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은 마구간에 있었다. 린다의 털을 빗어주고 있었다. 앰버가 오기로 돼 있었다. 제일 예쁜 린다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린다는 분명 앰버를 싫어할 것이다. 발로 사람을 패버릴지도 모른다. 스티븐슨이 낫겠다. 걔라면 아무리 싫어도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냥 인사차 한 말인데 진짜로 올 줄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금방 올 줄은 몰랐다. 앰버는 바쁘게 사는 여자애다. 그가 가입한 사교 모임이 열가지쯤 된다. 학교 학회도 대여섯개 참여하고 있으며 과외 봉사 활동도 주기적으로 나가고 있다. 이런 곳에 놀러올 시간은 어떻게 내는 걸까?
고급 스포츠 세단 냄새가 난다. 자동차 냄새는 고약하지만 단순하다. 한나절이면 냄새를 구성하는 분자들을 대부분 가려낼 수 있다. 하지만 말의 냄새는 그렇지 않다. 냄새를 구성하는 분자의 수가 무한대에 가깝다. 몇 년이 걸려도 냄새 원인 분자를 다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백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 차를 대신했다니. 어디 나갈 일이 있으면 무조건 말을 타야 했다니. 자동차의 발명으로 얼마나 많은 말들이 구원 받았던가? 이 단순한 기계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말들이 더 고통받았을까? 아버지는 어째서 기계 문명을 적대시했을까? 기계야 말로 생명의 고통을 줄일 최선의 대안 아닌가?
삐삐가 울린다. “도착. 차 아무데나?” 앰버는 주은의 삐삐에 문자를 보내는 걸 좋아했다. 최소한의 단어만 최소한으로 줄여 보내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어차피 의대 실습에 들어가면 다들 삐삐를 지급 받을테지만 앰버는 주은처럼 개인 용도의 삐삐를 따로 장만하겠다고 했다.
앰버가 호들갑 떨며 들어온다. 자기 집이 진짜 올드머니인 줄 알았는데 여기가 진짜라며 지금 당장 부모님 집 팔아 버리고 여기로 이사 오고 싶다고 시끄럽게 떠든다. 맥기 아저씨가 외부 약속이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스티븐슨을 본 앰버는 다시 또 호들갑을 떤다. 자기도 말을 타 봤다면서, 자기 친척 누가 목장을 갖고 있다고 거기에도 말들이 많다며, 이건 무슨 종, 저건 무슨 종, 마구 아는 척을 했다. 맥기 아저씨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 자리에 있었으면 패버렸을지 모른다.
앰버가 말을 타 보겠다는 걸 절대로 안 된다고 말렸다. 맥기 아저씨는 자기가 없을 때 절대로 말에 사람을 태워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 했다. 말에 함부로 사람을 태우면 사망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앰버는 응석이 심했다. 자기 말 타려고 승마복으로 빼 입고 왔는데 이럴 수 있냐며 투정을 부렸다. 자꾸 말에 안장을 얹으려 하질 않나 이 말이 자기를 좋아한다며 목을 끌어 안질 않나, 앰버는 너무 들떠 있었다. 남의 집에 와서 너무 신이 나서 선을 넘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은이 너는 인간이 모질다는 둥, 왜 그렇게 남자 같냐는 둥 힐난을 한다. 집에서 트리시가 나온다. 트리시에게 오늘 친구가 올 거라고 얘기 했다. 하지만 굳이 와서 인사할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트리시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다. 굳이 여기까지 나와 앰버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트리시는 앰버를 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아는 걸까?
앰버, 얘는 트리시야. 내 사촌. 고등학교 1학년.
우와 안녕? 준 조카도 미녀잖아!
루리카 님이시죠?
알고 보니 트리시는 앰버 인스타그램 구독자였다. 앰버의 인스타그램은 구독자 수가 수십만명이니 트리시가 그 중 한명이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알고 보니 앰버는 인스타그램을 2개 운영하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 여행 인스타그램, 다른 하나는 럭셔리 패션 인스타그램. 트리시는 럭셔리 패션 인스타그램 운영자 앰버를 아는 거였다.
둘이 오래 알던 친구처럼 수다를 떤다. 서로 네가 더 미녀라며 사탕발림을 하더니 착용한 옷이랑 액세서리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신상품 이야기로 넘어간다. 주은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이대로 두면 일박이일 이 자리에서 밥도 안 먹고 수다를 떨 것 같다. 앰버가 말을 웃기게 하는지 트리시가 깔깔대며 웃는다. 트리시의 반짝반짝 즐거운 얼굴을 보니 왠지 뿌듯하다. 앰버를 데려오기 잘 한 거 같다. 주은은 트리시가 자신의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배우자에 더 가까우려나? 주은은 자기가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는 왜 그렇게 남자 같애? 앰버의 말은 농담이 아닐지 몰랐다. 엄마는 언젠가 네가 아들이길 바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남자를 낳아서 싸움 잘 하는 놈으로 키우고 싶었다고.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데려가서 패주려고 했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주은은 자기가 혹시 몸만 여자로 태어난 건 아닐까 생각했다. 몸만 여자고 정신은 남자로 태어난 건 아닐까. 엄마의 소원을 기묘하게 뒤틀어 버린 자연의 유희가 아니었을까.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 슬퍼졌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엄마를 지킬 수 있었을까?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놈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을까?
눈치 빠른 앰버가 주은의 달라진 표정을 인지한다.
어머, 준 우리 둘만 얘기한다고 슬퍼졌나봐.
아니에요, 언니는 그런 걸로 안 삐쳐. 지금 다른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귀여운 트리시. 트리시가 엄마를 닮은 게 위안이다. 옛날 일이 생각나 슬퍼져도 트리시를 보면 기분이 좋다. 트리시는 앰버가 주은과 같은 대학 같은 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주은이 앰버를 자신과 같은 학교 다니는 동기라고 소개하자 크게 놀란다. 공부도 잘하시는 줄 몰랐다며 제법 우아한 말투로 칭찬해준다. 주은이랑 있을 때는 철딱서니 없는 말괄량이였던 트리시는 이럴 때 보면 교양있는 부자집 여자애 같다.
둘의 관심사가 자동차로 이어진다. 트리시는 앰버의 최신 스포츠 세단에 관심을 보인다. 앰버는 아마도 트리시를 자신을 차에 태워줄 것이다. 설마 자기 집에 데려가진 않겠지. 그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주은은 앰버를 트리시에게 맡기고 볼일을 보러 집으로 들어갔다. 트리시가 사교적인 성격이라 다행이다. 처음 본 사람 대하는 솜씨가 행사 요원 급이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트리시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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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은 그날 밤 일식집에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술에 취했던 것 같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해서 서로를 부담스럽게 만든 것 같다. 엄마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서 이런 건 모리스와 공유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술 자리에서 모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의심할 것이다. 이것이 정말 엄마의 연구 결과인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실험을 한 것인지, 어떤 이들을 대상으로 어떤 임상 과정을 거친 것인지. 모리스는 결국 이것이 엄마의 연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엄마는 학자 타입이 아니었다. 하다 안 돼도 끈덕지게 다시 생각하고 길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건 아버지가 잘 했다. 엄마는 하다가 안 되면 다른 데 관심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주은은 엄마가 지그소 퍼즐을 완성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1/3까지만 하다 그만 두고 다른 걸 하는 사람이었다.
모리스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 모른 척 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리스의 겉모습에 속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양순한 부자집 도련님인 줄 알고 만만하게 대했다가 피를 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 트리시가 그동안 많이 얘기해줬다. 내색하지 않는 건 모리스의 비밀 병기였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가, 아무 일 없는 줄 알았다가, 뜻밖의 역습을 당한 모리스의 지인들은 큰 충격을 받고 모리스를 두려워 했다. 모리스는 그날도 그런 척 했을 것이다. 주은이 말한 연구 결과, 아닌 줄 알면서도, 그거 전부 캐런이 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고 한 거였을 것이다.
문제는 아버지의 연구다. 혹시라도 주은의 노트북이, 수사 대상이 돼 압수될 경우, 암호화된 아버지의 연구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왜 이 부분이 암호화 된 것인지 추궁받을 것이다. 주은은 암호화 된 문서를 암호로 보이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평범한 문서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평범한 연구 논문처럼 보이는데 실은 아무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서로 만들 수 있을까?
방문이 벌컥 열리고 트리시가 들어온다. 주은은 트리시 방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는데 트리시는 하지 않는다. 트리시는 자기가 주은을 믿기 때문에 노크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인의 생각 없는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한 궤변이지만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트리시는 주은이 감출 게 없기 때문에, 방에서 허튼 짓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노크를 하지 않는 것이고, 주은은 트리시가 감출 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노크를 하는 것이다. 트리시는 주은을 대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것이고, 주은은 있는 것이다.
트리시는 앰버와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 돌아왔다. 말 구경을 하러 왔지만 말 구경은 하다 말고 집 구경만 하다 갔다고 한다. 앰버는 트리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건물 주소도 알려주고 자기가 애정하는 럭셔리 미용 샵 주소도 알려주었다. 앰버가 트리시에게 그랬다고 한다. 자기는 주은과 친해지고 싶은데 주은은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우리 언니는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다 그런다고.
흠.
언니가 그게 매력이라는 걸 잘 모르더라고.
그런 거야?
그런 거지. 아무나 다 좋다고 정 주면 사람이 싸 보이잖아. 언니처럼 가려서 줘야지.
앰버는 어땠어?
뭐가 어때.
너랑 잘 맞는 거 같아서.
재미있는 사람이야. 재미있는 사람이지.
둘이 또 만나기로 했어?
연락처는 주고 받았어.
그런데 어째 시큰둥 하네?
그런 거 있잖아 사람이 뭔가 비어 보이는 거. 거짓말 할 거 같고 그런 느낌. 모르지 뭐. 그냥 그런 거 같다고.
흠.
트리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아니면 앰버랑 오래 수다를 떠느라 피곤했거나. 한참 뒤에 트리시가 다시 말했다.
언니는 좀 더 사교적일 필요가 있는 거 같애.
왜?
언니는 사람을 끄는 재주가 있어.
그게 뭔데?
사람들이 언니 좋아해. 언니는 그걸 이용해야 해.
어떻게?
그건 언니가 알아내야지. 사람들이 언니 주변에 모이면 권력을 갖는 거잖아? 여왕벌처럼. 사람들을 부려 먹을 수도 있고, 국회의원도 할 수 있고.
주은은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는 국회의원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중세시대 영주와 다름 없는 권력을 이용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연구를 가능케 했다. 아버지는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트리시가 말을 이었다.
언니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해. 언니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해. 언니는 내 남편만 하기엔 아까운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