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거먼은 이곳이 병원이라고 믿었다. 자기는 환자이며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구금 상태이며, 치료가 아닌 샘플 채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삭발되었고, 피부는 면도기로 제모되었다. 필립은 다른 건 괜찮은데 매일 피를 뽑아 가는 건 참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방독 수트를 뒤집어 쓴 직원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냐 그 많은 피를 뽑아다 대체 어디에 쓸 거냐 물어 봐도 대답이 없었다. 필립은 사람들이 불친절한 것보다 자기가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분명히 이것 좀 풀어달라고 말 했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자꾸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도 이상했다. 처음엔 방독 수트 직원들이 침을 닦아주더니 이제는 아예 본 척도 하지 않는다. 필립의 일과는 평범했다. 가로 세로 10mX15m 사이즈의 방에서 먹고 싸고 자다 피 뽑히는 게 전부였다. 방바닥에 쿠션 주름을 세다 마음이 갑갑해지면 벽을 향해 달렸다.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쳤지만 벽은 바닥보다 푹신했다. 벽을 향해 달린다, 벽에 머리를 들이 박는다, 필립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자 노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사실은 지금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이거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방에 살았다. 음식도 맛이 없었고, 취미거리도 없었다. 게다가 방은 하루종일 울렁울렁 흔들렸다. 가끔 어지러워 토 할 때마다 이게 맛 없는 음식 때문인지 멀미 때문인지 궁금했다. 그때 비하면 살만해진 것이다. 방도 쾌적하고 음식도 기름지다. 무엇보다 울렁대지 않는 게 좋았다. 단단한 바닥이,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 감사했다. 할머니는 매사 감사하고 살라고 했다. 이제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도 할머니처럼 매사 감사하고 살게 된 것 같다. 나이를 헛먹지 않은 것이다. 인생이 나아지는 것이다. 필립은 문득 문득 꿈을 꾼 것이 기억 났다. 누군가를 날카로운 것으로 마구 찌르는 꿈이었다. 토끼도 있었고, 개도 있었고, 돼지도 있었고… 그리고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여자애도 있었고, 남자애도 있었고, 그리고 어른들도 있었다. 여자 노인을 찌르려고 하다가 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만 둔 것도 생각났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한번이면 모르겠는데, 그런 꿈을 연속해서 수십번은 꾼 것 같다.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러는 걸 본 것일지도 모른다. 내 앞에서 누군가 사람을 찔러 죽이는 걸 본 걸지 모른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가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내가 그래 놓고 꿈에서 그랬다고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뒤로 꿈을 꾼 적이 없다. 자고 일어나면 항상 자기 전과 동일한 풍경과 기억이다. 방독 수트 직원들이 오면 잠이 드는 것이고 그들이 가고 나면 잠에서 깨는 것이다. 전선이 치렁치렁 달린 못생긴 모자를 쓰고 있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끈이 주렁주렁 달린 의자 위에 묶일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필립은 의자에 묶여 있을 때마다 자신이 침이 길게 길게 고무줄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침을 흘리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편했다. 기분이 좋았다. 침을 흘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빵이 썩었어.
필립 거먼은 법적으로 구속 상태였다. 그는 다수의 폭행 및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 영장이 발부됐다. 특이한 점은 기소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는 기소 중단 상태였다. 그는 기소되면 안 되는 범죄자였다. 그는 국가 자산이었다. 정신 지배 연구의 최신 실험체였으며, 브로디의 장기 미제 사건의 마지막 용의자였다.
필립의 옷과 머리카락, 피부 조직과 혈액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필립이 있었던 곳은 콘크리트 지하 감옥이 아니었다. 그는 바다 위에 있었다. 아마도 선박이었을 것이다. 배 위에 만들어진 연구 시설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2년 동안,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가혹한 실험을 견뎌냈다. 실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른다. 실험실에서 풀려난 필립이 공격한 사람은 총 6명이었다. 브로디가 거기 왜 포함돼 있었는지, 정말 원래 목표물이었는지는 모른다. 살해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살해의 의도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필립은 말 그대로 실험체였다. 쓰고 버리는 실험체.
브로디는 필립이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한 곰팡이에 감염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연구실에서 배양된 곰팡이일 것이다. 곰팡이는 호흡기를 통해 감염됐을 것이며, 폐 혈관에 환각 물질을 생산해 숙주의 행동을 바꾼다. 정성주의 정신 지배 원리와 같은 메커니즘이다. 필립에 감염됨 곰팡이는 이 한 종류가 아닐 것이다. 훨씬 더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필립은 유일한 감염자도 아닐 것이다. 브로디는 정성주의 연구 결과가 어떤 경로로 유출된 것인지 궁금했다. 정성주는 분명 보안에 철저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통제되지 않은 실험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필립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 쉽지 않은 실험이라는 것이다. 필립은 의도된 결과가 아닐 것이다. 정신 지배의 핵심은 지배력이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대상에, 필요한 행동을 해야 하는데 필립의 행적엔 어떤 일관성도 통제력도 없었다. 필립을 감염시킨 곰팡이는 숙주의 이성을 마비시키는데 그쳤다. 목표물에 대해 어떤 예측 가능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목표물 근처에서 허우적대다 붙잡히는 결과를 낳았다. 실험을 주도한 자는 아마추어였을 것이다. 정성주의 연구 결과를 빼돌린 어떤 멍청이에게 속아 쓸데없는 돈과 시간을 낭비한 슈퍼 멍청이일 것이다. 필립의 꼴을 보아 하니 앞으로의 실험도 줄줄이 이런 식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곰팡이의 환각 물질을 이용하는 것은 쉽다. 대신 통제가 어렵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정성주의 정신 지배에는 숨겨진 단계가 있었다. 뇌가 아닌 아닌 척추 신경계를 장악하는 방식이다. 암호를 풀기 전엔 알 수 없는, 적용이 지극히 어려운 방식이지만 정신지배 결과물을 정확히 통제할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추어들은 그런 단계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브로디가 필립의 샘플에서 얻은 수확은 자기 확신이었다. 저들이 왜 실패한 것인지, 정성주와 저들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브로디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었다. 공학은 데이터의 분석만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데이터에 기반한 예측을 따르지 않는다. 공학은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지만 생명은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지 않는다. 공학은 인간이 만든 세계지만 생명은 인간이 만든 세계가 아니다. 공학은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지만, 생명은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다. 인간은 공학을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은 인간을 예측할 수 없으며 생명의 미래를 지배할 수 없다.
브로디는 정성주의 연구가 농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성주의 뒤를 밟기 위해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브로디가 깨달은 것은 농업도, 의학도, 생명도, 모두 같은 원형을 공유한다는 사실이었다.
생명을 키우기 위해, 예상할 수 없는 세월을 기다리며, 브로디는 생명은 기르는 것이 아니라 길을 터주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바라보고, 관찰하고, 다그치지 않고, 되새기는 것이 농업의 유일한 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브로디가 깨달은 것은 생명은 인간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생명은 인간의 의도를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정성주가 인간의 운명을 예지할 수 있었던 건 인간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성주와 브로디,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브로디는 정성주가 자신에게서 어떤 운명을 보았을지 궁금했다. 정성주는 분명 브로디가 자신의 암호를 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성주는 그 뒤에 무엇을 보았을까. 정성주는 브로디의 미래에서 무엇을 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