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40
주은은 트리시의 숙제를 도와 주고 있었다. 

통계와 확률 과목이었다. 트리시는 독립 이벤트 independent events 문제 풀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2030년 12월 25일에 비 오는 거랑 2032년 12월 25일에 비 오는 게 어째서 서로 독립 확률이야? 내 평생 크리스마스에는 항상 비가 왔다고! 

실제로 그런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이벤트가 서로 영향을 받느냐 안 받느냐 따지는 문제잖아. 2030년에 비가 왔다는 이유로 2031년에도 비가 올 확률이 높다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 지난 10년 동안 12월 25일에는 비가 왔으니까 내년에도 비가 오겠지! 이렇게 생각하잖아! 그쯤 되면 12월 25일에 비가 오는 건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잖아! 그게 어째서 독립 이벤트야? 

트리시는 바보라서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트리시는 수학 문제가 현실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트리시가 가져온 독립 이벤트 문제들 몇 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백인 존의 100m 달리기 기록 갱신과 흑인 샘의 100m 달리기 기록 갱신은 완전한 독립 이벤트일 수 없다. 종 간의 경쟁은, 다른 인종이라도, 완전히 격리된 지역에 있더라도, 개체의 능력치 향상에 영향을 끼친다. 문제는 직접적 영향을 따지고 있지만, 동시대에 살고 있는 같은 종의 동물은 어떤 식으로든 개체 간 트렌드를 공유한다. 경쟁, 진화, 생활방식, 사고방식, 심지어 발병률까지. 아버지는 이를 “종의 파장 species wave”라고 했다. 아버지는 같은 시간대를 사는 같은 종 개체들은 서로 진화의 나침반을 공유한다고 했다. 서로 다른 문명에서 동시대 동일한 문화와 별명품이 발견되는 것도, 동일한 패턴의 역사가 매번 반복되는 것도, 서로 같은 진화의 나침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진화의 나침반이 더 이상 공유되지 않을 때 원래 하나였던 종은 서로 다른 종으로 갈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당당히 틀리겠어! 학교에서 현실을 가르쳐야지! 이론만 배우다 실전에서 죽으란 거야? 

주은은 트리시가 귀여웠다. 몬티 홀 독립 확률 문제는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해서 시무룩하더니 날씨 얘기가 나오니까 기가 살아서 펄펄 뛰었다. 트리시는 천성이 밝고 긍정적인 것 같다. 트리시는 내가 좋아서 뽀뽀한 걸까? 

공연을 보고 온 날이었다. 유명 록 밴드였는데 주은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들어봤을 리가 없다. 이름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들었지만 기억 나지 않았다. 원래 이름을 외우는 건 주은이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일이다. 트리시와 주은은 맨 앞자리 스탠딩 석이었다. 밴드 보컬이 트리시에게 계속 눈길을 주고 있었다. 트리시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팬 협연곡을 받는다면서 트리시를 무대로 불렀다. 트리시가 신청한 곡을 같이 불렀다. 트리시는 노래를 잘 했다. 긴장돼 죽겠다고 하면서 하나도 떨지 않고 잘 불렀다. 목소리도 창법도 귀여웠다. 관객들이 좋아했다. 트리시가 주은도 무대 위로 부르려는 걸 주은이 필사적으로 거절했다. 밴드 보컬은 주은이 한국인 아니냐고 물었다. 트리시는 어떻게 아셨냐고 한국에서 온 언니라고 거짓말 했다. 밴드 보컬은 한국에 자주 공연을 간다고 했다. 한국을 좋아한다고, 한국인들 너무 좋아한다고 주은을 또 무대에 올리려는 걸 다시 또 필사적으로 거절해야 했다. 광란의 공연은 예정 시간보다 30분 넘게 계속됐다. 에너지가 바닥나고 얼이 빠진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파 디저트 가게에 들렀다. 문 간판 천장 벽이 몽땅 다 분홍색이었던 가게였는데 역시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둘이 나란히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 보며 컵케잌을 퍼먹고 있었다. 트리시가 물었다. 언니 여자랑 뽀뽀해본 적 있냐고. 

아니 없는데. 왜? 

나는 있거든. 

왜 그런 거야?

그냥 심심해서. 

…좋았어? 

응. 

그렇구나. 

나랑 할래? 

뭘. 

뽀뽀. 

우리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하는거지.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여기선 그래도 돼. 

트리시는 노래만 잘 하는 게 아니었다. 뽀뽀도 잘했다. 새로운 종류의 컵케잌을 먹은 것 같았다. 트리시 쪽이 더 달콤했던 거 같다. 트리시는 언니랑 뽀뽀 하는 거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진이랑 동영상 찍어서 인스타에 올렸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상관 없다고 했다. 자기는 레즈비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레즈비언에도 예외가 있다고, 남자에게 인기 많은 레즈비언도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트리시는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 운동 하는 남자였다.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성격이 거친, 충동적인 남자의 냄새였다. 지금껏 트리시는 집에 들어올 때마다 오만가지 남자 냄새를 뭍히고 들어왔다. 대부분 비슷한 종류의 남자들이었다. 외향적인, 예측하기 힘든, 위험한 남자들. 지금까진 대부분 스쳐 지나는 만남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금까진 서로 콜라만 같이 먹고 헤어지는 관계였다면 지금은 서로 스킨십을 하는 관계였다. 주은은 냄새로 인한 정보가 가끔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렇게 알고 싶지 않은 사적인 정보까지 알게 되는 경우엔 코를 막고 모른 척 하고 싶었다. 되고 싶지 않은 경찰견이 된 기분. 차라리 경찰서에서 일했다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됐을텐데. 

숙제가 끝나고 트리시는 주은에게 물었다. 이 다음에 뭐가 되고 싶냐고.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책 읽는 사람? 

뭐야, 무슨 소리야, 의사 되려고 의대 간 거 아니야? 

주은은 할 일이 있어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의대를 간 것이지 의사가 되려고 의대에 간 게 아니었다. 주은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책을 읽다 창 밖을 내다 보다 다시 책을 읽다 잠드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게 어릴 때 꿈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의사는… 되고 싶지 않아. 의대는 엄마가 갔으니까 따라 간 거야. 

하긴 나도 의사는 별로야. 어차피 나는 바보라서 시켜줘도 못하지만.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트리시는 눈을 반짝이며 주은에게 가까이 붙었다. 

걸그룹. 

걸그룹? 그게 뭔데? 

트리시는 태블릿을 켜고 동영상을 보여줬다. 어린 동양 여자애들이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고 이상한 춤을 추고 있었다. 한국 걸그룹이라고 했다. 

여기 봐, 얘. 얘가 언니랑 동갑이거든. 언니랑 똑같이 생겼잖아. 

서양인처럼 눈이 크고 코가 높은 여자애였다. 전혀 닮아 보이지 않았다. 주은은 트리시를 빤히 바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트리시, 너랑 닮았잖아. 내가 아니라. 

하지만 얘들은 한국인들이라고! 

너 지난번 콘서트에서 노래 잘 하더라. 그 밴드 사람한테 연락하면 걸그룹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람 너 좋아서 죽으려고 하던데. 

내가 아니라 언니한테 그랬던 거야. 

뭐? 

몰랐어? 걔 동양 여자한테 완전 환장해. 옐로 피버라고. 

주은은 트리시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트리시는 주은을 달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놀렸다. 문명 세계를 모르는 외계인이라며 틈만 나면 속이고 골려 먹었다. 주은은 앰버의 거짓말은 재미가 없는데 트리시의 거짓말은 왜 재미있는지 궁금했다. 앰버는 그렇지 않은데 트리시에게 속는 건 웃기고 즐거웠다. 트리시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애로 사항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하곤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나쁜 남자잖아. 맨날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니고. 

주은은 지금 네가 만나고 있는 남자가 그런 남자라고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언니는 결혼은 누구랑 할 거야? 

벌써 그런 걸 알아야 해? 

다들 이때쯤 생각한다고. 미리 정해 놓는 거지. 나중에 엉뚱한 놈한테 팔려가지 않게. 

나 결혼 안 하고 지금 가족들이랑 살래. 

트리시의 눈이 활짝 커졌다. 

진짜야? 

진짜야. 

그럼 나랑 결혼할래? 

뭐? 

언니가 돈 벌고 나는 집에서 살림할게. 

돈은 어떻게 벌어? 

언니 나중에 노벨의학상 받을 거잖아. 그럼 자동으로 돈 버는 거 아냐? 

주은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고모가 원래 그랬어. 집에서 다들 고모는 노벨의학상 받을 거라고. 고모가 못 받았으니까 언니가 받아야지. 

엄마에 대한 세상의 기대가 컸다는 사실을 주은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주은에게 그저 엄마였다. 다정한 엄마이자, 좋은 친구, 유일했던 가족. 

근데 나는 애도 낳고 싶거든. 그러니까 남자 만나는 건 허락해 줘야 해. 

몇 명 낳을 건데? 

2명이지 뭐. 아들 딸 하나씩. 

그러고 보니 엄마 네는 항상 아들 딸 하나씩 낳았네. 

되게 웃기지 않아? 무슨 디즈니 만화 영화 같애! 

디즈니? 

디즈니도 몰라? 

디즈니라는 회사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디즈니 만화 영화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디즈니 만화 보면 사람 새끼고 동물 새끼고 아들 딸 골고루 낳는데 아들 낳으면 꼭 아빠 닮고, 딸을 낳으면 엄마를 닮거든. 우리집이랑 똑같음. 진짜 웃겨. 

디즈니 만화 나도 보고 싶다. 

우리 언니 왤케 불쌍해! 디즈니 만화도 못 보고 자랐어! 걱정마 우리 결혼하면 내가 다 보여줄게. 

트리시는 휴대폰을 꺼내서 지금 볼 수 있는 디즈니 만화 영화를 검색했다. 봐봐 이런 거야 하면서 트리시는 주은에게 디즈니 만화들을 보여줬다. 이런 게 있었다니.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은 이런 걸 보고 자랐구나.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트리시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둘은 손을 꼭 붙잡고 몇 시간 동안 디즈니 만화를 봤다. 트리시는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깔깔대며 주은의 팔을 마구 때렸고, 그럴 때마다 주은은 트리시의 손을 꼭 쥐었다. 

언니. 

왜. 

우리 결혼할 거니까 뽀뽀 할까? 

트리시는 충동적이었다. 유희 추구 성향이 강했다. 아버지는 유희는 생명의 기본 생리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유희를 즐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은에게도 유희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생각한 유희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을까? 주은은 트리시가 좋았다. 트리시라면 정말로 결혼해서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며 웃고 살 것 같았다. 

작품 등록일 : 2026-03-27
최종 수정일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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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귀엽다 트리시
진미오징어   
으앙 ㅜㅜ 주은이랑 트리시가 결말까지 꽉꽉 행복했으면 좋겠어.. 걱정돼
나무늘버   
어머어머 왠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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