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s file #4
에린 킨젤라는 울지 않는 아이였다. 출산시에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아 숨을 쉬지 않는 것으로 착각, 간호사들로부터 한참동안 엉덩이를 맞아야 했다.
에린은 선천성 면역 질환을 갖고 태어났으나 부모는 그가 4살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다. 아이를 볼 때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긴 했어도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에린은 4살 때 워터포드 마리나에서 놀다 온 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그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장애인였음이 밝혀졌다. 그의 몸에는 항체를 생산하는 기능이 빠져 있었는데 이는 자동차에 전조등과 브레이크 등이 들어오지 않는 것과 비슷해서 밖에 한번 잘못 나갔다가 치명적 병을 얻어 사망할 수 있었다.
에린이 워터포드에서 얻어 온 병은 단순 바이러스 감염이었으나 이것이 패혈증으로 이어지면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병원에서는 살기 어렵다는 판정을 내렸다. 당시에는 패혈증에 듣는 약이 없었다. 면역 기능이 허물어진 에린 같은 어린이에게 패혈증은 사망 선고와 같았다.
에린의 아버지는 인공 호흡기에 의존한 채 눈 주위가 시꺼멓게 죽어가는 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신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번 소원을 이뤄준다고. 자신은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지금껏 단 한번도 뭔가 빌어본 적이 없었다. 아쉬우면 아쉬운대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주제 넘는 욕심을 부리는 건 옳지 않다고 믿었다.
에린의 아버지는 더블린 공항 검역소에서 일하면서 온갖 종류의 애착심을 보아 왔다. 사람들은 갖고 오지 말아야 할 물건을 압수 당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소중한지 울부짖었다. 바닷물, 야생 허브, 미꾸라지, 도룡뇽, 다람쥐 같은, 없어도 사는데 하등 지장 없는 하찮은 것들임에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다.
하찮은 것들. 신이 보기에 에린의 목숨도 하찮겠지.
에린의 아버지는 에린이 아빠 생일 선물로 집 앞에 꽃을 꺾어 꽃반지를 만들어 줬던 때를 생각했다. 꽃줄기에 매듭을 묶으려 하루종일 고생하던 에린의 자그마한 손을 보았다. 그 손 위로 굵은 주사바늘이 꽂힐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부모에게 웃음 짓던 에린의 눈을 보았다.
에린의 아버지는 신에게 빌지 않았다. 자신에게 에린이 얼마나 소중한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에린의 얼굴을 감싼 수동식 인공 호흡기에 바람을 넣었다. 심장 박동이 희미해질대로 희미해진 에린의 안색이 아득히 창백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제 그만 포기하시라며 물러났다. 아내와 친지들의 오열을 들으며 에린의 아버지는 묵묵히 호흡기에 바람을 넣었다. 신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번 소원을 이뤄줄 의무가 있었다. 지금 그 소원을 들어줘야 했다.
에린의 심장이 완전히 박동을 멈추었음에도 에린의 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후로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미동도 없이, 호흡기에 피를 쥐어 짜듯 바람을 넣었다. 그는 신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너의 의무를 다하라고.
에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은 더블린 네더크로스 병원 역사상 가장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병원 관계자들은 어린이 장례 전문 장의사와 커미션을 흥정하고 있었고, 묘자리도 자신의 병원을 통해 정하도록 할 참이었다. 에린의 생존을 확인한 담당 의사는 아버님의 '기'가 통한 것 같다는 얄팍한 설명을 늘어 놓았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에린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병원에서 에린의 회생 노력을 일찍 포기한 것은, 설사 살아난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린은 퇴원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바이러스의 접촉을 막아주는 밀실에서 생활해야 했고, 그의 부모는 병원비를 대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고된 일을 해야 했다.
8년 동안 멸균 밀실에서 고독한 삶을 살면서 에린은 밖에 나가 하고 싶은 일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는 집 앞에 정원을 만들어 꽃을 기르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사다 준 식물 도감을 보며 수백 수천가지 꽃들을 그렸다. 매년 부모님 생일이 되면 자신이 좋아 하는 꽃들로 화환을 그려 선물로 드렸다. 밖에 나가게 되면 진짜 꽃으로 만든 화환을 머리에 씌워 드리겠다고 했다.
에린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 그림도 그렸다. 비행기를 타고 동유럽 어딘가에 눈 쌓인 산을 내려다 보고 싶다고 했다. 몸이 건강해지면 아빠와 함께 공항에 근무하면서 맘 내킬 때마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갈 거라 했다.
에린이 바깥 생활에 대한 소원을 멈춘 것은 그의 나이 12살 때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더 이상 투명 플라스틱 막 앞에서 밤 늦게 피곤에 지쳐 힘들게 웃음 짓는 부모님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에게 밖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의학적으로 밀실 밖의 삶은 1년을 넘기지 못할 시한부 인생이었으나 에린에게는 새로운 인생이었다.
에린의 부모는 마음을 정했다. 마지막으로 딸의 소원을 이뤄주기로. 그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처분해 에린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에린이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 그곳에서 여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
에린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코크 하버 근처의 조그만 농지였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 에린의 부모는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부모는 내색 하지 못했지만 이곳에 에린을 묻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에린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씨를 뿌리고 묘목을 심어 밭을 꾸몄다. 날씨가 더워지면 싹이 돋고 이렇게 저렇게 생긴 꽃들이 피어날 것이라며 천진난만 웃었다.
그로부터 3달 뒤, 에린은 병으로 쓰러졌다. 고열로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에린은 병원에 가길 거부했다. 다시는, 죽어도,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에린이 사경을 헤매는 사이 밭에선 첫번째 꽃이 피었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에린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너를 아프게 낳아서 미안하다고.
에린 가족이 밭에 심은 21종의 화초들은 모두 꽃을 틔웠고 그 중 9종이 가을에 열매를 맺었다. 에린은 죽지 않았다. 그는 병에 시달리면서도 살아 남았다. 에린은 아픈 몸을 끌고 밭에 나가 약속대로 화환을 만들었다. 꽃의 수가 적어 머리에 씌울 크기는 되지 않았지만, 에린의 부모는 에린이 만들어 준 화환을 손목에 끼우고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에린 가족의 사정을 들은 이웃 농부들이 하나 둘씩 에린의 집에 찾아왔다. 겨울에도 죽지 않는 꽃나무들을 에린의 밭에 심어 주었다.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농작물도 심어 주었다.
에린은 지속적으로 병에 시달렸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에린은 병에서 완전히 나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하지만 모질게 살아 남았다. 이제나 저제나 에린의 죽음에 마음의 준비를 하던 부모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어쩌면, 에린이 선택한 땅이, 그리고 이 땅이 기른 꽃들이 에린의 목숨을 살려준 것일지 몰랐다. 이 땅에서 떠나지 않는 한 에린은 죽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건강해질지도 몰랐다.
에린의 가족은 땅에 정성을 쏟았다. 에린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밤 늦도록 노동에 시달릴 때와 달랐다. 그때는 아무 희망 없는 기계와 같은 삶이었지만 지금은 매순간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밭에 쟁이질 한번 할 때마다 땅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담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경험을 통해, 이웃 농부들의 도움을 받으며, 식물들을 성공적으로 키웠다. 에린의 가족은 자급자족에 성공했고, 에린이 기른 꽃은 인근 시골 동네에 판매되었다.
에린은 성인이 되었다. 유년 시절 내내 병에 시달린 탓에 발육 부진에 한쪽 다리를 저는 몸이 됐지만 더 이상 병에 걸리지 않았다. 에린은 꽃을 기르는 법에 대한 책을 썼고, 그의 이야기는 출판사를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 하루 아침에 에린은 아일랜드 전국구 유명인이 되었다. 의학계에선 불치성 면역 질환에서 살아남은 에린의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그를 설득했으나, 에린은 어떤 목적으로든 병원을 다시 찾지 않기로 했다.
에린은 아일랜드 인들에게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순례 행렬을 이었고, 많은 기업들이 에린을 채용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에린을 채용하는 회사는 앞으로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신이 만연했다. 미신 때문이 아니더라도, 에린의 존재만으로 기업 브랜드 이미지에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유명세에 에린 가족은 더 이상 코크 하버에 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에린을 낫게 해준 땅과 이별하기로 마음 먹었다. 언젠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오리라 마음 먹었다.
에린은 유명 기업들의 특채 제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더블린에 본사를 둔 버크 오거닉스 인터내셔널(Burke'sOrganics International)에 지원했다. 버크 오거닉스는 유기농 농산물을 제조 판매하는 신생 기업으로 에린에 대한 특채 의사는 없었다.
에린은 버크 오거닉스가 땅을 사랑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버크 오거닉스는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재배하는 농작물 간격을 늘려 땅과 식물이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 했고, 업계에서 가장 튼튼하고 맛있는 농작물들을 만들었다. 에린은 다른 지원자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버크 오거닉스에 지원했고, 최종 면접까지 합격했다.
최종 면접에서 에린을 만난 브로디는 충격을 받았다. 브로디에게 에린은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에린의 몸은 오랜 시간 무수히 많은 질병에 처참할 정도로 유린당했고, 유전자엔 면역 시스템 일부가 심각하게 결핍돼 있었다. 그러나 에린은 건강했다. 그에게서 온화한 냄새가 났다. 죽은 줄 알았던 고목에서 새 잎이 필 때 나는 냄새 같았다.
그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이런 종류의 냄새는 처음이었다. 이 냄새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잠시 고민했다. 재생? 운명에 저항?
브로디는 에린이 쓴 책을 훑어 보다 아무 생각없이 물었다.
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에린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인생이요.
에린은 말을 이었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꽃을 피우잖아요. 그게 식물의 인생이에요.
에린은 버크 오거닉스 인터내셔널의 농지 개발팀에 채용되었다. 그곳에서 관련 부서 농림청 직원을 만나 27살에 결혼했고, 29살에 임신을 했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에린은, 평생 처음으로, 울었다. 식물은 꽃을 피우기 위해 인생을 산다고 했다. 에린은 자신이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꽃을.
작품 등록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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