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연소 정부수반으로 유명한 산나 마린(Sanna Marin) 핀란드 총리는 의회에 제출한 안보 보고서와 스웨덴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나토 가입을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어. 사실상 나토 가입 신청을 공식화하겠다는 선언이지. 이미 미국 및 나토 주요국들과 만나 말을 다 맞춰 놓은 상태라 정식 절차 밟으면 승인은 거의 프리패스라고 봐야 해.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접한 핀란드만큼은 아니지만 스웨덴 역시 나토가입을 위한 안보정책 검토를 서두를 것이라고 밝혔어. 이런 안보 문제에 있어 핀란드나 스웨덴은 항상 같이 움직이는 한 세트나 마찬가지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나토 가입에 대한 찬성여론이 두 배로 증가하기도 했고. 설령 스웨덴 정부가 원하지 않는다 한들 자국 내 여론과 핀란드의 확고한 나토가입 의지로 인해 안팎으로 압박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거야. 즉, 스웨덴의 나토 가입 신청 역시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사실 개전 초기 핀란드와 스웨덴이 자신들의 오랜 원칙을 깨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이런 흐름을 예상하긴 어렵지 않았어. 보통 유럽 내 중립국이라면 스위스만 떠올리기 마련인데 군사적으론 핀란드와 스웨덴 역시 비동맹을 표방한 중립국이야. 물론 이들은 명백한 자유진영에 서방과 가깝고 EU 회원국이라 완전한 중립이라고 보긴 어렵지. 하지만 집단안보동맹인 나토에는 가입하지 않고 군사적인 중립국이자 완충지대로 남아있었어.
스웨덴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 직접적인 전쟁을 겪지 않고 비군사동맹 기조를 200년 동안 유지해온 국가야. 핀란드는 1939년 소련의 침공을 받았지만 결사항전한 덕분에 소련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국 및 중립국을 표방할 수 있었지. 2차대전과 냉전을 지나 소련 해체 이후로도 계속 중립을 유지했던 두 나라가 이제 기존의 안보정책을 완전히 뒤집겠다고 나섰어. 일대 변혁이지. 그동안 유럽에 정립된 질서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거야.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두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우리의 안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이야. 중립국 유지하기 위해 징병제를 유지한 건 물론 자체 국방력을 강화해왔지만 군사동맹 없이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낀거야. 이제 지구촌 시대는 끝났고 어디에 줄을 설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어. 양자택일의 순간에 현실을 부정하거나 이리저리 간보지 않고 자국 안보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을 택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이런 움직임에 러시아는 즉각 발끈하고 나섰어. 현재 러시아의 대표 콩라인이자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메드베데프는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 가입을 시도 한다면 발트해 연안에 핵 미사일을 전진 배치하겠다"고 발표했지. 외교적 수사 따윈 개나 준 공갈협박이나 마찬가지야.
두 달 가까이 우크라이나도 점령못해서 허우적거리는 주제에 또 다른 나라 상대로 군사긴장을 높이겠다고? 드디어 미친건가? 근데 푸틴으로선 저렇게 급발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우크라이나를 장악하지도 못했는데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하는 건 푸틴에게 있어서 최최최악의 시나리오거든.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을 나타낸 지도야. 굉장히 길지? 이 국경선은 자그마치 1340km에 달해. 현재 러시아 접경에 위치한 나토 동맹국들의 국경선을 다 합친 것과 맞먹는 길이야. 그러니까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는 나토국과 맞닿는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되는거야. 거기다 핀란드 국경 지근거리엔 러시아의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어. 푸틴이 발작할 만 하지?
또 하나, 핀란드 스웨덴 나토 가입 시 발트해가 사실상 봉쇄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러시아가 핵 무기를 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발트해 연안이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위치한 월경지 칼리닌그라드를 말해. 원래 독일 영토였다가 2차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된 곳이지. 소련 해체 이후 발트 3국이 독립하면서 본토의 국경에서 떨어져 나가게 됐어. 이후 폴란드와 발트 3국이 나토에 가입하면서 내륙은 나토국에 둘러싸인 형태가 되어버렸고.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러시아가 심각한 '부동항' 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을거야. 러시아가 벌인 전쟁 대부분이 부동항, 즉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차지하기 위한 세력확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다른 유럽국의 견제가 충돌했을 때 발생했어.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몇 안되는 부동항이면서, 러시아 해군 소속 발트 함대의 본부라 러시아에겐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지.
안 그래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껴있어서 육로가 막혔는데 핀란드와 스웨덴까지 나토에 가입한다? 통통배나 띄울 게 아닌 이상 발트해는 러시아의 손에서 벗어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죽고 못사는 부동항이 무용지물 되는데다, 여길 본부로 둔 발트함대는 옴짝달싹 못하고 사실상 간판 내리는 거지. 푸틴 입장에선 혹 떼려다 혹을 열 개 더 붙이는 꼴이 아닐 수 없어.
푸틴이 맘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핀란드를 손 봐주고 싶겠지만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녹록치 않아. 지금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형성한 북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은 완전히 패퇴한 상태야. 부챠 학살도 러시아군 퇴각 후 우크라군이 그 지역 탈환하니까 현장이 대대적으로 드러났던 거고. 지금까지 방어 중심으로 전투를 수행해 온 우크라군은 공세로 전환해 빼앗긴 지역을 수복하려 하고 있어. 러시아 역시 동부 돈바스 일대를 확실하게 점령하는 걸로 전략 목표를 대폭 수정 후 마찬가지로 전열을 정비하고 있지.
향후 협상을 위해 현재 점령한 동부를 단단히 틀어쥐려는 러시아군과 이 지역의 탈환을 위해 이동 중인 우크라군 사이의 전면 전투는 이제 피할 수 없게 됐어.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핀란드까지 쳐서 전선을 확대한다? 양면전은 역사가 보증하는 필망 루트야. 진짜 농담 아니고 80년 전 히틀러가 밟은 패망 코스를 빠짐없이 답습하는거나 마찬가지.
핀란드의 군사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 인구수의 한계로 정규군은 겨우 3만 정도야. 하지만 핀란드 전력의 핵심은 상비군이 아니라 예비군에 있어. 총 동원하면 29만 정도고 이 예비군은 훈련량이 많고 질적으로 우수해서 사실상 정규군이나 마찬가지야. 또한 꾸준한 서방무기 도입과 착실한 장비 개량으로 무기체계가 우크라이나와는 차원이 달라. 곧 미국에서 F-35가 도입될 예정이라 러시아 공군력을 웃돌 예정이지. 겨울전쟁을 한 번 겪었던 나라라서 대러시아 방어를 위해 영혼을 갈아 넣었다고 할 수 있어.
핀란드의 지랄맞은 지형 역시 든든한 수호신이야. 핀란드의 영토 대부분은 숲, 호수, 늪지로 이루어져 있어. 침공로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기동이 힘들고 수적 우위를 살리기도 힘들지. 예전 겨울전쟁에서 소련이 무작정 머릿수로 들이밀었다가 대박 깨진 게 이런 핀란드의 지리적 특성에도 기반하고 있어.
그리고 핀란드를 건드리면 얘네만 싸우는 게 아니라 한미동맹처럼 상호방위로 묶인 스웨덴은 자동 참전이야. 수상할 정도로 전투를 잘하는 친절한 스칸디나비아 자원봉사자들도 죄다 뛰어든다고 봐야지.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 중이라 만약 핀란드에 군대를 동원한다면 질적 수준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런 병력으로 온갖 화려한 서방 무기로 무장한 핀란드 정예군에게 달려든다? 안 봐도 결과가 뻔히 그려지지 않아? 아무리 푸틴이 판단력이 흐려졌어도 이것까지 모르진 않겠지.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허덕이느라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는 러시아로선 다급하게 핵과 미사일 카드라도 꺼내 핀란드를 저지하려는 거라고 볼 수 있어.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번번이 퇴짜 맞은 이유도 최빈국에 서방이 러시아 눈치를 본 것도 크지만 분쟁국은 나토 가입이 어렵다는 게 주된 명분이었거든.
나토 가입은 아예 헌법에 명문화했을 정도로 우크라이나에겐 숙원사업이자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이야. 크림사태로 러시아에 의한 실질적 안보 위협에 맞닥뜨린 우크라이나는 어느정도 정신 차리고 대대적인 국방개혁을 단행했어. 징병제를 부활하고, 서구화 무기들을 사들이고, 군제를 나토 표준으로 맞추고, 장교들을 미국에서 훈련시키고, 미군과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하는 등 나토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
하지만 나토가 가입 만큼은 끝끝내 받아주지 않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거야. 그렇다면 이번 핀란드와 스웨덴의 가입 움직임에 대한 나토의 반응은 어떨까? 핀란드 역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심기 건드릴까봐 떨떠름 해 하고 있을까?
응 아니고, 경제력 짱짱하고 국방력 탄탄한 신규 회원님이 가입한다는 소식에 대놓고 환영합니다 고갱님~을 외치는 중이야. 나토 사무총장은 "회원 30개국 모두가 핀란드와 스웨덴을 환영하며, 절차도 매우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어. 나토 가입 절차는 보통 수개월에서 1년까지 가는 경우도 있어. 2000년대 후반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가 가입했을 때가 11개월 정도 걸렸고.
이에 대해 나토는 아주 친절하게 핀란드와 스웨덴의 경우 그 과정이 훨씬 빨라질 거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지. 뭐 이 정도면 버선발로 달려 나오는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전 우크라이나 가입 건에 대해서는 "모든 나라는 자신의 안보 정책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회원국 전원의 의견일치를 통해 받아 들일지를 결정한다”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던 것과는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 가차없을 정도로.
나토의 주요국들 역시 핀란드와 스웨덴이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가 도울 것이라며 적극 응원하는 중이야. 나토로부터 공식적으로 환영한다는 보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우크라이나와 달리 핀란드는 가입 신청 시 승인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해.
헌법에 명시할 정도로 나토 가입을 간절히 원했으나 결국 내쳐진 우크라이나. 이제 막 가입의사를 밝혔을 뿐인데 꽃가마 대령해서 모셔가려는 핀란드. 참 불공평하지? 하지만 국제관계란 게 원래 이런 걸 어쩌겠어.
결국 지난편 주제와 이어지는 이야기야. 국가 간 관계는 동정심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외교를 통해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서로에게 이득이 있거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겠다 싶게끔 스스로 힘있는 위치에 있어야 해. 강대국들 입장에선 우크라이나보다 핀란드가 받아줬을 때 훨씬 이득이고 가치있는 국가라서 온도차가 이렇게나 극심한거야. 우크라이나가 전후 국제사회에서 핀란드와 같은 대접을 받고 싶다면 이번 전쟁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직접 증명하는 수 밖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