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비의 F춘기


 

“먹어, 선생님. 남기면 지옥 가서 다 먹어.” 

 

참고로 난 선생님 아니다. 그냥 일개 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다. 

철지난 MTBI로 보면 난 T발놈이 분명하다. T여서 논리적인게 아니라, F가 부족하여 감정표현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사실 MBTI랑은 상관없다. 

감정표현에 X찐따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2년동안 센터일을 하면서 부동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할머니 상사’지만 숨은 제2의 인물도 있다. 그녀를 대충 ‘오춘기 실장’으로 부르기로 한다.

 

 


 오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똑부러지면서 자신의 감정표현이 솔직하다. 할머니 상사보다 대략 10년~15년쯤 젊으신거 같은데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원체 동안이고 센터 옆옆 협의회에서 실장일을 하는 분이라서 정확한 이력도 모른다. 그저 할머니상사와 10년이 넘는 친분 사이로 센터에 자주 놀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 일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넘나들면 공유하는 사이다. 


 

 당시 나는 혼자 있으면 자는 걸 우선시 해서 주말내내 잠만 자다가 출근하는 월요일만 되면 쫄쫄 주린배를 움켜쥐고 오기 때문에 월요일이나 화요일은 잘 먹었다. 하지만 수요일쯤 되면 배가 불러서 자주 밥을 남겼는데 오춘기 실장은 그런 나를 왜 다 안먹냐면서 남기지 말라고 했다. 다 먹으면 다 먹었다고 칭찬도 해줄 정도로 매번 말하셨던 거 같다.  

그래서 어거지로 한 두숫가락 더 먹고 자리로 복귀하게 되면 그렇게 더부룩할 수가 없었다. 

 


근데 웃긴건 진짜로 힘이 난다는 것이다. 눈이 아픈건 핸드폰을 많이 봐서 그래와 같은 쌍급 잔소리이지만 정말로 밥을 잔뜩 먹으면 힘이 난다. 그래서 어른들 말씀 들어서 나쁠 것이 없다고 여기며 넘겼다. 근데 사실은 더 먹기 싫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하기가 껄그러웠다. 아니, 정말 우리 엄마 보다 나를 더 걱정해서 하는 말 같잖아??? 


 


“먹어, 선생님. 남기면 지옥 가서 다 먹어.” 

 

그래. 한 일년쯤 들었을까. 이제 얼추 밥도 잘 먹고 활동도 잘 하고 내 나름대로 식사 조절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아직도 남기면 지옥을 가라는 오춘기 실장이 원망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면 똑부러지고 찍 소리도 못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하지만..녜’ 를 반복하던 나도 1년쯤 들으니 소위 ‘뇌절’ 상태로 돌입했다. 

*뇌절: 뇌가 서서히 특정 현상에 쩔어져 홱가닥 한 모양.

 

 


“먹어, 선생님. 남기면 지옥 가서 다 먹어.” 

 

그런 날이였다. 창업캠프 준비로 2명의 강사님과 할머니 상사, 오춘기 실장 그리고 나 이렇게 밥을 먹는데 또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난 뭐에 신들린 듯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와!~~~~ 지옥에 가면 나 밥 잔뜩 있다! 안 굶는다, 안 굶는다!! 밥 챙겨먹는거 엄청 스트레스 받는데, 지옥 덕분에 스트레스 해소! 지옥에 밥 잔뜩 있다!!!!! 잔뜩 있다!!!!!”

 

이러면서 한 5분을 지옥에 가면 내가 남긴 밥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앞으로의 식량문제는 해결됐다면서 난리치면서 밥을 주워먹었다. 

 

오춘기 실장은 그거랑 이거는 틀리다면서 몇 번 말을 했지만 뇌절 상태로 절어진 내 입은 멈출 줄을 몰랐고 기어이 옆에서 밥 먹던 다른 강사분은 ‘지옥에 왜 가, 우리는 모두 천국을 가는거야’ 라면서 20년 교회생활을 증명하셨다.

 

밥풀을 더럽게 남긴다고 같이 욕먹던 할머니 상사까지 ‘나는 집에 있는 냉장고를 다 비워야돼. 너무 음식이 많아’ 하면서 주절주절 지방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밥을 항상 고마운 줄 모르고 남겨먹는 나로 향한 시선은 허공 어디로 흩어져버렸고 그 이후로 오춘기 실장님은 ‘밥을 왜 남기냐’ 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단 한마디도 안했다. 


 

 그렇게 나의 F춘기는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잔뜩해서 할머니 상사가 ‘너도 모르게 반말하는데, 너 내 앞에서만 그러고 다른 사람한테 그러지마라.’ 라고 할 정도로 열받으면 뒤에 ‘-요’를 잘라먹고, ‘싫어요, 안해요, 못해요. 어려워요.’ 라는 거절의 말도 늘고 ‘화난다, 속상하다, 짜증난다’ 라는 말도 잘해서 할머니 상사와 친한 주강사가 ‘깨비가 상사가 되면 피곤할까?’ 라는 질문을 해 뒷담화 아닌 뒷담화가 시작됐다고 나랑 사적으로 친하게 된 강사분이 고자질(?)까지 해줄 정도로 격렬한 춘기, 춘기, F춘기였다


 

하지만 원래 감정표현이 능숙하지 않았어서 그런가, 감정표현 하는 것도 지치게 되어 어느순간 어른들 앞에서 뭐하는 짓인가 싶어 점차 원래 내 식대로 ‘알겠습니다, 확인해볼게요. 기다려보세요’로 바뀌긴 했지만 확실히 앞뒤가 맞지 않아도 자신의 감정표현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나니 주변을 대하는 내 태도가 여유로워지면서 오히려 관계를 유지하는게 편해졌다. 

 

그리고 의외로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단순한 GIVE&TAKE가 아닌, 이런게 바로 감정을 주고 받는 관계란 것 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의를 할 때도, 논리적이게 정석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이상적일 거 같지만 의외로 감성적인 표현이나 분위기가 이야기를 진행할 때 더 매끄럽게 해주곤 하는데, MBTI로 따지면 ‘F’의 영역임이 틀림없다. 


 

 

처음 대학을 심리학과로 진학했음에도, 스스로의 삶에 더 이상 새로운게 없을 거 같은 흑백논리로 절어진 내가 새로운 분야로 미술을 선택한 것도, 내 인생에 부족한 ‘F’를 채우고 싶은 욕심이였을 것이다. 

 

MBTI 이야기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는데, 어떤 유형이든 결국 어른이 되면 골고루 갖고 있는 것이 이상적인 성숙한 상태라 나이가 들수록 유형의 의미는 없다는 이론이였다. 

 

지나친 감정으로 서로 상하지 않게 하는 매너만 있다면 사람들과의 관계형성과 의사소통은 논리보다는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더 편하다. 

 

 

얼마 전에, 또 할머니 상사와 오춘기 실장 그리고 바뀐 센터 담당자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는데 오춘기 실장님이 의자 들어서 밀라고 했다. 

근데 나는 1초 늦게 들어서 그냥 밀어버렸다. 그래서 ‘끼이이이이익이이-’ 하고 의자 소리가 시끄럽게 났다. 오춘기 실장님은 나한테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민폐야’ 라고 말씀했다. 

 

 

옛날 같으면 찍소리도 못하고 ‘네’ 해놓고 뒤에서 부글부글. 아니 내가 정당하게 커피값을 지불하고 왔는데 무슨 민페냐고 아무도 안 쳐다본다고 속으로만 했겠지만 F춘기를 겪으면서 격통의 어른이 되고 있는 오래사마 물러나지 않는다. 


 

“아, 제 의자에만 소리 나지 말라고 끼는 발커버가 없네요. 그래서 소리 났다보다. 어쩐지, 너무 소리가 크더라.” 이러고 천연덕스럽게 진짜로 ‘발 커버’가 없는 내가 앉은 의자를 가리켰다. 옆에 바뀐 담당자도 슬쩍 보더니 진짜로 여기만 발커버가 없다고 맞장구 쳤다. 

오춘기 실장님은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면서 뒷말을 붙였지만 이미 ‘의자 들어 넣기’ 소주제는 끝났다. 

 

물론 속으로는 나는 절대 민폐아님. 아무도 우리 자리는 쳐다보는 손님이 없었고(?) 진짜 민폐는 무인커피숍에서 싼 커피가격도 지불하지 않고 들어온 무전취식 손님이다. 나는 합리적인 골드손님이다. 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평화로운 T발놈의 논리로 머릿속을 채우며 살아가고 있긴 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15년 지기가 된 친구는 아니 무슨 그런 꼰대가 있냐고 뭐라했는데 그런 느낌 아니라서 설명하기 뭐했는데, 마침 오춘기실장님이 내가 차키에 악세사리 없이 다니는 거 보고 자기가 만든 공예제품 (신발 모양인 것 같음)을 손수 달아준 것을 보여줬다. 친구는 그걸 보더니 널 아끼시는구나? 라는데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꼰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꼰대 아니시다. 

 

내 논리로 맞으니까 내 말이 맞다. 

 



KEEP GOING! SISTER!


 

작품 등록일 : 2025-03-15
최종 수정일 : 2025-03-15

▶ 깨비의 스케쥴 관리, 실패

▶ 깨비의 계기는 인수인계

ㅋㅋㅋ 남의 경험담은 다 왜케 너무너무 재밌고 몰입되는지 모르겠음 ㅋㅋㅋㅋㅋㅋㅋ 깨비언니 앞으로도 잼난 얘기 많이 해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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