같다. 

밖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3명의 여자들이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오래 참았다는 듯 왁자지껄 수다를 떤다. 

야 아까 그 중국 년 봤냐. 

세상에 백인 모임에 왠 중국 년임? 백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 아님? 

헤어스타일도 촌스럽고, 옷도 촌스럽고, 말투도 촌스럽고, 누가 데려온 거지 년임? 

앰버잖아. 걔 이번에 일본에서 사업한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걔 중국애 맞음? 

몰라, 우리가 보기엔 다 중국 년이지 뭐가 달라. 

아무튼 거지 같은 년이 남자 하나 꼬셔 보겠다고 용을 쓰더라. 

중국 년들 제일 싫은 점이잖아 - 주제를 몰라요. 

방금 전까지 고상한 단어만 골라 쓰던 여자들이었다. “다른 점”이라는 단어를 “상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자기 만족 우월감을 느끼던 이들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변신해 불량 여고생의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주은 욕하기에 한참 열을 올리던 여자들이 밖에서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자 조용해진다. 어음, 음음, 어색한 소리를 내며 3명 모두 화장실을 나간다. 앰버였다. 그 사이 바지의 후크를 찾아 오줌을 다 싼 주은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다. 화장을 고치던 앰버가 주은에게 묻는다. 

저 병신들이 뭐래? 

중국이 싫대. 

앰버가 웃는다. 

준 네가 신경 안 쓸 건 알지만 어딜 가나 저런 애들은 있어.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알아. 

주은은 옷이 불편해서 이만 집에 가고 싶었다. 테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테오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바쁘신 몸이겠지. 주은 혼자 바쁘신 몸을 너무 오래 독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굳이 간다고 찾아서 작별 인사를 하면 그게 오히려 결례일 것 같았다. 주은은 그냥 아무 말 없이 앰버와 함께 모임에서 나왔다. 

앰버는 주은과 돌아오는 길에 테오 이야기를 했다. 성격 좋고 똑똑하고 집안도 좋은 아이라고. 그의 집은 영국에서 가장 큰 식품 제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테오의 아버지가 투자의 귀재라서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현금이 많은 집일 거란 얘기도 했다. 

너는 내가 너 여기 왜 데려온 건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테오라는 애가 보자고 했다며. 

앰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모임은, 남녀 교제를 위한 모임이야. 있는 집 자제들끼리 모여서 친분도 쌓고 미래 배우자 감도 찾는 거야. 말 그대로 짝짓기 프로그램인 거야. 내가 너 테오랑 이어주려고 데려온 거라고. 원래 내가 눈독 들이고 있었던 놈인데, 나한테 매력을 못 느끼길래, 너한테 양보하려고 데려 온 거야. 

생각해 보니 앰버는 전에도 이 모임에 대해 주은에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주은은 기억을 못한 것이다. 주은은 이름만 못 외우는 게 아니었다. 자기 생각에 “불필요한 정보”는 통째로 삭제해 버리는 버릇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건 필요없다” 판단되면 통째로 걸러 버리거나 삭제해 버리는 거였다. 그나마 엉뚱한 내용으로 왜곡하지 않아서 다행일까. 필요한 내용은 틀림없이 기억하는데 불필요한 내용은 아예 기록되지 않았다. 

아니, 남자가 그만큼 관심을 보였으면, 넌 휴대폰이 없으니까, 삐삐 번호라도 줬어야지. 아니면 집 전화번호도 있잖아. 서로 아무것도 없이 헤어진거야? 그게 말이 돼? 

앰버는 주은을 힐난하고 있었다. 후회하라는 듯, 아쉬워하라는 듯, 다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은은 앰버가 기대하는 감정이 없었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배우자 감을 찾는다니. 주은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주은에게 필요한 건 가족 뿐이고, 더 이상의 가족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은은 앰버가 다르게 보였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본인 앞가림 하기도 바쁜 애가? 

주은은 앰버를 빤히 쳐다 보았다. 운전을 하다 주은을 눈치 챈 앰버가 왜 그렇게 빤히 쳐다 보냐며 웃는다. 

왜 그렇게 보는지 알겠네. 왜 너한테 잘해주냐고, 그게 궁금한 거지?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네, 이렇게 해준다고 고마워할 애도 아니고 나한테 뭐가 굴러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같애. 너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일종의 생존 본능이랄까? 쟤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나한테 유리할 거란 본능? 

우리 힐빌리스 사람들 특징이 도움 안 되는 인간들은 버리고 도움 될 거 같은 인간들만 악착같이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거든. 그걸 잘해서 살아 남은 거야. 땅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더 중요하잖아? 사람이 없으면 땅에서 아무것도 나지 않으니까? 나도 준 네가 뭐가 도움 된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내 본능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 지금껏 틀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근데 솔직히, 네가 무슨 도움이 되든 그런 거 다 상관없고, 너 재미있잖아. 웃기잖아. 아직도 삐삐만 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고, 남자들 앞에서 쫄지도 않고, 돈 앞에서 아쉬워 하지도 않는 것도 웃기고. 사람 좋고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 사람이 도움이 되고 말고 그런 거 사실 모르는 거잖아? 그냥 싫으니까 멀리 하는 거고, 좋으니까 잘해주는 거지. 

작품 등록일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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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스가 있어야 재미따고
깨비   
오 이번편은 미드 한편 같다
an****   
ㅋㅋㅋㅋㅋㅋㅋㅋ앰버 참각막ㅋㅋㅋㅋㅋㅋㅋ
  
소장 은근 앙큼해 ㅋ
슬리피캣   
너무 재밌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생생하다 생생해
진미오징어   
사람 싫고 좋은데 답이없어
슬리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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