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허연 천장을 보았다.
익숙한 병원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어찔하다.
나는 아주 긴 잠을 잤다.
내가 잊어버린 기억들을 만났다.
나는 엄마랑 아빠랑 여동생이랑 서울에서 살았다.
여동생은 이미 이전에 나와 함께 살았었다.
서울의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나를 보았다.
빨간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를 첨벙대며 놀았다.
아끼던 인형에 여동생이 쉬를 싸서 목놓아 우는 나를 보았다.
아빠의 스쿠터 앞에 타고 빵빠레를 먹던 나를 보았다.
- 저기 봐라, 저게 63빌딩이다.
- 유탐삐띠?
주인집 딸이 나를 업고 꽃이며 새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야트막한 동산 위에 있던 초록지붕의 서울 집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그 집을 떠나오던 나를 보았다.
열 밤만 자면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올 거라고 했다.
나는 다 잊어버렸고, 다 잊어버릴 때까지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 첫 번째 생일이 지나고 곧 크리스마스도 지났을 때 엄마가 펄펄 끓는 물을 보온병에 넣어두고 깜빡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나를 보러 며칠 왔다 집에 내려가신 날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 보온병을 엎었다고 했다. 내가 입고 있던 솜이 두툼하게 든 우주복은 그 물을 흠뻑 흡수했다.
자지러지도록 울다가 주인집 딸이 발견할 때까지도 엄마는 절대로 깨지 않았다.
엄마는 불면증과 우울증이 심해서 잠자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고 했다.
역으로 가던 길에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되돌아온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어 목숨도 위험하다고 했단다.
그렇게 어린 아기는 화상으로도 죽을 수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허벅다리에 손바닥보다 커다랗고 흉측한 화상흉터를 얻었다.
나는 병원에 아주 오래오래 있었고, 엄마 아빠는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밤낮으로 일하고 돈 빌리러 다녔다고 했다.
아빠 모르게 이모들이 조금씩 돈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병원비라면 마포에 아파트를 몇 채 샀다고 타박한다.
자다 깨다 하는 내 옆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타령처럼 할머니는 병실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 하이고 애기가 별나네예. 얼굴 이런데 안 다쳐가 천만다행이 시더.
내가 모르는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떠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병실 불이 조도를 낮추고 티브이도 꺼졌을 때 엄마 아빠가 왔다.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그들의 눈빛에 나는 잊고 있던 불길의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아빠의 손을 보았다.
혹시 망치가 들려있지는 않을까.
엄마는 입술을 약간만 떼면서 목소리를 낮춰서 쌍욕을 했다.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질기도록 긴 내 목숨 줄은 왜 계속해서 붙어 있는 것일까.
나를 세상에 만든 사람이 저리 나를 죽이겠다는데, 나는 왜 죽지 않았을까.
나를 죽이려고 만든 것일까, 수많은 죽음의 기회 속에서 왜 나는 살아남았을까.
눈물이 흘러 귓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눈을 다시 감았다.
나는 물 위에 누워있고, 할아버지가 내 등을 받치고 있다.
할아버지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대로 나는 평온하게 물 위에 뜬 나뭇잎 같다.
뜨거운 손이 뺨을 후려치는 통에 나는 그대로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아버렸다.
엄마는 동네에서 제일 땅을 많이 가진 대대로 부잣집의 셋째 딸이었다.
그야말로 셋째 딸이지만 딸이 5명이나 있고, 아들이 하나였기 때문에 그리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훈장네 자손들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해서는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는 그런 집이었다.
뭐든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엄마는 이렇다 하게 눈에 띄는 딸은 아니었다. 예쁘지도 않았고, 걸핏하면 빈혈로 쓰러지기나 하는 영 외할머니 마음에 들지 않는 딸이었다.
외갓집의 아이들은 공부도 운동도 1등을 해야 하고 복스럽게 아무것이나 다 잘 먹어야 하고
누가 한대 때리면 나는 머리통을 깨부수어 놓아야 되는 전투적인 아이들이었는데, 엄마는 그 틈바구니에서 시집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소한테 미안해서 고기를 못 먹는 쓸데없이 마음이 약한 못난 아이였다.
엄마는 유모에게도 마음을 주곤 해서 유모가 일찍이 나이 많은 아저씨 집에 첩으로 팔려가면 밤새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했다. 글을 모르는 어린 유모에게 몰래 글을 알려주다 부지깽이로 흠씬 맞았다고 했다. 분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분과 위아래가 존재하는 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전쟁영웅이었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참전했고, 전장에서 포탄을 맞고도 살아 돌아온 신화 같은 존재였다. 주렁주렁 가슴팍에 달린 훈장들과 탄피 조각들이 박혀 절름거리는 다리를 대신해줄 값비싼 지팡이까지 그의 권위는 빛이 났다. 그가 길을 나서면 동네 머슴들은 바닥에 손을 짚고 인사를 했고 읍내 사람들은 모두 악수를 청했다.
외할머니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는 대신 밭을 매고 논을 갈고 소를 치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며 가문을 지켰다. 뭐든 1등으로 해내고야 마는 아이들로 키워냈다.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 도시로 나가서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다.
자유로운 도시의 분위기 속에서 엄마는 나팔바지도 입고 파마도 하고 안경도 쓰고 신여성이 되어갔다.
흐지부지한 녀석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엄마의 자매들은 모두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지만 엄마는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외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선을 보아야 한다고 니가 벌써 26살이라고.
머리를 박박 깎여서 절에 보내기 전에 당장 들어오라고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큰 이모가 동네 청년을 만나다가 들통 났을 때 광에 열흘을 가둬놨던 것이 생각났을 것이다.
막내 이모가 몰래 남의 옥수수밭을 서리했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두들겨 맞은 것도. 외삼촌이 몰래 타던 오토바이가 산산조각 나도록 박살이 나던 장면도.
전문대를 졸업하고 섬유공장에서 일을 하던 26살의 아빠는 그해 11월 엄마의 고향까지 할아버지랑 버스를 타고 와 화랑 다방에서 26살의 엄마와 선을 봤다.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뭐에 홀린 마냥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껴 서로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자고 약조를 했다.
그날 이후로 매일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넣던 양 집안의 어른들은 1월에 결혼 날짜를 잡았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의 단출한 5식구가 사는 집에 엄마가 시집을 갔다.
평생을 누구와도 방을 써본 적 없는 엄마는, 5명이 코를 골고 뒤척 거리는 좁은 단칸방에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로 일주일을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실신을 했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친정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빠는 더 큰 집이 생기면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일주일이 지나 할아버지의 생일이 왔다.
시아버지 첫 생신인데 도리를 다하라는 외할아버지 말에 엄마는 잠시 시댁에 들렀다.
그날 밤에는 할아버지가 돈을 삼천 원 주시며 여관 가서 편하게 자고 다음날 고향으로 가거라 이제는 오지 말거라 하며 엄마 아빠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날, 칠성장에서 내가 생겼다.
엄마는 입덧이 너무 심해서 몸무게가 30킬로 대로 떨어졌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복숭아통조림이 전부였다.
여름 뙤약볕에 할아버지는 복숭아가 유명하다는 동네까지 가서 몇 박스를 자전거에 실어다 밤새 끓이고 졸여 넥타를 만들어 냉장고에 식혀두고 엄마에게 먹였다.
회사에서 노조를 하다가 잘린 아빠는 밤엔 술을 먹고 낮엔 잠을 잤다.
가족들이 잠들면 매일 같이 옥상에 올라가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나의 엄마는 60년 만의 폭설이 무섭게 내리던 12월 어느 날에 23시간 동안 몸을 틀다 제왕절개를 권하는 의사에게 돈이 든다며 완강히 거절한 할머니 때문에 자연분만을 통해 4.8킬로의 거대한 아이를 낳았다.
출산 예정일을 열흘이나 넘긴 나는 좁은 양수 주머니 안에서 퉁퉁 불어 못생기고 끔찍하게도 컸다. 조그맣고 약한 엄마의 양분을 가책 없이 있는 대로 빨아먹고 복숭아 넥타로 몸집을 불린, 엄마의 눈물과 고통, 불안 속에서 자란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
애초에 손주가 딸이라는 사실에 돈이 아까워 며느리가 죽는다는대 제왕절개를 거절한 할머니도, 밤새 술을 먹고 집에서 잠을 자다 뒤늦게 나를 보러 온 아빠도, 일주일을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나 나를 본 엄마도 나의 탄생에 실망을 했다.
나에게 실망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우리 손녀는 키가 이렇게나 크니 이다음에 커서 농구선수시키면 되겠다고 겨우내 품 안에서 놓지 않았다.
엄마가 젖이 돌지 않아 밤낮으로 배고프다고 우는 나에게 쌀을 씹어 먹인 것도 할아버지였다.
동네에 아이를 낳은 아기 엄마를 찾아다니며 젖을 먹인 것도.
아빠는 사업을 해보겠다고 결혼반지를 판 돈 이십 몇만 원을 가지고 엄마와 나를 데리고 훌쩍 서울행을 선택했다.
서울이래도 변두리 깡촌이었다.
주인집에서 창고로 쓰던 것을 얻었고 그것이 우리 '집'의 시작이 되었다.
언덕 위에 있던 초록지붕의 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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