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디는 자신의 문제점을 돌아 보았다. 그는 자아 성찰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아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왜냐하면 정성주의 암호를 아직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문법을 안다고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다. 철길을 깔았다고 열차를 만들 수는 없으며 밥그릇을 만들었다고 밥이 생기게 할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런 암호를 만든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정성주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범죄자들을 만나 보고, 곰팡이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감정 이입을 했다.
브로디는 정성주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브로디 자신과 소름 끼치도록 닮은 냄새. 처음 맡아 본 혈연의 냄새. 하지만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다. 브로디는 회계사의 말에 호기심을 느껴서 정성주를 찾았다.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다. 꼭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단지 그 두 마디에 이끌려 그 먼 한국까지 찾아간 거였다. 무엇을 알고 싶어서 갔던 걸까? 아무 생각 없었다. 그저 본능에 이끌려 간 거였다.
정성주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라기엔 지나치게 남의 고통에 예민했다. 그에게는 고통이 부조리였고, 부조리는 고통이었다. 그는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해 고통을 줄이는 법을 연구했다. 고통을 또 다른 고통으로 막는 의학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어쩌면 생명을 사랑했던 건 아닐까. 고통 받는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그런 짓을 해왔던 건 아닐까. 예민한 후각은 고통의 냄새도 맡을 수 있을까. 정성주는 물리 화학적으로 불가능할 고통의 냄새를 맡는 단계에 도달한 걸까.
브로디는 정성주의 일기를 다시 읽었다. 그는 정성주의 심정을 다시 한번 이해해 보기로 했다. 고통이라는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정성주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떤 사고 방식에 이르게 됐을까.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생명의 제1목적은 번식이다. 하지만 자연은 “종”이라는 번식의 벽을 끊임없이 세운다.
.............동물은 같은 종끼리 경쟁한다. 같은 종은 부모 자식 간에도 경쟁하고 충돌한다. 부모가 같은 성별의 자식을 살해하는 일은 거의 모든 종에서 발생한다.
.............개체 간 갈등과 스트레스의 근원은 번식에 근거한다. 부모와 자식도, 형제도, 기타 모든 혈연 관계도 번식 경쟁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번식은 서로 간 유전적 차이가 클수록 촉진된다. 반대로, 개체 간 유전적 차이가 적을수록 번식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임신 중단, 기형, 장애 출산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야생 동물은 냄새로 짝 지을 상대를 결정하는 반면, 인간은 사회적 관계로 배우자를 결정한다. 이는 번식 성공률의 차이로 이어진다. 냄새로 짝짓기를 하는 야생에서는 번식 성공률이 높은 반면, 사회적 관계에 의해 짝짓기를 하는 인간 문명에서는 번식 성공률이 20%에 불과하다. 냄새에 의존할수록 상이한 유전 형질과 맺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사회 관계에 의존할수록 동일한 유전 형질과 맺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유전적 형질이 서로 멀어질수록, 번식의 끈은 강해진다. 하지만 끈이 더 멀어지면 끊어져 버린다. 종이라는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격리된다.
브로디는 문득 오라일리 교수가 책장에 쑤셔 넣은 편지가 생각났다. 묘한 기시감. 생각해 보니 브로디도 그런 편지가 있었다. 회계사가 준 편지였다. 브로디의 친모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을 받아 적은 편지. 책장을 뒤져 편지를 찾아 보았다. 평생 읽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편지. 한국어로 쓰여져 있는, 브로디가 읽을 수 없었던 편지. 생각해보니 거기 적힌 한국어와 정성주의 암호가 닮은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편지에 쓰인 문자와 정성주의 암호가 닮았다는 거였다. 브로디는 편지를 해독해보기로 했다. 정성주는 평생 한국어를 사용해 왔으니 그가 만든 언어에도 한국어의 패턴이 존재할 것이다.
편지에는 분명 “mother”라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브로디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니까.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 브로디는 “어머니”라는 한글 단어 모양이 정성주 언어와 상당 부분 겹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ㅁ
이 모양에서 획 2개를 빼면
ㄴ
2개를 더하면
ㅂ
2개를 빼고 2개를 더하면
ㄹ
한글은 ㅁ에서 출발한 문자인 것 같다. 정성주의 언어도 그렇지 않을까?
편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사람”이라는 단어도 자주 등장한다.
ㅅ
이 모양에서 획 한 개를 더하면
ㅈ
ㅁ과 합치면
囚
모든 문자가 ㅁ에서 출발해서 ㅁ으로 돌아온다. 한글과 정성주 언어의 동일한 패턴이다. 혹시 ㅁ에 그런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어머니”와 같은 의미인 건 아닐까?
문득 왜 책 제목이 “종의 기원”인지 궁금했다. 다윈은 어째서 책 제목을 그렇게 재미없게 지었을까? 왜 아무도 사보고 싶지 않게 지은 걸까? 원래 책 제목은 “원형으로부터 끝없이 이탈하는 다양성의 경향”이었다. 다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책이었던가? 어쨌거나 같은 내용이다. 같은 내용의 책이 다른 제목으로 나온 것이다. “종의 기원”과 “원형으로부터의 이탈”은 같은 의미다.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더 많은 걸 알수록, 더 깊이 알수록, 동질성에 주목하게 된다. 개체와 종 간의 차이점이 아닌, 생명이 공유하는 유사성이 커진다. 더 많은 차이점을 접할수록, 유사성은 막대해지고 개체 간 차이는 희미해진다. 그게 브로디가 지금껏 냄새로 세상을 이해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그게, “어머니”일까? “ㅁ”일까?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해 끝없이 갈라져 나아가는 것이 생명이다. 정성주의 언어도 그렇게 만든 것일까? 끝없이 갈라진 길에서 원형을 찾기 위함이었을까? 정성주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정성주의 문자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모든 문자는 ㅁ과 연결돼 있다. ㅁ에서 출발해 ㅁ으로 돌아온다.
ㅁ은 원형.
ㅅ은 이탈.
이제 알 것 같았다. 정성주의 암호는 표음 문자이자 표의 문자였다. 중국어도 한국어도 아니었지만 사실은 중국어이기도 하고 한국어이기도 했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브로디는 정성주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언어를 만든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평생 한번도 궁금해본 적 없는 것들이 궁금해졌다. 브로디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궁금했다. 어머니는 왜 정성주와 결혼한 것인지 궁금했다.
브로디는 회계사가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어떤 호혜적 심정으로 어머니를 도왔을까? 왜 브로디에게 연락을 한 걸까? 회계사는 신장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면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홀로 외롭게 죽었을 것이다. 정성주가 아니었다면 회계사는 가족을 이뤘을 것이다. 만약, 정성주가 아니었다면, 회계사는 혼자 죽지 않았을까? 아이를 낳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았을까?
.............우리는 생명을 개체가 아닌 흐름으로 이해한다. 번식도, 종도, 생존과 죽음도, 개체가 아닌 흐름의 결과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회계사는 죽기 전 이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