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은 낯선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가 불편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은은 낯선 사람들과의 식사 약속이 잡힐 떄마다 모리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모리스는 주은을 영국 사회에 안착시키려 하고 있었다. 주은이 리즈 가문의 일원으로 뿌리 내리기 위해 매번 애써 부담스러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필립 티번 총장은 엄마를 알고 있었다. 당시 임페리얼 칼리지 의예과에 몸 담았던 사람들 중에 엄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티번은 엄마와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며 아직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라고. 지금은 뭐하고 살고 있을까 궁금한 적도 많았다고, 이렇게 그의 딸을 보게 돼 기쁜 마음이라고 했다.
…의료 소송에 관한 수업 시간이었어. 우리 병원에 실제 있었던 의료 소송이었는데… 환자가 식도암 치료를 받았는데 전신마비 장애 판정을 받고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거야. 암에 의한 합병증이었는데, 우리 측에서는 과실이 없고, 전신마비 증상은 환자의 자가 면역 질환에 의한 자연 발생이었다는 논리로 승소한 케이스였지. 그때 교수는 의료 소송을 방어하려면 과실을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캐런이 반박한 거야. “그 신경병증은 그 암 환자에게서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했던 병이었다, 암에 걸려 병원에 왔으면 암에 의한 다른 합병증도 당연히 함께 검진하고 치료하는 것이 병원의 의무다, 환자의 말을 듣고, 환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그런 증상이 왜 일어났을까, 잠시만 생각해 봤어도 그 환자가 영구 장애로 고통 받을 일은 없었다, 그때 그 의사는 그저 나는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된다, 정해진 원칙만 지키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으로 환자의 절박한 사정을 무시한 것 아니냐. 그게 과실이 아니면 무엇이 과실이냐. 이런 식이면 병원이 가전제품 AS 센터보다 나은 게 뭐냐. 아니 AS 센터를 가도 사용자가 문제의 증상을 반복해서 주장하면 뚜껑 한번 더 열어서 살펴 보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프로토콜을 따라야 한다, 과실만 범하지 마라, 그렇게 가르칠 것이면 병원은 무엇 떄문에 존재하는 것이냐. 사람을 낫게 하진 못하고, 그런 식으로 방치하고 버려둬서, 병들고 고통받게 할 것이면 병원은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것 아니냐.”
…그때 우리 모두 큰 충격을 받았어. 왜 지금껏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사가 된 걸까. 그저 공부를 잘 했으니까? 집에서 의사가 되라고 했으니까?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싶었으니까? 정말로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서 의사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거야. 캐런 한 명만 빼고.
…그때 이후로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의사일까 기능인일까? 그런 자의식이 나를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했다고 생각해. 그때 캐런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평범한 기능인으로 살다 갔겠지.
…캐런은 어디에서도 훌륭한 의사였을 거야. 같은 의대생으로서도 존경스러운 사람이었고, 현업에 있을 때도 존경스러운 사람이었겠지. 네가 케런의 뒤를 따르겠다니 우리는 고맙고 뿌듯한 마음이다. 너도 분명 네 어머니처럼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주은을 혹시라도 불편하게 만들까봐 사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남에게 사려 깊은 만큼 자기 관리에도 열심인 사람이었다. 게으름이나 관리 소홀로 인한 냄새가 전혀 없었다. 그가 학장의 자리에 오른 건 본인의 철저한 자기 관리 때문이었지 엄마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주은은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시각 정보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필립 티번의 이름과 함께 기억나는 건 그의 얼굴이나 외모가 아닌 그의 냄새였다. 주은은 자기가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암에 걸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동일한 루틴을 따라 사는 사람일수록, 돌연변이 세포 증식의 가능성은 줄어 들어야 정상이다. 티번 같은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그의 암은 유전적 유인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암 세포는 어떤 원인으로 발생한 걸까.
모리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필립 티번과는 오랜 지인이었지만 서로 일이 바빠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티번은 캐런의 딸을 핑계로 모리스에게 흉금을 터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캐런을 흠모했는지, 그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모리스에게 네가 캐런의 오빠인 것에 질투를 했다는 말도 했다. 모리스는 환생을 생각했다. 주은은 캐런의 환생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신은 캐런의 운명이 안타까웠기에 유전적 대물림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은은 모리스의 차에서 창문을 열고 있었다. 주은은 차를 타면 창문을 여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바깥 공기를 마셔야 했다. 밖에 어떤 물질들이 존재하는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멀리서 화학 물질 냄새가 났다. 여자의 냄새. 여자의 취향을 결정짓는 냄새. “브래싱”이라는 간판이 붙은 드러그 스토어가 보였다. 저곳이다. 주은은 모리스에게 차를 저 가게 앞에 세워달라고 했다. 살 것이 있다고 했다.
주은은 본능적으로 트리시를 떠올렸다. 트리시와 어울리는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트리시 유전자에 적합한 화학 성분의 냄새. 매장 제일 바깥 쪽에 진열된 커다란 알약처럼 생긴 제품이었다. 립세럼이라고 써 있었지만 주은은 그게 뭔지 몰랐다. 어쨌든 몸에 해로운 건 아닐 것이다. 주은은 트리시에게 이걸 선물하기로 했다. 원래 선물을 살 생각은 없었지만 냄새는 언제나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좋은 걸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게 만든다. 여자의 본능일까? 아버지와 있을 때는 이런 본능이 없었다. 아버지와 있을 때는 한번도 여자로 살아 보지 못한 것 같다. 주은은 점원에게 립세럼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모리스에게 트리시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주은은 방에 책들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책들은 보기 좋게 정렬돼 있었고, 정렬된 책에는 빼곡히 노트가 붙어 있었다. 주은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초등/고등 교육 자격 시험과 대입 학력 시험, 그리고 임페리얼 칼리지 입학 요강 등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노트는 깨알 같이 자세하고 자상했다.
그걸로 하면 돼. 넌 캐런만큼 똑똑하니까 금방 합격할 거야.
모리스가 이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모리스는 원래 이렇게 꼼꼼한 사람이었다. 주은은 사람의 냄새로 성격과 행동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놀랄 일은 없었다. 주은이 감격한 것은 모리스가 정말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적인 의무감이 아니었다. 말이 아닌 행동 하나하나 가족을 대하는 듯한 애틋함이 있었다. 엄마와 이별 한 뒤 처음 느낀 가족애. 소속감. 안정감. 마음의 평온. 주은은 모리스를 빤히 바라 보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리스는 당황했다. 시선이 허리를 감싸고 들어온 것 같았다. 방금 저 시선에 깊숙히 입맞춤 당한 것 같았다. 대체 왜 저렇게 성숙한 걸까? 어째서 저 아이는 10대 소녀 같은 느낌이 없는 걸까? 모리스는 얼굴이 달아 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주은의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뒤적였다.
무… 무리하진 마. 시간 많으니까.
자신의 당황하는 모습에 더 당황한 모리스는 황급히 주은의 방에서 뛰쳐 나갔다. 모리스는 주은의 눈색깔이 파랗다는 사실을 지금 깨달았다. 주은은 캐런의 눈을 물려 받았다. 하지만 푸른눈은 열성이다. 동양인과 혼혈 중에 푸른눈을 가진 이가 있었던가? 아내가 죽기 전 만났던 여자가 떠올랐다. 푸른 눈동자의 여자. 가난했지만 당돌하기 짝이 없었던 여자.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때 열병처럼 빠져 들었던 그 여자. 그때 그 여자의 시선도 이만큼 도발적이었을까.
모리스는 죽은 아내 멜리사를 생각했다. 멜리사는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부자집 여자였다. 착한 여자였다. 세상 만물에 다정하고 친절한 여자. 하지만 매력이 없었다. 아내와 관계는 형식적이었고 모리스는 아내와의 시간이 지루했다. 그때는 아내가 금방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병은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아내의 상태가 호전된 것에 대한 안도의 심정이었을까 - 모리스는 뼈저린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의 외도와 동시에 아내가 죽은 것이 천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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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시는 아빠가 두고 간 립세럼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 트리시는 외출 금지 중이었다. 그 중국 여자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도 속상한데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사과하라는 건 인간적으로 해선 안 될 무리한 요구였다.
아빠가 중국어 책이라도 줬다면 성의를 봐서라도 사과문 한줄 정도는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인터넷에서 찾아 배우라고 했다. 아무래도 아빠는 나보다 그 중국 여자를 더 아끼는 것 같다. 아빠가 이렇게 하루 아침에 냉정하게 돌아설 리가 없다. 분명 음모가 있는 것이다. 그 중국 여자 뒤에 뭔가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트리시는 자꾸 립세럼에 눈길이 갔다. 거슬리니까 서랍 안에 처박아 둬야지 안 보이게. 립세럼을 들어 보니 묵직했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포장을 풀었다.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립세럼을 입술에 발랐다.
평생 립세럼을 구경도 못 해봤을 것 같은 여자애가 이런 걸 어떻게 산 거지? 아빠가 산 걸까? 아빠는 절대로 이런 걸 살 사람이 아니다. 아빠도 제임스도 여자 물건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화장품 샵은 물론 여자 옷가게에도 반경 100m내 접근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건 분명 그 중국 여자가 산 것이다. 우연이겠지. 어쩌다 얻어 걸렸겠지. 하지만 트리시는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트리시는 주은이 허술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인이 싫은 것과 별개로, 주은이 어딘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트리시는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