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이라는 여자가 있다. 33세 기혼, 서울 강서구 거주, 아이는 없다. 중소기업의 사무직 직장인이라지만 '콘텐츠 마케터'라는 제법 그럴싸해보이는 직함. 곧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다.
이들 부부의 가계 사정에 비하면 심하지는 않지만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적당한 허영기를 가진 여자. 맛있는 디너, 예쁜 카페에서 찍은 사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등을 인스타에 올린다. 운동하면서 찍은 사진 등 너무 노골적인 피드 업로드는 피하는 편.
시연 씨는 지금 심기가 편치 않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 결혼식에 따라갔다가, 피로연 때 남편 지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시연 씨는 악의 없이 버릇처럼 지인 와이프들의 외모를 재빠르게 스캔했다.
시연 씨의 관심사는 와이프들이 가진 명품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별 안목도, 생각도 없이 어떤 브랜드의 시그니처 제품을 들거나 걸치는 이들은 시연 씨의 눈에 아예 들지 못했다.
시연 씨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유전자의 우수함, 후천적인 노력,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조화장품이나 옷, 잡화를 매치하는 미적 센스. 단순히 '이 정도면 꿀리지 않겠지' '이 집단에 낄 수 있겠지' 정도가 아닌, 예술 작품을 고르는 수준의 감각.
오늘 시연 씨는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한땀한땀 S컬을 넣었다. 헤어 컬러는 동양인 특유의 붉은빛을 뺀 애쉬카키브라운. 청담 모 뷰티살롱에서 브러쉬로 후드려맞아가듯 배운 화장 스킬도 활용했다.
시연 씨는 화장할 때 베이지, 브라운, 핑크나 코랄에 국한되지 않고 보랏빛이나 민트처럼 대담한 색조 사용도 센스있게 하는 편이었다.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만큼, 차분한 핑크를 메인으로 라벤더로 살짝 화사하게 마무리했다.
정기적인 일대일 필라테스 레슨으로 안쪽 근육을 길게 늘리고, 전체적 몸의 형태는 헬스로 다져줬다. 자외선이 심한 낮 대신 밤에 러닝을 해서 붓기를 빼 준다. 피부는 원래 깨끗한 편이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1년에 한 번은 울써마지, 그밖에 정기적으로 리쥬란 시술을 받는 정도.
이 정도는 '유전자가 우수해 보일 수 있는' 수준을 위해 '후천적인 노력'을 한 것이다. 자기 또래의 남들에 비해 그다지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나쁜 부분을 살짝 교정해 준 정도. 앞으로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
오늘 시연 씨는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크림빛 새틴 블라우스를 입었다. 가방은 꽤 눈에 띄는 디올이지만, 사실 로고가 전면에 보이는 옷이나 가방은 질색이다.
시연 씨는 의외로 빈티지도 좋아했다. 여기에 이세이미야케 H라인 빈티지 스커트를 매치했다. 구두는 손에 집히는 대로 편한 걸 골랐지만, 스타킹은 아주 은은하게 은빛이 도는 디올의 누드 스타킹이다.
역시 오늘도 아니다, 이 자리엔 없다. 시연 씨는 남편의 지인들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유전자가 우수해 보이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
미적 감각, 개성이 있는 사람.
없다.
단순히 예쁘장한 사람, 명품으로 휘감은 사람은 시연 씨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감흥이라,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본다면 묘한 경쟁의식을 느끼거나, 정말 레벨이 높다면 순수하게 경의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이 자리엔 없다. 시연 씨는 묘하게 안도하며 음식을 먹었다. 남편은 방금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시연 씨의 내적 독백 따위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저 차를 가져와서 맥주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이 유일한 불만 같았다. 그렇다고 대리를 부를 정도로 마시고 싶은 건 아니었고.
결혼한 지 일년 된 시연 씨의 남편은 집이 잘 살고 본인 자체는 무난하다는 설정이다. 인간성은 괜찮지만 그렇게 튀지는 않는 사람, 그래서 시연 씨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남편. 시댁도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교양있는 사람들이다.
남편이 갑자기 테이블 맞은편을 보고 환히 웃는다. 이들의 테이블에 다른 누군가가 합류하려는 것 같다. 이들과 잘 아는 사이인 부부다. 와이프 쪽은 막 두 돌이 지난 여자 아기를 안고 있다.
으으.
시연 씨는 경악한다. 이들의 외모 때문이다.
이들 세 가족은 외모가 서로 똑 닮았다. 둥글둥글한 돼지들. 부부는 상당한 고도비만 같았다. 여자 쪽이 걸친 싸구려 쉬폰 블라우스 안에 둥근 뱃살이 보이는 듯 했다.
비극적인 건 엄마와 딸의 외모는 거의 유전자 복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다큰 조선돼지감자가 어린 조선돼지감자를 안고 있는 것 같은...
이들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뷔페를 싹 돌며 음식을 접시 위에 미친듯이 퍼담기 시작한다.
밸런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유린기 떡볶이 갈비 스테이크 탕수육 크림파스타 육회 초밥 등 여튼 눈에 띄는 것들은 싹 한 접시 위에 아슬아슬하게 산을 쌓듯 담아 소스가 접시 밖으로 질질 흐를 것 같은.
그것도 떡볶이 국물과 크림파스타 소스가 섞여서.
으으.
정말 비위에 안 좋다.
이들 부부는 가끔 말을 걸어오는 이들의 목소리에 대충 동조하며 정신없이 음식을 퍼먹기 시작한다. 차는 안 가져왔는지 생맥주 무한리필도 거침없이 이용한다.
엄마에게 안긴 어린 딸은 끊임없이 팔을 휘두르며 칭얼댄다. 그리고 엄마 접시 위에 있는 음식을 함부로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시연 씨는 옛날에 봤던 지브리의 유명 애니메이션의 도입부를 떠올렸다. 주인공 치히로가 부르든 말든 정신없이 접시에 코를 박고 음식을 탐하던 돼지들. 금방이라도 피부에 땀 대신 육수가 줄줄 흐를 것 같은 비계덩어리들.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 아침에 거울을 보거나 외출할 때 괴롭지 않은 걸까??
시연 씨는 어색하게 스타카토 웃음을 지으며 포크를 딱 내려놨다. 입맛이 뚝 떨어진다. 괜히 '나까지 뭔가 먹으면 살찔 것 같은 자리'라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런 시연 씨가 어떻든 자리는 화기애애하다.
겨우 자리를 마치고 남편과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눈치없는 남편놈이 말한다.
"종혁이(돼지 남편)네 진짜 행복해 보이지 않아? 걔네 연애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하여튼 결혼 잘 했어. 싸우는 것도 못 봤고, 안정감이 있어."
"...그래?"
"윤지(돼지 와이프)가 진짜 성격이 좋거든. 포용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다른 여자들이랑은 좀 다른 거 같더라. 명품 밝히고 지랄맞고 까탈스러운 여자애들 있잖아, 그런 게 일절 없어, 복스럽게 잘 먹고 성격 좋고. 얘기해보면 되게 재밌다?"
"아... 그래..."
"어느날은 윤지가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는 거야. 근데 걔가 족발 좋아하거든, 그래서 내가 '야 족발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니까 윤지가 좋다고 자기가 아는 맛집 바로 풀더라? '너 다이어트 한다며?' 하니까 '야 족발을 어떻게 안 먹어, 이것만 먹고 내일부턴 진짜 한다' 이러는데 표정이 엄청 비장한 거야. 진짜 웃겨.ㅋㅋ 막상 족발 시켜주니까 완전 행복하게 먹는데 보고 있기만 해도 뿌듯하더라."
눈치없는 남편역할들이 늘 그렇듯 그는 꼭 한마디를 더 얹는다.
"윤지랑은 같이 뭐 먹을 맛이 나, 신나. 자기도 좀 팍팍 먹고 그래. 맨날 다이어트한다고 깨작깨작..."
"...그만해."
시연 씨는 입술을 깨문다. 순식간에 분위기 갑분싸.
뭐? 그 돼지가 성격이 좋아?
아니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과거 회상 장면이 펼쳐진다. 대충 어린 시연 씨가 노란 장판 K-기생충집에서 교복을 입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애미애비는 반지하에서 자기들끼리 쐬주 먹고 싸우느라 시연 씨에게 별 관심이 없다. 피부가 심하게 건조한 시연 씨는 다 터진 손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다가 책가방을 뒤진다. 핸드크림이 가방에서 터져서 내용물이 다 흘렀다. 시연 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옛날을 생각한다.
애미애비를 졸라 아주 잠깐 다녔던 동네 피아노학원. 그마저도 학원비가 밀려 그만뒀지만.
음대를 갓 졸업한 젊은 여자 선생님에게 사정이 있어 학원을 그만둔다고 말하던 날이었다.
선생님은 평소 시연 씨에게 짜증스러운 편이었다. 악보를 잘못 봤을 때, 박자를 틀렸을 때, 같은 구간에서 계속 실수를 반복할 때... 선생님은 어느날 피아노를 치던 시연 씨의 손등을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건조해서 피부가 다 터졌는데, 핸드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니?"
그날도 짜증섞인 말투였다. 시연 씨는 학원을 그만둔다고 말하면 선생님이 또 짜증을 낼까 봐 살짝 쫄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시연 씨의 다 터진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지금 집이 많이 힘드냐고.
아무도 시연 씨를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연 씨는 스스로 자신을 케어해야 했다. 다행히 유전자 원판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고, 근성도 있었고, 미추를 구분하는 눈썰미도 있었다.
노력했는데...
그런데 이제와서 이 남편이란 작자는 내 노력을 하나도 알아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관리하지 않고 꾸역꾸역 먹어대는 것이 윤지의 '미덕'이고, 시연 본인이 밥을 '깨작깨작' 먹는다며 비교질하는 듯한 발언까지 한다.
아 꼴보기 싫은 놈.
"...자기, 화났어? 왜 그래?"
"......"
시발 나도 그렇게 편하게 살 수 있었어. 근데 그렇게 안 했어. 내가 그렇게 돼지처럼 처 먹고, 자기관리까지 안 하면 그 집구석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겠어? 그 K-기생충노란장판 가족들처럼 되는대로 대충 사는 게 옳았다는 말이야??
공부 열심히 해서 인서울 대학 가서 세련된 애들이랑 어울리고, 죽어라 알바해서 화장품이랑 옷 사고, 배고파도 굶고... 그런 내 노력이 뭐? '깨작깨작'???
역시, 남편이랑은 이런 데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게 나랑 남편의 다른 점이겠지. 남편은 교양있고 경제력있는 집안에서 자라서 순진하다.
역시 난 속은 열등감 덩어리라 못돼쳐먹은 부분이 있는 걸까.
사실 남편 말대로 윤지 같은 사람들이 더 남들의 환영을 받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자기와 깊게 안 섞이는 타인이라면, 같이 있는 순간은 그저 잘 받아주고 성격 좋고 재미있게 해 주는 둥글둥글한 사람이 더 좋을 거다. 친구도 많을 거고.
시연 씨는 사실 진짜 친한 친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야, 잠깐 속이 안 좋아서 그랬어. 괜찮아."
남편은 흘깃 조수석의 시연 씨 눈치를 보며 운전을 계속하고, 시연 씨는 물끄러미 창 밖을 보며 1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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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라는 만화의 에피소드 중 오마쥬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