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창문틈으로 내비치고
온갖서적들이 가득 쌓인 그러나 가지런한책상
달빛 만큼이나 푸르게 서늘한 얼굴의 익화는
마지못해 써내려가던 붓을 멈춘다.
불연듯 붓을 꺾는다.
무당파의 다음 기수라고 했던가.
우연히 마주하게된 그의 검은
춤이었고 바람이었다.
칼은 사람을 죽이는것이고
무예는 그 수단이다.
그러나 그의 검에는 바람이 있었고 흔들리던 풀잎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떠올릴 수록 저 깊이 눌러놓았던 무언가가 벌컥벌컥 올라왔다.
남궁세가의 본분
무림정파의 수장
그리고 그들의 차기 수장이 될 장남 남궁익화.
그 틀에 벗어나 자라본적이 없으며
항상 원로들의 기대 보다 앞서왔었다.
규율안에서 존재하는 것들 중
나에게 어려운것은 없었다.
이미 세상을 타계한 작은 사숙님께
첫 검을 배웠을때
그 차가운 감촉. 바람.
사숙의 검은 바람 이었고 자유였다.
자라면서 알게된것은 나는 아버지와 같은
틀에 박힌것이 능숙한 인간이었고
검을 다루기엔 너무 고지식했다.
잘하는것과 원하는 것과의 사이
나의 책임과 의무
그 모든게 용암처럼 넘쳐 흐른다.
"도 도련님 마님께도 또!"
다급히 시종이 외마디만 전하며 급히 사라진다.
익화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황궁에서 요순황제의 사랑을 듬뿍바던 공주였던 어미는
황제가 죽고 끈 떨어진 연마냥 남궁세가로 시집을 왔다.
다분히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궁세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내던져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시비들에게 치울때 조심하라 이른다.
차가운 눈빛으로 제 어미를 바라본다.
"어찌 또 이러십니까. 이런신들 당주님께서 오시겠습니까"
익화와 비슷한 달빛같은 서늘한 안색이 돌아본다.
"너도 니 아비와 다를게 없구나! 내 배로 낳은 자식이
한겨울의 석빙고 보다도 차갑디 차가운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것이냐? 감히? !"
분풀이의 시간이다.
던지는 그릇이야 피하면 되는것이고
내지르는 고함이야 귀를 닫으면 되는것이다.
의미없는 여인네의 감정호소 따위 대의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걸
어찌 이 여인은 불혹이 넘는 시간동안 깨닫지를 못하는 것일까
대의.
그런데 그게 무엇이지.
나는 무엇이고.
그저 대의를 위한 도구인 것인가.
어느새 잦아든 소음에
생각에 잠겨있단 익화가 고개를든다.
그의 어머니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구. 그래 도구.
익화야 어떤인간은 목적만으로도 살아간다.
난 그게 납득이 가질 않아.. .."
달빛이 흐느낀다.
흠짓 놀라고 만다.
'도구 '
그리 살아도 상관없다 여긴적도 있었다.
세상의 많은 도구들 중
가치있고 명분이 있는 도구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춤을 본 이후론
당연것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죽을만큼.
처소로 돌아가자.
붓은 여전히 꺽여있고
달빛고 창연하였다.
달라진것은 나 자신뿐이구나.
더이상은 이곳에 있을 수없구나.
바람이 될 순 없지만
바람을 따라가야 했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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