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s #36
주은의 외할머니 조안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지금도 밖에 나가면 뒷모습만 보고 따라 오는 남자가 있을 정도로, 나이에 비해 당혹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했다. 

조안의 결혼 전 성은 머피였다.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 인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작은 농장을 운영하며 그럭저럭 먹고 살다 조안의 나이 13살 때 농장이 매각되었다. 먹고 살 길이 불투명해진 조안의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제철소에 취업했고,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했다. 조안에겐 오빠가 있었다. 조안보다 3살 위였던 오빠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아버지를 따라 공장을 다니다 사고로 죽었다. 조안의 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실어증을 앓았고, 오래지 않아 아들과 동일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조안의 어머니는 강인한 여자였다. 남편과 아들을 잃었지만 자신에겐 딸이 있다는 생각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으로 받은 산재 보상금을 조안의 대학 등록금으로 넣었고, 남편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런던 근교로 이주, 더 악착같이 일했다. 조안의 어머니가 일한 집에서는 그의 남다른 꼼꼼함과 성실함에 그를 영구 고용해 집에 눌러 앉힐 궁리를 했다. 하지만 조안의 어머니는 더 이상 일 할 수 없었다. 조안은 어머니가 관절염을 감추고 살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았다. 통증이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한밤중에 숨 죽여 우는 어머니를 본 조안은 학교를 휴학하고, 어머니를 병원에 보낸 뒤, 자신이 어머니의 일을 맡았다. 조안의 나이 21살, 대학 3학년 때였다. 조안을 고용한 집에서는 새로운 가정부를 찾고 싶지 않았다. 기존 가정부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을 뿐 아니라 조안 역시 어머니 못지 않게 일을 잘 했기 때문이었다. 

조안이 가정부로 일한 집에는 아들이 있었다. 헨리 리즈. 26살 의대생이었다. 그에겐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지만 조안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지만, 천천히, 깊게, 무자비하게 빠져 들었다. 헨리는 조안의 표정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웃지 않는, 서글프고 먹먹한 표정. 자신의 폴로 장비를 엉뚱한 곳에 치웠다는 착각에 조안을 감정적으로 다그칠 때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조안의 냉랭한 눈을 헨리는 잊을 수 없었다. 조안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감정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헌신적인 가정부였지만, 어떻게 봐도 가정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헨리는 조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하면 상처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 할수록, 외면할수록, 더 빠져 들었다. 눈에 띄지 않아야, 가정부를 그만 두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명분이 없었다. 이렇게 일 잘 하는 사람을, 몸져 누운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처지의 여자를, 일터의 남자가 성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쫓을 수는 없었다. 헨리는 고통 받았다. 자신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조안에게, 그녀의 시종 냉랭하고 무심한 태도에 상사병을 앓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들을 버젓한 집과 결혼시키고자 했던 부모는 가정부와 사랑에 빠진 아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래서 젊은 여자를 가정부로 들이면 안 되는 거였다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헨리가 조안에 대한 연정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자, 그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자존심을 무릅쓰고, 조안을 설득했다. 어머니가 아프시다니, 우리 아들과 결혼해서 이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조안은 헨리에게 눈곱만큼의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헨리가 자신에게 욕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였다. 어머니를 위해, 모두를 위해, 최선의 길은 이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조안은 헨리와 결혼을 결정했다. 

조안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다 할 수 없었다. 여자의 행복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유전적 요인인지 불우한 가정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안은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해 결혼한 것이었다. 배우자로서의 본분에 조안은 눈곱만큼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는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며느리였다. 건강한 아들 딸까지 낳아 줬으니 헨리는 아내에게 감사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아내에게 느낀 감정은 야속함이었다.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아내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깊고 무겁게 쌓인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조안에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가정부야? 와이프가 아니라?

헨리가 죽었을 때도 조안은 연민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조안이 남편의 죽음에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남편의 병이 혹시 자식들에게 유전된 것은 아닌가, 자식들이 혹시 같은 병으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조안이 애착을 가진 건 자신의 혈육이었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배우자가 아니었다. 조안은 어쩌면 남편의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남편의 아내로 산 것이 아니라 그의 씨받이이자 가정부로 산 것일지 몰랐다. 

조안은 아들 모리스보다 딸 캐런을 아꼈다. 아들 모리스에겐 정을 주지 않았다. 딸 캐런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다. 사람들은 모리스보다 캐런이 더 예쁘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 사랑의 불가항력적 속성일까.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사랑이 뼈 속 깊이 사무쳐 그걸 자신도 모르게 대물림 한 것이었다. 타고난 기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안의 편애 때문이었는지, 모리스는 순하고 예의 바른 아이로 자랐고, 캐런은 까다롭고 버릇 없는 아이로 자랐다. 

조안은 자식들의 이성 교제에 엄격했다. 자신은 신분을 뛰어 넘어 결혼했지만, 제 자식들에겐 그런 일을 허용할 수 없었다. 조안과 캐런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캐런이 남자를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조안은 사회 밑바닥 시정잡배들만 골라 만나는 캐런과 매일 싸웠다. 조안이 느낀 건 배신감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는데. 누구보다 사랑해줬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때 조안은 캐런이 없었다면 삶의 의지를 잃었을 지 몰랐다. 그는 어머니의 과거를 기억했다. 아버지와 오빠가 죽었을 때 딸 앞에서 울지 않았던 어머니를 기억했다. 그때 어머니를 기억하며 자신의 캐런에 대한 편애를 정당화 했다. 캐런도 자신처럼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할 것이라 믿었다. 조안과 캐런의 관계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졌다.

조안이 가장 무서운 건 가족의 죽음이었다. 캐런이 집을 나갔을 때 조안은 어머니를 잃었을 때보다 더 한 공포와 상실감에 시달렸다. 또 다시 가족을 잃는 악몽에 몸서리쳤다. 그는 캐런이 죽는 게 무서웠다. 매일 애 끓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범죄자 살인마와 결혼해도 좋으니 제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캐런이 혼혈 자식을 남기고 죽은 건 조안에게 형벌이었다. 조안은 자신의 편애에 대한, 오만함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생각으로 살아 왔음을 인정해야 했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바꿔야 했다. 조안은 주은이 캐런이 남기고 간 생명이라는 사실을 매일 세뇌했다. 주은은, 동양인이 아닌, 캐런과, 나와, 어머니 몸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을 매일 억지로 머리 속에 주입했다. 

세뇌의 효과였을까, 마구간에서 놀고 있는 주은에게 말을 걸었을 때, 조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 보는 주은의 눈에서 캐런을 보았다. 두려움 없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눈빛, 캐런을 키우는 동안 내내 보았던 그 눈빛. 임페리얼 칼리지 입학식에서 트리시의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는 주은을 보고 조안은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캐런이 마지막 웃었던 그때, 뱃시가 자기 말을 알아들었다고 “엄마 얘가 내 말 알아들어” 하며 엄마에게 활짝 웃던 그때 그 모습이 주은의 얼굴에 복사돼 있었다. 조안은 그제서야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캐런의 육신이 다른 모습으로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기도는, 비록 절반 뿐이지만, 이뤄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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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칼리지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의료 장비와, 세계에서 가장 진일보한 의학 기술들이 즐비했다. 신입생들을 인솔하고 교내 시설을 소개하는 전공의 미첨은 들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어리고 순진한 학생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 여기 보이는 이 기계가 뭐냐면 게놈 분석기에요, 다들 게놈 약학 Pharmacogenomics이라고 들어 봤지요? 인간의 몸은 변덕이 심해서 똑 같은 약을 처방 받아도 어떤 사람은 전혀 듣질 않고, 어떤 사람은 부작용을 일으켜요. 그래서 약을 처방할 때 원래는 그 사람의 유전자 정보에 맞춰야 하는 거에요. 근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죠. 사람 유전자 정보를 측정할 수가 없으니까. 이 기계가 있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어떤 약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해 주거든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 어떤 약을, 얼마큼 투여해야 하는지, 어떤 약은 투여하지 말아야 하는지, 싹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그리고 당연히! 병원에서 하루종일 기다려서 해야 하는 건강 검진도 20분만에 해줄 수 있어요. 어떤 병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지, 유전적으로 어떤 강점이 있는지, 약점이 있는지도! 

미첨은 신입생 중 제일 귀엽게 생긴 여자애에게 말했다. 

거기 학생 분, 이 기계로 한번 측정해 볼래요? 

여학생은 머뭇머뭇 부끄러워 하다 물었다. 

방사선을 쓰나요? 그런 거면 싫은데… 

물론 농담입니다. 이 기계는 아직 시험 단계라서 일반에게 사용할 수 없어요. 

‘어이없는 놈이네 괜히 예쁜 여자한테 말 한번 걸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학생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유쾌한 분위기에 그냥 웃어 넘겼다. 

다음 방문한 곳은 커다란 모니터가 수십개가 붙어 있는 방이었다. 모니터에는 벌레처럼 생긴 것들이 액체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자, 여기는 나노로봇 전시… 아니 실험실입니다. 지금 여기 C1 모니터에 보이는 로봇은 일명 “혈관 땜장이”입니다. 뇌졸중이 예상되는 환자의 혈관 속에 투여하면 환부에 몰려 가서 터집니다. 그러면 거기서 나온 응고 단백질이 혈관을 단단하게 보호해주죠. 주로 동맥류 환자 목숨을 구할 용도로 쓰일 거 같은데, 반대로 막힌 혈관을 청소하거나, 아니면 혈관 자체를 폐쇄해서 수술을 용이하게 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신입생이 물었다. 그는 미첨의 바로 뒤에 붙어서 그가 소개하는 것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암 세포를 공격하는 나노로봇은 없나요? 

여기 M3 모니터를 보시면… 저 흰색 알갱이들이 암 세포를 제거하는 가미가제, 자폭 로봇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소개한 것들은 상용화 직전의, 그러니까 앞으로 수년 내 일반 활용이 가능한 기술들이지만, 저 로봇 같은 경우 사실… 기약이 없습니다. 내년에 상용화가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이론상 그런 거고요. 우리끼리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똑 같은 말 20년 전에도 했는데. 

미첨은 굉장히 큰 연구실로 학생들을 데리고 갔다. 

이곳은 우리 병원이 자랑하는, 신경 보조 장비 연구소 되겠습니다. 쉽게 말해, 뇌를 다른 신체 부위와 연결해주는 거에요. 어떤 사고나 장애로 뇌가 다른 신경 말단 부위와 커뮤니케이션이 끊어진 경우 이 기기가 끊어진 커뮤니케이션을 복구해주는 거죠. 그러니까 마비된 팔이나, 하반신, 기타 다른 신체 부위들을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겁니다. 원래는 척추 장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도구였거든요. 이걸 착용해서, 마비된 부위에 신경 자극을 주고,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아예 다리가 없어도! 팔이 없어도! 기타 다른 부위가 망가졌어도! 이 장비를 통해 움직일 수 있습니다. 휠체어라든가, 로봇 다리라든가, 로봇 팔 등을 이 장비에 연결해서 걷고 움직이고 심지어 달릴 수도 있는 거죠. 지금은 이론적 단계지만, 잃었던 시각, 청각, 그리고 촉각도 이 장비를 통해 되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경을 쓴, 키가 큰 남학생이 물었다. 이 남학생은 아까부터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따라 오고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상용화 되면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그건 어느 부위에 장착될 건지에 따라 다르죠! 

휠체어에 연결할 경우 어떨지요? 

아무래도 휠체어 상품이 가장 저렴하겠죠. 도입도 제일 빠를 거고요. 이미 시중에 나온 다른 시험 제품들이랑 비교하면 아마 3만 파운드에서 5만 파운드 정도에 판매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은은 아버지의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저 남학생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어 본 게 아니다. 저 남학생은 절박한 질문을 한 것이다. 가족 중에 저 기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아니면 언젠가 반드시. 

미첨은 여기 장비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참고로, 여기 장비들은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특히, 신체 기능 강화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죠. 더 멀리 뛰고, 더 멀리 보고, 더 멀리 듣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지금 여기 보시는 장비는 원래 청각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것인데 이제는 일반인이 원하는대로, 원하는 소리만 듣고, 원하지 않는 소리는 듣지 않는, 원하는 소리를 수km 밖에서도 들을 수 있고, 원치 않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도 들리지 않게 해줍니다. 

여학생 중 하나가 옆에 친구에게 속삭였다. 

꼭 007 연구소 같애. 

미첨은 눈을 크게 떴다. 007 발언을 한 여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미있는 지적이네요! 하지만 007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이었죠! 우리는 반대죠!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기술이니까! 

주은은 아버지 병원에도 첨단 장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부분 기부를 통해 들어온 것이지만 개중엔 중국 정부에서 무상 제공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신기술에 관심이 없었다. 기계를 사용하는 게 더 편하고 정확하지 않느냐는 조언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분명 현대 의학 트렌드와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모든 걸 직감으로 판단했다. 통계와 데이터는 아버지에게 아무 의미 없었다. 아버지의 의술은 현대 의학이 아닌 주술에 더 가까웠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 더 열광했는지 모른다. 최첨단 기기를 갖춘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죽은 사람이 나올 때마다 아버지의 명성은 높아졌다.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맹목적으로, 현대 의학에 등 돌리고 아버지를 믿었다. 첨단 기기를 갖춘 병원에서 부작용이 생기면 현대 의학 기술의 한계 때문이었고, 아버지의 병원에서 부작용이 생기면 그건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 

미첨의 현대 의학 기술 견학은 꽤 길었다. 의대 건물에는 구석구석 볼 것이 많았고, 미첨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얼마나 혜택 받은 일인지, 자기가 얼마나 신입생들보다 아는 게 많은지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자, 이제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미생물 배양소. 인간 몸에 사는 미생물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연구하고 배양하고 이식하는 연구소에요. 다들 지금 지쳐 보이니까, 우리가 여기서 최근 개발한 테스트 샘플 하나만 소개할게요. 

미첨이 연구소 서랍에서 꺼내 온 것은 작은 박스들이었다. 박스에는 “치아 미생물 젤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우리 연구소에서 최근 개발한 신제품이에요. 아직 출시는 안 됐는데… 자기 전에 이걸 입에 물고 자면 입 안에 미생물 군집이 바뀌어요. 우리 몸에 좋은 쪽으로! 아침 구취가 싹 사라지고! 무엇보다 좋은 꿈을 꾸게 해준다고! 

미첨은 이걸 신입생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웃는 표정으로 박스를 학생들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호응이 없었다. 다들 신중한 성격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만든 모르는 물체를 입에 넣고 자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아침에 두통이나 설사에 시달릴 지도 모를 일이다. 미첨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쯤 주은이 손을 들었다. 

아, 예쁜 아가씨! 집에 갖고 가서 한번 시험해 보겠어요? 근데 너무 어려 보이는데… 여기 입학생 맞죠? 

주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첨이 준 박스를 받았다. 그러자 주은 뒤에 있던 여자애도 손을 들고 박스를 받았다. 주은은 아까부터 이 뒤에 여자가 신경 쓰였다. 견학이 계속 되는 동안 이 여자는 계속해서 주은에게 가까이 붙었다. 이 여자는 분명 주은에게 의도적으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주은이 여자를 돌아 보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 나는 엠버야. 우리 인사하지 않을래? 

주은은 여자의 체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저런 냄새가 나는지는 알겠는데 왜 좋고 싫은 감정이 생기는 걸까? 저 여자 몸에 기생하는 박테리아는 내게도 전염되는 걸까? 왜 저 박테리아는 백인에게만 기생하는 걸까? 

인간의 체취는, 실제론, 몸의 냄새가 아닌 미생물의 냄새다. 인간 몸에 기생하는 미생물이 만든 냄새가 그 사람의 체취로 인지되는 것이다. 인간의 진짜 체취는 피 냄새다. 미생물을 방어하기 위한 유전자 - 면역 체계 냄새다. 주은은 지금도 생각한다. 둘을 굳이 구분 지어야 할까? 미생물은 몸의 면역 체계에 적응했기에 그 몸에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생물은 그 몸의 일부여야 하는 것 아닌가? 

과학을 위해서라면 피의 냄새와 미생물의 냄새는 구분되어야 하지만 주은은 그런 게 싫었다. 그런 것 더 이상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유전자에서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분자 구조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이제 그만 알고 싶었다. 주은은 그냥 모르고 살고 싶었다. 이제 그만 평범해지고 싶었다.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헤어 린스, 스킨 케어, 향수 로션 같은 냄새만 알고 싶었다. 앰버의 몸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과 피부 용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 사이로 풍기는 익숙한 냄새, 오래 전 어디선가 맡아 본 냄새, 누구에게서 맡았던 냄새였을까?

주은은 억지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앰버와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앰버는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일본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에 매년 2번 이상 가는 “일빠” 앰버는 일본에서 한달 살기도 해본 적이 있으며 영국인들을 위한 일본 여행 정보를 제공하는 SNS도 운영하고 있었다. 앰버는 주은이 일본인 혈통일 것이란 강력한 확신을 갖고 접근한 것이었다. 앰버는 주은이 일본이 아닌 중국에 살다 왔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상관 없다고 했다. 어차피 일본이나 중국이나 다 같은 문화권이니 너도 일본에서 살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앰버는 부자였다. 그가 사는 곳은 런던에서 거주비가 제일 비싼 곳 중 하나였고, 그가 운영하는 일본 여행 인스타그램에는 돈이 없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값비싼 곳들만 추천돼 있었다. 주은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신입생들 중에 주은 같은 혼혈 말고 진짜 동양인이 2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앰버는 동양인이 좋아서 나중에 동양인과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겐 가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품 등록일 : 2026-03-24
최종 수정일 : 2026-03-24

▶ Brody’s files #37

▶ Brody’s files #35

진정한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지식간의 사랑이 아닐까
복숭아   
브로디 파일이 올라오는 지금 저는 매일이 행벅합니다.
  
주은을 사랑하면서 조안도 생각했을까 캐런은? 울음 참으며 사랑하는 방식이 이렇게 대물림 되네ㅠ
  
주은 취향 확실하네. 트리시는 뭔짓해도 좋아죽으면서ㅋㅋ
버터   
과묵한 조안의 소리없는 오열에
가슴이 뻐근해짐

캐런이...우리 캐런이가 살아왔어!
진미오징어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매번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얘기가 술술술 계속 나옵니까
하루에 한번씩 선물받는 기분입니다
진미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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