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디는 어릴 때 했던 시체 찾기 놀이를 떠올렸다.
길을 걸으면 땅에 묻힌 주검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인간 동물 모두 같은 모양으로 태어나듯, 인간 동물 모두 죽어서 같은 냄새로 남는다. 말, 늑대, 곰, 새, 쥐, 사람... 모두 죽어 세월이 지나면 희미한 석회질로 남아 땅과 하나가 된다.
종을 구분할 수 있는 주검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이다. 브로디는 어릴 때 그런 시체들을 찾아 다녔다. 최근 죽은 시체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일수록 말이 많았다. 나는 누구고 언제 어떻게 죽었고 여기 이렇게 지내고 있어.
브로디는 주검들의 이야기를 맡으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들판에 아무렇게나 묻힌 사람 시체 위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냄새를 곰 씹은 적도 있었고, 피 흘리며 죽어 간 짐승의 시체를 찾기 위해 날이 저물고 길을 잃을 때까지 걸은 적도 있었다.
브로디는 지금도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주검의 냄새를 맡았다. 땅 속엔 거의 언제나 무언가의 뼈가 묻혀 있었다. 브로디는 땅 속에 묻힌 뼈의 사연이 궁금했다. 언제 어떻게 죽었고 살아 생전엔 어떻게 지냈는지. 브로디는 죽은 이들의 사연이 궁금했다. 오래 전 잊혀진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브로디는 리피 저수지의 진흙밭 위에 앉아 있었다. 이곳 약 1m 아래 두 소녀의 시체가 묻혀 있었다. 두 소녀는 6년 전 캐슬녹에서 실종된 설리반 자매일 것이다. 설리반 자매는 6년 전 마트 CCTV에 어느 남자와 주차장으로 가는 모습이 찍힌 뒤 다시 발견되지 않았고 미제 실종 사건으로 남았다.
브로디는 땅을 파지 말고 기다리게 했다. 그는 땅의 냄새를 맡았다. 땅은 불모지였다. 수천년 전, 빙하기가 오기도 한참 전, 시냇물의 퇴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이 땅은, 오래 전 농토로 개간된 이웃 땅들과 달리, 산소 공급이 차단된 지형 덕에 천년 넘게 단 하나의 생명도 잉태하지 못한 회색빛 무기질 침묵의 땅으로 남았다.
불모의 땅은 두 소녀를 품고 있었다. 산소 부족으로 더디게 분해된 소녀들의 사체는 아직 대부분 썩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땅은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소녀들이 이곳에 끌려와 진흙 속에 산 채로 묻힐 때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작은 아이는 3살, 큰 아이는 6살쯤이었을 것이다. 작은 아이가 먼저 묻혔고 큰 아이는 나중에 묻혔다.
브로디는 땅을 파도록 했다.
범인은 후크헤드에 사는 50대 철도 노동자였다. 6년 전 그는 여자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캐슬녹의 마트에서 설리반 자매를 유괴했다. 원래 언니만 유괴하려고 했는데 동생이 끝까지 따라 왔다고 했다. 동생이 차 안에서 심하게 울자 범인은 리피 저수지에 들러 동생을 진흙 속에 파 묻었다. 언니는 범인이 소변을 보기 위해 국도 변에 차를 세운 사이 탈출, 리피 저수지까지 걸어가 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이미 진흙 속에 빠져 죽었고, 언니는 진흙밭에서 동생을 찾다가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동생 곁에 죽었다.
언니의 시체는 녹슨 삽을 품고 있었다. 저수지에 빠진 동생을 구하기 위해 범인의 차 뒷좌석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삽은 남부 지방 철도 노동자에게만 지급되는 다용도 삽으로 범인을 검거하는데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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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디는 새로운 DNA 수사 기법이었다. 80년대 처음 도입된 DNA 수사보다 진일보한, 새로운 차원의 수사 기술, 마법의 열쇠 같은 존재였다. 캘러핸 경감은 장기 미제 사건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가 브로디에게 바란 것은 그들이 오랜 세월 해결하지 못한, 미치도록 해결하고 싶었던 사건의 실마리였다. 캘러핸 경감은 브로디를 위한 미제 사건 전담팀을 만들었다. 브로디의 미제 사건 전담팀은 더블린을 넘어 아일랜드 전역 미제 사건을 관할했다. 브로디는 사건의 지역도 유형도 가리지 않았다. 해결해야 할 미제 사건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맡아 해결했다. 브로디가 원한 조건은 하나였다.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 브로디의 미제 사건 전담팀에는 브로디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
#1
주디스 실종 10주년이었다. 주디스 맥긴은 테레누어 가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됐다. 대학생이었던 그는 어머니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식당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었고, 그의 부모는 주디스의 실종 후 직장을 그만 두고 아일랜드 전역에 플래카드를 걸고 실종 전단지를 뿌렸다.
브로디가 가진 단서는 주디스의 혈육 - 부모와 여동생의 냄새, 그리고 십년 전 마지막 일했던 식당에서 입었던 유니폼 뿐.
브로디는 주디스의 혈육에게서 유전적 형질의 냄새를 맡았다. 감성적 - 낭만적 형질의 냄새. 목적지향적이지 않은, 관계지향적 삶의 냄새. 주디스는 목적지 A와 B 사이를 최단거리 직진하는 유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쉽게 한눈을 팔았을 것이며, 쉽게 시간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브로디는 주디스가 실종된 날과 같은 계절, 같은 날씨, 같은 시각, 같은 경로를 따라 걸었다. 봄이었다. 꽃을 파는 트럭이 있었다. 어쩌면 트럭이 눈에 띄었는지 모른다. 강렬한 꽃냄새를 풍기는 트럭. 어쩌면 주디스의 취향에 강렬하게 어필한 꽃이 있었을지 모른다. 주디스는 그 꽃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것인지 모른다.
브로디는 인간의 유전자 냄새로부터 취향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농부의 직감이었다. 저 사람이 어떤 꽃과 열매를 좋아할지 아는 것. 식물을 길러 판매하는 농부의 천부적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브로디는 주디스의 가족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낀 것인지 모른다.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로 여긴 것인지 모른다.
브로디는 꽃을 파는 트럭의 꽃 냄새를 하나씩 맡아 보았다. 주디스였다면 어떤 냄새에 이끌렸을까. 그가 그때 이 길에서 맡았던 냄새, 그를 죽음의 덪으로 인도한 꽃은 무엇이었을까.
부활절 백합Easter lilies. 보라색 개량종이 출시된 것이 대략 10년 전이다. 백합의 색과 향을 보다 여성적 취향으로 개량한 종으로, 당시엔 이 백합종 판매자들이 많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추론이었지만 유일한 실마리였다.
경찰은 브로디가 지명한 변종 백합을 거래한 업자를 전수 조사했다. 예상대로 많지 않은 수였다. 지금까지 십년 간 동일 사업을 해온 업자는 한 명 뿐이었다. 범인은 십년 전 우연히 판매한 꽃 때문에 꼬리가 잡힐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피트 라이언. 그는 정육점을 운영하던 사업가였다. 정육점이 잘 되지 않아 고기 식당을 함께 운영했지만 같이 망했다. 큰 빚을 진 그는 극단적인 사람이 되었다. 씻을 수 없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온라인에서 여자를 꼬셔 강간 후 살해했다. 시체를 바다에 버린 후 자신도 빠져 죽을 생각이었으나, 그의 극단적 범죄 행위는 삶의 의욕을 부추겼다. 그는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여자를 노린 연쇄 살인범이 되었다. 꽃가게 트럭에서 시작한 사업은, 주디스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7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그는 여자의 취향을 잘 알았다. 그와 그의 꽃은 여자를 납치 살인하기 위한 최상의 듀오였다. 더블린 외곽에 위치한 피트 라이언의 화원엔 희생자들이 묻혀 있었다. 희생자들이 묻힌 자리엔, 그들을 유혹했던, 그들이 이곳까지 따라 와 사려고 했던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2
린드게일 초등학교에 히니, 제니, 일린은 삼총사였다. 셋은 장래 희망이 같았다. 동물학자가 돼 전세계를 탐험하는 것. 삼총사는 동네에서 수km 떨어진 숲에 나비 희귀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여름 방학을 맞아 숲으로 놀러 갔다 실종되었다. 7년 넘게 단서 하나 발견되지 않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실종 사건이 되었다.
인공 화학 물질에 길들여진 인간은 숲의 냄새와 인간의 냄새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탐지견을 데려 오지만 개는 실종자의 마지막 흔적까지만 인도한다. 인간은 숲의 기억을 잃었다. 인간은 숲에서 길을 잃고, 숲에서 길을 잃은 인간은 돌아오지 못했다. 빈사 상태로든, 주검으로든, 인간이 숲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 어딘가 살아 있거나, 발견되지 못한 곳에 주검으로 있거나.
브로디는 어느 수사관이 제시한 “피리 부는 사나이” 추론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나비를 찾던 아이들은 숲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라 갔을 것이다. 처음 아이들의 냄새를 추적했던 경찰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단지 말을 못했을 뿐.
브로디는 경찰견이 인도한 실종자의 마지막 흔적 지점에서 시작했다. 브로디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이 숲을 처음 방문한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곳에 처음 우연히 방문한 사람이 아니라 자주 왔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숲이 자기 집처럼 익숙했기에, 이곳에 처음 온 어린이들을 보고, 마치 집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게 유일한 단서였다. 범인은 이 숲을 자주 찾는 사람이라는 것. 범인은 아이들이 실종된 뒤에도, 아마도 세상의 관심이 시들해진 뒤, 아마도 1년 쯤 뒤에, 또 다시 숲을 방문했을 것이다. 이곳은 그에게 행운의 장소일 것이다. 흥분과 스릴, 성취감으로 가득한, 좋은 기운을 가져다 주는 곳일 것이다.
브로디는 그로부터 매일 2주 동안 숲을 돌았다. 이곳을 2번 이상 방문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흔적을 찾았다. 수십 명이었던 후보가 서너 명으로 줄었다. 이 중 한 명이 범인일 것이다. 터무니없는, 근거없는 직감이었지만, 브로디는 누구일지 알 것 같았다. 냄새는 인간의 성격을 담는다. 성격과 삶의 방식을 말해준다. 일률천편적이던 인간의 형상이, 냄새를 통해, 영화 속 등장인물 같은 캐릭터를 갖는다.
낯선 아이들에게 기꺼이 접근해 목적을 달성할 인간. 대상에 대한 간절함이 절박에 달한 인간. 그런 캐릭터의 소유자가 누굴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용의자는 브로디와 함께 숲에 잠복한 수사관들에 의해 잡혔다. 톰 호건. 직업이 일정치 않은, 스스로 작가라는 남자였다. 부모의 사망 후 부모의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수줍음이 많은,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에겐 충동성도, 폭력성도, 변태적 성적 취향의 냄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낯선 어린이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는 최근 자신과 유전적 연관성이 없는 어린이와 접촉한 적이 있었다.
톰 호건은 실제로 작가였다. 그는 시체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고양이를 죽이다 7년 전부터 사람 아이를 죽이기 시작했다. 그는 죽은 지 오래된 시체에는 감흥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죽인, 갓 죽은 시체에 감흥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거부감이나 위험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에게 희생 당한 아이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톰은 동심을 이해하는, 선량하고 친절한,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었을 것이다. 죽은 아이들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까. 톰 호건으로부터 비정상적인 외로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오랜 세월 쌓인 결핍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 그들이 그런 후각을 갖고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까.
브로디는 생각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톰 호건의 지하실에 묻힌 아이들 중 하나였다면, 살 수 있었을까. 그의 냄새만으로, 그가 내게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까.
#3
래리 고먼. 다트리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인근 대학 축제를 구경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실종됐다. 4년 넘게 단서 하나 발견되지 않은 미제 사건이 되었다.
비 내리는 밤이었다. 학교 정문 CCTV에 래리가 학교에 들러 우산을 갖고 나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유일한 단서였다. 래리는 밤 10시 20분에 학교에 들러 11시에 우산을 들고 나왔다. 정상적인 경우, 아무리 늦어도, 5분 내 우산을 들고 나왔어야 했다. 40분이나 걸릴 이유가 없었다. 경찰은 이 점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40분 동안 래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한 것인지. 학교에서 했던 일과 실종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브로디는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는 경찰의 수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경찰은 래리가 아마도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혼자 “성적” 행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같은 날씨,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방문한 브로디는 경찰과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학교엔 누군가 있었다.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난, 당직실도 운영하지 않는, 아무도 없는, 어둠과 적막 뿐인 학교 건물에 누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래리의 실종과 연관이 있었다.
실내에서 발생한 사건은 브로디의 전문이었다. 실내에선 냄새가 흩어지거나 오염되지 않고 스며든다. 누가 언제 왔다 갔는지, 무얼 했는지, 기록이 오래 남는다. 실내에 쌓인 냄새의 지층은 범죄 수사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브로디는 학교에서 누군가 환각 물질을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생들끼리 단발적 거래라고 보기 어려운, 상습적인, 어쩌면 정기화 된 거래였다. 브로디는 이 거래 행위가 4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래리는 그때 학교에서 환각 물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대학 축제에서 처음 환각 물질을 접한 뒤, 학교에 들러 2차 복용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실종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
트레버 밀런. 대체 교사로 일하는 30대 남자였다. 그는 교사이자 약초상herbalist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산에서 버섯을 채집해 약을 제조했다. 공부 잘하는 약, 잠이 덜 오는 약, 피로가 풀리는 약, 버섯의 환각 성분을 이용한 각성제였다. 처음에는 취미 생활이었다. 하지만 효과가 확인된 뒤로 친한 학생들에게도 나눠 주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상거래 행위로 발전했다.
트레버는 인기 교사였다. 그가 가르치는 지리 시간은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트레버를 따르는 학생들은 트레버의 버섯 채집에 직접 따라 가기도 했다. 트레버의 약초 비즈니스에 대해 아는 학생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이 래리 고먼을 죽음으로 이끈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래리가 대학 축제에서 접한 것은 LSD였다. 래리는 그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다급하게 각성 효과를 원했다. 축제에 숨어든 마약상으로부터 LSD를 구매해 복용했지만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학교로 돌아가 트레버를 찾았다. 트레버는 당일 다른 학생과 약속이 있었으나 약속했던 학생은 나타나지 않고 래리가 나타난 거였다. 트레버가 래리에게 판매한 각성제는 말똥버섯Panaeolus과 애주름버섯Mycena을 조합한 성분이었다. 이 성분이, 뒤늦게, 래리가 복용한 LSD와 반응을 일으켜 환각 폭주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됐다. 래리가 복용한 건 어쩌면 LSD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싸구려 합성 마약이었을 수도 있다.
트레버가 래리에게 준 각성제는 치명적인 성분이 아니었다. 트레버는 래리가 마약을 복용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래리의 시신은 학교에서 10km 이상 떨어진 말레이 공원 지하 수로에서 발견됐다. 그가 죽기 전 어떤 환각 증세를 겪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유골 많은 부분이 골절돼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기 직전까지 환각에 시달렸을 것이다. 환각이 만들어 낸 공포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자신도 모르는 곳에 기어 들어가 죽은 것이었다.
래리를 실제 죽음으로 이끈 범인은 대학 축제에서 마약을 판 마약상이었지만, 언론은 트레버에 초점을 맞췄다. 트레버가 체포된 날 언론엔 “현직 교사, 학생들에게 마약 팔아”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트레버는 신혼이었다. 체포 당시 결혼 3개월이었던 트레버는 버섯의 치유 효과에 관한 책을 쓰기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트레버의 체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학생들이 경찰서에서 시위를 벌였다. 일부 수사관은 “우리 선생님 돌려 달라”며 울부짖는 학생들에게 썩은 계란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4
벤 헤이즈는 2살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아내의 심부름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다 화이트처치에서 퍽치기 강도로 사망했다. 피해자를 한번에 기절시키지 못한 범인은 피해자가 깨어나자 머리를 한번 더 가격해 죽였다.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미제 처리. 2살 아이를 키우던 피해자 아내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뒤따라 자살.
당시 수사 담당자는 피해자의 두피와 옷을 증거물로 보관, 브로디는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다. 근방 대형 물류 창고에서 쓰는 소독제 냄새였다. 유기물은 소모되거나 변질되지만 무기물은 소모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유기물의 냄새는 세월이 지나면 무의미해지지만 무기물의 냄새는 여전히 동일한 의미로 남는다.
경찰은 사건일 이전 일주일 동안 해당 물류 창고에서 근무한 적 있는 직원들을 전수 조사했다. 용의자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일 즈음 회사를 그만둔, 혹은 해고된 남성을 우선 조사했기 때문이었다.
드류 맥베인. 소년원 출신 소매치기 장물팔이범이었다. 그는 22살 때 거리에서 공병을 줍던 가출 여고생과 동거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직장에 취업해 성실히 일했다. 동거녀는 화장실이 딸린 집에서 살고 싶어했다. 임신 중이기 때문이었다. 임신으로 밤에 자주 소변이 마려운 동거녀 때문에 드류는 마음이 급했다.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려면 보증금이 필요했다. 새벽 근무와 야근을 자처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정리 해고 통지였다. 해고 통지를 받은 그날 드류는 범행을 결심했다. 벤의 지갑을 털어 동거녀에겐 받지도 못한 퇴직금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경찰에 잡혀 온 드류를 본 브로디는 그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아마 2살일 것이다. 드류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2년 전 퍽치기를 한 피해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경찰서에서 알았다. 그는 무서웠다고 했다. 손이 너무 떨려서 피해자를 한방에 쓰러뜨리지 못했다고 했다. 피해자가 깨어난 것이 너무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세게 내리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밴스 수사관이 ‘너 때문에 피해자의 아내와 부모가 자살했다’고 말 하려는 걸 옆에 있던 일레인 수사관이 제지했다. 드류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고 있었다.
드류는 최소 7년 형 이상 받을 것이다. 드류가 감옥에 가면 그의 아내와 아이는 어떻게 될까. 남편이 자신을 위해 살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내는 어떻게 될까. 2년 전 피해자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해자의 아내도 삶의 의지를 잃는다면, 정의가 구현된 것일까. 모두가 잘 된 일이라고 흡족해 할까.
냄새를 과거를 보는 감각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뿐이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려주지 않는다. 브로디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것에도 애착 갖지 않기로 했다. 냄새로 보는 세상에 감정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수년 간 해결되지 않던 미제 사건들이 브로디에 의해 하나씩 해결되었다. 경시청 사람들은 경외감을 느꼈다. 망치와 해머와 커터를 써도,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던 강철보다 단단한 자물쇠가, 외국에서 수입된, 듣도 보도 못한 도구에 의해 간단히 열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