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by reiha

 

 

 

불시에 울리는 핸드폰 진동 때문에 세 번째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을 때, 나는 슬쩍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인터뷰 도중에, 그것도 인터뷰어가 핸드폰을 들고 들락날락하다니 욕을 먹어도 싸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다리던 연락 모레 예정된 화보 촬영의 섭외 건이 해결되었다는 은 아니었다.

 

많이 바쁘신가 봐요.”

오늘의 인터뷰 대상자인 공연기획자 정환희씨가 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치우지도 못하고 손으로 꼭 쥐었다.

죄송합니다. 내일 일정 때문에 꺼둘 수가 없어서.”

대답하면서도 내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정환희씨는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이상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인터뷰는 마무리해도 될 것 같은데. 어때요?”

, , .”

 

나는 서둘러 대답하며 노트를 훑어보았다. 38세 공연기획자 정환희. 소극장에서 인디 락밴드의 공연을 시작으로 여러 뮤직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대중음악 뿐 아니라 클래식과 미술을 접목한 특이한 컨셉의 공연으로 유명해진 여자였다. 업계에서 철의 여인으로 유명했기에 실제로 보면 어떨까 했는데 의외로 인터뷰 내내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인터뷰는 별 특이할 것도 없이 잘 마무리되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가 있었던 합정의 오피스 빌딩에서 내려오면서, 하루 종일 날 괴롭힌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급하게 카드값을 메꿔달라는 엄마의 문자, 다음은 요즘 자신에게 소홀하다는 남친의 문자, 그 다음은 다시 이번만 빌려주면 다음 달에 꼭 돌려주겠다는 엄마의 문자, 또 그 다음은 생각할 시간을 갖자며 주말에 홀로 여행을 가겠다는 남친의 문자. 마지막은 모레 화보 촬영의 모델이 펑크가 났는데 일정을 대체 어떻게 관리했길래 이런 상황이 생겼냐고 나를 책망하는 편집장님의 문자.

 

.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첫 번째. 일단 엄마에게 돈을 보낼까? 엄마가 사정이 어렵다고 할 때마다 조금씩 보낸 돈이 이제 쌓여서 이천만원. 박봉 초보에디터가 이천만원을 모으려면 몇 달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어렵다고 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지. 여태까지 나를 이렇게 키워주셨는데, 나 키우는 데 들어간 돈에 비하면 이천만원은 별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 달 월급은 벌써 앵꼬났는데. 아 모르겠다.

 

다음 두 번째. 자신에게 소홀하다고 징징거리다가 주말에 홀로 여행을 가겠다는 남친 새끼. 인스타에서 내 친구에게 지분거리는 거 봤다고 얘기를 해야 할까. 하지만 지분거렸다는 건 내 착각일수도 있는데. 내 친구라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말을 건 걸 수도 있잖아. 물론 이게 처음도 아니었지만, 이 얘길 꺼내면 또 싸우겠지. 이번만 그냥 넘어가면 또 이런 일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다음 세 번째. 모레 화보 건은.

 

나는 건물을 나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유리문 앞에 서서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밖을 바라보았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해야지. 그런데 생각을 해봐도 하나도 해결이 안 되네.

 

꺼져버리고 싶다.”

 

진심을 담아서 중얼거렸을 때,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보니 방금 인터뷰를 마친 정환희씨였다. 환희씨는 특유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 여기 있었네요?”

, .”

 

나처럼 야근이 잦을 텐데도 피곤함 없이 매끈한 하얀 피부, 가볍게 어깨를 덮고 있는 건강해 보이는 갈색 머리. 브랜드 로고는 없지만 깔끔하고 잘 정돈된 옷차림. 그녀가 내뿜는 단정한 생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미소를 보냈다.

 

나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려던 참이에요. 마침 잘 됐네. 아까 인터뷰에서 내가 다 얘기하지 못한 게 있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거든요. 어떻게 공연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 기자님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할까요?”

 

 

그녀를 따라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프랜차이즈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어스름한 조명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작은 카페였다. 노트를 열어서 확인해보니, 그녀가 말하지 못했다던 어떻게 공연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에 관한 인터뷰는 이미 첫 장에 기록되어 있었다. 학교 선배의 권유로 인디밴드의 공연을 계절 시리즈로 만들어 런칭.

 

학교 선배의 권유로 인디밴드의 공연을 계절 시리즈로 만들어 시작하게 되었다, 고 아까 내가 말했죠?”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가 내 표정을 읽은 듯 살며시 웃었다. 나도 그녀의 미소에 따라 웃었다.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식으로 시작하게 된 건 물론 그 일이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소규모의 클래식 공연을 기획해 본 적이 있어요. 청중은 단 오십 명.”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나는 이십대 후반이었어요.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스물아홉.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젊은 나인데, 그 때는 나이 때문에 초조했죠. 잘 나가는 다섯 살 연상의 의사 남친이 있었고, 한 여성 잡지의 경력 3년차 초보 에디터였죠. 지금 기자님처럼요. 남들 보기에 나쁘지 않은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대학원까지 바쁘게 다니는 중이었어요.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외모관리에도 소홀하지 않았고 어딜 가든 예쁘다, 매력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기자님, 왜 웃어요? 나 안 예뻐요?”

 

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예뻐요.”

 

그녀도 농담처럼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사람, 부러워 해 본 적 있지 않아요? 어딜 가든 있잖아요. 별로 노력하는 것도 없는데 예쁘고 똑똑하고 부티나면서 멋있는 남자친구도 있고, 미래가 탄탄대로인 것 같은 사람. 고등학교 때도 그런 친구 한 명쯤은 있고, 대학교에도 그런 선배 한 명쯤은 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부러움을 받고 싶었어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십년 전은 어땠을까? 충분히 예뻤을 것이다. 노력 따윈 필요 없을 만큼.

 

의사 남친은, 대학원 선배가 소개시켜 준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들었지만, 같은 과 후배인데 예쁘고 똑똑하고 자기 할 일 똑바로 하면서 집도 좀 사는 것 같은 그런 괜찮은 여자아이가 있으니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다나 봐요.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나요. 그 사람이 일이 너무 바빠서 약속을 병원 근처로 잡았는데, 그러고도 콜이 불려서 한 시간이나 지각을 했거든요. 의사면 단가, 너무 화가 나서 얼굴 한 번 보고 쏴붙여 주고 가려고 했는데 막상 나타난 그 사람에게 화를 내지 못했어요.”

 

잘생겼군요?!”

 

. 잘생겼더라고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공부만 한 왜소한 체구의 안경여드름을 생각했는데 키도 크고 훤칠하게 잘 생긴 사람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다 잘난 척 하는 것 하나 없이, 오히려 약간 순수하고 소심하게 보일 정도였어요. 주선자가 여자를 별로 사귀어 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어요. 나를 보고 떨려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그 날부터 우린 만나게 되었어요.”

 

뭔가 운명 같네요. 멋있어요.”

 

운명은 운명이었어요. 멋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친구는 나에게 정말 잘해줬고, 그게 진심이라는 건 주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였어요. 편지도 자주 써 줬고, 그 바쁜 와중에도 전화 연락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오프가 나면 미술관도 가고, 연주회도 가고. 그는 입버릇처럼 나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길 했어요. 그는 날 때부터 유복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을 나에게도 누리게 해 주고 싶다고 했어요. 지금 봐도 멋있는 커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쁘고 똑똑하고 일 당차게 잘하는 여자와 모태 부자이지만 순수한 의사 남자친구. 만난 지 100일이 되었을 때 그가 내밀었던 파란 박스의 촉감이 아직도 생각나요. 자신은 100일 기념으로 장미 백송이 꽃다발을 주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그런 건 촌스럽다면서 여기서 이 목걸이를 사주면 좋아할 거라고 했대요. 자신은 이 파란 박스가 왜 특별한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이게 마음에 드냐고, 이런 걸 사 보는 건 처음이라며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쑥스럽게 말했던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 나요.”

 

부러워요. 나도 그런 선물 받고 싶었는데.”

 

그러면서 나는 내 남자친구와의 100일을 떠올렸다. 그가 100일 기념으로 생각했었던 것은 파란 박스의 목걸이도 장미꽃다발도 아닌, 평소의 싸구려 모텔보다 아주 약간 급이 높은 레지던스급 호텔에서의 하룻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몰랐어요. 항상 나를 보며 예쁘다, 멋있다고 했지만, 화장 안 한 생얼인데 예뻐 보이려면 주기적으로 피부과에 가야하고, 부드러운 갈색 웨이브 머리는 미용실에서 클리닉을 받지 않으면 금세 부스스하게 퍼져 버린다는 걸. 새벽까지 퇴근도 못하고 비좁은 사무실에서 쓴 원고는 편집장님에게 쿠사리를 먹으며 수십 번 고쳐 써야 했고, 대학원 생활과 병행하느라 하루 네 시간 이상 푹 잠들어 본 적이 없다는 걸.”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는 지금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다들 나를 재벌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잘 사는 집 딸로 생각했지만, 사실 내 부모님은 어느 정도 잘 사는 집은커녕 대한민국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가난한 형편이었어요. 대학교 등록금이 그 때까지도 고스란히 대출로 남아있을 정도였고 옷값, 가방, 그 외 내가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지출해야 했던 돈 때문에 사실 겨우 카드값을 갚아나가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여기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만일, 집이 너무 가난한 한 여자가 잘생기고 재산도 많은 부유한 젊은 의사를 만나고 있다면. 기자님은 그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그녀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만일 기자님이 아주 가난하지만 예쁘고 똑똑한 여자인데, 잘생기고 재산도 많은 젊은 의사를 만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그게 진짜 사랑일까 스스로 의심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쁘고 똑똑한데 단 한 가지, 돈만 없잖아요. 그 의사와 결혼한다면 완벽해지는 거니까, 스스로를 속이고 난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글쎄요, 전 좀 상상력이 없어서. 일단 전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고, 백수 남친은 있지만 의사 남친은 없거든요. 솔직히 내가 그 상황이라면 사랑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을 것 같아요. 일단 잡고 볼래요. 파란 박스 목걸이도 좀 받아보고.”

 

내 대답에 그녀는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와 함께 있는 건 좋았지만, 어떨 땐 불편하기도 했으니까요.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는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켰어요. 친구들도 그처럼 다들 부자였고, 직업도 다들 좋았어요. 의사나 변호사가 아니라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그런 사람들. 최선을 다해서 당당해 보이려고 애썼지만 나는 항상 기가 죽어 있었어요. 그를 만나고 집에 들어갈 때면, 마치 연속으로 야근을 한 것처럼 녹초가 되어서 뻗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교양 있어 보이도록 그에게 맞추었는데. 한 가지 정말 안 되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클래식 공연. 그는 때때로 제일 비싼 좌석을 예매해서 날 클래식 공연에 데려가곤 했는데, 사실 난 클래식 음악이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세계적인 지휘자의 공연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졸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을 거예요.”

 

나는 다시 큭큭, 웃었다. 충분히 공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다시 생각하면, 그 때 나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던 것 같아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이 사람이 돈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무슨 상관이에요. 나한테 그 사람은 잘생기고 재산이 많고 똑똑한 의사. 그 모든 게 합쳐져서 그 사람인데. 그 중 하나만 빠져도 이미 그 사람이 아닌 건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일 년을 만났고,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다시 집중했다. 결혼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꿈꾸는 듯 순수해보였다.

 

누가 먼저 얘기했는지는 몰라요. 난 여자는 결혼에 대해 먼저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 내가 먼저 꺼내지는 않았겠지만, 무의식중에 결혼 얘기가 나오도록 그를 자극했는지도요. 대학원 동기들이 나에게 물을 때마다, 난 아직 결정된 건 없다고 말하면서도 남자친구가 프로포즈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그 말처럼, 남자친구가 프로포즈를 했어요. 마치 영화처럼.”

 

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는 아름다운 프로포즈. 지금의 그녀처럼, 그 때도 분명 아름다웠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반짝 반짝 빛났겠지.

 

카페 한 곳을 나 하나만을 위해 빌려서, 쑥쓰러워하면서 피아노도 쳐 주고, 여태까지 우리의 데이트를 다 기록해서 그걸 일일이 편지로 써서 그 때의 기분을 추억하게 해줬어요. 그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나는 그 때 정말 젊고 아름답고 반짝 반짝 빛났을 거예요.그 때는 몰랐어요. 오로지 젊음으로 인해 아름답고 빛나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기 쉽다는 걸.”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사뭇 달라진 그녀의 어조에 뭔가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직원을 불러서 물 한 잔을 청했다. 나는 그녀가 천천히 물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컵을 내려놓았다.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누군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한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해요. 내가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왜 나에게 나쁜 짓을 하겠어요. 뻔히 결혼할 사람을 따로 두고서, 왜 바람을 피우겠어요. 그 사람에게도 마치 결혼할 것처럼 속이면서.”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학회가 있어서 만날 수 없었던 주말이 지나고 얼마간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많이 바쁜 것 같아서 나는 재촉하지도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죠. 그렇게 출근했던 금요일 아침,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던 미술부 기자 은영씨가 나를 불러내더라고요. 항상 무뚝뚝한 인상이어서 별로 호감을 느끼지도 못했던 나와 비슷한 또래의 그녀였는데 그 날은 어쩐지. 날 일부러 회사 사람이 자주 오지 않는 옆 건물 카페까지 데리고 가서, 테이블 위에 카드 한 장을 올려놓더군요.”

 

설마.”

 

내가 잘 알고 있는 이름이 적힌 청첩장이었어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빤히 그녀의 얼굴만 보고 있었죠. 그녀는 딱히 위로할 생각도 없다는 듯, 회사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어요. 친한 친구의 학교 동기가 이번에 결혼을 한다는데, 참신하고 예쁜 디자인의 청첩장을 만들기를 원해서 건너 건너 은영씨에게까지 디자인 의뢰가 들어 왔대요. 처음에 별 생각 없이 시안을 잡다가, 이름과 얼굴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 환희 기자의 남자친구도 의사라고 하지 않았나? 그 때 한 번 회사 근처에서 봤던 거 같은데. 근데, 얼굴도 비슷한 것 같은데?”

 

맙소사. 일일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이런 일이.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녀의 다음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cc로 만나서 함께 졸업 후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의 결혼 상대자. 십년을 넘게 사귀었으니 바람피운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나였던 거죠. 그제서야 생각이 났어요. 내가 그의 친구들을 만난 건 연애 초기 단 두 번 뿐. 그 친구들의 연락처도 난 전혀 몰랐어요. 프로포즈를 하면서 왜 날 부모님에게 소개시키지 않을까. 그는 아직 내가 젊으니 일 년간 천천히 결혼을 준비하자고 했어요. 그럼 그 때는 소개시켜 주겠지. 주말에 연락이 안 될 때면 바쁠 것이라고 생각했고, 바쁜 남자를 재촉해서 질리게 하는 그런 어리석은 여자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참았고, 나와 함께 있을 때 그가 핸드폰을 꺼두는 이유는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상황이 모두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듣지 않았던 거예요.”

 

…….”

 

나라면 귀찮아서라도 그런 짓은 못할 것 같아요. 그렇죠? 그냥 단순하게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한 여자와 결혼 준비를 하면서, 또 다른 여자와도 결혼할 것처럼 속인다는 것. 그 때는 그를 위한 변명을 만드느라, 원래의 여자친구와는 이미 마음이 식었는데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서 결혼을 진행하는 거고 정말로 사랑하는 건 나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변명한 대로.”

 

작은 카페의 창가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카페 안의 조명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스름했기 때문에 직원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면서 작은 초에 불을 붙여주었다.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들어서 주변 테이블들을 둘러보니, 퇴근 후 만난 것 같은 어린 연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여기서부터는. 별로 재미가 없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재미가 있으려면, 내가 그의 결혼식에 찾아가서 깽판을 쳤어야 하는 거죠. 이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결혼을 약속한 건 나라고. 다들 알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칼이라도 휘둘렀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난 그러기엔. 너무 자존심이 강했어요. 나는 그 사람에게 단 한 번만 전화로 사실을 확인했어요. 그는 여러 가지 변명을 했지만, 나는 사실 그 변명을 듣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 때문에 헤매기엔 나는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그리고 쪽팔렸어요. 그의 결혼상대자에 관해서도 더 이상 알아보지 않았고, 내 인생에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만들려고 했죠.”

 

하지만, 힘들잖아요. 없었던 일로 하기엔 너무.”

 

말했잖아요. 나는 내가 힘든 걸 인정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고.”

 

그녀는 한 쪽 턱을 손으로 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흔들리는 촛불 위에 그녀의 담담한 눈동자가 비쳤다.

 

주변에 딱히 헤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서서히 자연스럽게 흔한 남녀 관계처럼 헤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게 그렇게 준비했어요. 회사에서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은영씨 뿐이었고, 대학원은 어차피 졸업했으니까 모임을 당분간 안 나가면 되는 거였고. 나는 잘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 상태는 점점 나빠졌어요. 원래는 바빠서 잠을 못 잤다면 이제는 정말로 잠이 안 오기 시작했던 거예요.”

 

…….”

 

괜찮은 척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뇌는 나를 쉬게 해주지 않았어요. 일주일에 열 시간도 제대로 못 자는 날들이 반복되었어요. 살은 옷이 하나도 맞지 않을 정도로 쫙 빠졌고, 지금 생각하니 머리도 좀 빠졌던 것 같아요. 끔찍하죠?”

 

그녀는 싱긋 웃었다. 지금의 그녀는 과거를 담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데, 그 때는 어땠을까.

 

그렇게 잠을 못 자는데 아무리 괜찮은 척 한다고 해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죠.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났는데 나는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어요. 지금의 나라면 아마 상담사라도 찾았을 텐데, 그 때는 병원을 찾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뭐랄까,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상처 입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 알림이 울리더군요. 일 년 전 예약했던 서울시향의 정기 연주회. 내가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클래식 공연을 제일 비싼 좌석으로 예매했었는데,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되어버린 표 두 장이 남아있었던 거죠. 나는 그 표를 은영씨에게 주었어요.”

 

, 사실을 알려준 미술부 기자님에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은영씨가 갑자기, 자기는 이런 곳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같이 갔으면 한다는 거예요. 나는 귀찮았지만, 어차피 퇴근 후 집으로 가도 잘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같이 갔어요. 지금도 생각나요. 맨 앞자리에서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나와 그녀의 모습이.”

 

그녀는 가볍게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나는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와 이 자리에 앉아서 좋아하지도 않는 연주를 행복하게 듣고 있었는데. 마음이 아주 복잡했지만 꾹 참고 앉아 있었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연주를 듣다가 뛰쳐나가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 연주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나는.”

 

그리고? 어떻게 했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잠이 들었어요.”

 

?”

 

완전히, 순간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구요. 기자님, 수면내시경 해 보셨죠? 프로포폴 맞고 나서 잠이 들 때, 영화에서처럼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는 게 아니잖아요. 허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뚝 마치 전원이 꺼지는 것처럼.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내가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구요. 마치 무슨 신호라도 준 것처럼.”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녀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두 달 동안 그렇게 잠을 못 자서 괴로워했는데,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서 시작하자마자 숙면해 버리다니! 세계적인 지휘자와의 협연에, 무려 곡은 시벨리우스 교향곡 2. 그렇게 격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수 있었는지. 인터미션 때 은영씨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깨우더군요. 그렇게 푹 자면 배고프지 않냐고 하면서, 먹고 자라고 가방에서 초콜렛을 꺼내 주더라고요.”

 

그 분도 참 특이하시네요.”

 

환희씨를 따라 웃으면서 내가 말했다.

 

초콜렛을 꺼내서 먹고, 그리고 다음 연주가 시작되었고, 나는 또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잠들어 버렸어요. 앞 시간에 너무 푹 잔 탓인지, 이번에는 자면서 살짝 살짝 깨기도 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반쯤 잠이 들려고 할 때, 아주 멀리서 음악이 들려오고 나는 그걸 들으면서 다시 잠들고. 또 다시 살짝 깨려고 할 때, 이번엔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서 나와 함께 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느꼈어요. 나는 은영씨와 친하게 지낸 적도 없고 사실 그 이후로도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 옆에서 푹 잠들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일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촛불에 비쳐서 아주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양 팔을 들어보였다.

 

그 날 이후로 극적으로 불면증이 없어지지는 않았어요. 대신 나는 적극적으로 이걸 이용해 보려고 했죠. 나는 그 때부터 내가 알지도 못하는 클래식 공연을 닥치는 대로 예매했어요. 내가 관심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우리나라는 클래식 관람을 하기에 생각보다 좋은 환경이었어요. 좋은 자리만 포기한다면 영화표 한 장 가격으로 훌륭한 연주자들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죠. 물론 나는 음악을 들으러 간 게 아니라 자러 간 거였지만. 자러 가는 거였으니까 그 때까지 항상 신경 썼던 옷차림도 대충 가볍게, 데이트가 아니니까 화장도 하지 않고,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연주가 시작되면 그 순간 뚝 - ”

 

그녀는 큭큭, 웃었다.

 

주변 관객들이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요? 하지만 그 때 나는 주변의 시선보다, 우선 내가 먼저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나는 조금씩 집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어요. 잠을 잘 수 있게 되니 모든 것이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아져 가는 게 보였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제가 다니던 잡지사에서 여름 행사를 하나 기획하게 되었어요. 당시는 잡지사들이 잘 나가던 시절이라 때때로 외부업체와 협력해서 미니 콘서트라든지, 영화 상영회라든지, 그런 걸 하곤 했거든요. 편집장님이 새로운 기획을 하고 싶다고 여러 가지 제안을 해 보라길래, 나는 안 될 줄 알면서도.”

 

안 될 줄 알면서도?”

 

나는 눈을 빛내며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수면을 주제로 하는 클래식 콘서트를 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잡지의 주 독자층인 여성들 중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받아서, 큰 강당에 작은 침대를 하나씩 빌려서 가져다 두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워서 누군가 나를 위해 연주해주는 음악을 들으면서 푹 자는 거죠. 목적은 자는 거니까, 음악에 조예가 없으면 더 좋죠. 이 황당한 제안을 편집장님께서 받아들여서, 정말로 한 여름의 딥 슬립이라는 타이틀로 행사를 열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죠?”

 

하지만 나도 그런 음악회가 있다면 가고 싶어요.”

 

기자님처럼 생각했던 여자들이 많았는지, 의외로 참가 신청이 많았어요. 행사는 무사히 열렸지만, 사실 내가 지금의 약력에 이 부분을 넣지 않은 것은 나중에 욕도 좀 먹고 말도 많았거든요. 연주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잠을 재우려고 연주를 하다니. 여기까지가, 내가 어떻게 공연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가볍게 고개를 으쓱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방금 푹 자고 나온 것처럼 산뜻했다.

 

이런 건 기사로 쓰기엔 너무 길고 지루하죠? 제가 괜히 기자님을 붙잡아 두었네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에요. 아주 재미있었어요. , 이 이야기를 어떻게 기사로 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환희씨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고.”

 

이런 얘길 기사로 뭐하러 써요.”

 

그녀는 두 번째로 날라 온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냥 누군가에게 말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가능하면 그 때의 나처럼 젊고 아름다우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그런 사람에게. 우리 이제 일어날까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바로 일어나 버리기에도 왠지 이상하고, 그렇다고 계속 앉아있기에는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다 마셔버린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가방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내가 첫 번째로 기획했던 그 행사. 거기에 참가하러 온 여자들의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표정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다들 너무 지쳐있고 피곤해보였죠. 인생의 괴로움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는 그런 얼굴들이었어요. 그녀들은 준비된 와인을 한 잔씩 옆에 두고 따뜻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음악이 시작되자 잠을 청했어요.”

 

…….”

 

행사가 끝나고 그녀들이 얼마나 만족했는지 사실 나는 잘 몰라요. 나는 무대 저 편에서 잠든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이 달콤한 죽음 같은 잠이 끝나고 깨어나면 그 다음은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는 걸, 그들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나서며,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요는, ‘수면의 중요성이군요. 그렇죠?”

 

맞아요.”

 

그녀는 코를 살짝 찡긋- 하면서 웃어 보였다. 나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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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달아주신 분이 계셨는데 본문 수정하다가 글을 날려버렸어요;;

(댓글 잘 보았습니다 ㅠㅠ)

 

 

 

 


작품 등록일 : 2018-11-11
또 읽으러 왔숨돠 글좋아요
개비개비   
너무 좋아요 계속 써주세요
gg****   
#
ng*****   
진짜같다 ㅋㅋㅋ 재밌어용! 사딸라!
개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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