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틀랜타는 별로 아름답지가 않다.
나는 인천에서 자랐다. 2025년 기준 인천의 인구는 삼백만 명. 로스앤젤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베를린의 인구가 그쯤 된다. 그러니까 인천은 서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은 도시도 아닌 셈이다.
무엇이 아니라는 것으로 인천을 논하자면 인천이 부산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마치 오사카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꼭 아틀란타가 그런 것처럼, 남부의 도심 역할을 하고 특유의 역사가 있고 특유의 억양도 있는 부산.
인천은 그런 도시가 아니다. 서울과 자꾸 어깨를 겨루려 들며 호시탐탐 역전승을 꿈꾸는 경쟁자가 아니라 서울 옆에 꼭 달라붙어 그것에 어느 정도는 기생하는 느낌이랄까? 인천은 서울을 먹여 살리는 항구이자 서울에 일자리를 잡은 많은 노동계층이 삶을 꾸려나가는 곳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인천 출신의 사람들이 부산 출신들이 으레 부산을 그리워하듯이 인천을 그리워하는 일 같은 건 없다. 서울이 그들에게 인천이 제공했던 모든 것을, 오히려 조금 더 본질에 가깝게, 그리고 조금 더 혹독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인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나는 서울과 가까웠다. 중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모여 어디 놀러 간다치면 항상 일단 홍대에서 모였다. 초등학생 때까지야 구월동이니 부평이니 하는 인천의 번화가에 모였지만, 한 번 서울에 다녀온 뒤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모든 것이 더 비싸고 모든 사람이 더 불친절하고 모든 것이 더 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울에서 모였다. 서울의 치밀함이 우리가 "무엇이라도 된 것마냥"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인천과 달리 서울은 모든 구석이 빽빽했다. 하늘에서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갑자기 덜렁 나타나는 공터나 쓰레기장, 문을 닫은 카센터 같은 것이 적어도 서울의 번화가에는 없었다. 인천에서 우리는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서도 두어 블록에 한 번씩은 반드시 그런 빈 공간을 마주쳐야 했고 가끔은 그 곳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옷차림새만으로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도 만나야 했다. 이상한 사람들은 서울에 훨씬 더 많았지만 그들은 어쩐지 위험하지 않아 보였다. 서울의 이상한 사람들은 어쩐지 일본인들처럼 보였고, 집이 서울역의 계단참이라고 할지라도 저녁이 되면 편의점에서 찬거리를 사들고 조용히 귀가할 것 같았다. 그 이미지는 모두 닭장 같이 비좁은 서울의 빽빽함에서 비롯되었다. 아주 적은 공간만을 차지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는 서울의 사람들에게서는 야생의 공격성은 읽을 수 없었다.
애틀랜타에서 보낸 첫 한 달 동안 내가 가장 괴롭게 그리워한 것이 바로 서울의 그 빽빽함이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뉴욕도, 도쿄도, 빠리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공격성을 어느 정도 잘라내는, 어떤 면에서는 본연의 생명력까지 깎아 다듬어버리는 빽빽함. 갑갑함이 만들어내는, 자기 자신에게마저 해당되는 일견 맥없고 무관심한 태도야말로 내겐 대규모의 공동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안전망이자 곧 문명의 증거로 보였다.
인천에서 생활하면서도 빽빽함에 목마르던 나에게 애틀랜타의 듬성듬성함은 내 인생이 미美적으로 추락했다는 신호였다. 서울의 반을 조금 넘는 크기에, 인구가 고작해야 오십만이라니. 서울은 인구가 천만에 가까운데! 십분의 일이라니. 그 도시에 살기 위한 경쟁을 십분지 일만큼만 해도 되는 곳으로 넘어오니 나라는 인간의 중요성도 십분지 일로 쪼그라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일을 막 시작했으므로 이런 비교는 아무 근거가 없었다. 평범한 미국인이 애틀랜타에서 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과 평범한 한국인이 서울에서 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 중 어느 쪽이 더 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열 배까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비집고 들어오려는 노력, 어떻게든 꾸역꾸역 엉덩이를 들이밀고 그 다음엔 발을 튕겨 남들의 피곤한 몸에 올라타서라도 열차에 탑승하려는 그런 노력이 도시의 경치에서 지울 수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서울을 떠나온 직후, 그런 허덕임은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 애틀랜타의 풍경이 내겐 자유롭고 평화롭기보다는 공허하고 무료했다. 빠리에 사는 사람도 뉴욕에 사는 사람도 도쿄에 사는 사람도, 젠장 나도 한 달 전까지 그 일부였기에 별로 존경스럽지도 않은 서울에 사는 사람도 자기 도시에 대해서 쓸 때 경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 대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쓰는데, 내가 애틀랜타에 대해 쓰지 않고서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결여였다. 나는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선 한적함이나 느긋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하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덜 개발된 광활함 따위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인 유학생으로서의 생활을 논하고 들자면 애틀랜타는 무엇보다 편리성 면에서 따라올 곳이 없는 도시였다. 단순히 한국인 이민자들의 인구 수나 김밥과 떡볶이를 먹기 위해 얼마만큼의 품을 들여야 하는지 따위만이 기준인 건 아니었다. 그것만 놓고 따지면 엘에이나 샌프란시스코, 뉴욕이 애틀랜타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내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종일관 불평한 대로, 애틀랜타는 (도시 치고는) 한가한 도시였고, 그건 애틀랜타의 사람들에서도 드러났다. 따갑고 야멸찬 경쟁이나 서로를 등쳐먹으려는 교묘한 술수는 애틀랜타에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막 물을 건너온 이방인으로서 저지른 온갖 멍청한 실수들 앞에서 애틀랜타의 모든 사람들은 친절하거나 최소한 유용했다. 나조차도 그게 미국에서 흔치 않은 경험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학교 셔틀이 멈추는 자리를 다섯 번이나 각기 다른 곳으로 오해했는데도 흰머리의 흑인 기사님은 나에게 "이번이 진짜 마지막으로 말해 주는 건데, 아가씨Ma'am, 저 코너 끝에서 기다리라고요" 하고 잔소리하며 아침잠의 여운에 젖은 내가 허수아비처럼 어벙한 얼굴을 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곳까지 차를 몰아 다가와주었다.
도시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아파트에 도착하는 한 나는 안전했다. 안전한 정도가 아니라 환영을 받는다고 느꼈다. 빽빽한 도시들이 매서운 검역관처럼 매일같이 사람들의 얼굴에 "이제 필요 없음" 딱지를 붙이는 동안 애틀랜타는 오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떻게 지내?" 하고 물었다.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들은 솔직했고, 음식 나누어 먹는 것을 좋아했고, 먹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팍팍하고 피로한 일인지 모두 알고 있었으며 때문에 분주함을 허풍거리 삼아 자신을 드높이는 일이 없었다. 미국인들이 부르는 대로 애틀랜타는 시골 중에서 제일 안 시골Biggest small town인 도시였다.
이목구비 생김새에서부터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게 티나는 유학생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애틀랜타가 어쩌다 이렇게 따뜻한 도시가 되었는지 모자란 지식으로 굳이 설명하자면 남부식 환대southern hospitality를 꼽을 수도 있고 이 도시의 인종 다양성과 민권 운동 역사를 찾아 설명할 수도 있고,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처럼 좋건 싫건 미국 사회의 "주인공"들인 교육받은 백인들도 성공을 위해 달려드는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즉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따졌을 때 2군 내지는 3군쯤 되는 도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긋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섣불리 시도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진심을 보여줬다.
이런 요소가 특히 유학생에게 중요한 건 학생이란 족속이 근본적으로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와 볼로냐에서 처음 우리가 아는 "대학"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대학생을 배칠러Bachelor라고 불렀고, 오늘날에도 북미와 유럽에서 학사 학위는 배칠러 학위Bachelor's degree라고 불린다. 이 '배칠러'의 뜻은 '총각'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당시 대학이라는 공간이 사실상 오늘날의 '신학대학'이었으며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직자들이나 성직자 지망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은 성직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도 결코 가정을 부양할 수 없는 경제력을 가졌다고 해서 '총각들'이라고 불렸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공부를 하면서 가정을 부양할 정도의 돈을 버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한 명의 성인으로서, 여기저기서 받는 장학금이나 역시 여기저기서 뛰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어찌어찌 연명해 나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여전히 피부양자 노릇을 하고 있다면 때로 수치심이 들 수는 있어도 형편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스스로를 책임지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면, 박사라면 모를까 석사를 하는 동안에는 몇 년 동안 크든 적든 굶주림의 위협을 인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상황은 사람에게서 끈기와 의지력을 앗아간다. 유학에 있어 언어의 장벽이나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떨어짐보다 더 고생스러운 것이 바로 이 가난을 버티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살면서 공부를 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달에 200을 못 받는 한국의 그 어떤 일자리도 달콤하고 의젓한 것으로 느껴진다.
바로 이럴 때 사람을 알아가고 친구를 만드는 일은 피곤한 삶에 일종의 낭만을 불어넣어 안 그래도 사람 안 만나고 책 읽느라 정신 상태가 청소년기에 고착되어 있는 대학원생들의 가슴에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준다. "이 곳 사람들은 날 좋아해"라는 느낌은 이 고독한 책벌레들에게 낯설고도 설레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들이 장밋빛 렌즈로 작용해 가난을 버티는 대신 즐기는 정신 이상 상태로 유학생들을 이끈다는 것이 내 생각에 애틀랜타가 유학하기 좋은 도시인 이유다. 뉴욕에서 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정도의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것은 아마 센트럴 파크나 금문교를 볼 때 느껴지는 "이런 곳에 오다니,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감각일 텐데, 대학원생으로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은 필히 힘이 빠지는 순간이 온다. 대학원이 학생들에게 세상에 위대한 학자는 썩어 넘치도록 많고 너는 그 중 만분의 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을 거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강렬한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틀랜타는 아름답지가 못한 도시이며, 푸르고 너른 하늘과 햇빛 아래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어디에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인의 허영은 단 한 모금도 채워 주지를 않는다.
끔찍한 대중교통 시스템, 백인 동네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곧장 나타나는 엄청난 수의 홈리스들, 설계자가 정신병을 녹여 넣어서 운전대를 잡는 순간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정신병자가 되는 것 같은 도로 상황, 학교 캠퍼스를 제외하면 어디를 가도 벗어날 수 없는 오줌 냄새, 지린내는 그나마 어디서 나는 것인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지 도저히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이 공기 중을 맴도는 마치 기독교 신의 구취 같은 골목길의 기묘한 악취도 물론 도움이 되지 않는다.
30분이 넘게 땡볕 아래 서 기다려서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건물 벽에 그려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의 눈빛이 나에게 말해 주는 것은 자유의 꿈, '아메리칸 프라미스'가 아니라 애틀랜타에서 살아간다는 게 돌아가는 그 날까지 서울을 그리워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슬프고 성급한 예감이다.
여기는 애틀랜타, 멋진 도시지만 나는 흑인이 아니고, 석사 학위를 받기까지는 아직도 2년 하고 8개월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