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말고사가 끝나고 매미가 울기 시작하고 더워지고

약속의 그날이 왔다.

그때 유행하던 스타일은 힙합과 일본스트릿을 섞은 혼노모 스타일,,,

나는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지만 뒷목이 다 보일만큼 짧게 자른 커트머리에

하늘색 색안경, 플라스틱으로 된 구슬같은 피어싱을 끼고 신촌으로 향했다.

남동생의 흰 셔츠(키작고 마른 내가 입으니 힙합이 됨)에

허리 사이즈 30의 바지(원래 내 사이즈는 24인데 까리해보이려고 엄청 큰 사이즈로 삼)를 껴입으니 스스로가 신화의 이민우가 된 것 같아 자광 폭발한 상태로 지하철을 탐.

(그때 키와 몸무게가 160에 44키로였는데 지금도 그대로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거 어떤 꼴인지 상상이 감??? 코끼리 가죽 뒤집어쓴 난민 어린이 같았을듯 ㅅㅂ)

유딩과 초딩사이의 어린이가 내 등의 가방을 보며 손가락질 했다.

엄마! 저 형 등에 가방이 관모양이야!!!!

당시 중2병 걸린 청소년의 간지 아이템 관모양 가방도 큰 마음먹고 샀다.

니뽄스타일 쇼핑몰에서 당시엔 큰 돈(5-6만원 정도 준듯)주고 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본 브랜드 짭이었던 것 같다.

비싼 값 못하게 이음새와 마감 부분이 허접했었음. ㅅㅂ

기말고사를 존나게 잘봐서 전교 3등인가 했다.

그 대가로 엄마에게 용돈받아 샀음.

남은 돈은 데이트 비용하려고 챙겨옴 ㅋㅋㅋㅋ

암튼 존나 꽃단장하고 신공으로 향함.

초딩때 앞집 사는 남자애가 나를 좋아해,

부모끼리 재미로 얘네 약혼시키자고 이어줘 강제로 데이트 몇 번 한 걸 제외하면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데이트였다.

진짜 심장 두근두근 터질 것 같고 손발이 시려서 죽을 것 같았음.

배는 왜 또 이렇게 사르르 아픈지 ㅠㅠ

삼십대 초반이 된 지금도 좋아하는 애랑 단 둘이 있게되면 손발 시리고 배아프고 난리남.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쪼는 버릇은 이때부터 있었나보다.

신촌에 도착!

현대백화점 주변의 꽃집에서 빨간 장미꽃을 한 송이 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람들이 힐끗힐끗 한 번씩 다 쳐다봄.

후,, 나에게 존나 도취된 상태로 한걸음씩 걸어감.

나는 존나 까리하고 힙한 레즈다.

오늘 여기 오려고 간지템(남동생셔츠, 관모양 가방) 다 장착했고 전교 3등도 한 천재다.

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공입구에서 문자를 보냈다.

- 여보 나 도착했어. 어디니?

- 나 화장실에 애들이랑 있으니까 이쪽으로 와.

서울에서 너구리를 잡나보다.

화장실은 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나의 그녀는 어디에?

사진 속 그녀는 긴 생머리에 흰 피부, 소희를 닮은 얼굴을 가진 청초한 인상이었는데

너구리 굴 속에는 쎈 언니들 밖에 없었다. ㅠㅠ

두리번거리는 나를 중심으로 터널이 생겼다.

- 루안! 네 애인왔어.

(진희의 가명,, 당시 레즈들은 은/혈/천/휘/류 등등을 조합한 가명을 만들어 서로를 부름)

너구리굴의 대장역활을 맡은 것처럼 보이는 키큰 칼머리가 나를 보며 말했다.

- 네가 쿠로야?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내 가명은 쿠로였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세는 넘치지만 뭘 몰라도 제대로 모르던 나는

저게 뭔 뜻인진 모르고 그냥 간지나서 즉석에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