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얘기야
할아버지가 12살때 사춘기가 쎄개 왔어
시골에서 독자로 태어났는데
사촌 형들보니 자기도 결국은 농삿꾼이 될 팔자인거야
부쳐먹을 전답도 없이 소작농으로 남의 곳간만 채우다 죽을팔자
마침 명절이라고 동네 형이 서울서 내려왔는데
양복을 쫙 빼입고 중절모도 쓰고 아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자랑이 늘어졌어
들어보니 대부업 같은 걸 하는데 형이 자기 밑에 셈 잘하는 조수하나 두고싶다고 말을 흘린거야
할아버지는 형아 따라 도시로 나가고 싶었데
그래서 형한테 나 좀 데려가라고 했더니
그럼 내가 사장한테 잘 한번 말해볼테니 20원 만들어와라 그러는거야
그때 학교선생 월급이 20원쯤 됐거든
그렇게 큰돈은 세간을 다 팔아도 부족할 만큼 가난했던 집인데
애지중지 키우는 소한마리가 있었는데 소를 팔면 못받아도 6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으니
아직은 어린소지만 저걸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어
형이 먼저 서울로 돌아가고 호시탐탐 소를 팔 생각만 하고 있었어
뒷산에 소먹이러 올라갔다가 불현듯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마을 반대편으로 산을 넘어 하루만 걸어가면 안동시장이니까
그 길로 소를 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어
소는 아무 말도 없이 할아버지가 이랴이랴 하는대로 부지런히 산을 올랐지
자그마한 소가 아직 코뚜레에 맺힌 피가 끈적한 작은 소가 한눈도 팔지않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잘 올랐데
능선을 꺾어 내려가는 길에 풀숲에 낙엽쌓여있는데 꼭 낙엽같이 알록달록한 뱀을 못봤지
뱀이 깜짝 놀래서 할아버지 종아리를 콱 물어버렸어
할아버지는 갑자기 종아리가 욱신하니 내려다봤더니 뱀은 그길로 쏜살같이 도망가느라 스사사 나뭇잎 헤치는 소리만 들리고
아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지
윗도리 고름을 끊어다가 종아리를 꽉 묶었지만 어린마음에 너무 놀라서인지 소 궁둥이에 머리를 쿵 받고 쓰러졌어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뜨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더러는 울고 더러는 애가 눈떴다고 호들갑을 떨었지
어안이 벙벙해서 눈만 끔쩍거리니까 수염이 명치까지 자란 의원이 이거 달여 맥이고 고약 잘 바르라 일러주고는 마을 사람들이랑 돌아갔어
나 어떻게 된거냐 물으니 소등에 엎혀서 집에 왔데
길에서 하도 소가 울어서 사람들이 나와보니 종아리에 피칠갑을 한 할아버지가 소등에 업어져 있었다고
들춰보니 뱀 물린 자국이 있어서 의원을 불러다 줬다고
얼마 안있어서 동네에 폐물이며 뭐며 도둑 맞은 집들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집 아들들이 서울형한테 일자리 봐달라고 그걸 팔아다 보낸거야
서울형은 잠적해버렸고 동네 제일 큰 어른이 찾으러 갔더니 그 형이 그런식으로 돈 잔뜩 해먹고 날라버린거야
어른은 그길로 내려와서 머리싸매고 죽내 사내 하는 집집마다 전당포에서 물건 찾아다주고
집나간 아들들도 달래서 데려왔지
형네 부모님이랑 동생들은 볼 면목없다고 세간살이 다 두고 새벽에 떠나 버렸어
어른은 가족도 없고 혼자 평생을 적적하게 지내셨는데
그일 있고 얼마 안지나서 갑자기 돌아가셨어
문안인사하러 하인이 아무리 불러도 기척이 없어서 들어가보니 좋은 명주한복 차려입으시고 몸단장 깨끗이하고 누워계셨데
할아버지는 소한테 평생 은혜갚아야 한다고 한 겨울에 눈이 와도 새로 풀베다가 먹였데
소는 더운김 뿜으면서 밥도 잘먹고 밭일도 곧잘하고 잘 자란 어른 소가 되었어
할아버지는 몇해 있다가 장가를 들었지
할머니는 시집오고 얼마 안돼서 큰 병을 앓았는데 고칠 돈이 없었어
부뚜막에 앉아 있으니 소가 하염없이 처다보는거야
꼭 자기 팔아서 할머니 병 고치라는거 같았데
아침에 죽을 새로 끓여서 든든하게 먹이고 나니
이제 가자하는 듯이 머리로 문간을 쿵쿵 찧더란다
할아버지는 연신 눈물을 닦으면서 신작로를 걸어갔어
소를 넘기고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몇 걸음 걷다가 딱 한번만 보자 싶어서 돌아보니
다 큰 소가 어렸을때 자기 업고 올때마냥 쪼그맣더라는거야
집까지 오면서 동네가 떠나라고 울었데
할머니는 그돈으로 병도 고치고 딸 여섯에 아들하나를 낳았어
할아버지는 나한테 종종 소얘기를 해줬어
진짠지 가짠지 그 동네 큰어른이 사실은 여자였다는데
시골동네에서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주 오래살면서 마을지장신 마냥 보살피고 그랬다더라
그래서 그랬는지 몸가짐이 늘 단정하고 수염하나 없는 말간 얼굴에 말씀이 참 없으셨다고
옛날 얘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