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48
양밍 아저씨는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었다. 애당초 양밍에게 자신의 딸을 맡긴 건 그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시였다. 

아버지의 병원에는 직함이 없었다. 각자 맡은 일만 있었다. 병원 직원들에게 존재하는 건 계급이 아닌 암묵적 서열이었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양밍 아저씨는 병원의 2인자였다. 유사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밍 아저씨가 병원을 이끌기로 되기로 돼 있었다. 

모두가 양밍 아저씨를 좋아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양밍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아무 말 없는 것이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연적 권력이 되었다. 

병원 치료에 불만을 품은 건달이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다. 키가 2m 가까이 되는, 미친 황소 같은 성깔을 가진, 동네에서 유명한 불량배였다. 여러 명의 건장한 병원 직원들에게 둘러 싸여도 기죽지 않고 물건을 내던지며 행패를 부리던 건달을 양밍 아저씨는 시선 하나로 제압했다. 양밍 아저씨가 천천히 유유자적 건달 앞에 바짝 다가가 그를 바라 보자 그의 목소리가 리모콘으로 TV 볼륨 줄인 것처럼 줄어 들었다. 건달의 움직임이 점점 조신해지더니 겁 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양밍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 그만 가시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건달은 양밍 아저씨의 시선을 슬슬 피하더니 자기가 알아서 나갔다. 

병원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병원에 근무한지 얼마 안 된 젊은 사내들은 예수의 기적을 본 것처럼 신기해했다. 어떻게 하신 거냐고,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양밍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옆에서 숨만 쉬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양밍 아저씨 발 밑에 기었다. 그냥 바라 보기만 해도 사람의 태도가 주술에 걸린 것처럼 바뀌었다. 굳이 이래라 저래라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복잡한 지시 사항을 제외하고는 시선만으로 대부분의 의사 소통이 이뤄졌다. 양밍 아저씨가 굳이 말을 해야 할 때는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였고, 완력을 써야 할 때는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경우였다. 양밍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병원에서는 양밍 아저씨와 장진졔 아저씨가 서열을 가리기 위해 일대일 격투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격투에서 장진졔 아저씨가 지고 양밍 아저씨가 이겼다고, 장진졔 아저씨가 양밍 아저씨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는 소문이었다. 양밍 아저씨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헛소리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냈지만, 장진졔 아저씨는 사실이라고 했다. 주은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양밍 아저씨를 신격화 하기 위해 만들어낸 유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진졔 아저씨는 그 유치한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인정해 버렸다. 자기는 양밍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그에게 도전하는 자는 자신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양밍 아저씨는 죽을 때도 남자로 죽었다. 실험실 기계 오작동으로 시작된 비극은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 양밍 아저씨는 새로 들어온 여자 연구원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이 대신 죽었다. 박테리아 유출로 실험실 문이 자동 폐쇄됐을 때, 아저씨는, 시뻘건 불이 번쩍이는 실험실 유리벽 안에서 사람들에게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양밍 아저씨는 자신의 죽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실험실 박스 뒤로 들어가 홀로 죽었다. 

양밍 아저씨가 죽었을 때, 주은은 아버지가 우는 걸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딸이 죽어도 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은에게 아버지의 눈물은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양밍 아저씨의 장례식장 밖에서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은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양밍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버지는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애정도.

주은은 1층에서 시끄럽게 구는 남자가 거슬렸다. 트리시의 남자 친구였다.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그건 뻥이었다고! 그걸 진지하게 믿었단 말이야?” 트리시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다. 트리시는 친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농담으로 진짜 같은 거짓말을 하고 “뻥인데”라며 놀리는 거였다. 트리시는 주은이 속을 때마다 귀엽다고 깔깔대며 뽀뽀 해줬는데 저 놈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임스가 맞상대 하고 있지만 효과가 없는 것 같다. 계속 씩씩대며 트리시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무례한 놈이다. 이 집 사람들을 업신 여기는 것 같다. 

주은은 학교 과제를 해야 했다. 집중해야 했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책을 덮고 일어섰다. 자기도 모르게 1층으로 내려가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고릴라처럼 생긴 럭비복을 입은 남자다. 키가 2m쯤 되는 것 같다. 제임스를 만만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만만해 보이는 것 같다. 

양밍 아저씨는 사람의 급소를 때리는 건 본능적 직감이라고 했다. 이 부분을 때려야지 위치를 가늠하면 안 맞는다고 했다. 아무 생각없이 주먹을 휘둘러야 한다고 했다. 리듬을 타듯, 공을 던지듯, 경쾌하게, 가볍게, 일격필살.  

퍽 소리와 함께 고릴라가 쓰러진다. 고릴라가 숨을 쉬지 못한다. 주은이 고릴라 앞으로 가서 고릴라를 내려다 본다. 양밍 아저씨는 남자를 제압하기 위해선 절대 말을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말은 남자의 적이다. 말을 하는 순간 남자는 엇나간다. 말을 빌미로 악의를 품고, 선을 넘고, 배신을 한다. 

고릴라는 고통 가득 찬 표정으로 주은을 올려다 보았다. 주은이 말 없이 조용히 고릴라를 바라 본다. 시선은 남자의 명령어다. 시선으로 의사를 전달할 때 비로소 남자는 몸뚱이를 움직인다. 남자는 시선으로 명령해야 뒷탈이 없다. 악의를 품지도, 선을 넘지도, 배신을 하지도 않는다. 

고릴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나간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푹하고 쓰러진다. 병원에 가야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정말로 장기에 손상이 발생했다면 아까 손상된 장기의 냄새가 가득 피어 올랐을 것이다. 앞으로 한두 시간 동안 고통스럽겠지만 병원에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릴라는 이제 여기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트리시가 놀란 표정으로 주은을 보았다. 주은은 트리시를 마주 보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트리시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저런 놈과 교제하지 말라는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데자뷔였다. 양밍 아저씨가 그때 동네 불량배를 제압했을 때 상황의 반복이었다. 아저씨의 행동 패턴이 내게 전이된 것일까? 누군가 죽더라도, 그의 생각과 행동은 남는 것일까? 엄마가 내게 유전자를 남긴 것처럼, 양밍 아저씨는 내게 삶의 방식을 남긴 것일까? 

.............동시대를 사는 같은 종의 개체는 진화의 나침반을 공유한다.

주은은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 말은, 처음 생각과 달리, 무정하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품 등록일 : 2026-04-01
최종 수정일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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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ody’s files #47

상실에 관해서 덜 슬퍼해도 될지도 몰라
내가 떠난 사람 나를 떠난 사람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생명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사실 오르가즘도 사랑도
그 누군가를 강렬하게 나의 안에 받아들이고 싶다
라는 원초적인 본능이라 생각해
내가 그 사람을 흡수하고 싶다
너무 좋아서
슬리피캣   
예전에 닮아간다는 건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한 적 있었는데 뜬금없지만 그게 생각나는 에피.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이런 느낌이구나.

주은아 부디 나를 제자로
  
우덜도 지금 동시대를 살면서 진화의 나침반을 공유하고 있잖여
당장 나새끼만 봐도 이드 몰랐던 십년전에 비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름
진미오징어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이 스며드는 거구나
관찰로 진화가 가능하다는건 고무적인 일이네
트리시도 나쁜놈 옆에 두지말아라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슬리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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