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46
…고통은 삶에 대한 미련이다. 

아버지 병원에 장기 입원 환자가 죽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 병원에서는 매일 수없이 많은 환자들이 죽지만 이 환자는 특별한 경우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손을 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흔한 호흡기 질환으로 알았지만 점점 숨 쉬는 것이 힘들어지더니 숨 한번 몰아쉴 때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원인도 병명도 몰랐다. 혹자는 자율신경계 이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버지는 병명을 붙이는 걸 싫어했다. 아버지에게 환자의 병은 “그 사람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환자에겐 병명이 없었다. 아버지에겐 “감기”도 “폐렴”도 “대장암”도 없었다. 모든 병은 “그 환자의 문제”였다. 병은 각자의 몸에 따라 특수해진다. 저 환자에게 들었던 치료법은 이 환자에겐 듣지 않는다. 그게 아버지의 의학이었다. 

아버지는 그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고통을 멈추기 위해 고통을 느끼는 모든 신경을 마비시켰지만, 숨을 쉬지 못해 받는 고통은 물리적 고통이었다. 그 환자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아버지는 안락사를 권했다. 하지만 환자와 유족의 입장은 완고했다. 살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살아 보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환자는 아버지의 연명 치료에 따라 1년 넘게 지옥의 고통을 겪고 갔다. 

장진졔 아저씨는 그 환자의 죽음에 맺힌 게 많았다. 고통은 삶에 대한 미련이라는 말. 그건 곧 삶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했다. 아저씨는 그 환자의 깊고 오랜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장진졔 아저씨는 살인 전과가 있었다. 그는 살인 혐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된 적이 있었다. 유명 폭력 조직의 실력자였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건 확실치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아버지의 병원을 찾은 수많은 중국인 중 하나였다. 1년 넘게 계속된 어머니의 복부 통증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장진졔 아저씨는 어머니를 업고 아버지의 병원을 찾았다. 아버지의 진료 순서는 엄격하게 지켜졌기에 장진졔 아저씨는 한달 이상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이에 아저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병을 치료해 달라고 온 게 아니라고. 제발 지금 당장 어머니의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만 알려달라고.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난다고 말씀해주신다면 지금 당장 생에 대한 미련을 중단하겠다고. 

아버지는 장진졔 아저씨의 말에 거짓이나 억지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진료 순서를 바꿔 아저씨의 어머니를 먼저 진료했다. 아버지는 아저씨 어머니의 썩은 장기를 제거하고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장기만 남겨 두었다. 그의 어머니는 더 이상 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고통은 사라지고 평온함만 남았다. 그의 어머니는 충전이 불가능한 휴대폰처럼 기력이 쇠해 갔고, 몸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됐을 때, 마치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이 꺼지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자식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어머니였다. 애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어머니는 아저씨를 엄하게 키웠다. 아저씨가 사소한 시비로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영영 나쁜 길로 빠졌을 때도 자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평생 자식 때문에, 자식이 저지른 죄를 보상하기 위해, 힘든 삶을 살았지만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아저씨의 어머니는 삶 대신 고통의 해방을 택했다. 아저씨는 어머니의 혈액에 영양분을 투여해 삶을 연장해드리고 싶은 욕구를 이 악물고 참았다. 몸 안에 양분이 투여되는 순간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의 생명 연장을 포기했다. 한 많은 인생이었지만, 이대로 평온한 죽음을 맞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저씨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자식 키운 보람이 있네.” 네 덕에 편히 죽어 고맙다고 한 말이었다. 아저씨는 어머니의 고통이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주은의 아버지에 의해 그 업보를 탕감 받았다고 생각했다. 장진졔 아저씨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맹세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당신을 위해 살 것이라고. 아버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반응이었지만 장진졔 아저씨는 정말 자신의 맹세대로 살았다. 

…더 이상 못 살겠다 싶어 죽으려고 해도 본능은 죽는 걸 거부한다. 그게 고통이다. 삶에 대한 욕구, 의지, 미련은 필연적 고통을 부른다. 

장진졔 아저씨는 주은에게 칼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양밍 아저씨는 그런 걸 가르치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장진졔 아저씨는 생각이 달랐다. 여자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은 칼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주은에게 사람을 최단 시간 내 “무력화”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칼을 고르는 법, 감추는 법, 그리고 다루는 법까지. 

장진졔 아저씨는 아직도 아버지를 죽인 배후를 찾고 있을 것이다. 장진졔 아저씨는 오래 전부터 아버지의 병원 내 사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 죽음의 배후를 캐기 위해 엄마의 과거도 조사했을 것이다. 아마 캄보디아에도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거기서 피트의 집을 털었을 것이다. 장진졔 아저씨는, 피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았다면, 그가 자신이 주은에게 가르쳐 준 방식대로 죽은 걸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보람이었을까? 후회였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면역학을 가르치는 교수 콜린 베넷은 장진졔 아저씨 서양인 버전이었다. 서로 다른 인종인데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꼴이었다. 장진졔 아저씨는 조상 중에 서양인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정도로 전형적인 서구형 미남이었고, 베넷 교수는 동양인의 피가 섞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국적 느낌의 미남이었다. 

베넷 교수는 의대 내 몇 안 되는 미남이었다. “다른 데도 신통치 않지만 의대는 특히 더 해.” 같은 과 여학생들의 푸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교수 중에 이런 미남이 있을 줄이야. 베넷 교수는 강의도 잘했다. 외모만 출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의학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그는 어떤 학생이라도 존경할 수 밖에 없는 교수였다. 

…데이비스 상병은 신혼 3개월만에, 자기도 모르는 새, 비밀 작전에 투입됩니다. 히틀러 암살 작전이라고 그럴듯하게 둘러대긴 했지만 실제로는 베르고프 어딘가에 군사 기지 사진을 찍어 오는 게 전부였던 임무였죠 독일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후방 침투 임무였는데 제대로 된 지도도 주지 않고 직접 지도를 그려가며 길을 찾아야 했던 최악의 임무, 예상대로 작전은 실패했고, 5명의 대원들 중 4명이 죽거나 실종, 데이비스 상병 혼자 살아 남아 나치 친위대에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베르고프 알프스 산맥에서, 나침반만 갖고, 프랑스 브르타뉴까지, 1300km 거리를 걸어서 목숨 걸고 대탈출, 23일 동안 밥을 딱 한번 먹었답니다. 어느 농가 빈집에 들어가서 빵이랑 고기를 훔쳐 먹었는데 미안해서 가진 돈을 다 두고 나왔다고 하더군요. 도중에 총에 한번 맞고, 독사에 물려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영양실조에 만신창이가 돼서 브르타뉴에 간신히 도착,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구조됐는데, 그 당시 그 지역에 무서운 독감이 유행이었던 거죠. 마을 주민 수십명이 독감으로 사망했고, 데이비스를 구조하러 온 영국 대원들까지 태반이 독감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데이비스만 안 걸렸습니다. 

…이상하죠? 이런 사례가 수없이 발견되거든요. 생사가 오가는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 그 흔한 감기 한번 안 걸립니다. 23일이 아니라 23년 동안 안 걸린 사례도 있지요. 그렇게 몸을 혹사했는데도,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면역력은 초인적 수준으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나서, 이제 좀 살겠다 싶으면, 그때 병에 걸립니다. 생존 확률 1%도 안 되는 무서운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감기에 걸려 죽습니다. 자, 여기서 그럼 간단한 실험을 하나 해볼게요. 

교수는 학생 명부를 뒤적인다. 

준 리즈? 

예?

운동 잘 해요? 

예. 

남학생들이 와하고 웃는다. 여자가 저렇게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주은은 사실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운동도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운동을 못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 할 것 같다는 본능적 느낌만 있었다. 

그럼 잠깐 일어나 보세요. 

일어난 주은에게 베넷 교수가 말한다. 

내가 지금 이 참깨 주머니를 학생한테 던질 테니 받아 보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수가 참깨 주머니를 획하고 던진다. 주은은 능숙하게 한손으로 받는다. 남학생들이 오오 하고 감탄한다. 둘은 그렇게 두어번 참깨 주머니를 주고 받는다. 

이게, 여러분의 면역 체계입니다. 어디서 뭐가 날아오는지 아는 거에요. 그래서 받을 수 있는 거에요. 뭔가 날아오니까 잡는다. 이게 면역 시스템이에요. 뭐가 날아오는지 모른다, 그러면 잡지 못하는 거에요. 병에 걸리는 거죠. 

베넷 교수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선다. 

리즈 학생, 내가 지금 이렇게 몸을 돌리고 있을 테니 내 머리를 향해 주머니를 던져 보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은이 주머니를 던진다. 주머니가 퍽하고 교수 머리를 정확히 강타한다. 교수의 머리가 헝클어진다. 남학생들이 박장대소 웃는다. 교수도 같이 웃는다. 남학생들은 주은의 무덤덤한 표정을 보며 말한다. 쟤 매력 있는데?

이게, 병에 걸리는 거에요. 면역 체계가 대응을 못하는 거에요. 뭐가 날아오는지 모르니까. 혹은, 알고도 대처를 안 하니까. 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베넷 교수는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하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아까 데이비스 상병 얘기 하는 거에요. 데이비스 상병이 병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와 같은 거에요.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23일 동안 몸에 쏟아져 들어온 외부 침입자들을 잡았던 거에요. 날아오면 잡는다. 몸이 그런 상태로 유지되는 거에요. 23일이든, 23년이든, 지속적으로. 병에 안 걸리는 거에요. 뭐가 날아오든, 악착같이, 공격적으로, 여지없이 잡아 버리니까. 반대로, 전쟁이 끝나면, 더 이상 그런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 거에요. 뭐가 날아 와도 굳이 잡지 않는 느슨한 상태로 바뀌는 거죠. 데이비스 상병은 전쟁이 끝나고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무사 귀환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지 석달만이었습니다. 

베넷 교수는 면역 체계 개론을 이야기했다. 뭐가 날아올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뭐가 날아올지 알아서 병에 걸리는 경우와, 아는데도 병에 걸리는 경우,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면역 체계는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적응과 대처에 의해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 타고난 면역력보다 삶의 방식이 면역력에 더 큰 강화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 학생들은 흥미진진하게 강의를 들었다. 왜 선배들이 베넷 교수의 강의를 강력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났다. 베넷 교수는 주은을 보고 말했다. 

준 리즈 학생은 저를 따라 오세요. 아까 생체 실험을 해준 대가로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남학생들 몇 명이 휘파람을 불며 박수 친다. 아까 주은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앰버가 주은의 손을 잡으며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베넷 교수의 방은 북향이었다. 해가 거의 들지 않는, 건물 구석에 위치한 어둡고 침침한 방이었다. 

이 방을 다들 싫어하길래 내가 차지했지. 

베넷 교수는 주은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 사실은 학생 어머니와 친한 사이였어. 사적인 관심 때문에 부른 거야. 

베넷 교수의 말엔 부끄러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말투와 표정이 전형적인 상남자였다. 강의실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보니 굉장한 남성미가 느껴졌다. 베넷 교수는 엄마와 사귀는 관계였다. 사귄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베넷은 엄마와 결혼하려고 했다고. 지금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고 했다. 

캐런이 운동을 잘했어. 우리 같이 폴로를 했거든. 여자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력도 강하고 운동 신경도 좋았지. 그때 생각이 나서 오늘 당신이랑 참깨 주머니를 주고 받은 거야. 

베넷은 엄마 이야기를 한참 했다. 둘이 관계가 잘 되진 않았지만 항상 앞날이 궁금했던 사람이었다고. 어떤 남자와 결혼했어도 멋진 삶을 살았을 거라고. 하지만 베넷은 엄마가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물어 보지 않았다. 

베넷은 엄마의 말 이야기도 했다. 벳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자기도 벳시를 타 본 적이 있다고. 벳시에게 딸 린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것 같았다. 

벳시는 정말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말이었어. 근데 딸은 그 정반대란 말인가. 유전은 아무리 오래 연구해도 알 수 없어. 

베넷은 책장 깊숙한 곳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크고 두꺼운 책이다. 유전학 개론서였다. 

지금은 면역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원래 궁금했던 쪽은 유전학이었어. 그래서 유전학 교수가 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로 왔네. 사람 일이 알 수 없어. 

베넷 교수에게 받은 책을 뒤적이는 주은에게 베넷 교수가 말했다. 

교과서 같은 책이지만 따분한 책이 아니라 굉장히 잘 쓰여진 책이야. 유전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이 잘 설명돼 있어. 

책 중간에 엄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책 여러 곳에 엄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베넷이 말했다. 

중요한 부분에 표시 해둔 거야.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엄마는 베넷과 좋은 관계였던 것 같았다. 

네 어머니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는 네 어머니가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길 바랐어. 나를 버린 여자에 의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데 남자로서 긍지도 느꼈지. 고마운 사람이었어. 인생에 좋은 기억만 남겨준 고마운 사람. 

작품 등록일 : 2026-03-31
최종 수정일 : 2026-03-31

▶ Brody’s files #47

▶ Brody’s files #45

베넷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네
미워하지 않는 마음은 귀하고 강하다

마음 속에
잊혀지지 않는 이뤄지지 않은 사랑
하나쯤 품고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야
슬리피캣   
매강 학습만화같애 나같은 긴 글 못읽는 애도 이해 잘된당
  
삶의 방식이 면역력에 더 큰 강화효과를 줄 수 있다...베넷교수님 멋지네요
  
장씨 아저씨 얘기에 한번 울고
베넷 아저씨 얘기에 웃다 울음
진미오징어   
ㅠㅠ손에서 놓질 못햐겠다
진미오징어   
ㅠㅠㅠㅠㅠㅠㅠㅠ 남자의 사랑.
슬리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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