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43
모리스는 일식집을 예약했다. 병원 건너편 블록에 고급 일식집이다. 중요한 손님들을 모시고 가는 접대용 식당이다. 아버지 헨리가 발견한 곳이다. 아버지가 병원장일 때 새로 생긴 가게였다고 했다. 아버지가 저녁에 일을 마치고 우연히 들렀다 너무 맛있어서 단골이 됐다고 했다. 갈 때마다 손님이 없길래 식당 주인에게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느냐 물었더니 망하지만 않고 계속 일 하는 게 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헨리는 그 말을 듣고 식당에 투자했다. 식당을 넓히는 것이 좋겠다고 식당을 크고 화려하게 새로 지었다. 헨리는 돈이 돈을 부르는 법이라고 말했다. 테이블 4개에 불과했던 구멍 가게 일식집은 궁궐 같은 대형 요식업으로 거듭났다. 식당의 수익이 크게 늘었지만 아버지는 투자 원금만 돌려 받았다. 식당 주인은 아버지를 몇번이고 직접 찾아와 수익금을 나눠 주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받기를 거절했다.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밖에선 누구보다 인자한 호인이었다. 오갈 데 없던 헬렌을 가정부로 들인 것도, 퇴물 기수 맥기에게 집을 지어준 것도, 모두 아버지 헨리의 평소 전형적인 행태였다. 

그랬던 사람이 자신의 아내에겐 왜 그렇게 모질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대체 어떤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을까. 

모리스가 “아버지의 일식집”이라고 부르는 일식집은 가족 행사 장소이기도 했다. 오늘은 주은이 성인식을 하는 날이다. 주은을 손님으로 모시는 날이다. 

모리스는 사실 “아버지의 일식집”에 가는 게 부담스러웠다. 밥값을 받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갈 때마다 너무 과잉 친절을 베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식당만큼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 좋은 곳은 없다. 모리스는 예약을 하면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자리니 요청이 있을 때만 종업원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모리스는 주은을 병원에서 만나 함께 일식집으로 갔다. 일식집에 들어서는 주은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일식집 천장 벽 바닥 모두 다른 세상인 것처럼 이국적이다. 주은이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하다 발을 헛디뎠다. 이런 곳에 처음 와 본 것 같다. 이제 좀 어린애 티가 난다. 주은은 그동안 너무 귀여운 데가 없었다. 

병원장님 오셨다고 직원들 움직임이 분주하다. 이번에 같이 오신 손님이 어린 여자애인 것이 의아한 눈치다. 제일 넓은, 보안이 잘 된 방으로 모신다. 이곳은 손님이 방에서 버튼을 눌러야 접대가 허용된다. 방 안에서 외부를 CCTV로 모니터링 할 수도 있다. 

정신없이 방 안을 둘러 보는 주은의 목에 목걸이가 눈에 띈다. 유명한, 값 비싼 브랜드였지만 모리스는 그런 것 모른다. 그에겐 그저 처음 보는, 눈에 띄는 목걸이일 뿐이다. 모리스가 물었다. 

그 목걸이도 트리시랑 같이 산 거니? 

아뇨, 할머니가 주신 거에요. 엄마 건데 거의 안 썼다고. 

새 걸 사주지 왜 쓰던 걸 주고 그래. 

새 것도 사주셨어요. 그건 오늘 안 차고 나왔어요. 

어머니 조안은 캐런에게 어릴 때 읽어줬던 동화책 세트도 주은에게 줬다. 주은이 더 어렸으면 동화책을 읽어 주려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주은을 캐런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주은은 캐런의 길들여진 버전이었다. 다 같은데 성질만 달랐다. 캐런은 야생이었다.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 같은 아이였다. 주은은 캐런에 비하면 군용마다. 군대에서 훈련받은 여자 아이다. 

트리시가 하루종일 네 얘기만 해. 둘이 많이 친한가 봐. 

주은은 트리시와 무엇을 하고 노는지 모리스에게 이야기했다. 둘이 같이 본 영화, 같이 돌아다닌 공원, 식당, 쇼핑몰, 그리고 공연... 주은은 들떠 있었다. 친구에게 수다 떨 듯 모리스에게 수다를 떨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모리스는 믿을 수 없었다. 원래 원수지간이었는데 이제는 친자매보다 친하다. 모리스는 10대 여자 아이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놀라운 건 트리시가 양순해졌다는 점이다. 주은이 오기 전, 모리스는 트리시의 사춘기가 무서웠다. 캐런도 저 나이대 엇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정 붙일데 없으면 밖으로 한눈을 팔게 되고, 밖으로 한눈을 팔면 캐런처럼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마침 주은이 온 것이다. 트리시의 사춘기 공포는 주은에 의해 사라졌다. 주은은 가정의 수호자다. 캐런이 우리 가족에게 보내준 은총이다. 

술상이 들어왔다. 주은은 이제 18살하고 8개월이 지났다. 성인이 된 기념주다. 제임스도 내년에 18살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면 여기 데려올 생각이다. 18살 여자애가 좋아할만한 사케로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유자 소주를 가져왔다. 술을 맛 본 주은의 눈이 번쩍 떠진다. 이거 술 맞느냐고 묻는다. 어린애들은 역시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순진한 것. 어른들은 이런 술 안 마신다. 진짜 술을 마신다. 

술이 술 같지 않다며 홀짝홀짝 한병 다 비워 가는데 주은은 술이 전혀 오르지 않은 것 같다. 술이 센 건가? 생각해 보니 캐런도 그랬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여자였다. 같이 술을 먹던 남자들이 먼저 골아 떨어질 때까지 캐런 혼자 멀쩡했다. 그럼 그렇지 누구 딸 아니랄까 봐. 그럼 이제 어른 술을 시켜 볼까. 모리스는 직원을 불러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학교는 어때? 

재미있어요. 애들하고도 잘 지내고요. 

너는 지루할텐데. 나 1학년 때는 커뮤니티 봉사 활동 한 기억 밖에 없어. 너는 현장에서 일한 베테랑이잖아. 

…그때 사실 힘들었어요. 진짜로 사람이 죽으니까. 

지금이 나아 그럼? 

저는 지금이 나아요. 재미없다 지루하다 그런 것도 너무 행복해서 하는 말인 거 같아요. 

“재미가 없다는 건 너무 행복해서 하는 말.” 이 한 마디는 주은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케 한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자랐다는 얘기다. 모리스는 주은의 과거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애비가 미성년자 딸을 응급실에 상주시키면서 사람이 피 흘리며 죽는 꼴을 보게 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술이 나왔다. 주은에게 따라 줬더니 맛을 보고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그대로 다 마셔 버린다. 이번 술은 달지도 않고 과일향도 나지도 않는다. 진짜 어른 술이다. 주은은 술이 잘 받는 체질인 것 같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어?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랑 같이 이렇게 외식도 하고 그랬어? 

아버지랑 같이 밖에 나간 적은 없어요. 아버지는 병원에만 있었어요. 

아버지랑 그럼… 여행 간 적도 없고, 유원지에 간 적도 없고… 가족 행사 같은 것도 없었어? 

예 없었어요. 

주은은 1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거의 없었다, 별로 없었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단 한번 비슷한 일도 없었다는 얘기다. 주은의 아버지는, 아예 그런 약속조차,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은에겐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캐런이 죽은 뒤로 여기 오기까지 내내 혼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있었을 거 아니야. 

예… 저랑 친한 아저씨 아줌마들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일하시는. 

또래 친구가 아니고… 어른들이었던 거야? 

예. 또래 친구는 없었던 거 같아요. 

대체 어떻게 된 애비인가. 딸을 방치한 거였다. 딸을 자기 일터에 들여놓고 자기가 알아서 먹고 자게, 죽든 살든 상관없이 내버려 둔 것이다. “친한 아저씨 아줌마들”은 또 뭐야. 씨족사회 품앗이 같은 건가? 석기시대 공동육아 같은? 캐런은 어떻게 그런 남자와 연을 맺고 아이를 낳은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체 무슨 매력으로? 

벌써 술이 절반쯤 비었다. 이래도 괜찮은가? 무슨 애가 이렇게 술을 잘 마시지? 확실히 술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니 대화가 자연스럽다. 음식도 절반 이상 나왔다. 주은이 잘 먹어서 다행이다. 젓가락질을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중국에서 먹었던 것들은 괜찮았을까? 영국보다는 나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먹는 것만큼은 여기보다 나았을 것이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모리스는 “방해하지 마시오” 버튼을 눌렀다. 

사실은…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찾아 왔었어. 병원으로. 아버지가 중국에서 한 연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더라고. 

주은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모리스를 바라 보았다. 좋지 않은 느낌이다. 주은이 염려했던, 설마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사람들… 너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데 그 사람들이 궁금한 건 네가 아버지의 연구 결과를 갖고 있느냐는 거야. 

당연히 아버지의 모든 연구 결과는 주은이 갖고 있다. 하지만 문제될 일은 없다. 아버지의 연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뜬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아버지와 관련된 미신에 속은 것이다. 주은은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어떤 연구 말씀이죠? 

뭐라고 정확히 얘기는 안 해. 국가 안보 뭐라고 하는 걸로 봐서는… 전염의 위험이 있는 미생물 연구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저는 아버지 연구를 갖고 있지 않아요. 아버지의 모든 연구 결과는 중국 정부 소유로 넘어갔어요. 제가 갖고 있는 건 엄마의 연구 결과에요. 

모리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 생존 확률 반반인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기분. 

캐런의 연구? 

진작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정리 중이에요. 엄마가 남긴 연구가 양이 많아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내가 볼 수 있을까? 

예, 보여드릴게요. 

모리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머지 음식을 모두 들이라고 했다. 술도 한병 더 시켰다. 캐런이 남긴 것이 있었다니. 주은을 남긴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만 학술적 업적까지 남겼다면 그것 또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주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중국 정부가 연구 결과를 몰수했다니 정보부는 중국 정부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그쪽에서 무슨 생물학 무기를 만들든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우리 가족하고만 관계 없으면 된다. 모리스는 주은에게 캐런의 연구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주은은 모리스에게 조목조목 답해 주었다. 

주은의 이야기를 들은 모리스는 믿을 수 없었다. 캐런은 어떤 인생을 살았던 걸까? 캐런은 주은을 낳고 엄마가 아닌 알렉산더 플레밍으로 산 것이다. 페니실린보다 더 위대한 발견, 한두가지가 아닌 대여섯가지나 되는 천지개벽 수준의 발견을 한 것이다. 주은의 의학 지식 수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18살인데, 이제 의대 1학년인데, 이렇게 많은 걸 알 수 있는 건가? 주은은 이미 의학 생물학 전문가였다. 의업에 30년 종사한 모리스에 뒤지지 않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느새 세번째 술병이 비워졌다. 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술 한 병을 더 시켰다. 모리스는 주은과 이야기 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동안 어린 애라고 너무 낮춰 봤다. 주은은 천재다. 캐런도 천재였지만, 주은은 더 천재일지 모른다. 주은은 졸업하면 모리스의 병원에서 일할 것이다. 모리스의 병원을 물려받을 사람은 주은이다. 그런데 왜 쟤는 술이 하나도 취한 것 같지 않지. 

그러니까 일부러 중복 감염을 일으킨다는 거잖아. 면역력을 억제해서, 1차 감염 바이러스의 천적을 투입하는 거라고. 

예, 1차 감염 바이러스는 인간 면역력에 우세하고, 2차 감염 바이러스는 1차 감염 바이러스에 우세하고…

인간 면역력은 2차 감염 바이러스에 우세하고… 그래서 “바이러스성 삼각관계”라고… 

2차 감염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난 면역 체계는 잠복기에 들어간 1차 감염 바이러스에도 방어력을 갖게 돼요. 

아하. 

더 흥미로운 건 이 삼각 관계에서 살아 남은 바이러스가 변이된다는 사실이에요. 더 이상 인간에게 감염되지 않는 거에요. 

모리스는 임상 실험은 어떻게 한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린 아이에게 물어볼 질문이 아니었다. 중복 감염 자체만으로 환자의 생명은 위험해진다. 그런데 아예 면역력을 죽인 상태에서 중복 감염을 시도하는 행위는 생체 실험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독성이 약한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해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이런 실험은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 병원에서나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세계 각국에서 그런 류의 생체 실험은 빈번하게 있었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 

다시 또 생각해 보면 그 반대의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안전한 약이 아닌, 안전한 임상 실험을 선택한 결과,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적도 있지 않았는가? 그때 차라리 과감하게 위험한 임상 실험을 감행했다면 더 많은 인명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캐런의 말대로, 현대 의학은 더 많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보다 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발달한 게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도덕이나 법리는 의사의 몸보신을 위한 변명인 걸까? 캐런의 연구는, 과정이 아닌, 결과를 봐야 하는 것일까?

모리스는 주은이 들려주는 캐런의 연구 이야기에 푹 빠졌다. 바이러스성 삼각관계는 오각관계로까지 확장 적용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곰팡이의 방어 물질을 통해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법, 다른 종에 감염시키는 법, 반대로 같은 종에 감염되지 않게 하는 법, 식물 꽃가루를 통해 동물의 면역 체계를 통제하는 법 등에 대해 이야기 들었다. 모리스는 어릴 때 과학자가 되고 싶어 이공계를 선택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의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과학자가 되어 사막에 열대우림을 만들고, 시베리아에 지열 에너지 도시를 설계하는 상상을 했다.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는 영생의 도시를 만드는 상상도 했다. 그때 그랬는데, 지금은 병신 같은 의료 장비가 언제 작동할지 마음 졸이는 찌질한 소시민 신세. 세상은 넓고 과학은 무한한데 자신은 평생 자본의 굴레에 갇혀 살아야 할 운명인가 씁쓸한 감정도 느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빈 술병이 4개로 늘어 있었다. 이걸 내가 다 마신 건가? 그렇다면 너무 많이 마신 건데. 그런데 주은은 술을 마시긴 한 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몸이 여전히 곳곳하다. 아직도 젓가락질을 하며 음식을 주워먹고 있다. 초식동물 같다. 하루종일 끊임없이 먹는 초식동물. 귀여운 초식동물. 

삼촌. 

응?

취했죠. 

응? 아니야. 그럴리가. 내가 어린애 데리고 뭐하는 짓이지? 이제 집에 가자. 

혀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물을 좀 마시면 다시 혀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모리스는 택시를 불렀다.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주은은 어릴 때 이야기를 했다. 기분 좋게 취했는지 어린이처럼 재잘재잘 떠들었다. 엄마와 캄보디아에서 살 때 있었던 일, 앙코르와트에 놀러 갔을 때 있었던 일, 그곳 승려들과 친구가 됐던 이야기, 남자 관광객들이 엄마에게 반해서 쫓아 다녔던 이야기, 사원을 오르다 기절한 여자 관광객을 엄마가 응급 조치로 살린 이야기, 아무도 오지 않는 높은 유적지 위에서 엄마와 단 둘이 노을을 봤던 이야기, 시간이 영원히 정지한 것 같았던 그때, 지구 전체를 덮어 버린 것 같았던 새빨간 노을, 그때 둘이 말없이 손 꼭 붙잡고 서로에게 기댔던 기억… 모리스와 주은은 어느새 택시에서 내려 집 앞 공원 벤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캐런이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모리스는 캐런이 그리웠다. 캐런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고 싶었다. 모리스는 혼잣말 하듯 아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캐런은 어떤 엄마였을까?

엄마는… 좋은 친구였어요. 

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 

주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주은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모리스의 감정이 공유되고 있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모리스는 주은의 손을 꼭 쥐었다. 마주 잡는 여자 아이의 손이 거칠고 억세다. 모리스는 말 없이 주은의 머리에 뺨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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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디는 아버지와 식사 중이었다. 고급 식당을 예약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극구 만류했다. 할 수 없이 저녁이 나오는 맥주집에서 식사를 했다. 대형 TV에서 뉴스가 시끄럽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취객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음과 경쟁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곳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밥을 먹을 때 언제나 항상 말이 없었다. 둘은 할 말이 있어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은 대부분 회사에서 했다. 아니면 길을 걸으면서 하든가. 앉아 있을 때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암묵적으로 굳어진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피터 뎀시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뎀시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 아버지가 아프면 뎀시가 아버지 밭에 와서 일을 해주고, 뎀시가 아프면 아버지가 뎀시 밭에 가서 일을 해주는, 아버지와 뎀시는 농토의 전우였다. 브로디는 어릴 때 뎀시 아저씨의 냄새를 처음 맡고 놀랐다. 아버지와 혈연 관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냄새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주변엔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와 냄새가 비슷한 사람들. 감정 기복이 없는, 기계처럼 충직한, 고통 받아도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 

뎀시는 소작농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자기 소유 땅을 갖게 된 건 죽기 겨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는 유능한 농부였다. 그는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고, 작물을 건강하게 키워 최대한의 소출을 내는 재주도 있었다. 하지만 돈을 모으는 재주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더 싼 가격에 농작물을 내다 팔았고, “싸고 질 좋다”는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남들보다 두배 세배 더 열심히 일했지만 그의 손에 남은 건 형편없이 적은 수입과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 든 몸을 달래기 위한 약 뿐이었다. 

브로디는 뎀시 아저씨 사정이 딱했다. 그래서 더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농사 지을 수 있는 재료와 장비를 대여해 주었지만 뎀시는 그런 도움 받는 걸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왜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지 아버지에게 물어 보자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다. “농부는 자기 하던대로 하고 싶어하지 남이 하란대로 하고 싶어하지 않아.”

어떻게 돌아가신 거에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안 아픈데가 있었겠냐. 너무 아파서 병원도 못 갔다는데. 

아버지에겐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였지만, 아버지는 별로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브로디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나무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버지였다. 행운도, 불운도, 그저 각자의 사정이고, 죽음도, 생존도, 그저 자연 흐름의 일부였다. 아버지에겐 깊은 지식도, 확신 가득한 깨달음도 없었지만, 대신 누구보다 관조적이었다. 

내일 장례식도 가야 할 거 아니에요. 

회사 창립 기념식은 어차피 저녁 아니냐? 끝나고 가면 되지 않나. 

내일은 회사 창립 20주년이다. 행사장을 빌려 놓고 연예인급 사회자도 섭외했더니 아버지는 오지 못하게 생겼다. 장례식에는 지난 50년 동안 농토의 전우로 살았던 친구들이 총집합할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는 절대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다. 아마 밤늦도록 술을 먹을 것이다. 농토의 전우들은 뎀시가 남기고 간 땅을 어떻게 관리할지 의논할 것이다. 할 수 없다. 어차피 아버지는 창립 기념일 같은 행사에 도움되는 사람이 아니다. 

농부는 기념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삶의 이정표나 변수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브로디는 평생 한번도 그런 걸 챙겨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진짜 농토의 전우는 브로디였을 것이다. 불량 종자를 들였을 때도, 수확물에 곰팡이가 생겼을 때도, 사업 수익이 폭락했을 때도, 아버지와 브로디는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숨소리만으로 협의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아버지는 브로디를 대학에 보내려고 했다. 대학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브로디가 대학 진학을 마다하고 밭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저렇게 똑똑한 애를 이런 좁은 세상에 가둬 두면 되느냐고. 아버지는 그 말에 적지 않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자기 때문에 자식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 아닐까 무서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고 했다. 여기는 좁은 세상이 아니라고. 

농토의 전우는 서로 묻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법이다. 아버지는 브로디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디는 아버지의 생각을 실현했다. 여기는 결코 좁은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 그 생각을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그것이 브로디의,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큰 업적이었다. 

너도 이제 마흔이잖아. 만나는 여자 없냐? 

아버지의 특이 화법이다. 알면서 또 물어 보기. 아버지는 브로디가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걸 며칠 전 이야기 듣고 또 이렇게 물어 보는 중이다. 어쨌든 이번엔 다른 때보다 더 오래 만나는 중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대감에 물어 보는 것이다. 이번엔 결혼 하는 거냐고. 

너 입양하기로 했을 때 나는 반대했었다. 애가 없으면 없는대로 살지 뭐하러 남의 애를 입양하느냐고. 너 입양은 순전히 에밀리의 결정이었어. 

아버지가 브로디의 입양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브로디는 그냥 가만 듣기만 했다. 

먹일 입만 늘어나는 거다, 사는 게 더 팍팍해질 거다,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 네가 유일한 보람이었던 거야. 남이 낳은 자식인데, 키우니까, 내 자식 같은 거야. 너 키가 한달에 몇cm씩 자라는 걸 볼 때마다 뿌듯하고 기운나고 더 열심히 일하고 싶고 그랬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돼서 좋긴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는 다시 돌아가서 또 입양을 할 거야. 

그러니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얘기였다. 애를 기르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게 인생을 살게 해준다는 얘기였다. 아버지는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아버지보다 4살 어린 꽃집 하는 여자였다. 어머니와 많이 다른 여자였다. 어머니는 발랄하고 외향적이었는데 꽃집 여자는 얌전하고 내향적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사별하고 오래 혼자 살았다. 둘 다 식물을 기른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혹시 재혼을 하게 되면 아직 미혼인 아들 보기 부끄럽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재혼하시면 저도 할게요. 잘 되면 같은 날 결혼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죠. 

아버지가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TV 뉴스 볼륨이 커졌다. 속보였다. 

…팜플러스 회장 로리 맥닐리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는 소식입니다. 로리 맥닐리는 사기 협잡 횡령 혐의로 소환 통보를 받은 상태였는데요, 최근 살인 혐의가 추가되면서 체포 영장이 청구된 것입니다. 로리 맥닐리는 현재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일각에선 해외 도피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가게 주인이 채널을 돌렸다. 그동안 숨겨졌던 팜플러스의 실체에 대한 심층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팜플러스가 급성장한 진짜 비결은 건 영국과 밀약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맥닐리 가문이 돈을 대는 여러 조직 중 하나가 IRA였거든요 그러니까 영국 입장에선 “테러 지원 기업”이었는데 로리 맥닐리가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180도 달라집니다. IRA에 자금을 대는 기업에서 IRA 정보를 영국에 팔아 먹는 기업으로 변신한 거죠. 그 대가로 아일랜드 농축산물을 영국에 독점 수출한 겁니다. 영국에 붙어 먹은 이중 스파이였던 거죠. IRA에 자금을 대면서 영국 측에는 IRA의 정보를 밀고하는. 1970년대 IRA 테러 때마다 IRA 대원들이 일망타진 된 게 팜플러스가 영국에 제공한 정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천사의 미소로 등에 칼을 꽂는다.” 90년대 뉴스 기사 제목이었어요. 애국 기업인 척 하면서 실제론 애국자들을 팔아 먹는, 고객 만족도 1위 기업이면서 실제론 서민 삶을 잔인하게 짓밟아 온 팜플러스의 실체를 알린 보도였는데, 해당 언론사는 오래지 않아 자금난으로 폐업했습니다. 방대한 심층 보도 기사였는데 아무도 관심 없었어요. 워낙 애국 기업 이미지가 공고해서 사람들이 모함이라고 생각한 거죠. 팜플러스의 실체를 알리려는 시도는 부지기수로 많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팜플러스는 애국기업, 불황에도 사재를 털어 애국자들을 먹여 살린 기업’ 그렇게 믿었으니 소용이 없었죠. 팜플러스가 지금껏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은 이유, 그런 짓으로 망하긴커녕 제조, 유통, 언론까지 장악한 완전무결한 슈퍼 기업이 된 이유, 이제 아시겠습니까? 

작품 등록일 : 2026-03-30

▶ Brody’s files #44

▶ Brody’s files #42

응 팜플러스 망해라
  
세상에 인과응보 권선징악따윈 없다 해도
로리 맥닐리만큼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고스란히 다 받아내길 바람

소장님!!!!!!!
소설속에서라도!!!!!!!!!
우덜 좀 가슴 뻥 뚫리게 확 마 조져줏씨요!!!!!
진미오징어   
농토의 전우는 서로 묻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법이다

뜨거운 눈물이 아침부터 불불불불 쏟아짐
진미오징어   
야생마 캐런
그리고
그에서 진화된
군용마 주은

존잼이다
진미오징어   
1빠 농부... 난 농부같은 사람들이 좋더라 주위에 더 많아졌으면.. 그사람들은 원래부터 농부같았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무언가를 기르다보니 농부같아진걸까
슬리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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