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기는 체구가 작았다. 까맣게 마른 근육질 체형 때문에 실제보다 더 작아 보였다. 그는 젊은 시절 경마 기수였다. 한때 마주들의 에이스로 높은 급여를 받았지만 경기 중 말과 함께 쓰러지면서 골반이 부러졌다. 그때 다리가 부러진 말은 안락사 되었고 맥기는 기수라는 직업에서 은퇴해야 했다. .
맥기는 은퇴 후 경마 도박에 빠져 들었다. 그는 경마에는 승부 조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주는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느 기수에게 의뢰가 들어오는지는 알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누가 돈을 먹었는지만 알면 그 경기의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처음 5경기에서 연달아 큰 돈을 벌었다. 도박의 성공이 당연시 되자 욕심이 커졌고, 모험을 감행했다. 전재산을 걸고 거기에 빌린 돈까지 몰아 넣었다. 이거 한방으로 도박사라는 직업에서 은퇴할 생각이었다. 맥기가 몰랐던 것은 아주 가끔 승부 조작이 겹치기로 들어오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겹치기 조작이 자신이 모든 걸 건 경기에 들어왔다는 사실 역시 맥기는 까맣게 몰랐다.
맥기는 한순간 모든 걸 잃었고, 승부 조작이 발각되는 바람에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전재산을 잃고 거지 꼴이 된 반대 급부였을까, 그는 무혐의로 풀려났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헨리 리즈, 모리스의 아버지였다. 헨리는 대대로 이어오던 집안의 종마 사업을 정리 중이었다. 리즈 가문의 업은 이제 말이 아닌 병원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사랑했다. 제일 아끼는 말들은 남겨 두고 집 소유의 대지에서 직접 기르기로 했다. 말을 관리할 사람, 말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헨리 리즈는 자기가 좋아했던 기수 맥기를 찾았다. 현역 시절 맥기는 역전의 명수였다. 다 지던 경기도 마지막 200m를 남기고 역전하는 일이 허다했다. 말은 감정적인 동물이다. 막판 스퍼트는 기수와의 교감이 이뤄지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육감일 뿐이었지만, 헨리는 맥기가 말을 길들이는 능력이 탁월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맥기는 그 뒤로 30년 넘게 리즈 가문의 말 관리인으로 살았다. 그동안 그가 새끼를 받은 말 수가 60마리에 달했다. 그는 확실히 말을 키우는데 소질이 있었다. 오갈 데 없는 맥기를 위해 헨리 리즈가 새로 지어준 집에는 그가 받은 말 새끼들의 이름과 사진, 그리고 그와 함께 살다 죽은 말의 명패들이 걸려 있다. 그는 말의 인생과 함께 살았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스스로는 가정을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다른 종의 유전자를 건강히 대물림시켰다는 사실에 성취감을 느꼈다.
맥기는 주은이 말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주은은 마구간 말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놀이동산에 처음 놀러 온 아이 같았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과 다름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혈육이 없는 것에 결핍이나 공허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에겐 13마리나 되는 가족들이 있었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또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맥기는 주은에게 린다라는 이름의 말을 소개했다.
린다는 벳시의 딸이야. 벳시는 캐런이 좋아했던 말이지.
벳시는 종마였다. 우월한 종자를 생산하기 위해 선택됐지만 임신 합병증을 자주 앓았고 그 때문에 종마가 아닌 관상용 말로 역할이 변경됐다. 캐런은 집에 오면 언제나 제일 먼저 벳시를 찾았다.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벳시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둘은 자매처럼 유대감이 돈독했다. 벳시는 캐런이 외출을 하면 오매불망 캐런을 기다렸고, 캐런이 집을 아주 나간 뒤로는 우울증을 앓았다. 임신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벳시는 몇 년 전 모르는 수컷의 새끼를 배었다. 노산이었지만 새끼는 무사했고, 벳시는 죽었다.
그 새끼가 지금 이 말이야. 린다.
린다는 엄마 캐런을 닮았다고 했다. 맥기는 지금껏 수천이 넘는 말을 봤지만 린다처럼 도도한 성격은 한번도 못 봤다고 했다. 린다는 사람을 깔보듯 내려다 봤다. 그런 태도가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뱃시도 캐런이랑 닮았지만 린다가 정말 많이 비슷해.
린다는 주은에게 관심을 보였다. 린다는 원래 자기 보기에 하찮은 인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한다.
벳시였다면 널 알아 봤을 거야. 짐승은 냄새로 상대를 구분하니까. 네가 캐런의 딸이라는 걸 알았겠지.
만져 봐도 되나요?
맥기는 린다가 주은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았다. 린다가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호의적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은이 린다를 쓰다듬자 린다는 주은에게 머리를 기울였다.
어머니와 딸이네, 어머니와 딸이야.
맥기가 껄껄 웃었다. 어머니를 잃은 두 딸은 서로의 냄새를 맡았다. 냄새는 과거를 읽는 감각이다. 냄새는 어쩌면 선대의 냄새도, 전생의 기억도 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주은은 린다에게서 벳시의 기억을 찾았다. 엄마와 함께 했던 벳시의 추억을 그려 보았다. 주은에겐 그런 믿음이 생겼다. 개체의 감정과 기억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을 뿐, 세대와 종을 넘어 공유될 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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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엄마 방 창문에는 아침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온다. 창문에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일까 먹을 것이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일까. 어쩌면 이 집 어딘가에 둥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공원 어딘가에 둥지를 틀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좋은 집에서 살았구나. 지금 내가 엄마 대신 이 방에 살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은이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본 건 영국에 도착하고 넉달만이었다. 자격 요건은 쉽게 달성했다. 남은 건 대학에서 제공하는 의학 자격 시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은은 가장 높은 등급의 시험이 가장 쉬웠고 가장 낮은 단계였던 중등교육 자격 시험이 가장 어려웠다. 과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주은이 평생 관심 가져 본 적이 없던 과목들을 억지로 공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은은 공부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공부보다 이렇게 책상에 앉아 책을 통해 배우는 공부가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책 읽는 걸 금기시 했다. 모든 건 몸뚱이로 배워야 했다. 머리로 배운 것은 체득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몸을 직접 부딪쳐 배워야 체득이 되고 실전 활용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틀리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주은은 그래도 책이 좋았다. 아버지의 말이 전부 사실일지라도 주은은 그래도 여전히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싶었다. 중등교육 자격시험 문제지에는 주은의 지적 수준으론 어이없이 단순한 내용만 있지만 그래도 주은은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중국에 있을 때 누군가 그랬다. 배움에는 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준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엄마의 말대로 주은은 정말 학자 유형일지 몰랐다. 아버지처럼 직접 세상을 경험하며 배우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고 배우는 것이 더 체질에 맞는 것 같았다.
방 창문에 시시때때로 새들이 날아 들었다. 새들은 바깥 창틀에 앉아 주은을 보고 저 안 에서 뭐하는 거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주은은 밖에 나가 보고 싶었다. 공원엔 분명 벤치와 테이블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공부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는데 헬렌 아줌마가 커피를 싸주겠다고 한다. 주은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검은 색의 쓴 맛이 나는 차라는 것만 알았다. 먹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감사하다고 받았다. 사양하지 않고 받는 것도 예의다. 인간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방법이다. 헬렌 아줌마는 뭐든 잘 먹는 사람을 좋아한다. 주은이 소고기만 빼고 뭐든 주는대로 잘 먹는다고 많이 이뻐했다.
공원은 넓었다. 방 창문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었다. 벤치와 테이블이 있긴 했지만 더러웠다. 이곳 사람들은 벤치를 깨끗하게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가도가도 더러운 벤치만 나왔다. 이러다 지구 반 바퀴쯤 돌 것 같아서 그냥 잔디밭에 누워서 하기로 했다. 조안 할머니가 사준 새 옷이었지만 할 수 없다. 돌아가는 길에 옷을 한벌 더 사는 것이 좋겠다. 이런 데서 뒹굴어도 아무렇지 않을 옷으로.
주은은 누울 자리를 골랐다. 짐승의 배설물이 묻어 있지 않은 자리에 배를 깔고 누웠다. 흙과 식물과 곰팡이, 그리고 질소 유기 화합물, 땅의 냄새를 맡아 본 게 오래 전 같다. 주은이 중국에서 살았던 땅은 콘크리트였다. 콘크리트 시멘트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십년 가까이 살았다. 몇 걸음 나가면 공원과 산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일년에 한두번도 어려운 사치였다.
이렇게 가까이 땅 냄새를 맡아 본 건 엄마와 살 때였다. 캄보디아에 살 때 엄마와 자주 시골길에서 놀았다. 엄마와 숨바꼭질 하며 놀았던 그때, 땅 속에 언제나 뭔가 있었다. 금속 물질과, 화약과, 제초제와, 독극물, 그리고 사람의 뼈. “엄마 땅 속에 죽은 사람들이 있어”라고 말했을 때 엄마는 표정이 어두웠다. 엄마는 딸의 특수한 능력을 기특하거나 신기해 하지 않았다. 엄마는 딸의 능력을 두려워 했다. 주은은 단지 왜 땅 속에 그런 것들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 뿐이다. 엄마에게 잘 난 척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캄보디아와 이곳 땅의 냄새는 많이 달랐다. 여기엔 죽은 사람도 없었고, 해로운 물질도 없었다. 이곳에 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30대 남자였다. 지독한 체쥐를 풍기는 백인 남자가 다가 오고 있었다. 주은에게 다가오는 것이 틀림 없었다. 주은은 악숙하지 않은 백인 남자의 냄새에 본능적 적의를 느꼈다. 남자는 적의가 없었지만 주은은 있었다. 주은은 백인과 동양인은 냄새의 차이가 극심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모리스와 제임스에게 반감이 없었던 까닭은 가족이었기 때문일까. 주은은 엄마와 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서 관계를 맺은 것인지 궁금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냄새에 거부감이 없었던 걸까. 엄마는 아버지에게 인종 혐오를 느끼지 않았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종은 서로 다른 종으로 갈라지기 위한 과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 나 같은 아이가 천년 넘게 태어나지 않는다면 백인과 동양인은 서로 다른 종으로 분화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
책을 챙겨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귀찮았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익숙해지려면 이곳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남자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주은은 냄새로 사람의 행동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냄새는 상대의 의도를 알려주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주은의 생각은 달랐다. 동물의 냄새엔 성격을 말해주는 정보가 담긴다. 성격은 특정 상황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결정하는 인자다. 사람의 냄새로 그 사람의 의도를 예측할 수 있는 이유다. 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고용했다. 아버지도 그런 방법으로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을 골라 썼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신중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걸 할 수 없다고 말할 때가 많았다.
니하오마!
남자는 주은에게 인사했다. 세상 모든 동양인이 중국인인 줄 아는 또 다른 백인이었다. 주은은 중국 국적을 가진 적이 없었다. 주은은 태어날 때부터 영국인이었고 지금껏 계속 영국인이었다.
니하오마!
주은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 봤다. 남자는 주은의 눈이 동양인의 눈색깔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아… 여기 사니?
주은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겁을 먹었다. 주춤주춤 자세를 고쳐 잡다 다시 용기를 내 물었다.
나는 여기 살거든. 새로 이사 온 사람인가 해서.
주은은 대답을 해줄까 말까 간을 보는 것 같았다. 상대가 괜히 말을 걸었다 싶은 기분에 빠지게 만들었다. 주은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관계 우위를 점하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로부터 물려 받은 습성인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저 여자 영어를 못 알아 듣는 건가 진짜 중국인가 그냥 가던 길 갈 걸’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주은이 말했다.
놀러 왔어요.
아… 그럼 학생?
주은은 또 남자를 아무 말없이 빤히 바라 보았다. 남자는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눠 봐야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이 주변 정보가 필요하지 않니? 내가 여기 오래 살아서…
주은은 남자를 빤히 바라 보다 웃음 지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가시라는 제스처였다. 남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 치며 물러 갔다.
주은은 남자가 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알고 있었다. 주은은 남자에게 성욕이 있으며 성욕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주은에게 성욕을 드러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주은은 신의 딸이었다.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주은은 2차 성징이 발현된 뒤로도 사실상 무성sexless의 존재로 살았다. 하지만 주은은 아직도 가끔 기억한다. 병원 사람들 중에 자신에게 성욕을 품은 남자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도 가끔 남자들에게 성욕을 느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첫경험을 한 건 16살 때였다. 아버지에게 땅을 기증한 쉬씨의 아들이었다. 주은과 동갑이라고 서로 인사를 시킨 기억이 났다. 남자 아이는 수줍은 성격이었다. 주은과 한번도 시선을 마주 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병원에 자주 들렀다. 올 때마다 주은에게 먹을 걸 가져다 주었다. 일본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과자들이었다. 주은은 남자 아이의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건강한 남자 아이였다. 건강하고 안전한 유전자의 냄새. 어느 날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고, 직원들은 지역 정치인이 소집한 모임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주은은 비에 잔뜩 젖은 남자 아이의 냄새를 맡았다. 몸이 달아 올랐다. 몸이 안절부절 들떴다. 남자의 냄새가 짙어지자 주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은은 과자를 주고 가려는 남자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남자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주은은 남자의 팔을 잡아 당겨 입을 맞췄다. 남자는 봉제인형처럼 주은의 손에 힘없이 놀아 났다. 주은은 자기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답답했던 것 같았다. 이런 갑갑한 곳에서 우울한 일만 하다 보니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핑계겠지. 주은은 분명 즐기고 있었다. 남자의 성기를 자기 몸 안에 집어 넣을 때도, 거기에서 물컹한 액체가 흘러 들어올 때도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온 몸이 짜릿한 느낌. 동시에 느껴진 따뜻함 아늑함. 남자 아이는 뜻하지 않은 첫경험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허둥지둥 도망치듯 병원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오지 않았다.
주은은 공공장소에 여자 혼자 누워 있는 게 남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성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벤치에 앉기로 했다. 깔개를 갖고 와서 더러운 벤치라도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벤치에 앉아서 공부를 한 뒤에도 주은은 남자들의 접근을 받았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건달들에게 희롱 당할 때는 폭력을 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세상은 여자에게 마냥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은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들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지 몰라도 여자 입장에선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주은은 공원에는 산책을 할 때만 나가기로 했다. 주변을 살필 수 있을 때, 상황 대처 여력이 충분할 때는 그런 일 겪을 확률이 줄어든다. 하지만 한눈 팔고 어딘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그럴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사냥감이 된다.
주은이 임페리얼 칼리지 의학과에 입학한 건 영국에 오고 8개월 뒤였다. 18살을 10개월 앞두고 있었으니 아주 그리 이른 입학은 아니었다. 가족들은 “대단하다”고 크게 기뻐했지만 주은의 입장에서 의대 입학은 미리 정해진 미래와 다름 없었다. 주은은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이었다. 실제로는 아버지 병원, 청두 외곽 진유안 구에 위치한 “사천건민의학과학원”에서 일했지만, 서류상으로는 국경 없는 의사회 캄보디아와 중국 사천지부에서 근무한 것으로 돼 있었다. 아버지의 배려였다. 아버지의 병원은 너무 비밀이 많았기에 딸의 경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어쨌든 지금도 국경 없는 의사회 관련 자료를 검색하면 “어머니 캐런 리즈의 뒤를 이어 그의 딸 준 리즈가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의술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의학 경력자 주은이 의대에 입학하기 위해 할 일은 명목상 자격 요건을 갖추는 것 뿐이었고, 그건 주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리스는 주은이 대학 입학금을 자기 돈으로 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분명히 그때 주은에게 준 노트에 대락 등록금은 반드시 자신을 통해 입금해야 한다고 적어줬는데 주은은 그 부분만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 주은은 엄마로부터 물려 받은 돈이니 입학금으로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모리스는 그 말이 별로 믿기지 않았다. 캐런은 돈을 모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캐런은 내일 필요한 돈도 오늘 써버리는 사람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문제를 해결하는, 돈을 모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캐런이 10년 뒤를 위해, 그것도 자식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 두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모리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저 돈은 캐런이 아닌 다른 이로부터 받은 것이다. 주은의 태도로 보건데 주은은 대학 등록금 수준의 돈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주은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리스는 주은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했다. 어째서 딸에게 휴대폰조차 사준 적이 없는 걸까? 주은에게 휴대폰과 태블릿을 사준 게 8개월 전이지만 주은은 태블릿만 뜯어 보고 휴대폰은 아예 포장조차 풀지 않았다. 자기는 삐삐를 쓴다고 했다. 삐삐로 문자 메시지를 받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주은이 가진 전자 장비는 중국에서 가져온 삐삐와 낡은 노트북 뿐이었다. 가끔 서재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 주은을 본 적이 있었다. 주은은 매번 노트북에 머리를 박고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면 급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노트북으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 걸까? 노트북에 뭐가 있는 걸까?
입학식에는 트리시도 왔다. 트리시가 사과를 한 건 오래 전 일이었지만 둘은 아직 사이가 서먹했다. 트리시가 중국어로 사과할 때 주은이 웃는 바람에 트리시는 몹시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주은은 트리시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트리시는 관계 개선을 거부했다. 사무적인 단답형 대답만 할 뿐이었다.
모리스는 트리시에게 꽃다발을 맡겼다. 주은에게 줄 입학 축하 꽃다발 트리시 네가 주라는 거였다. 트리시는 아빠가 무서웠다. 불만을 제기하면 정색하는 아빠 표정을 보고 트리시는 머리 속이 새하얗게 얼어 붙는 느낌이었다. 아빠 말을 거스르면 이제 살아남을 수 없어. 웬만하면 토 달지 말고 하라는대로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게 본인에게 이득이라는 사실을 몇번 혼이 나고서야 깨달았다.
트리시는 주은에게 꽃다발을 줄 때 주은이 너무 기뻐 하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어떻게 저렇게 어린애처럼 자지러지게 좋아할 수 있지. 주은이 자신의 팔을 잡아 당겨 볼에 키스를 할 때도 크게 놀랐다. 너무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 그런 행동을 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볼을 내주고 말았다. 지금 이렇게 입학식이랍시고 차려 입은 걸 보니 중국 촌년 티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지금 보니 못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트리시는 그동안 “고모를 닮아서 미인이네”라는 말을 백만번쯤 들은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고모를 진짜 닮은 건 내가 아니라 저 애겠지. 트리시가 심정적으로 주은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이때였다. 그동안 트리시는 일부러 외면했던 거였다. 주은이 자기만큼 예쁘다는 것, 4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것, 지능이 무섭게 높다는 것, 다재다능한데 성격도 좋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것도. 트리시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애와 친해지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그동안 저 애와 사이가 가까워지지 못한 건 순전히 자신의 멍청함 때문이었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