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어린 시절 모리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모리스의 세상엔 캐런만 있었다. 부모님도, 가정부도, 친구들도, 이웃들도, 그들에겐 캐런 뿐이었다. 세상 모든 관심과 사랑은 캐런을 위한 것이었다. 모리스는 없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여동생 옆에서 모리스는 햇살이 아닌 그늘로 자랐다.
“예쁜 애가 예쁜 짓도 잘해” 어른들이 캐런에게 하는 말이었다. “캐런?”하고 부르면 캐런은 포즈를 취했다. TV에서 본 것인지, 잡지에서 본 것인지, 캐런은 자기 이름을 불러준 사람을 위해 세상 둘도 없는 천사 같은 표정과 자세를 취했다.
캐런은 갖고 싶은 걸 다 가졌다. 갖고 싶은 것 앞에서 사람을 말똥말똥 쳐다 보면 사람들은 캐런의 미칠듯한 사랑스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원하는 걸 내어주었다. 부모님은 캐런이 밖에서 무단으로 받아 온 공짜 물건들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제값을 치르기 위해, 동분서주 해야 했다. 부모님이 캐런에게 다시 이러지 말라고, 이런 거 받지 말라고 타이를 때마다 “난 가만 있었다고! 그 사람이 그냥 준 거라고!”라며 바락바락 성을 내던 모습이 아직도 어제 기억 같다. 어머니가 캐런을 편애한 건 어머니의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떤 부모였어도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캐런를 무덤덤 매력없는 남자 형제와 동등하게 대하기 힘들었으리라.
모리스는 캐런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부모에게, 세상에, 서운함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도 캐런을 숭배했으니까. 그도 캐런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으니까.
캐런은 사랑이 넘치는 아이였다. 특히 동물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했다. 기형으로 태어난 망아지가 어미 젖을 빨지 못하고 죽었을 때 캐런은 밤새 서럽게 울며 부모님을 괴롭혔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캐런을 위해 망아지 무덤을 만들어 주느라 다음날 출근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맥기를 고용한 건 캐런 때문이었다. 캐런을 위해 말을 건강하게 관리할 사람이, 혹시 그들 중 누군가 죽으면 무덤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맥기가 살고 있는 집은 원래 캐런을 위한 동물원이었다. 이곳에 닭과 앵무새와 그 밖에 여러 종류를 알 수 없는 동물들을 키웠다. 캐런은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캐런은 밖에서 만난 동물들에게도, 무슨 종인지 알지도 못하는 동물들에게도, 하나같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을 붙여 준 동물은 캐런의 가족이 되었다. 매일 찾아 가 이름을 부르며 가족처럼 대했다.
캐런의 사랑은 공평했다. 인간도 동물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사랑했다. 캐런에게 인간은 또 다른 종류의 동물이었다. 캐런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말이었다. 동물이 인간과 뭐가 달라. 캐런의 사랑은 모두에게 공평한 햇살이었다.
하지만 햇살은 영원하지 않았다. 사춘기가 지나며 캐런의 햇살에는 구름이 깃들었다. 캐런은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자의식과, 오만과, 편견과, 언어의 남용, 캐런은 탈피하기 시작했다. 어린 천사에서 반항적 십대 소녀로.
모리스는 캐런이 자신에겐 끝까지 천사였다고 믿었다. 캐런이 16살 때였다. 자기 방에 가구 배치를 바꾼다고 했다. 모리스는 여느 때와 같이 여동생의 미치광이 같은 변덕을 군말없이 받아 주었다. 한시간 넘게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주고 난 뒤 이제 만족하십니까 물어보자 캐런이 물었다.
오빠 뽀뽀해 봤어?
모리스는 17살이었다. 의대 진학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여자를 만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뽀뽀해 본 적 없다는 모리스의 대답에 캐런이 말했다.
그럼 나랑 할래?
“캐런?”하고 부를 때 짓던 천사 같은 표정. 캐런은 5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캐런은 모리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가만히 있어.
캐런이 한 건 뽀뽀가 아니었다. 키스였다. 캐런은 능숙했다. 혀가 모리스 입 안 깊숙히 들어왔다. 모리스는 발기했다.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또 하고 싶으면 얘기해, 해줄게.
캐런은 모리스에게 윙크하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동물이 인간과 뭐가 달라. 캐런은 오빠를 어릴 때 사랑했던 오만가지 동물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리스는 달랐다. 캐런에게 감정을 느꼈다. 캐런 꿈을 꾸다 몽정을 했고, 캐런을 잊기 위해 다른 여자 동영상을 보며 자위 행위를 했다.
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영미 문학의 이해”를 들은 것도 캐런 때문이었다. 캐런의 책상과 침대 위에 나뒹굴던 문학 책들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강의 마지막 작품은 노벨 상을 받은 어느 미국 작가의 소설이었다. 소설 2장에는 여동생에 대한 성욕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부분을 교수가 낭독할 때 모리스는 강의실을 뛰쳐 나갔다. 묘사가 너무 자세했다. 너무 자기 이야기 같았다. 정말로 부끄러운 건, 부끄럽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캐런에게 미칠듯한 욕구를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는 솔직히 그랬다. 정말, 진심으로, 캐런을 원했다. 캐런과 함께 살고 싶었다. 결혼하지 않고 캐런을 곁에 두고 평생 캐런을 위해 살고 싶었다. 캐런을 향한 욕구가 절박한 지경에 달했을 때 캐런은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모리스는 병원 일이 복잡해질 때마다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이 주목받지 못했을 때, 모두가 캐런을 사랑했을 때,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았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복받은 인생인가 싶다가도 캐런 생각이 나 슬퍼졌다. 모리스는 주은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캐런에게 못해준 거 전부 주은에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리스는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주은을 위해 꽃을 사기로 했다. 그의 방을 꽃향기로 가득히 만들어 주기로 했다. 주은을 위한 모든 건 캐런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병원에서 새로 구매한 자기공명영상진단기에 문제가 생긴 건 병원에 큰 타격이었다. 이 기기를 구매하기 위해 은행에서 200만 파운드를 대출 받았다. 작년에 산 로봇수술기도 비슷한 가격에 샀는데 신뢰성에 문제가 있어 딱 한번 쓰고 다시 쓰지 못하고 있다. 이놈의 거지 같은 공학 문명은 의학 산업을 파산의 골짜기로 몰고 간다. 물건을 똑바로 만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돈을 더 받을 생각을 하는 사기꾼 같은 놈들이다. 지난 달에 발생한 보험료 부정 수급 건은 아직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검찰에 2번이나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자칫하면 피의자로 소환될 수도 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는데,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니. 대체 법무팀에서는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걸까? 이쯤 되면 법무팀 책임을 묻고 물갈이를 해야 하는 걸까? 모리스는 자기도 진작에 월급쟁이 병원장을 앉혀 놓고 놀러 다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첼시에 정형외과 병원을 차린 루카스는 병원 일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데 직함이 의사다. 그는 자기 병원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월급쟁이 사장을 고용하고 자기는 유튜버로 살고 있다. 전세계 최고급 호텔을 돌아 다니며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구독자 수 10만명을 넘겼다. 무책임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병원 일이 복잡해질 때마다 생각이 흔들렸다. 루카스가 현명한 놈이고, 자기가 미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방문객이 오셨다고, 정부 기관에서 오신 분들인데 상의할 일이 있어서 뵙고 싶다고 한다. 모리스는 혀를 찼다. 보험료 부정 수급은 다른 병원에 더 많을텐데 왜 하필 여길 찾아 온다는 말인가? 모리스는 피해의식을 느낄 것 같을 때가 제일 기분 나빴다. 모리스는 피해의식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들어 오시라고 했다.
새까만 양복을 입은 점잖게 생긴 남자 둘이었다. 건내준 명함을 보니 한 명은 국립 보건원에서 나온 멜러, 다른 한 명은 정보부에서 나온 라이스였다. 왠 정보부? 혼란해 하는 모리스에게 라이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일의 성격상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찾아 뵌 점 죄송합니다. 바쁘실테니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면, 선생님 댁에 준 리즈라고, 작년에 중국에서 온 조카 분이 있을 겁니다. 그 분 때문에 찾아 뵌 건데요,
이들은 주은의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주은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그건 모리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모리스가 몰랐던 건 주은의 아버지 정성주가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연구는 국가 안보 및 국민 보건에, 잠재적으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위협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모리스가 물었지만 이들은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이들이 알고 싶은 건 주은이 해당 “위협”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지 여부였다.
저희가 알고 싶은 건 그러니까… 조카 분이 수상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알 수 없는 곳과 연락을 한다든가, 우편물을 보낸다든가, 남몰래 연구 활동 같은 것을 한다든가…
모리스가 딱히 생각나는 건 주은의 노트북 뿐이었다. 그의 유일한 통신 수단인 삐삐는 거의 집에 두고 다니는 편이고 딱히 사람들 앞에서 감추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주은의 삐삐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집에서 노트북을 몰래 쓰는 것 같다는 건 언급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모리스에게 주은은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 건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정 의심이 가시면 지금 다니는 학교에도 한번 이야기를 해보시죠. 아마 그쪽도 같은 말을 할 겁니다.
이들은 그 뒤로 거의 30분 동안 주은에 관한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공항에서 어떻게 왔는지, 소지품에는 뭐가 있었는지, 주은의 방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나 출입이 가능한지, 통신 수단은 무엇을 사용하는지, 집 전화를 쓴 적이 있는지, 취미 활동은 무엇인지, 만나는 사람은 누구누구인지 등등등.
이들의 입장은 그러했다. 절대로 쉽게 간과하거나 마음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 감시 요원을 붙여야 하는 상황이지만 모리스 집이 워낙 저명한 국가 유공자 집이라 자발적 협조를 구하고 있다는 점, 수상한 점이 있으면 즉시 자신들과 상의하셔야 한다는 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은과 모리스 가족들에겐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 등이었다.
모리스 입장에선 감시를 붙인다 해도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면 오히려 범죄 예방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찜찜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주은은 어디서 뭘 하다 온 걸까? 이제 알 수 있는 건 주은은 국경없는 의사회에서만 활동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주은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비밀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모리스가 알 수 없는 건 그 비밀을 주은이 갖고 있는지 여부였다. 모리스는 저녁에 주은에게 꽃을 사다줄 계획을 취소했다. 모리스는 주은의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혹시나, 예상치 못한 걸 알게 될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