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넙으로 자라던 어린 시절,
내게는 동생이 두명있었다.
그중 한명은 어릴 때 부모님이 정성껏 고른 상대중의 한명과 프리넙을 쓰고 결혼했는데, 최근에 동생이 배우자와 싸우고 기분이 크게 상한 일이 있었나보다.
내게 기분전환용으로 읽을 로맨스 소설을 써달란다.
트럼프VS매카트니에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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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같은 남자를 주인공으로, 대공이 애딸린 한국인 이혼녀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만약 남편과 결혼안하고 유럽으로 유학갔으면.......? 이라는 상상과 자매끼리 수다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그래서 지금 남편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상류층 유럽인과 연애하는 환상을 채워주기로 했다. 너무 어릴때 결혼해버려서 추억 하나없고 억울하다니까. 이 글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설정, 특히 대공의 과거, 외모, 언행은 사연있는 남자취향에 유럽빠인 동생이 자라면서 본 외국 상류층들의 언행을 반영했으며, 절반은 동생이 쓴거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동생의 환상을 100%반영한 것으로, 완전한 허구이다.
동생의 남편은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상류층이고, 오래동안 괜찮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싸웠다고 발렌타인 데이 디너와 선물을 취소한 그의 행동은 치사했다.
올해에는 내가 평소에는 절대 안쓰는 소설을 써서 동생에게 줌으로써 그 괘씸함을 갈음한다.
대공을
8년전쯤에 파리에서 스치듯이 만난 적이 있다.
결혼식이 가까워 졌을때 보석쇼핑을 하자고 해서 나나나와 파리에 쇼핑을 왔을 때였다. 방탄롤스로이스가 까르띠에 본점앞에 멈춰섰고,
그 안에서 경호원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재빨리 내려 문을 열고 돌아섰다.
넥타이없이 회색 스리피스정장을 입은 건장하고 키큰 백발의 남자가 바로 따라내려서 문을 잡았는데,
왼손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없다.
다시 보니까,
눈도 하나가 없는지 안대를 하고 있다.
한쪽 귀앞에서 목으로 길게 큰 흉터가 있다.
차안에서 어리고 예쁜 여자아이들이 깔깔거리면서 내렸다.
나나나는 그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누군가 했더니. 북부대공이군"
“아는 사람?”
“알다마다. 최근에 아버지가 죽어서 북부대공국의 군주가 됬어. 봐. 장애인이야. 눈하나 없는 거 보여?"
"그러네"
"비공식적으로 유럽에서는 제일 부자라 다들 설설 기지만. 사교활동도 거의 하지 않아서,
친척들 장례식 아니면 국빈만찬정도?
아, IOC에서 활동을 좀 하기는 하는데 딱히
IOC위원이 되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고.
6촌인가 7촌인 여자랑 어릴때 결혼했는데,
부인은 미국남자랑 바람나서 집을 나갔어.
부인이 비행기사고로 죽은지 얼마안되서 홀아비지.
소문이 엄청 안좋아서 정상적으로는 여자를 못 만나나봐.
요새는 저 이탈리아 계집애들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맙소사”
“왜? 이탈리아 아가씨들이 왜……”
“저 여자애들,
대공과 5촌간이야. 여자애들 할머니와 대공의 어머니가 자매간이거든. 하긴 만나주는 여자들이 없으니…….
내가 저 여자애들 아버지면,
이상한 소문이 날까봐 절대 딸들을 대공의 제트기에 태우지 않을텐데.
봐, 샤프롱도 없잖아.
추하다 진짜”
“아직 데뷔도 안한 어린애들이 굳이 샤프롱과......”
“저렇게 어리고 예쁜애들이 저런 홀애비랑 왜 어울리겠어?
다 돈이지 뭐”
“아가씨들도 딱히 돈이 궁한 집안 출신인 것같지는 않은데”
“이드 너 이럴때는 정말”
“응?”
“저애들도 물론 자기 동네에서는 있는 집안애들이지.
하지만 대공은 스케일이 달라.
대공국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제군주국이야.
북부대공국 자체가 아예 다 저 남자 거라고.
우리가 오늘 결혼식용 보석보러온 거,
대공은 저 계집애들과 날마다 해도 될정도라고.
알겠어?”
“아,
그렇게 돈이 많아?”
“순진하긴.
하긴, 네가 사교계를 알겠어. 그게 네 매력이긴 해”
그게 내가 대공을 처음 본 기억이었다. 당시 나는 20대 중반, 유럽에 온지 2년도 안됬고, 내가 유학하던 '나' 도시의 귀족출신인 약혼자의 말은 다 사실이라고 여길정도로 순진했다.
“나나나경?”
“전하!”
나나나는 대공의 흉을 잔뜩 보았지만,
정작 대공이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자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그래. 나백작님과 작년에 영국에서 봤었지?”
“예.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으음, 나야 늘 똑같지.
아, 이쪽이 곧 결혼한다는……..”
“그렇습니다. 자기야, 인사해. 북부대공전하셔”
“안녕하세요?
김이드라고 합니다”
“처음뵙겠습니다.
헨리 노르트입니다”
영지가 있는 사람들은 '노르트(북부)의 헨리'라고 보통 말하는데, 단어의 순서만 바꿔서 평민들의 퍼스트네임과 라스트네임처럼 말해 겸손한 느낌을 주다니, 굉장한 걸. 나나나는 그와 악수를 했고, 대공은 나와는 매우 형식적으로 양볼에 키스하는 프랑스식 인사를 했다. 대공은 아가씨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엘레나와 비토리아.
내 이탈리아인 사촌,
토마소의 딸들이야”
“아, 처음 뵙겠습니다”
“오, 안녕하세요”
남편은 아가씨들의 손을 잡고 들어올려 입맞춤을 했다.
아가씨들은 어려보인다.
15, 16살정도? 어리고 예쁘다.
둘 다 아주 비싸 보이는 펜디코트를 입고 있다.
아가씨들은 재빨리 내 약지에 끼워진 '나'가문의 보석반지를 스캔한 후, 나와도 인사했다.
“나나나경,
약혼녀랑 쇼핑하시나봐요”
“예, 결혼식용 예물을 보러 다니는 중입니다.
까르띠에는 프라이빗 쇼핑때문에 닫는다고 하더니, 대공전하와 아가씨들이 오시는 거였군요. 다른 곳을 먼저 가보려고요”
“한시간만 있다가 오세요.
저희는 빨리 결정하는 편이거든요”
“그럴까요?”
“네. 우린 지인짜 빨리 결정하는 편인데도, 헨리가 워낙 쇼핑을 싫어해요.
그렇죠, 헨리?”
아가씨 중의 한명이 대공에게 팔짱을 끼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대공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대공의 표정이,
나나나의 말과 매치가 되지 않는다.
나나나는 대공을 어린 여자애들을 좋아하는 늙은 슈가대디처럼 묘사했는데,
내가 보기엔 대공이 되려 호구잡힌 것 같은데.
나이는 어려도 아가씨들이 더 닳아 보이는 걸.
대공은 머리가 벌써 하얗게 샌거 빼고는 생각보다 젊었고 점잖아보인다. 진짜 유럽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 맞아?
얼굴의 상처와 안대때문에 대공이라기보다는 제대한 군인같이 보이는데.
“헨리,
어서 들어가요!”
“네,
헨리, 어서~”
“그러지. 나나나경, 그럼”
“예,
전하. 좋은 여행 되십시오”
대공이 가게 안으로 사라지자 나나나는 혀를 찼다.
“봤어?
추잡하긴. 와이프죽은지 얼마나 됬다고.
5촌이면 너무 가깝지 않아?”
“그런 사이로는 안보이던데………
정말 쇼핑만 같이 온거 아닐까”
“아후,
김이드씨. 정신차리세요. 어느 남자가 여자애들이랑 쇼핑을 그냥 온다구요?
말이 되요?”
“그냥 친척이라 그런 걸 수도 있잖…….”
“내가 대공만큼 돈이 많으면 영국이나 네덜란드 공주부터 후려볼텐데.
저런 이탈리아 시골 여자애들은 뭐.
하긴, 장애도 있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공주님들이 만나주겠어…….
이드야, 우리 프라다부터 갔다 오자”
“응?
으응”
“안된다,
엘레나. 비토리아. 너희가 머물 곳은 거기가 아니라, 아래층 코너 스위트야”
“아빠랑 할머니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도 안된다. 어릴 때처럼 같은 공간에서 묵을 수 없어. 그때도 네 아버지나 할머니가 항상 같이 있지 않았니. 특히 비토리아, 네 데뷔가 1년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너희를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이 아닌데”
“뭐 어때요? 곧 할머니가 오시잖아요. 그리고 우리 둘 다, 데뷔무도회랑은 상관없이, 결혼 안 할 건데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미래는 모르는 거야. 데뷔탕트가 되서 무도회에 가게 되면, 거기서 로맨스가 시작......"
“헨리, 잔소리 좀! 참, 내일 아침에 헨리가 있는 스위트에 와서 밥먹고 나가도 되요?
내일은 파리에 사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어요!”
“내일, 자동차, 종일 써도 되요?
카드도 주면 안되요?"
“그러렴. 요한이 파리 지리에 익숙하니 운전을 부탁하마"
“와! 최고야!”
“감사합니다!”
“응…….”
아이들이 깔깔대며 경호원들과 방으로 사라진 후,
나머지 직원들은 대공을 따라 꼭대기층으로 올라왔다.
“후ㅡ 피곤하군”
“오랜만에 시달릴 전하의 신용카드도 피곤할 겁니다”
“하하하,
괜찮아. 엘레나와 비토리아는 아직 어리잖아.
한참 쇼핑을 좋아할 나이지”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닙니까?
토마소백작님도 무슨 생각이신지.
아이들을 전하가 돌보게 하고 본인은 모나코로 가버리다니요”
“그러게 말이야. 아, 나랑 며칠 파리에 있는 것 때문에 저 애들에게 해가 되는 소문이라도 나면 안되는데. 파트너없이 들어가도 괜찮은 파티만 골라서 다닐 수도 없고.”
“이모님이 이번에 도와주신다고 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설마요”
“하긴,
설마. 저렇게 어린데.
그래도 만약 이상한 소문이 나면 안되니까,
이번에는 얼른 돌려 보내야겠어”
“그러시지요”
“아,
그리고 나나나경이 결혼한다는 여자 말인데”
“예”
“어……
프랑스인이, 아닌 것 같은데?”
“한국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나시에서 대학원을 나오고 장-바티스타네 회사를 다닌다더군요.
나나나경과는 대학에서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피부가, 음, 꿀..... 꿀색이더군”
경호원 헨리는 침을 삼켰다. 대공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자신과 매우 허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여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 외국인 여자가 젊고 예쁘장하기는 했지만, 대공의 주의를 끌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공이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나나백작의 며느리가 될 여자에게 구애라도 한다면 이건 진짜 대형 스캔달인데. 유럽의 싸구려 가십잡지들이 대공에 대해 온갖 더러운 소설을 쓰다못해.....
대공은 곧, 알아서 자신을 잘 추스렸다.
“음,
대학에서 만났다고?”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럼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서 사귀다 약혼……. 틀림없이, 근사한 로맨스였겠지......"
경호원헨리는 침묵했다. 대공은 외로운 사람이다. 어릴 때 같이 납치되었던 6촌과 대공자 시절에 결혼했지만, 대공자비는 집에 붙어있는 법이 없었다. 대공자비는 영국왕족들처럼 연예인에 가까운, 미디어에 노출되는 화려한 삶을 원했지만, 대공의 집안은 그와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했고, 유럽에서는 대공가의 비위를 거슬리면서까지 그녀의 응석을 받아줄 사람들이 없었다. 대공자비는 미국의 사교계로 옮겨가 거기서 미국인들과 어울렸고, 빠르게 망가지지 시작했다. 바람까지 났지만, 설사 아내가 바람나서 집을 나가도 하느님앞에서 맹세한 아내라면서 대공은 오래동안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아내가 죽고나니 어느새 30대 중반. 유럽의 왠만한 공주나 괜찮은 아가씨들은 다 결혼해버린 상태인데다가, 이제 작위까지 계승해 군주가 되어버렸으니 누구랑 선뜻 만남이 되기도 어렵다.
"아, 헨리. 난 샤워할고 올게.
잠깐 이메일 확인하고 싶은데,
내 랩탑에 어디있지?”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고마워, 헨리”
“별 말씀을요,
헨리”
결혼 후,
나는 곧바로 임신했다.
아이의 4살 생일 전날이였다.
생일 파티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서재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아이의 야간 내니중의 한명과 남편이 안고 있다가 당황하면서 떨어졌다.
“끌로이?”
“마담”
“내가 불렀써어……
할말이 있어서…….”
맙소사, 남편은 취해있었다.
나나나에게서 술냄새가 난다.
“나나나!
얼마나 마신거야?”
“위스키 조금”
“거짓말! 술냄새가……..”
“저,
저는 나나나드에게 돌아가 보겠습니다.
실례합니다”
끌로이가 재빨리 서재에서 나갔다.
나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상태인 남편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야”
“뭐긴?”
“끌로이를 안고 있었잖아”
“저 여자가 날 안았어”
“거짓말.
끌로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나나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서재에 있는 큰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럴 사람이고?”
“나나나!”
“넌 멍청해.
아무것도 몰라”
“끌로이는 야간내니로서 할일이 있으니까,
밤에 이렇게 부르지마”
“뭐 어때?
한 명 더 있잖아.
어…… 이름이 뭐더라”
“야간에 내니가 두명은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건 네 의견이었잖아.
그러니까”
“제길, 알았어. 알았다고!”
그는 술에 취해 초점이 잘 맞지 않는 흐리멍덩한 눈길로 내게 손을 뻗었다.
“왜?”
“이리와봐……”
“싫어. 자러 갈거야”
“나도 자고 싶어”
“자면 되지?”
“바보. 너랑 자고 싶다고”
“오늘은 싫어”
“어제도, 싫다며”
“오늘은 이유가 있어.
방금, 끌로이를 끌어안고 있는 걸 봤으니까.
끌로이에게 사과해”
“끌로이가 날 먼저 안았어”
“거짓말!”
“정말이야”
그는 피식 웃었다.
“너,
정말 바보야.
왜 그렇게 사람을 믿어?
끌로이는 알게 된지
6개월도 안됬잖아”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내가 본게 분명히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전에는”
“멍청하긴”
나나나는 혀를 찼다.
“결혼하니까,
뭐라도 된거 같지”
“뭐?”
“나랑 결혼하니까,
뭐라도 된거 같지?”
“무슨말이야”
“너, 건방져. 건방져졌어. 자기 주장이 있는 편이긴 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내 말을 좀 듣는 편이 좋을거야.
솔직히 너,
나랑 결혼 안했으면 끽해야 장-바티스타네 회사에서 일하는 수백명의 엔지니어 중의 하나일 뿐이었을 걸”
“그것도 좋았어.
장-바티스타는 최소한,
직원을 와이프앞에서 껴안지는 않았거든”
“야!”
3년 후.
“이드?”
“샬롯?”
“이드! 나 좀 도와줘”
“무슨일인데요?”
“오늘 북부대공이 우리 갤러리에 오는 날인데,
꽃배달이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어!”
“저런. 몇개나 필요해요?”
“리셉션에 하나.
사무실로 가는 입구에 큰거 하나,
사무실 안에 작은거
2개. 작은 거는 둘다 되도록 꽃꽃이로…….”
“몇시라고 하셨죠?”
“11시”
“지금 갈게요”
“재,재료도 없어”
“사가지고 갈게요”
“맙소사.
고마워”
“뭘요”
나나나드가 서운해하겠지만,
수영은 틀렸다.
내일 가야지
“나나나드! 고모네 갤러리,
꽃배달에 문제가 생겼어.
우리가 가서 도와야되.
수영은 내일 가자”
“고모네? 할 수 없지”
나나나드는 애착곰돌이인형을 안고 일어났다.
우버를 동네수퍼로 불러놓고 나가서 수퍼에 있는 꽃을 전부 쓸어담았다.
우버는 우리가 사는 시와 옆 도시의 경계에 있는,
고급 주택단지에 있는 갤러리에 우리를 내려다 주었다.
내리자마자 나는 꽃꽃이 재료를 싸들고 안으로 달렸다.
“이드!”
“샬롯”
전시누이와 나는 재빨리 비주를 했다.
샬롯이 꽃병과 꽃꽃이용 도자기가 여러개 놓여진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다.
나나나드는 묵묵히 우리를 따라왔다.
“오늘 주제가 ‘새로운 만남’이고, 전시된 작품을 대강 보면서 왔는데,
좀 밝은 색이 나을것같은데.
이거, 그리고 꽃꽃이 용으로는 이거 두개가 좋을 것 같아요”
“아아,
좋아. 끝나고 불러줘”
샬롯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어쩌지, 대공의 경호원들이 이미 도착했데!”
“가봐요, 샬롯. 여기는 내가 다 하고 부를게요”
“응!”
꽃병 작은거 한개,
큰거 두개,
꽃꽃이 두개.
할 수 있다.
나는 꽃가위를 들고 집중했다.
빨리 끝내야되.
길어야 15분.
문이 벌컥 열렸다.
장이다.
“이드!
리셉션 꽃!”
“자, 리셉션용이에요”
“맙소사. 고마워!”
“사무실로 가는 복도용도 다 되가요.
그거랑 사무실내에 놓는 건,
제가 제자리에 놓아둘테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요,
장”
“응. 아, 그리고 보안체크를 안 받은 사람은 들이지 않기로 했거든.
그래서……”
“알겠어요. 으음, 사무실 옆 부엌에 나나나드랑 조용히 있을게요”
“고마워”
장은 리셉션용 꽃을 가지고 사라졌다.
나는 재빨리 복도용 꽃을 마무리했다.
“나나나드,
여기서 꼼짝말고 있어”
“네”
복도용 꽃은 상당히 커서,
두손으로 안아들고 이동해야 했다.
복도용 꽃병을 장식한 꽃꽃이를 옮겨두고 들어와서,
재빨리 쇠침으로 된 수반 두개를 장식했다.
한 개는 조금 크게,
다른 한개는 조금 작개.
두 개를 테이블에 나란히 놓아 장식하니 그럴듯 하다.
나는 얼른 남은 재료와 쓰레기를 모아 돌돌 말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깨끗이 닦은 후 나나나드를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
“나나나드.
이리 와”
“왜?
고모 사무실이잖아”
“응.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신데.
여기까지 들어올지 안올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어오면 우리는 여기서 조용히 없는 척 해야되”
“왜?”
“아,
그 손님,
최근에 죽을 뻔 했다나.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보고 싶지 않나봐”
“알겠다.
겁이 나는구나”
“그럴 거 같아.
아주 잠깐이니까 우리는 아주 조용히 있자”
“응”
밖에서 후다닥 하는 소리가 몇번 나더니,
곧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대공이 도착했나보다.
나는 부엌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나나드는 낙서를 했다.
“아ㅡ,
감사합니다”
전시누이 목소리다.
경호원인지 대공 본인인지는 모르지만,
들어가게 문을 열어줬나보다.
사람들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자리에 앉는 소리도 났다.
“홍차?
커피?”
“홍차로 부탁합니다”
장이 부엌으로 들어와서 나와 나나나드에게 윙크를 하고,
조용히 찻잎을 우리기 시작했다.
나는 받짓고리를 꺼내 나나나드의 인형중의 하나를 꿰메고 있었다.
“부아송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제가 그 것을 걸고 싶은 곳이 독일에 있는 제 별장이라”
북부대공국은 불어와 독일어가 공용어라고 들었는데,
대공의 불어는 완벽하다.
파리식 억양.
“제가 비서분과 연락해서 배달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작품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는데,
장이 우유와 레몬,
차를 예쁜 접시에 담아서 나갔다.
“감사합니다”
대공은 예술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대화가 물흐르듯이 진행되는데,
예술사 전공으로 학위가 있고 꽤 알려진 아트딜러인 전시누이의 말을 다 이해하는 것같은데?
“으음?”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서 안심하는데,
대공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 이런. 바지 단추가……”
“오렌지부인이 반짓고리를 가지고 있을겁니다”
“호텔에 들렸다가 나백작의 집에 가면 시간에 늦을 것 같은데”
“오렌지부인을 나백작의 집으로 오라고 할까요?”
“으음,
어떻게 해야하지……”
장이 나섰다.
“반짓고리,
여기에도 있습니다”
“오! 잘 됬군요.
누구 바느질 할 줄 아는사람?”
순간 침묵이 흘렀다.
경호원들도, 전시누이도, 장도 바느질을 못하나 보다.
“사장님,
이드가 바느질을 할 줄 알…….읍”
“이드가 누구지요?”
“아!
제 친구인데,
음, 오늘 꽃꽃이를 도와주었습니다.
여기! 이것도 이드가 한 것입니다.
빨리 끝나고 갈거라고 생각해서 굳이 보안검사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그만 여기에……”
“백작부인과 장외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들었는데요”
대머리 경호원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최근의 사건때문에,
대공전하의 안전”
“헨리, 됬어. 그럴 수도 있지.
백작부인의 친구라면 수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장실은 저쪽입니다.
바지를 주시면 바로 수선해 드리지요”
“헨리, 같이 가지.
나는 화장실에 있을테니 헨리가 바지를 전해줘”
“예, 전하”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시누이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드!
들었어?”
“네”
“도와주겠어?”
“네”
나는 나나나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사무실에는 덩치가 큰 경호원 두 명과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남자 비서 한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김이드라고 합니다”
“나나나드입니다”
2미터도 넘어보이는 거구의 대머리 경호원이 불쑥 들어왔다.
“저는 헨리, 대공전하의 경호실장입니다.
대공전하의 바지 단추가 떨어진 걸 수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나는 앉아서 실에 바늘을 꿰었다.
대공이 입고 있는 회색 정장바지에 어울릴만한 검은 실로.
대공은 덩치가 큰편인다.
고급남성정장용 옷감으로 그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된 것이 분명한 바지.
무슨 이불만하다.
침묵 속에서,
단추를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꿰어넣었다.
“다 되었습니다.
만약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바로 바꿔드릴테니 대공께 여쭤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헨리라는 대머리 경호원이 나갔다가,
백발에 190정도 되는 건장한 남자와 다시 함께 들어왔다. 대공이다. 정면에서 보니까, 기억에 있는것보다 잘생겼다. 8년전에 그렇게 스치듯이 만났으니 날 기억할리가 없겠지.
대공은 이제 40대초반. 처음 만났을 때는 작위를 계승한지 얼마 안됬을때라 군주보다는 은퇴한 군인같이 보였는데, 지금은 더 성숙하고, 군주다운 오라가 흐른다.
대공의 이마부터 시작하는 콧대가 엄청나게 높다.
끝이 살짝 처진 크고 연한 녹색 눈, 이제 약간 눈가 주름도 있다. 전형적인 유럽인들의 얇은 입술.
바지와 같은 천으로 된 조끼와 자켓을 넥타이 없이 입고 이는데,
잘 어울린다.
나를 보고 살짝 눈이 커진다.
동공이 확장된 연한 녹색눈.
하긴, 이 도시에는 동양인이 드무니까.
“제 바지단추를 다시 달아주신 분이군요”
온화한 미소를 띈 얼굴이 잘생겼다. 스타일도 좋고...... 관리 잘된 몸매. 서른살만되도 유럽인들은 외모가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군계일학이다.
“헨리 노르트라고 합니다”
“김이드입니다”
“우리, 파리에서 본적이 있지 않나요?
까르띠에 앞에서?”
“맞습니다, 전하.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이혼한 전남편과 파리로 결혼식용 보석을 주문하러 갔을 때, 8년전인데 기억력도 좋아라.
우리는 악수를 교환했다.
대공은 인사만 하고 바로 나갈거라는 내 예상을 깨고,
꽃꽃이 이야기를 꺼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꽃꽃이는 전부 김양 작품이라고요?”
“네, 전하”
“헨리라고 불러주세요.”
“예, 헨리”
“화훼전문가이신가요?
다다음주에 '나'도시에 다시 들릴 예정인데,
그때 제가 머물 호텔방의 꽃장식을 부탁드리고 싶군요”
전시누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이드는 사실 장-바티스타의 회사에서 일하는 시빌엔지니어입니다,
전하”
“오? 그런데 어떻게 꽃꽃이를?”
“이드는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실은 오늘 평소에 꽃장식을 부탁하는 곳이 배달사고가 나서,
제가 급히 이드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럼 시간이 촉박했을텐데,
놀라운 솜씨로군요”
“준비를 더 철저히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전하”
“헨리.
헨리하고 불러주시시요”
그는 전시누에게 미소지었다.
“샬롯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무, 물론입니다”
“이드, 샬롯에게 연락처를 물어보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제가 나 도시에 다시 왔을때,
다시 꽃장식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지요”
“자, 이쪽 아가씨도 함께 하겠지?
안녕, 나는 헨리야”
“나나나드에요”
“만나서 반가워,
나나나드”
“저도요, 헨리”
“샬롯, 아버지의 저택으로 이제 가실까요?”
“네,
그러지요”
“이드”
나는 그가 다시 악수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대공은 내가 내민 손을 살짝 잡더니 들어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어라?
“그럼,
다시 만날때까지”
놀라서 고개만 끄덕했다.
대공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졌다.
샬롯과 쟝이 내게 눈짓을 하고 따라나갔다.
나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다들 나가는 거 같으니,
나도 집에 가야지.
나나나드의 손을 잡고 방에서 나왔다.
거대한 방탄 롤스로이스 몇대가 건물앞에 서있었다.
대공이 먼저 차에 올랐다.
샬롯은 친정아버지인 나나백작의 기사가 운전석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벤츠에 올라탔고,
출발했다. 나는 대공과 샬롯이 떠난 후 다시 우버를 불러서 나나나드와 그걸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샬롯은 내 연락처를 대공의 비서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재료와 택시값을 덮고도 남을 넉넉한 비용을 계좌이체로 보내주었다.
대공의 비서가 사흘 후에 연락을 했다.
대공이 머물 예정인 '나'도시에서 제일 비싼 호텔의 스위트룸 구조도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꽃이 장식되야할 부분이 붉은색 점으로 표시가 되어있었다.
내게 신분증을 들고 호텔로 미리 답사를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적어져있어서,
나는 버스를 타고 다음주 토요일에 수영장을 다녀와서 답사를 갔다.
호텔은 생각보다 어둡고 차분한,
갈색과 밤색이 주를 이루는 색조로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노란색이나 오렌지색꽃을 쓰면 환한 느낌도 주면서 기존 분위기에도 어색하지 않게 어울릴것같았다.
나나나드는 호텔방이 아주 마음에 드는지 방마다 구경을 다녔다.
다음주 토요일 아침에는 일찍 도매시장에 사서 꽃을 사고,
호텔로 갔다.
대공은 정오경에 도착한다고 했다.
화병 3개와 수반
5개를 끝내고 수영장가면 시간이 딱 맞을 듯.
“어?”
막 꽃장식을 끝내고 지저분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드”
“헨리?”
대공이었다. 아직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헨리!”
구석에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던 나나나주가 달려와서 헨리에게 안긴다.
“안녕,
나나나드”
“안녕,
헨리”
“안녕하세요, 헨리”
“안녕하세요, 이드”
그는 군청색 바지에 드레스셔츠,
바지과 같은 천으로 된 조끼와 자켓을 입고 있었다.
“정오쯤이 도착하신다고 들었는데,
빨리 오셨네요”
“아, 스위스 IOC에서의 미팅이 취소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호텔은 이미 체크아웃을 해버려서,
그냥 여기로 왔지요”
“그러셨군요”
“꽃장식을 끝내고,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예”
“아름답군요, 감사합니다”
“뭘요”
“아침, 아직 안드셨지요?
드시고 가시겠어요?”
“아, 그런 폐를 끼칠수는……”
“크로와상에 핫초콜렛 주세요”
“나나나드!”
“하하, 아이가 배가 고픈가 보군요.
드시고 가시지요.
다음 일정이 있으신가요?”
“수영수업이 11시에 있어요.
아침먹고 버스타도 충분한데!”
“나나나드, 여기서 아침먹고 갈래?
수영장에는 내가 데려다 줄게”
“헨리, 최고. 우리엄마는 에그베네딕트 좋아해요.
커피는 크림만”
“나도 수란 좋아하는데, 잘 됬구나. 헨리, 에그베네딕트 두개와 커피 두잔 부탁해. 아이는 크로와상과 핫초콜렛. 신선한 과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물론입니다, 전하. 준비하겠습니다"
대공은 아이가 없다고 들었는데, 뜻밖에 어린 나나나드랑 죽이 잘 맞는것같다. 나나나드는 대공의 손까지 잡고 거실로 먼저 따라갔다. 나도 그냥 주저앉았다.
사실 배도 고프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이 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가 나갔고,
대공이 자리를 권해서 나는 거실에 있는 호화로운 가죽소파위에 앉았다.
대공의 직원들이 짐을 방안으로 옮기고 호텔직원들이 올라와서 식탁에 아침을 차리기 시작했다.
대공은 차분히 앉아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문득, 내 옷차림이 의식되었다.
뽀빠이청바지에 포니테일.
화장도 안했는데.
그는 꽃꽃이에 대한 칭찬으로 입을 열었고,
우리는 그가 샬롯의 갤러리에서 산 그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느닷없이 도착해서 겨우 두 번 본 나와 대화를 스무스하게 대공의 말솜씨가 굉장하다. 틀림없이 어릴때부터 언어와 화술을 엄격하게 교육받았겠지. 대공은 프랑스인같은 완벽한 불어로, 막 배달이 끝나서 대공의 독일별장에 장식되었다는 샬롯에게선 산 그림이 걸린 곳을 설명하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독일별장의 관리인이 찍어 보내주었습니다.
어떤가요?”
“오……. 멋져요. 그림이 딱 맞는 곳을 찾은 것 같군요”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그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비서가 다가와 아침이 준비되었다고 했다.
그는 함께 가기를 권하면서 일어났다.
나와 나나나드는 대공과 함께 아침 식사가 준비된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 햇살이 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짙은 밤색의 공간에 아름답게 스며들었다.
식탁에 장식된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꽃이,
내가 한 것이지만 참 공간에 적절하게 어우러진다.
에그베네딕트와 커피가 신속하게 서빙되었다.
나나나드도 크로와상과 핫초코렛을 받고 미소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는 에그베네딕트에 크림을 넣은 커피를 좋아한다고 나나나드가 대공에게 말한 것이 불과
15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식탁에 앉아서 포크로 수란을 터뜨리게 됬다.
이렇게 신속한 서비스라니 과연 '나'도시에서는 최고의 호텔답다.
12시에 온다던 손님이
9시에 나타나서 아침을 차려달라고해도 이렇게 대응이 완벽하다니.
대공은 처음 만났을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내게 커피를 권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언제 출발하셨기에 이렇게 빨리 오셨나요?”
“아,
저와 직원들은 전원 외교여권이라 보안검사를 받지 않으니까요.
스위스에서 7시반에 이륙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아침은
IOC에서 먹게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건물에서 화재가 났다더군요.
그래서 그냥,
스위스를 떠났습니다.
이드는 여기 언제쯤 오셨나요?”
“음,
7시에 꽃시장에 갔었고……
여기 도착한거는
8시정도?”
“아니,
이 많은 꽃장식을 다 하는데 한시간도 안걸렸다는 겁니까?”
“하하, 한국에서 일할때는 이것도 시간이 넉넉한 편인데”
“더 이야기해 주시지요.
한국에서 꽃꽃이를 배우셨나요?”
“예. 저의 외가가 한국에서 화훼산업을……”
외가집이 하우스에서 꽃을 기르는 사업을 하는 것,
그래서 꽃꽃이를 배운것, 한국에서 공대다니며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경험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시간이 어느새
10시가 넘었다. 이런. 대공은 대화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진짜 보통이 아니다. 나는 아직 대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 사람은 우리 외가집의 사업과 내가 다니던 대학의 이름까지 술술 불게 만들었다.
“저,
곧 수영장에 가는 버스를 타야해서”
“제가 바래다 드리지요.
수영장은 어디입니까?”
“$$ 공원옆에 있는 시립수영장이에요”
“아,
그다지 멀지 않군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눈짓하자 비서가 사라졌다.
대공은 나나나드의 수영실력이 궁금한지 아이에게 질문을 했다.
“아,
저도 수영을 한지가 꽤 되었군요”
“저 수업끝나고 자유수영해요!
헨리도 같이 할래요?”
“나나나드, 헨리는 바쁜 분인데……”
“아니오, 괜찮습니다. 요한, 수영복을 준비해주게”
“예, 전하”
“괜찮다면, 오늘 오후에는 나나나드와 수영을 하고 싶군요”
“어…… 그러세요”
“이드도,
오늘 함께 수영하십니까?”
“아니요! 엄마는 엉덩이에서 피가 나서 안되요”
이런 젠장!
내가 생리중이라는 걸 나나나드가 말하자 대공은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겼다.
“그렇구나.
그럴때도 있지”
“어른들은 그럴때가 있다면서요.
헨리도 종종 엉덩이에서 피나요?”
“아니.
피가 나는 건 여자어른들뿐이야”
“불공평해!”
“그러게 말이다”
대공은 수영장에 경호원 두명만 데리고 입장했다.
30분간 수업이 진행되는사이,
보호자들은 주변의 플라스틱 의자에 흩어앉아 기다렸다.
대공은 나와 함께 의자에 앉았다.
눈에 띄는 브랜드용품을 걸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대공은 은근히 주목을 받는다.
그는 어찌나 자연스럽고 편하게 앉아있는지,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도 왕좌로 보이게 한다.
하긴 자기나라에서는 군주니까 일종의 왕이기는 하구나. 귀족출신의 고위직 외교관 같은 우아한 부티가 흐르는 그를 학부형들이 은근히 훔쳐본다.
그와 나는 나나나드를 지켜보면서 가볍게 수다를 떨었다.
“수업이 끝나가네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대공은 남자 탈의실로 사라졌다.
경호원중의 한명이 그를 따라갔다.
나나나드는 교육용 풀장에서 나와 자유수영장으로 옮겨갔다.
그사이에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대공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와, 무슨 40대 남자가 저런 몸매를?
옷을 입고 있을 때도 짐작은 갔지만,
떡 벌어진 어깨,
완벽한 복근,
엉덩이도 안 쳐졌잖아!
두툼한 흉곽과 굵은 허벅지에서 남성미가 철철 흐른다.
평범하고 약간 헐렁한, 보수적인 디자인의 특색없는 검은색 수영복을 위 아래로 입고 있었는데,
아주 잘 어울렸다. 나중에 약혼하고나서야 대공이 옷을 벗은 상태를 처음 봤는데, 왜 그렇게 수영장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었는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릴 때 납치되었다더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체에 깊은 흉터가 여러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눈짓하고 풀장으로 들어갔다.
탈의실로 따라들어간 경호원이 내 옆에 앉아서 자신을 소개했고,
우리는 인사를 교환했다.
다른 경호원도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헨리!”
“나나나드”
나나나드는 수영장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반색했다.
아이가 대공과 풀장 주변에 흩어져있는 장난감으로 신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변에 자유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몇명 더 있었지만,
다들 접근은 하지 않았다.
“대공께서 풀장에서 나온 뒤에 함께 점심을 드시기를 권하십니다만,
마담”
대공을 따라 온 경호원 중 한명이 프랑스어로 내게 속삭였다.
“음,
호텔로 돌아가서요?”
“호텔에서도 좋고,
따로 원하시는 곳이 있으시면 바로 수배하겠습니다”
“감사하지만 다음에 뵙자고 전해주세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경호원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대공이 뭔가를 권해서 까이는걸 별로 본적이 없나보지.
하긴 유럽에 단 하나남은 전제군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11시부터
30분간 수영수업,
그리고 30분간 자유수영.
12시 정각에 나나나드를 불렀다.
나나나드는 더 있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되면 프리드리히와의 점심약속에 늦게 될거니까.
나나나드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걸 여자탈의실에서 도와주고 나오니,
이미 옷을 갈아입고 나와있던 대공이 미소지었다.
아직 조금 젖은 머리를 빗어서 올백으로 넘기도 있는것도 괜찮네.
“이드,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친구랑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그러시군요. 가시지요”
대공의 차는 진한 회색의 방탄 롤스로이스였다.
경호원이 문을 열기 위해 앞서 가는 걸 손짓으로 제지한 대공이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나나나드는 당당하게 폴짝 뛰어올라 차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뒤따랐고,
대공이 탄 후,
경호원들이 탑승했다.
차는 육중한 덩치와는 다르게 승차감은 괜찮다.
차안에서 대공은 말없이 나와 나나나드의 잡담을 듣고 있었다.
나나나드는 프리드리히랑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헨리,
햄버거 좋아해요?”
“좋아해.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왜요?”
“햄버거를 많이 먹으면 뚱뚱해진다고,
대공성의 요리사가
1주일에 한 번만 만들어주거든”
“뭐야, 대공성에서 살아도 별거 없네요.
1주일에 한번만 햄버거를 먹어야 된다면, 나랑 다를게 뭐야!”
“그러게 말이다.
바닐라 쉐이크도
1주일에 한번,
피자도 일주일에 한번만 만들어준단다”
“저랑 똑같네요!
이럴수가”
나나나드는 대공도
1주일에 한번밖에 햄버거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여행중일때는 한번 더 먹기도 하는데,
그러면 뚱뚱해질까봐 비서들이 운동스케줄을 더 잡아주지”
“헨리가 뭐가 뚱뚱해요.
근육이 학교체육선생님같은데”
“그래? 내 트레이너들이 들으면 좋아하겠구나”
“트레이너라면, 어른들의 체육선생님 같은 건가요?”
“그렇지”
“아니, 헨리는 몇살인데 아직도 선생님이 있어요?”
“배움에는 끝이 없단다”
“이럴수가! 그럼, 숙제도 있어요?”
“숙제는”
그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어째 해마다 늘어나기만 하는구나”
“뭐라고요!”
경악하는 나나나드의 얼굴을 보며 헨리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니, 애랑도 대화를 이렇게 잘 이어가다니. 유럽의 모든 왕족들이 한다리건너면 다 친척간이라 자기들끼리 몰래 자주 모인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유럽에 있는 오만친척들 애는 다 봐주고 다니는건가?
“뭐,
어른이 되서 좋은 점도 있단다.
어른이 되면,
원하는 일을 더 할 수 있지.
여행도 많이 할 수 있고,
햄버거는 여전히 1주일에 한번이기는 하지만, 아이스크림이나 소다를 더 자주 먹을 수 있고……”
“전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어서 햄버거랑 감자튀김을 날마다 먹을 거에요!”
“그래,
나나나드는 그럴 수 있을 것같구나”
놀랍게도, 그는 차가 멈추자 재빨리 일어나서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나와 나나나드가 내리자,
그는 미소지었다.
“오늘 뵈서 반가웠습니다”
“저도요.
조심해서 가세요”
“예. 그럼……..”
아이 손을 잡고 돌아섰다.
롤스로이스도, 대공도 너무 튀어서 얼른 멀어지고 싶다.
내 어깨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게 느껴진다.
나나나랑 다니면서 이런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나보다.
프리드리히는 이미 도착해있었다.
우리는 비주를 했고,
나나나드는 프리드리히를 껴안았다.
“왠일이야?
이드가 늦다니”
“엄마친구랑 수영장에 갔거든요”
“엄마친구?
누구?”
“헨리요”
“헨리? 오오? 누군데?”
나나나드는 신나서 헨리가 얼마나 비싼 호텔에 머무는지,
함께 먹은 아침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수영장에서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를 묘사했다.
“음,
데이트라고 하기엔 약간 애매한데”
“데이트 아니야,
프레드리히. 그 사람 선약이 깨지지 않았으면 얼굴 볼일도 없을 건데 우연히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네 전 시누가 소개시켜준 사람이면 부자겠네?
잘 생겼어?”
“……. 응”
“잘생겼다고?
오, 이드가 잘생겼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잘생겼을까?
나이는?”
“43살인가......”
“이혼? 아니면 아직 총각?”
“사별이라던데”
“그렇구나. 아, 사별이면 좀 어렵다.
사진있어?”
“없어. 데이트가 아니라니까”
“그렇구나. 아깝다. 잘 생긴 40대남자는 드물어”
“그렇긴 하지”
“이드,
할말이 있어”
“네, 샬롯”
“자기가 잘 모르는 거 같아서 말인데,
대공이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아”
“네?”
“저런.
전혀 몰랐구나”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가하세요?”
“대공이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금도 펑펑 뿌리는 건 사실이지만,
내 갤러리에만
3달 연속 오는 건 수상해.
유럽에 갤러리가 몇갠데.
처음에는 그렇다해도 두번째랑 세번째는,
꼭 자기가 호텔방 꽃장식을 해야된다는 조건이 붙은 거도 그렇고.
여기 올때마다 다른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호텔에서 여러날 묵으면서 호텔 꽃장식을 자기가 하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상하고, 꼭 빨리 도착해서 같이 밥을 먹고, 그 뒤에도 따라나오려고 한다며. 수영장, 그 뒤에는 점심도 먹으라고 잡고"
“아,
그러고보니……..?”
“대공은 어릴때 사고난 이후로는 딱 직원들이 미리 점검해놓은 동선만 따라가기로 유명한데,
자기보려고 자꾸 동선을 바꾸는 짓을 하는게…….
수상해”
“우연아닐까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자주야.
대공의 직원들도 다 눈치챈거 같아.
직원들도 이런 적이 없어서 좀 허둥지둥하는 느낌?
재미는 있겠다ㅡ 대공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적이 없거든”
“유부남이었다면서요?”
“아,
마리? 휴, 말도 마.
그 여자 아버지도 미친놈이었고,
그 여자도 정상은 아니었어.
어릴때 같이 자란데다 같이 납치된적이 있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유대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상한 여자였어.
나도 두어번 본적이 있거든”
“어땠어요?”
“음, 예뻤어, 근데 말을 되게 함부러 했지.
대공가사람들이 싸고 돌아서 그렇지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대공과 함께 트라우마 치료를 오래동안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대공도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대공은 친해지기가 어렵기는 해도 비정상은 아니야.
대공이 애꾸눈에 손가락도 몇개없고,
말수도 없고,
사교활동도 잘 하지 않으니까 소문은 그렇게 낫지만. 대공이 18살이 되자마자 결혼해서 함께 몇년간 조용했는데,
그 뒤로 더 이상해졌지.
마리는 미국사교계에서 난장판으로 놀아나고,
대공은 북부대공국으로 돌아와서 일만하고.
이상한 커플이였어”
“대공의 부인은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면서요”
“응.
다들 쉬쉬하는데,
미국남자랑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는데 그 남자랑 타고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그때가 언제였죠?”
“음, 9년전이야. 그 뒤로 대공은 북부대공국의 운영과 홍보에는 아주 열심인데 여자를 안만나서 문제야.
대공국의 직계자손은 지금 대공하나만 남았거든.
뭐 친척중에서 누가 횡재하겠지,
대공이 자식없이 죽으면”
“그렇군요”
“이드는 생각없어?
대공을 어떻게 생각해?
눈이 하나 없기는 해도 그만하면 잘 생겼지?”
“그렇더라고요.
배도 안나왔고.
수영장에서 보니까 몸도 좋고”
“그치?
대공의 친척들이 대공을 여자랑 엮으려고 난리인데 내가 보기엔 대공은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트라우마요?”
“아,
소문에…… 납치당했을때, 심하게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어.
그때 불과 9살인가 10살때였는데, 음……. 심지어 먹을 것이 없으니까 고문받을 때 잘린 손가락을 마리와 함께 먹었다는 소문도……”
“으으”
“마리의 아버지는 정말 재수없는……
주먹을 부르는 주둥이였지. 로마노프 황실의 영광이 어쩌고....... 웃기는 소리. 정작 로마노프가의 혈통이 더 진한 사람들도 가만히 있는데, 지가 뭐라고 기자들만 보면 나불거리고...... 납치범들이 마리의 아버지를 죽였는데 그 시체를 아이들과 계속 뒀나봐. 며칠이나……
둘다 발견되었을때는 숨만 붙어있고,
엉망진창이었다고 하던데.
아무튼 뭔가 트라우마가 있어서 인간관계를 잘 못맺어.
마리는 계속 자길 받아주는 남자를 찾아다니고,
대공은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일만 하고”
“저런…….”
“마리가 죽은 다음에는,
파트너가 필요한 자리가 생기면 대공의 친척들이 자기들 딸이나 조카들을 밀어넣어 주는데,
대공은 정중하게 에스코트를 해주고 숙소도 쇼핑도 최고급으로 해주지만 딱 그뿐인가봐.
가십잡지들은 그걸 아주 이상하게 편집해서 대공을 행실이 추잡한 중년남자로 묘사하는 기사를 쓰는데,
사실이 아닌 건 우리끼리는 다 알지.
대공의 이모가 이탈리아 백작과 결혼해서,
손녀가 두명 있는데"
"아! 만난 적 있어요. 엘레나랑 비토리아"
"맞아! 그애들 아버지인 대공의 사촌이 모나코에서 도박으로 거액을 날리는 바람에, 그 애들 데뷰탕트 비용도 대공이 다 대줬던 거, 알아? 예전에 대공의 어머니가 이탈리아인 친척들에 신세를 졌다는 이야기야 이 바닥에서 다 아는 이야기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비토리아가 작년에 결혼하면서 대공에게서 뜯어간 비용은 지금도 다들 수근거려. 프랑스공주가 영국왕이랑 결혼했어도 그정도 사치는 안부렸을 거라면서. 최근 몇년간은 그 애들이 돌아가면서 대공이랑 행사에 함께 가주기는 했지. 그 애들이 대공의 개인 신용카드를 받아서 스위스나 프랑스에서 계속 미친 쇼핑을 하는 바람에 소문이 이상하게 났지.
대공과 만찬에 참석하기만 하면,
그 전날은 불가리에서 파인주얼리를 마음대로 살수있다는 둥…….
둘 다 인스타그램에 과시용 사진은 잔뜩 찍어서 올리는데, 별거없어"
"대공은 소문과는 달라보이더데요. 점잖고"
"역시, 이드는 사람을 잘 본다니까. 대공은 절대로 같은 방에서 오촌 아가씨들과 묵지도 않아. 토마소백작이 딸을 대공에게 넘겨서 호구잡으려고 하는 것같은데, 대공은 어릴때 방학마다 본 아이들에게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자기는,
대공이 제발로 자기 공간에 자꾸 들이려고 하거든.
갤러리도 그렇고,
호텔방에도 그렇고.
나나나드랑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나도 대공이랑 알고 지낸지 15년이 넘었는데 대공이 본인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들은건 올해가 처음이야”
"그런가요"
"잘 됬으면 좋겠다. 대공은 어마어마한 부자인데다가 괜찮은 사람이야"
"샬롯은 대공과는 잘 아는 사이였나요?"
"전혀. 얼굴이야 어릴때부터 알았지만, 성인이 되서 그림을 팔아보고 대공이 괜찮은 사람인 걸 알았지"
"그림을 팔아보고 괜찮은 사람인걸 알았다고요?"
"응"
전 시누이는 내게 윙크했다.
"7백만불짜리 작품을 사면서도 배송비는 깎으려고 드는 인간들이 있어. 대공은 항상 작품가격에 배송비와 부가가치세, 그 날 갤러리 통채로 빌리는 비용까지 절대 깎는법없이 한방에 지불해주거든"
"오"
"돈쓰는거 보면 그 사람 그릇이 보이지. 부자라고 다 그러는 건 아니거든"
태어날때부터 백작영애였고, 현재도 잘나가는 예술품 딜러인 전시누이에게서는 항상 많이 배운다. 감탄이 나왔다.
프랑스,
가상의 도시 ‘나’,
새해가 밝았다.
신년 휴가가 끝나고 출근한 첫날이었으니까,
1월2번째주였다. 이혼하고 다시 취업한 뒤로,
회사로는 아무것도 배달 온적이 없었는데,
아침 일찍 내 이름으로 꽃배달이 왔다.
같은 팀의 동료들도 의아해했다.
나도 의아했다.
누가 보냈지? 나는 인터넷쇼핑도 전혀 하지 않고, 개인우편도 절대 회사로 받지 않으니까(이것도 전시누이에게서 배웠다).
선물은 커다란,
예쁜 꽃바구니였다.
크기가 내가 회사에서 쓰는 HP 컴퓨터 스크린보다 더 커서 놀랬다.
이정도면 500유로는 하겠는걸.
누가, 왜 이런걸 내게?
꽃바구니와 함께 온 카드를 열어보니,
전남편이었다.
‘이드야,
오랜만에 얼굴보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서 너무 좋았어.
발렌타인데이에 뭐해?
연락줘.’
거의
3년전에 바람나서 헤어진 남편이 보낸거라고는믿기힘든 메세지였다.
이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데?
나나나드한테 보내는 선물이면 몰라도.
“자기,
누구야?”
다들 궁금해 죽겠지만 아무도 물어보지는 못하고 있는데,
원래도 친했지만 재취업하고 제일 친해진,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는 동갑의 동료 프레드리히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틴트 위로 챕스틱을 잔뜩 발라 번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전남편.”
전남편 나나나는 내가 사는 도시의 영주였던 나 집안의 손자로,
이 근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부자다.
“오호호호!”
프레드리히가 바리톤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나나나경이?”
“응.”
“오호,
꽃 너무 예쁘다.
자기 나랑 오늘 점심먹을래?”
“응.”
“내가 살게.
스시먹자?”
“응.”
직원휴게실에서 팀 전체에게 시달리느니 프레드리히에게 5분 시달리고 다른 사람들이 프레드리히를 볶아먹게 놔두는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건,
재취업한 첫주에 깨달은 지혜이다.
프레드리히는 이런걸로 주위사람들에게 달달 볶이는걸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프레드리히는 괜찮은 엔지니어이기는 하지만,
마케팅이나 PR을 하는게 더 적성에 맞을텐데…..
점심시간에 프레드리히랑 직원출입증을 찍고 나가려는데 로비에서 리셉션 직원이 날 붙잡았다.
“네?
저한테 소포가요?”
이상한 날이다. 포장은 평범한 갈색종이로 되어있었지만,
상자는 꽤 컸다.
프리드리히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받아주었다.
“오!
묵직한데. 저런, 독일어네?
나는 독일어 못읽는데.”
엄마가 독일계라서 이름은 독일식으로 지었는데도 정작 독일어는 전혀 못읽는 프리드리히기 송신자 주소를 보고 시무룩한다.
독일어란 말에 나도 포기했다.
“나도 독일어 못해.”
“근데 받는 주소는 정확히 여기고 네 이름도 맞아.
우리, 스시먹고 와서 풀어보자.”
나한테 온 소포를 같이 풀어보자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프레드리히의 넉살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러자.”
자기한테 온것도 아닌데 신나서 선물상자를 들고 나가는 프레드리히를 따라 회사근처에 있는 베트남사람들이 하는 스시가세에 들어갔다.
“이랏샤이마세!”
일본에서 10년간 살면서 센세이에게 진짜 에도니기리를 배웠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응우엔씨가 활기찬 인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연어.”
“연어하나랑 참치하나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구석에 있는 자리게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전남편이 보낸 카드를 재빨리 프레드리히에게 자진납세했다.
점심시간은 삼십분 뿐이니까,
빨리빨리.
“우후.”
프레드리히는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자기는 어때?”
“뭐가?”
“전남편말이야.
다시 잘 해 보고싶어?”
“……몰라.”
“알아,
알아. 우리 이드를 두고, 어디 그런짓을! 그래도 이 카드보면,
뭔가 나나나드경이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뉘앙스가 풍겨.”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뉘앙스를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니면 전남편은 싫다는 거야.”
“둘다.”
“아휴!”
결국 수다 떠느라 바빠서 선물을 열어볼 시간은 되지않았고, 그냥 들어왔다.
이혼할 때 프리넙에 따라,
전남편에게 생활비로 1년에 2십만유로씩 받고있지만,
지난 2년간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나백작가의 저택에서 나와서 작은 아파트를 구해 딸 나나나드와 이사를 해야했고,
내니를 더이상 쓸수가 없으니 혼자 집안일과 아이돌보는 일을 다 해야 했다.
나나나드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큰 집과,
아빠의 부재에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힘들었다. 프리넙때문에 이혼 자체는 매우 빨리 스무스하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동안 남편은 얼굴한번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이 바람피운 일에 대한 언급도,
사과도 없었다.
시댁사람들은 놀랄만큼 편안한 얼굴로 내게 잘 해주고,
크리스마스나 생일때 꼬박꼬박 카드와 선물도 보내오지만,
‘그 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시누이가, 진심으로 이렇게 되서 안타깝다,
내 동생이지만 정말 개자식이야라는 말을 했을때는 정말 엉엉 울뻔했다.
시누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프레드리히는 내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전시댁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전남편을 만났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리고 연말 휴가 끝나니 이걸 보냈다는 건 전남편이 다시 내게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라고 열변을 토했다.
“잘 생각해봐.
이건 기회일 수 있어.”
대저택에서 3교대로 일하는 내니와 직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던 5년.
엄청난 부자인 남편과 시댁의 사랑을 받으며 살던 그 시간들이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자기,
어차피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진짜 잘 생각해 봐.”
“으응……”
“어쩜 좋아!
자기 또 결혼하면 나 너무 서운할거 같은데.
나중에 놀러가도되?”
“당연하지.”
“오호호! 자기 최고!”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무렵 회사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회의가 잡혀서 결국 상자는 열어보지 못했다.
오후에 엄청나게 바빴다.
2시반에 무거운 상자와 꽃바구니를 이고지고 버스를 탔다.
근처 대학교에서 우르르 학생들이 버스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버스안이 붐빈다.
그나마 미리 타서 자리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가 나를 보고 뛰어온다.
“엄마!”
주변에는 아이들을 픽업하러온 엄마들과 내니들로 붐빈다.
아이는 잽싸게 뛰어와 나에게 안겼다.
“나나나드,
안녕.”
“안녕,
엄마.”
우리는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나나나드는 금방 불어로 말을 바꾸었다.
“어?
이 꽃이랑 상자,
뭐야?”
“아, 꽃은 아빠가…
상자는 누가 보냈어.”
“누가요?”
“아직 몰라.
독일어라서 읽을 수가 없었어.”
“내가 읽어볼까요?”
독일계 귀족인 할머니와 친한 나나나드는 일곱살에 불과하지만 독일어를 꽤 잘한다.
시어머니는 나나나드에게 반드시 독일어로만 말을 걸었고,
자연스럽게 나나나드도 할머니와는 독일어로만 대화했다.
“집에 가서.
너무 무겁다,
빨리 집에 가자.”
“네.”
우리는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꽃과 상자가 너무 무겁다.
어딜가든 운전기사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살때는 살이 찔까봐 일부러 저택에 있는 체육시설에서 운동을 해야 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걷는 것만도 저절로 운동이 된다.
“음,
주소는 북부대공국이야.
대공님이 보내신거 아닐까?”
“뭐?”
“열어보자.
엄마, 가위!”
“어? 어어.”
딸의 재촉에 나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대한 티파니 상자가 나타나자 딸은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
빨리!”
“어,
그래.”
상자를 열자 나타난 것은 체스세트였다.
“어?
뭐야? 보석이 아니네?”
딸은 체스세트를 유심히 보더니,
활짝 웃었다.
“그래도,
진짜 금이겠지?”
“잘 모르겠어.”
“엄마,
구글 검색!”
“아니면 뭐 어떠니.
예쁘잖아”
“안된다니까! 진짜 금인지 알고 싶어.”
나는 핸드폰에서 구글을 열어 ‘티파니 체스 세트’라고 검색어를 쳤다.
“24k GOLD VERMEIL? 이게 무슨 뜻이지?”
“은으로 만든 뒤에,
순금을 그위에 씌었다는 뜻이야”
“그럼 이거 그냥 다 은이네?”
“그렇지.”
“뭐야! 난 다 금이라는 줄.”
“은이면 어때.
너무 예쁘다.”
“카드엔 뭐라고 쓰여있어요?
독일어면……”
“아, 불어야. 괜찮아.”
깨끗한 불어 필기체로, 내용은 간단했다.
‘친애하는 이드,
저는 1월에 유럽에 있을 겁니다.
언제 체스 한판 하시겠어요?
연락주세요.’
그리고 적혀져있는 이메일.
의외로 끝이 지메일로 끝나는,
평범한 이메일이었다.
“뭐야!
무거워서 골드바라도 잔뜩 들어있을 줄……
대공전하는 엄청난 부자라고,
고모가 그랬는데”
딸은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예쁜 체스말들을 주물럭거리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대공이랑 만나서 수영장 몇번 같이 가더니, 정작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아이는 이미 고모를 들쑤셔서 대공에 대해 조사를 끝낸 모양이다.
“예쁘긴 하네……”
“나나나드,
손씻고 밥먹자.”
“네……”
지나가는 말로 체스두는 걸 좋아한다고 한 내 말을 기억한 대공이 보낸 선물을 받고 나니, 감사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드에 적힌 지메일로 인사를 보냈는데, 대공은 뜻밖에 함께 체스를 두러 '나'도시에 오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을 잡았다. 그가 들어오자,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인 작은 커피숍이 꽉차는 느낌이다.
나도 이제 얼굴을 아는 경호원 두명이 문앞에 서고,
얼굴을 모르는 두명이 따라 들어왔다.
그는 주문을 받는 줄에 나와 함께섰다.
사람들이 그를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입고 걸친 물건중에 상표가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숨길수없는 부티가 흘렀다.
남자 평균키가
180이라는 이곳에서도 190가량인 대공은 더 큰 편이기도 하고.
오후4시반이라 대부분의 남자들이 수염이 다시 거뭇거뭇 나있는 것과 달리,
그는 면도를 한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깔끔한 얼굴에 희미하게 고급스러운 콜롱향기가 났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과 엄청 비싸보이는 시계, 깨끗한 구두. 발끝까지 그는 완벽했다.
그는 전혀 독일어억양이 없는,
완벽한 불어로 직원에게 직접 주문했다. 대공국은 독어와 불어를 공용어로 쓴다던데,
그는 둘 다 완벽하게 구사한다.
직원들과는 주로 독어로 이야기하던데,
나는 독일어를 전혀 못하므로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불어를 사용했다.
“뭐 드시겠어요?”
“카푸치노요.”
그는 카푸치노 두 잔을 주문하고,
계산 후 나와 함께 빈자리로 향했다.
내가 안쪽에 앉고 그는 바깥쪽에 나를 마주보고 앉았다.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힐끗거리는 것도,
그의 벌어진 넓은 어깨로 곧 가려져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 들어온 경호원 둘도 커피를 주문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바로 뒤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프레드리히는 그가 나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했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뜨거운 열정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른 자세로 앉아 차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자주 오나요?”
“네. 일주일에 한번정도?
나나나드가 여기 핫초콜렛을 좋아해서요.”
“귀엽네요. 핫초콜렛이라……
저도, 어릴때는 자주 마셨지요.”
몇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가게 주인인 마리아가 직접 카푸치노 두잔을 들고 왔다.
“이드,
잘 지냈어?”
“네,
마리아. 안녕하세요?”
스페인과 프랑스의 혼혈인 마리아는 카푸치노를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앉아있는데도 서서 있는 마리아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내가 대공을 소개시켜주길 바라는게 분명한 제스쳐에,
나는 입을 열었다.
“헨리,
이 분은 마리아에요. 여기 커피숍주인이죠.”
헨리는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앙리(헨리의 불어식 발음)?”
“네. 안녕하세요, 마리아.”
“흠, 이근처에서는 못보던 분인데?
관광객? 비지니스?”
“예, 이곳은 주로 사업차 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비지니스만은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좋은 시간 보네요.”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내에 헨리가 일로 나를 만나는 것은 아닌 걸 알아낸 마리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저,
체스세트 선물 감사했습니다.
여기로 가져오기는 했지만…
커피숍에서 비치된 체스세트로 두는게 어떨까요.”
“그러지요”
체스 한판 두자고 동네 커피숍까지 찾아 온 사람치고는 대공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보여, 가볍게 던졌다.
“내기하실래요?
이긴 사람 원하는거 하나 들어주기”
“예”
십이만오천불짜리 순은 체스세트를 동네 커피숍에서 꺼내는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듯했다.
헨리는 바로 알아듣고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 마리아에게서 체스세트를 빌려왔다.
그와 나는 체스를 두고,
카푸치노를 마시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뉴욕에 갔다가,
프랑스남부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는 어머니를 뵙고,
독일에 비지니스로 들렸다가(체스세트도 독일에서 사서 내가 일하는 곳으로 보냈다고한다), 다시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온 여정을 간단하게 묘사했다.
나는 시계추처럼 집,
나나나드의 학교,
직장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을 묘사했다.
체스 첫판은 내가 이겼다.
“제가 졌군요. 원하시는 걸 말해 보세요.”
하늘에 떠있는 달을 따달라고 하면 따줄수도 있을것같은 아우라를 지닌 남자였지만,
나는 그냥 웃었다.
“이곳에서 몇일동안 있으신다고 하셨죠?
내일, 여기서 같은 시간에 만나요.
오늘은 제가 운이 좋았던것 같아요.”
“그것뿐입니까?”
“네.”
잠깐 침묵하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 내일은 내니 불러주실 필요없어요.
나나나드도 함께 와서,
핫초코렛도 마시고,
숙제도 할수있고.”
그는 어쩐지,
내 말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이도 함께,
내일 뵙겠습니다.”
그는 담백하게 말하고,
체스세트를 다시 잘 모아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는 체스세트를 마리에게 돌려주고,
카운터 앞에 관광객들용으로 놓여진 팁 단지에 100유로짜리 지폐를 몇개 떨어뜨린 후,
나와 함께 커피숍에서 나왔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경호원들이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아저씨!”
나나나드는 헨리를 보고 달려들었다.
나나나드가 독일어로 빠르게 뭐라고 했고,
헨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살짝, 눈가의 주름이 깊어지면서 표정이 밝게 변하는 모습이 멋져보였다.
두 사람은 독일어로 뭐라고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내니가 그를 보고 불어로 인사했다.
“전하.”
“부인.
감사합니다.”
나나나드가 빠르게 뭐라고 독일어로 말하자,
이번에는 내니와 대공이 동시에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이드, 그럼 내일 뵙지요.”
“안녕히 가세요.”
그는 오늘 만났을 때 처럼 비쥬를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올리더니,
손등에 키스한후 사라졌다.
“내일?
내일이라고?”
기계적으로 부엌을 치우는 내옆에서 이것저것 캐묻던 나나나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도대체! 왜! 왜 내니를 거절한 건데!”
“아,
독일어로 한 이야기가 그거였어?
내니가 얼마나 비싼데?
나랑 체스 한판 두려고 내니까지 또 불러달라고 하긴 좀 그래.”
“엄마.
데이트 아냐?
애말고 남자를 봐야지.”
“데이트아니야.”
“아후! 답답! 내니 몇푼이나 한다고……”
“그렇게 말하지마.”
“대공하고 있을때는, 대공에게 집중해야지.
애가 있으면,
어, 시선이 흐…
흝어진단말이야!”
“와ㅡ 그거 어려운 단어인데,
대단한걸?”
“내 어휘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데이트면 남자에게 집중해야지,
나를 왜 데려가.”
“데이트 아니라니까!
너도 핫초코렛 마시면서 옆에서 숙제하면 되지,
뭘.”
“답답하다 진짜.
엄마 이럴땐,
지인~~~짜 답답해.”
딸은 고개를 저으며 애착인형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대공은 이미 같은 자리에 체스판까지 깔아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마시겠어요?”
“카푸치노요.”
“나나나드는?”
“핫초코렛주세요.”
마리아가 카푸치노 두잔과 핫초코렛 한 잔을 든 쟁반을 가지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앙리?”
“네, 안녕하세요.”
“파리에서 오셨지요? 여기서 좀 오래 지내실거면 내가 아주 좋은 부동산 중개인을 아는데.
혹시 집구하나 해서.”
“아, 지금은 호텔에 있습니다.
집은……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요? 하긴 파리면 여기서 기차타고 금방이지.”
“아, 저는 파리에서 온게 아닙니다.”
“그래요? 어디 분일까? 악센트는 완전히 파리사람같은데?
우리 엄마가,
파리지앙이었지.”
“그러세요? 저희 어머니도,
프랑스에서 자랐습니다.”
“어쩐지! 불어가 너무 완벽하더라.
그럼, 어머니는 프랑스분이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북부대공국 출신입니다.”
“그렇구나. 혹시 마음 바뀌면 이야기해요. 우리 형부가 ‘나’도시에서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우명한 부동산 중개인이거든”
“예. 감사합니다.”
이제 대공이 북부대공국과 프랑스의 혼혈임을 알아낸 마리는 의기양양하게 부엌으로 사라졌다.
“어머니가 프랑스분이셨나요?”
“어머니는 프랑스인으로, 음, '여겨집니다'. 할아버지가 유서깊은 프랑스귀족집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조부모님 4분의 국적이 다 달랐습니다.
러시아, 북부대공국, 독일과 프랑스.외할머니가 러시아인 이었지만,
러시아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볼셰비키혁명때, 러시아의 황족들과 귀족들은 거의 다 도망나왔거든요. 어머니가 태어난 곳은 스위스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거의 프랑스에서 다니셨고요. 어머니의 양쪽 조부모님이 가진 프랑스와 러시아의 영지는, 혁명으로 소유권을 전부 잃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상속권이 있던 독일의 토지도 독일정부와 긴 소송을 했지만, 결국 폐소했고요. 당시 관례대로, 신세를 질만한 형편이 나은 친척의 도움으로 생활했지요. 이탈리아 백작과 결혼한 큰이모님이 도와주셔서 어머니는 다행히 프랑스의 기숙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당시 대공자였던 아버지와 약혼하셨습니다. 가신들이 반대를 꽤 했는데 아버지가 밀어붙였다고 하더군요. 결혼 후에는 아버지와 북부대공국에 사셨지만 여행을 많이 다니셨고……
지금은 프랑스나 스페인 북부에 주로 계세요.
나이가 드니 대공국은 너무 춥다고 그러시면서.”
“그러시구나.”
“이드양은, 추위를 타시나요?”
“음, 저는 한국에서 자라서……
왠만한 추위는 괜찮아요.
한국도 추울땐 굉장히 추워요.”
“남한은 어느 정도 추운가요?”
“마이너스10-15도정도?”
“춥군요. 그 정도 추위도 상관없습니까?”
"추운건 상관없어요. 전 더위를 더 타니까"
더위를 더 탄다는 말에 대공은 왠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북한은 더 춥다고 하던데요.
가볼일은 평생없겠지만.”
“저는 가봤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절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북한에는 무,
무슨일로……?”
“호기심에…… 예전에, 러시아 대사를 따라 나선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벌써 20년도 넘은 일입니다."
"헨리, 의외네요? 경호원들이 점검한 동선에서 절대 안벗어나는 편이 안전하다면서요"
헨리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눈빛이 은밀해진다.
"저도 어릴때 몇번, 미친짓을 한적이 있습니다, 이드"
"그래요?"
"저는 어릴때 납치되었던 적이 있어서, 그 후에는 대공성에서 홈스쿨링을 받으며 컸습니다. 제 얼굴은 서른이 넘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공위를 계승한 뒤에야 공식초상화로 처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정말 미친 짓을 몇번...... 가명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적도 있고, 북한에 가짜 신분으로 가보기도 했고요"
"몇번이나 갔어요?"
"한 번. 별로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요.”
“신기하다…… 저는, 거길 못가거든요.
한국인이라.”
“음? 프랑스 여권이 있지 않나요?”
“아직이요. 영주권만 있어요.
한국인은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아서,
유로여권을 가지게 되면 한국여권을 버려야해서.”
“한국여권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 너무 많죠.
일단 병원가는거요.
의료시스템.”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헨리는 그날,
다시 체스게임에 졌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처럼 바로 일어나지 않고 커피를 다시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헨리는 어디서도,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북한여행기, 홈스쿨링을 받다가 가짜 서류를 만들어서 미국 정부의 협조하에 몰래 미국에서 유학한 이야기. 미국에서 경호원들이 형제나 사촌, 친구들로 위장하고 따라와서 함께 지냈던 이야기. 경호원들이 점검해 놓은 동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대공이 되기전, 이 사람도 젊고 철없던 때가 있었구나.
나도 내 이야기를 했다. 헨리의 모험이야기에 비하면 평범하고, 거의 시시한 인생이기는 하지만. 내가 한국여권을 유지하는 이유, 다니는 직장이야기. 그리고……
“아,
나나나드, 미안해.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됬네.”
나나나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전 괜찮아요.
쿠키 사주셔서 고마워요,
헨리”
“이제 집에 가자.”
“잠깐만.”
헨리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제가 졌는데,
바라는 것은 없나요?”
나나나드가 당당하게 외쳤다.
“전 아메리칸 돌이랑 샤워실놀이 세트를 가지고 싶어요!”
대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활짝 웃으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같다.
훨씬 젊어보이고.
“나나나드!”
“하하하, 나나나드, 아메리칸 돌 좋아하니?”
“네!”
“그래, 알았다. 네 생일에 맞춰서 가져올까? 이드, 괜찮습니까”
"그, 그러세요"
“우와! 감사합니다.”
“자, 이드, 원하는게 뭐지요?”
눈이 마주쳤다.
나나나드때문에 시원하게 웃고 난 그의 표정은 어제보다 훨씬 풀려있었다.
“바쁘신 분인거,
알아요. 언젠가 이 근처를 지나갈때,
다시 들려서 오늘처럼 체스도 두고 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내일 어떠세요?”
“네?”
아니, 잠깐 지나가는 거 아니였어?
이곳에 몇일이나 있는거지?
“내일이라구요?”
“예.
저는 내일도 여기 있을 겁니다.”
“그러면…… 내일, 여기서 같은 시간에 뵐까요?”
“그러지요”
그는 체스세트를 다시 잘 모아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는 체스세트를 마리아에게 돌려주고,
카운터 앞에 관광객들용으로 놓여진 팁 단지에 100유로짜리 지폐를 우수수 떨어뜨린 후,
나와 함께 커피숍에서 나왔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경호원들이 어제처럼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우리는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 출입구 앞에서 헤어졌다.
세번째 날도,
똑같았다. 나나나드는 옆에서 숙제를 하고,
색칠을 하고,
낙서를 하면서 놀고,
우리는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체스를 두었다.
그러나, 세번째 날은 첫 이틀과 완전히 달랐다.
그동안 그는 체스두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잡담을 할 사이없이 집중했는데도,
세번째 날은 내가 졌다.
“졌어요!”
“으음.”
“와, 완전히 졌어요.
잘 두시네요.
그동안 봐주신거죠!”
“아닙니다. 정말 어렵게 이겼습니다.”
“거짓말!”
나는 깔깔 웃었다.
“자,
원하는 걸 말해보세요.”
“…… 내일,
디너를 함께 할수있으면 영광이겠습니다.”
순간, 내 눈길이 자연히 나나나드에게로 옮겨갔다.
대공이 그걸 알아채고 얼른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제가 내니를……”
“엄마, 완전 좋아!
오렌지부인을 다시 만나고 싶었어!”
“얘는,
오렌지부인이 다시 시간이 되실지 모르……”
“오렌지부인은 저의 유모였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지금은, 저의 직원으로 함께 여행중입니다.
부탁하면 틀림없이 들어주실거에요.”
“하, 하지만.”
“하지만?”
안되는 이유가 100개는 있을 건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나나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엄마,
입을 옷이 없구나?”
“어?”
“그렇군요.”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부분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내일 3시에 나나나드의 학교에서 만나서,
쇼핑을 함께 하시는게 어떻습니까?”
“어…… 그럴까요?”
그는 체스세트를 다시 잘 모아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는 체스세트를 마리아에게 돌려주고,
카운터 앞에 관광객들용으로 놓여진 팁 단지에 100유로짜리 지폐 몇개를 또 우수수 떨어뜨린 후,
나와 함께 커피숍에서 나왔다. 커피숍에서 나가는 길에 눈이 마주친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경호원들이 어제처럼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나나나드가 자기랑 비슷하게 생긴 아메리칸돌이 샤워실세트안에서 노는 걸 유튜브에서 봤다면서 떠드는 걸 들으며 우리는 조용히 걸었다.
우리는 내가 사는 아파츠 건물 출입구 앞에서 헤어졌다.
“그 때 뵙겠습니다.
좋은 밤….”
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내 손을 잡아 올려 키스했다.
절대 입술이 닿지 않는,
완벽한 인사.
“되시길.”
“헨리! 잘가요! 경호원아저씨들도 안녕!”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나는 나나나드를 흘겨보았다.
“입을 옷이 없다고?”
나나나드가 깔깔 웃었다.
“내일 데이트 망해도 새옷은 챙겨야지.”
“어린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농담이야. 내일 데이트는 절대 망하면 안되는거야,
엄마.”
“데이트는 무슨.”
“대공전하 표정 안 봤어요?
내일, 디너를 함께 할수있으면 영광이겠습니다아~”
대공의 파리식 억양을 흉내내며 나나나드는 깔깔거렸다.
“어휴,
내가 말을 말지.”
“엄마 빨리 자자!
내일 다크서클 있으면 안되는데!”
“네가 다크서클이 어딨다고…”
“나 말고,
엄마 말이야!
한국 할머니가 보내준 마스크팩 어디있어!
붙이고 자!”
검은 색에 가까운 진한 회색의 롤스로이스 두대는 온갖 호화로운 차량들이 즐비한 나나나드의 학교 주차장에서도 튀었다.
그중에 제일 튀는 건 차에서 내려서 손목시계를 보고 있는 대공이었다.
대공은 상표가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색 모직 바지와 코트 차림이었는데도,
여전히 숨길수없는 부티가 줄줄 흘렀다.
롤스로이스옆에 서서 있으니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픽업하러 온 여자들이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들은 멈춰서서 노골적으로 그를 관찰했다.
“안녕하세요 헨리!”
헨리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나나나드는 바로 차안 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드,
안녕하세요. 타시지요.”
“네.”
오렌지부인과 나나나드,
경호원중 일부를 내 아파트에 내려놓은 다음에,
내가 사는 ‘나’도시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향했다.
“위로 가시지요.”
우리는 백화점 꼭대기층으로 올라갔다.
프라이빗 쇼핑이 가능한 공간에,
롱샴부인이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온건 거의 4년전이었는데도,
부인은 마치 나를 지난주에 본것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이드”
“엘리자베타”
우리는 볼키스를 교환하고,
자리에 앉았다.
롱샴부인이 헨리에게 물었다.
“디너는 장소가 스시쿄토 맞지요?”
“네.”
“먼저 드레스부터 볼까요?”
모델들이 나와서 드레스를 입고 한 바퀴 돈 다음,
사라졌다.
“어느 드레스가 마음에 드나요?”
“아,
3번 4번,
그리고 7번…..”
그의 눈짓에 드레스룸이 바로 세팅되었고,
나는 들어가서 옷을 입어보았다.
사실 7번이 제일 마음에 들었지만,
가격표를 보고 내려놓았다.
1만 9천 유로.
3번은 그거 반값에 매우 무난한 디자인이니까,
이걸로 해야지.
“이걸로 할께요.”
나는 3번 드레스를 입어보고 나와서 말했다.
그의 눈썹뼈가 살짝 올라갔다.
“그것도 물론 아주 멋집니다만,
다른 것은 입어보지도 않고요?”
“전, 이것이 좋아요.”
“그러시지요. 자, 신발을 보실까요.”
나는 신발이 스무켤레정도 올려진 트레이에서 무난한 검은색 미들힐을 집어들었다.
신어보니 딱 맞는다.
엘리자베타는 아직도 내 사이즈를 아는구나.
“이게 좋아요.”
“그렇습니까……?”
그는 다시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다.
아니, 내가 뭘 고를때마다 왜 그렇게 놀라는데?
“자,
악세사리를……”
“악세사리는 됬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8천유로,
신발은 가격표는 못봤지만 천오백에서 이천유로정도 할거다.
이것만도 만유로.
대공은 틀림없이 악세사리도 전부 1층에있는 보석상에서 올려왔을테니,
금 팔찌하나만 사도 십만유로는 될거다.
밥한번 먹자고 십만유로나 들여 날 치장해줄 필요는 없다.
엘리자베타가 끼어들었다.
“어머,
이드, 주얼리 모델들이 이미 대기중이에요.”
“아,
그게……”
“아무것도 마음에 안드시면 고르지 않아도 되요,
이드. 잠깐 보고가요,
네? 디너까진 아직 시간도 있겠지요?
헨리?”
“그럼요, 엘리자베타.”
아니, 롱샴부인은 헨리의 퍼스트네임은 어떻게 아는거지?
원래 아는 사이인가?
나는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롱샴부인이 손짓을 하자 보석을 주렁주렁 걸친 모델들이 걸어나왔다. 깡마른 동유럽계 소녀들의 목, 귀, 팔에는 1층의 보석상들에게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 온갖 보석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맙소사,
진짜 불가리잖아?
저 노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그라프같은데!
보석들이 쭉쭉 눈앞을 스쳐갔다.
반짝임이 눈부셨다.
“급히 준비하느라 매장에 있는 걸로만 가져온거라……
그다지 인상깊은 작품은 없는것같군요.”
내가 별 반응이 없자 헨리가 중얼거렸다.
사실 나는 인상깊지 않아서가 아니라 놀라서 얼어붙은 건데.
롱샴부인은 헨리의 말에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성품밖에 없으니, 그러실만도 하지요.
실망스러우시겠어요,
이를 어쩌나"
“실망은요. 다 예쁜걸요……”
나도 모르게,
커다란 에메랄드가 달린,
쵸커에 가까운 짧은 다이아몬드 두줄로 만들어진 목걸이에 눈길이 갔다.
헨리는 그걸 재빨리 알아채고 그 상자에 손을 뻗었다.
“이게 마음에 드나요?
해보시겠어요?”
“그거 예쁘죠!
헨리, 그 목걸이,
잠금쇠가 좀 복잡해요.
헨리가 해주세요.”
“그러지요.”
헨리는 굵은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여 목걸이를 내 목에 둘렀다.
살짝, 손가락이 내 목에 스쳤다.
엘리자베타가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예쁘다!
불가리에요. 예쁘죠?”
“네.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이드씨가 입고있는 드레스랑도 톤이 맞네요.”
거울 속에 보이는,
거대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하고 있는 나자신이 낮설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보석을 마지막으로 본건,
나나나의 집안 귀금속 컬렉션을 구경할때?
런던에서 갔을 때 박물관에 구경한 것들?
“자,
이 팔찌 어떄요?
세트는 아니지만 같이 하면 우아할것같은데.
헨리?”
“예.”
헨리는 큰 덩치에 비해 놀랠만큼 민첩한 동작으로 팔찌를 받았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음,
음, 머리를 제가 묶어 볼게요.”
엘리자베타는 뒤로 가더니,
내 머리칼을 쥐고 순식간에 로우번을 만들더니,
진열되있는 머리끈중에서 연한 녹색보석이 달랑거리는 것으로 재빨리 마무리했다. 내 머리를 다시 만져주는 척 하면서, 새상품을 머리카락에 감아버리다니, 이대로 걸치고 나가면 이것도 계산해야 하잖아! 이런 선수같으니!
“어머!
너무 너무 예쁘다!
이드, 자, 일어나서 한바퀴 돌아봐요.
신발은 편해요?”
“네, 네.”
“귀걸이도 볼래요?”
“아니요.
헨리, 저 배고파요.
어서 식당으로 가요.”
엘리자베타의 세일즈 실력을 아는 나는,
헨리가 더 돈을 쓰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럴까요?”
내가 배고프다는 말에 헨리도 일어났다.
나도 핸드백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럼 벗어놓으신건 제가 정리해서 회사로 보낼게요!
다음엔 백도 보러 오세요!”
“이드,
그러고보니, 가방을 고르지 않았네요?”
“네에?
필요없어요.
지금 핸드백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후다닥 방을 나왔고,
헨리는 재빨리 따라왔다.
헨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이드랑 있으면 정말 놀랄 일 투성이군요.”
“네? 뭐가요?”
“쇼핑이요.”
이 양반이!
이 목걸이만도 2백만유로는 하겠구만.
가격이 아니라,
시간이 적게 들어서 놀랐다고?
“이런 쇼핑이면 매일도 하겠어요…….”
허허, 진짜 큰일날 양반이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2미터가 넘는 거인 대머리 경호원 헨리가 얼른 엘리베이터문을 잡아주었다.
대공이 독일어로 감사인사를 했다.
“당케 쇤,
헨리.”
아,
이 사람 이름도 헨리구나.
나도 따라했다.
“ 당케 쇤,
헨리.”
대머리 경호원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내려왔다.
북부대공국사람들은 다 저러나……?
밥은 맛있었다.
스시를 오랜만에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렀다.
된장국도 풍미가 깊은,
제대로 끓인 돈지루였다.
후식으로 나온 사과셔벗에 녹차를 마시면서,
아주 행복했다.
오랜만에 잘 지은 밥을 먹었다!
녹차도 완전 고급이고.
“아,
맛있다. 잘먹었어요.”
“맛있었다니 기쁘네요.”
그는 행복해보였다.
그가 행복해 보여서,
나도 좋았다.
오랜만에 받는 남자의 다정한 눈길도 좋았고,
맛있는 밥을 잔뜩 먹게되어서 좋았고,
이 어마어마한 목걸이도 실은 너무 좋았다.
팔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도 너무 예뻤다.
이 팔찌도 오십만유로는 할 거 같은데.
아아, 모르겠다. 스시와 함께 마신 화이트와인때문인지,
술기운이 살짝 올랐다.
“커피는,
됬어요. 녹차, 감사합니다. 진짜 녹차는 오랜만에 마셔보네요.”
“진짜 녹차?
가짜 녹차도 있나요?”
“슈퍼마켓에서 파는 녹차는 이상한 맛이 나요.
헨리, 슈퍼마켓녹차 마셔본적있어요?”
“아니오”
“하하! 그래서 모르는구나.
하여튼, 그런게 있어요. 나중에 하나 줄게요.”
“예. 감사합니다”
저녁이 끝나자 나는 일어섰다.
나나나드는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었지만,
피곤했다. 집에 가고 싶었다.
헨리도 별말없이 바로 따라왔다.
경호원들도 재빨리 따라붙었다.
롤스로이스가 아파트 앞에 정차하자,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뭘요.
참, 핸드백?”
“맞다.”
나는 얼른 뒤로 돌아 핸드백을 쥐었다.
나를 에스코트한 손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내 팔을 살짝 받치고 있었다.
헨리는 직접 엘리베이터를 잡아 나를 먼저 태웠다.
경호원들이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 서서 등을 돌리는 것이 닫히는 문 사이로 보였다.
6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나는 내 팔이 올려진 헨리의 팔뚝만 쳐다 보고 있었다. 헨리는 팔뚝이 참 단단하구나......
열쇠로 문을 열자,
오렌지부인이 핸드백을 들고 조용히 나왔다.
“부인,
아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오세요.
나나나드는, 잠들었어요. 이드, 좋은 시간 보냈어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오렌지 부인은 먼저 조용히 사라졌다.
“저기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진심이었다. 이 순간 만큼은,
진심이었다. 하긴 모든 진심이 그렇지.
언젠가는 변하겠지만,
이 순간만은 진심.
“밥도 너무 맛있고,
즐거웠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이드”
그는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 일찍 여기를 떠납니다만,
열흘쯤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다시 뵐수있을까요?”
“그럼요.
연락하세요.”
“그럼……”
그는 내 손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잡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자,
허전했다.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어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방범걸쇠를 걸어요.”
나는 돌아서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순순히 걸쇠까지 걸었다.
밖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가만히 손잡이를 밖에서 틀어 살짝 기척을 내더니,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너무 피곤하다.
오랜만에 탄수화물을 잔뜩 먹었더니 배가 부르고 졸린다.
나는 얼른 나나나드를 확인했다.
아이는 애착인형을 안고 잘 자고 있었다.
목걸이와 팔찌를 벗어 화장대 깊숙이 넣어 두고,
화장을 지우고 침대에 누웠다.
금방 잠이 들었다.
나와 나나나드 둘다 늦잠을 잤다.
9시가 거의 다 되서 일어나니,
모르는 번호로 30분전에 왓츠앱 메세지가 와 있었다.
“어제 시간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2월13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
대공이었다. 비행기 타기 직전에 보낸것이 분명했다.
딱 열흘 남았다.
월요일에 회사로 롱샴부인이 보낸 짐이 도착했다.
내가 탈의실에 벗어놓은 옷들이었다.
프레드리히는 주소를 보고 활짝 웃었다.
“자기,
쇼핑했구나?”
“응.”
“나나나경이랑?”
“아니.”
“뭐??”
놀래서 눈이 커지는 프레드리히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쉿!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점심때……
말해줄게. 지금은 조용히……
비밀이야.”
‘비밀’이라는 단어처럼 프레드리히를 설득할 수 있는 마법은 없다.
그는 소년같이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ㅡ오케이……”
회사의 대주주이자 프로젝트를 발주한 독일계은행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날이라 매니저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 프로젝트,
어떨거 같아?”
“나는 된다고 봐,
돈은 별로 안남겠지만 랜드마크가 될거니까,
장기적으로는……”
“자, 시작합시다.”
사장님이 자리에 앉아,
회의실 불이 꺼지면서 긴장한 표정의 매니저가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한시간 넘게 발표와 맹렬한 토론이 이어졌다.
“커피한잔 마시고 다시 합시다.”
오전9시 정각에 시작했는데,
벌써 10시45분이었다. 간단한 음식과 커피,
차 종류가 다양하게 준비되어있었다.
“어,
마담 나?”
“사장님.”
“이제는… 마드모아젤 김이라고 불러야되나?”
“에이 예전처럼 그냥 이드라고 부르세요.”
“그래도 되?”
“네. 장-바티스타.”
사장인 장-바티스타는 대학 동문이라고 항상 내게 잘 해주었다.
재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닐때 제일 먼저 연락이 온것도 여기였다.
그는 40대 중후반의,
185cm정도의 키에 황소같은 덩치를 가진 스위스와 프랑스의 혼혈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엔지니어이고 머리도 비상한 사람이었다. 8년전보다 살이 조금 쪘지만,
원래 덩치가 워낙 큰 사람이라 별로 뚱뚱해보이지는 않는다.
“괜찮아요?
힘들면 이야기해요,
끝까지 자리지킬필요는 없는데.”
“아니에요. 많이 배웠어요.”
“그래요? 이드는 참,
그런 자세가 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은행에서 보낸,
젊고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독일남자가 다가왔다.
금발에 잘 생긴편.
어려보였다. 유럽인들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꽤 오래살았는데도.
“장-바티스타”
“어,
오토.”
사장은 오토가 커피머신을 사용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으나,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ㅡ 어디서 뵌것같은데?
혹시, 나나나드경의 결혼식에서?”
“맞아요.”
“저는 오토 로스칠드라고 합니다.”
“김이드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발주한 은행에서 오신 분이죠?”
“예,
그렇습니다.”
굳이 내가 나나나의 전부인인걸 사장앞에서 확인할건 뭐람……
“저,
제 명함입니다.
다음주에 시간되시나요?”
장-바티스타는 젊은 독일인의 느닷없는 폭주에 놀라 끼어들려고했으나,
내가 막았다.
“제가,
연락드릴게요.”
“그래요. 기다릴게요.”
독일인은 윙크를 던지고 물러갔다.
“황당하네.”
장-바티스타가 나를 구석으로 몰더니 속삭였다.
“오토는,
어리지만 은행 대주주의 아들이라 따라온거지,
뭐 특별히 중요한 인물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드,
맘에 안들면 까.”
“프로젝트 발주처에서 온 사람이라도요?”
“상관없어. 까. 정 귀찮게 하면 나랑 사귄다고 하던가.”
“장-바티스타, 유부남이잖아요?”
“작년에 이혼했어.”
“저런, 전혀 몰랐어요.
유감이에요……”
“괜찮아. 차라리 후련해.
애들도 다 컸고,
뭐.”
“그렇군요.”
“농담아니야.
오토 쟤,
스물 다섯인가?
여섯? 어리지만 소문이 별로 안 좋아.”
“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2월13일 오후,
대공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나나나드 학교 주자창에서 뵐까요?’
나는 얼른 그렇게 하자고 답을 보내고 퇴근준비를 했다.
“이드야!”
“나나나?”
“너, 왜 전화 안받아!
꽃바구니, 안 받았어?”
“받았어.”
“그런데? 아니, 오토?”
회사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남편 나나나와 오토는,
동시에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나.
오랜만이다?”
“넌 여기서 뭐해?”
“우리 은행이 장-바티스타네 회사에 건물 하나 발주했어.”
“그랬구나.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이드야, 나랑 잠깐 이야기좀해.”
“이드가 너랑 할 이야기가 어디있어?
이혼했잖아.”
“뭐야?”
“이든느 나랑 지금 회의실에 내려오는 길이야.
나랑 나갈건데.”
“뭐?”
“아니,잠깐, 오토. 난 같이 나가겠다고 한거 아닌데!”
나나나는 기세등등해졌다.
“아니라잖아?
나랑 할 이야기가 있어.”
“아닌데?
꽃바구니 받았는데 전화 안받았으면,
아닐텐데?”
“이봐, 오토! 빠져.”
“내가 왜?
네가 빠져.”
“좀! 둘다 여기서 왜이래요!”
“워워워~
둘 다 진정하시고.”
장-바티스타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끼어들었다.
“나나나,
오토, 우리 회사로비에서 소란피우지마.”
나나나가 탁,
내 손목을 쥐었다.
“장-바티스타, 맞는 말이야.
자, 그럼 오늘은 이만.”
그러자 오토가 내 다른 손목을 쥐었다.
“네가 왜?”
“야, 난 이여자 남편이었어!”
“이었겠지?
이었다는 과거시제아냐?
지금은 아니지?”
“이 새끼가……”
평생 부유하게 살아왔고,
왠만해서는 안된다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는 젊은 두 남자는 팽팽하게 맞섰다.
“둘 다 당장 그만두지못해!
이드는… 이드는 나랑 만나는 중이야!”
장-바티스타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로비에 있는 모든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진짜?”
“진짜야, 이드?”
나는 가만히 있었다. 사장이 나를 곤란한 처지에서 구해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어제 고백했어.
그렇지? 이드? 이거, 오늘 같이 마시기로 했어.
그렇지?”
그는 와인병을 보여주며 말했다.
“흥,
사장이랑 썸타는 중이였어?
그래서 연락이 없었군.”
나나나가 먼저 손목을 놓았다.
“알았어.
하루됬다고? 이드, 마음 바뀌면 연락해.”
오토는 쌩 돌아서서 걸어갔다.
“하루됬다,
라?”
장-바티스타가 크게 고래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
“그럼 뭐,
아직 관계가 확실해 진건 아니네?”
“오늘 이거 같이 마시는 거부터 시작해야지.”
“흠.”
오토는 내 손목을 놓고,
빠르게 장-바티스타가 들고 있는 병을 훓었다.
“몽라셰. 나쁘지않군. 이드, 저도 와인좋아해요. 연락해요!”
“네……”
몽라셰라면 그저그런 빈티지라도 2,3천유로는 할텐데,
오토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오토도 굉장한 부자집도련님인게 분명하다.
“감사합니다.”
장-바티스타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었다.
“뭘.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런데 이드.”
“네?”
“이거 같이 마실래?
근처에 코키지 내고 갈수있는 바를 아는데.”
몽라셰는 나도 무척 좋아하는 와인이었지만,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으니 할수없지.
“제가 무척 좋아하는 와인인데,
다음에……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알았어.”
사장은 순순히 물러났다.
좋은 사람이다.
몇년만에 느닷없이 전화해서 직장에 복귀해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선선히 들어준것도 고맙고.
“데려다 줄까?”
“아, 아니오. 버스타고 갈게요.”
“딸 학교까지만. 어차피 가는 방향이야.”
“그, 그럼 부탁드려요.”
나나나와 오토에게 시달렸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냥 포기했다.
버스안에서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시달리기도 싫었고.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갈 수 있으니까.
차안에서 사장은 말이 없다가,
갑자기 와인병을 내게 건냈다.
“자.”
“네?”
“가져.”
“예?”
“가지고 있어.
시간 될 때 가져와,
같이 마시게.
아니, 혼자 다 마셔버려도 되.”
“어……”
“다 왔다.”
“아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자 사장은 사라졌다.
나는 사장의 차가 사라지자 집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몽라셰 레이블이 보이지 않게 병을 돌려서 옆구리에 끼고.
혹시 누가 이 병의 가치를 알아보고 소매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서.
“엄마!”
나나나드와 오렌지부인이 나를 웃으면서 맞아 주었다.
대공이 부엌에서 뭔가 하고 있었는지,
걷어올린 드레스셔츠 소매를 다시 내리며 나왔다. 주름없이 잘 관리된 질좋은 회색 모직조끼가 그의 넓은 가슴위에서 팽팽하게 퍼지는 모습이 섹시했다.
“왔어요? 미안, 부엌을 멋대로 좀 썼어요.
나나나드 간식때문에.”
나도 모르게 경호원들의 눈치를 보았다.
감히 대공전하를 애 간식이나 차리게 만들다니,
저년을 매우 쳐라!
같은 표정을 기대했으나,
전원 완벽한 무표정이다.
“괜찮아요. 아이 간식도 챙겨주고,
고마워요.”
나나나드는 대공이 영국식 오이샌드위치를 만들어 줬다고 자랑했다.
오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거! 이거 뭐에요, 엄마아?”
“아, 와인.”
나는 병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나나드가 호들갑을 떨었다.
“몽라셰! 이거 엄마가 좋아하는 건데!
누가 줬어?”
웃음이 나왔다.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찡긋하는게 참,
내 자식이지만 저렇게 영악하다니.
“누가 줬을거같아?”
“아빠? 또 회사 찾아갔구나?
전화 안 받는다고?”
“아빠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와인은 사장님이 주신거야.”
“그으래? 아빠는 별일 없지?”
“응. 별일없었어. 찾아 오는 것도 이제 그만둘거야.
장-바티스타가, 도와줬어”
“진짜? 잘됬다.”
“몽라셰, 좋아하시나요?”
구석에서 가만히 서 있던 대공이 부드럽게 물었다.
“몽라셰도 좋아하는데, 엄마는 샤또 무통 로칠드이나 로마네 꽁띠는 더……!”
“나나이드. 어린애가 술이야기 하는 거 아니야.”
“왜? 다 마시잖아.
나도 16살이 되자마자 고모가 사준다고 했어!”
“9년남았네? 너 아직 7살이야……”
나는 대공을 보고 웃었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예.”
나나이드가 대공에게 후다닥 뛰어가서 독일어로 뭐라고 빠르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공이 사준 드레스에,
평소하는 귀걸이,
그리고 그가 사준 팔찌만 하고 나왔다.
대공이 다가오자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팔짱을 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다.
외모를 평가하는 말이나,
입바른 소리없이,
그냥 눈빛으로 보내는 찬사만으로 충분하다.
대공이 나를 에스코트하면서 나가자,
경호원중에서 두명이 따라 나왔다.
오늘은 시내에 있던 스시집보다 조금 멀게 교외로 나가야 되는 식당이라서 아파트 뒤에 주차된 롤스로이스에 올랐다.
대공이 운전기사에게 독일어로 뭐라고 하자 차가 출발했다.
“헨리, 불어나 독어는 완벽한거 알겠는데,
영어도 혹시 해요?”
“음, 조금 합니다.”
“와 대단해요! 몇개국어 하세요?”
“친척들이 하는 언어라……
어릴 때 조금 배웠습니다.
대단치 않습니다…...”
식당은 미쉐린 스타 두개가 붙어있는 프렌치식당이었다.
‘나’지역에서는 제일 좋고 비싼곳이다.
안에는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대공이 식당 전체를 빌린 것이 분명했다.
“와, 와! 너무 맛있다.”
에피타이저는 말그대로 예술작품이었다.
감탄하는 나를 대공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예술이야! 이렇게 맛있는 에피타이저는 오랜만이에요.”
몇번 만났고,
조금 허물이 없어졌다고 이렇게 익숙해지면 안되는데.
초호화쇼핑, 맛있는 밥,
이런 친절……
“메인에 곁드릴 와인은,
샤토 무통 로칠드,
아니면 로마네 꽁띠?”
나는 소리내서 웃었다.
나나나드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구나.
대공은 미국인들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널찍한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남성미의 절정이다.
와, 섹시한데? 이 사람을 이성으로 의식하면 안되는데,
자꾸 그렇게 된다.
사십대 초반인데 관리가 너무 잘 되어있다.
배도 안나오고,
주름도 별로 없고.
“그 아이의 말은, 모두 진실이지 않습니까.”
“그렇긴하죠.”
“와인은 뭘로 하시겠어요?”
“으음, 양고기가 메인이면,
헨리는 뭘로 하겠어요?”
“저라면, 이 빈티지의 샤토무통로칠드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그걸로 할게요.”
나는 대공이 와인 두잔을 시킬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한병을 시켰다.
한 병을 시켜서 그는 내 잔을 먼저 채워주고,
자신의 잔을 스스로 채웠다.
그가 선택한 와인은 음식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도대체 어떤 빈티지인지,
확인하고 싶어질정도로.
나중에 살짝 봐야지.
“와….! 너무 잘어울려요.
헨리, 와인 잘 아시나봐요.”
“하하, 아니요. 그냥 주변에서 귀동냥한겁니다.
이드는, 와인 잘 아시나요?”
“잘 모르죠.
아는건 몇몇 와이너리 이름 뿐,
나나나드가 아는게 딱 저도 아는 정도에요.”
유럽에서 공학대학원 다니고 10년간 구르면서 이것저것 보고 들은게 있지만 아는척은 말아야지.
외국인이 한국에서 좀 오래 살았다고 전통주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게대가 대공은 어릴때부터 고급와인이라는 와인은 다 마셔보면서 성장했을 거니까.
나이가 지긋한 직원이 다가와 디저트메뉴를 건냈다.
나에게 건내진 메뉴판에는 가격이 적혀져 있지않았다. 고급식당은 여자가 받는 메뉴판에는 가격에 적혀져 있지 않다.
“어… 초콜렛무스와 치즈가 좋겠어요.”
“코냑? 브랜디?”
“아, 그냥 이 와인 계속 마실래요.”
눈물나게 맛있는 이 와인을 남길수가 없었다.
대공은 내 잔에 와인을 더 채워주고,
나와 같은 디저트와 꼬냑을 시켰다.
코냑은 포르투갈산이었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세상에! 이거 초코렛무스맞아?”
“이드, 괜찮아요?”
“그럼요! 천국같은 맛이 나는 걸요.
와~ 나나나드도 이걸 먹어봤어야 하는데!”
“다음에는, 같이 오지요.”
“애가 당신이랑 나가면 절대 안따라오려고 해요.
데이트 잘하고와 엄마~
이러면서.”
대공은 활짝 미소지었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보다.
“사랑스러운 아이지요. 나중에 모녀간에 단둘이 오는 것도 좋겠군요.”
“하하 저는 이곳에 아이를 데려올 능력이 안되서…..”
“그냥 오셔서 드시면 됩니다.
제가 식당주인과 아는 사이이니,
부탁해 놓겠습니다.”
“네에?”
나는 눈이 휘둥글해졌다.
아니, 이 남자 뭐야.
“나나나드가 이 초코렛무스를 먹게되면,
날마다 여기 오자고 할지도 몰라요,
헨리.”
“그래도 좋습니다. 언제든, 몇번이든. 나나나드와 더 친해지면 언젠가 함께 왔으면 좋겠군요.”
“……”
갑자기 무서워졌다.
샤토 무통 로칠드는 가게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빈티지로 사도 3, 4천 유로다.
식당에서 마셨으니 7천유로는 하겠지.
오늘 식사, 와인에 디저트까지 틀림없이 만유로는 들었겠지.
게다가 식당을 닫게 만들고 우리끼리만 밥을 먹었으니 하루 매출과 비용을 다 냈을것이다. 이 남자,
나나나보다 훨씬 부자다.
내가 상상도 못하는 부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것에 익숙해 지면 안되는데.
저택에서 3교대로 일하는 직원들의 보살핌,
항상 대기중인 운전기사와 미용사,
가격표를 보지 않고 쇼핑을 할 수 있는 삶.
그러다가, 어느날 굴러떨어진다.
작은 아파트에서 아이랑 단둘이 살면서,
다음 달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오면 어쩌지,
하면서 걱정하는 삶.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이드?”
“아……”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는걸,
헨리는 알아채고 물었다.
“괜찮아요? 치즈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 아니요. 치즈는… 완벽해요.”
“뭔가 문제라도….”
“너무 완벽해서 그래요.
걱정되서.”
“완벽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순수한 의아함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이다.
뭐랄까 가끔 상식을 뛰어넘는 면니 있는 것같긴 하지만.
좋은 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큰것이 분명한,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직원들도 그가 대공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가족같이 아끼는게 눈에 보였다.
이 우람한 덩치의 대공이 보호받아야될만큼 약해보이진 않지만,
경호원들도 그를 진심으로 애지중지 한다.
게다가 40이 넘었는데도 20대뺨치는 잘 관리된 몸매에 아그리파같이 생긴 얼굴.
“그냥, 이순간이 너무 완벽해서,
꿈같아요, 곧 사라지면 너무 슬플것같은,
꿈.”
“아……”
그의 아름다움 얼굴이,
이그러졌다. 우와 섹시해……
세상에, 찡그리는 표정도 예술이다.
그가 찡그리는 표정은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
나는 실컷 감상했다.
“사라지지 않을겁니다…… 약속하지요.”
“거짓말.”
“사라지지, 않을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거니까요.”
그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커피를 사양하고 집으로 오는 길,
그는 말이 없었다.
꼭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을 뿐.
집에 돌아오니,
나나나드는 이미 잠자리에 든 다음이었다.
그는 직원들을 모두 물리고,
나와 식탁앞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신용카드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뭐에요?”
“신용카드입니다.
프랑스의 은행에 있는 제 개인 개좌에서 결제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이런건 받을 수 없어요.”
“이드, 지난 3일내내 나는 이곳 호텔에서 빈둥거리다가 나나나드를 픽업한 후,
당신과 외출하러 나가는 일만 반복했습니다.
그런데도 재산은 줄어들기는 커녕 되려 불어나고 있어요.
제발, 받아주세요”
“그럴리가요. 첫날 산 보석도……”
“내가 그 보석을 날마다,
아니 매 시간마다 산다고 해도 저는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하, 하지만.”
아,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감사하지만…… 언젠가는 마음이 바뀔수도 있잖아요……?
이걸 다시 가져가고 싶은 날이 올지도.”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나올거같다.
“그리고 이런거 남이 보기에도 안좋아요……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돈을 받는거.”
“그럼, 결혼하도록 하지요.”
“네?”
“물론 청혼은 나중에 제대로 하겠습니다.
이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는게 아닙니다.”
“아아.”
나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웃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적이 있어요.”
“…… 전남편, 입니까?”
“네. 결혼하자고 했지요.
프리넙이라는 걸 써야 한다고 해서,
서명했죠. 결혼도 했고요.
아이도 낳고,
첫 2-3년은 정말 행복했죠……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됬지요. 집에서 맨손으로 나와서,
아이는 너무 혼란스러워하고,
저는 혼자 허둥거리는.
놀랍게도, 돈은 없지만 돈때문에 불행해 지지는 않았어요.
저는 전남편이 한번이라도 그일을 언급할줄 알았어요.
바람피워서 미안하다.
당신을 상처입히려던 것은 아니었다.
나나나드랑 잘 살았으면 좋겠다.
뭐 그런말.”
“…… 그런 말을,
들은적이 없군요.”
“변호사들만 잔뜩 만났죠.
자, 같이 살기 싫으면,
프리넙 한대로 이제 헤어져.
5년살았으니 오십만유로,
아이하나당 오십만유로,
바람피우는거 들켰으니 오십만 유로.
더 기가 막힌건 그걸 용서하고 살았으면 오십만유로를 더 받을수있었다는 거에요. 그런데도 이혼하기로 했으니, 결국 내 선택이다……
다들 그렇게 여기는 거 같았어요.
동네 신문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아무도 바람을 피운 남편이 사과한마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없고,
내가 겨우 5년간의 결혼생활끝에 백오십만 유로를 땡긴 운좋은 외국여자가 되어있더라고요.
내가, 그 시간이,
내 아이가,
다 합쳐서 백오십만유로짜리였다니.
죽고싶었죠.”
“…….”
"저 예전에 파리 까르띠에 본점앞에서 처음 만난거, 기억하시죠"
"....... 그 날을 잊기 위해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실겁니다"
"제가 그날 무슨 보석을 골랐을것 같아요?"
"결혼식용이니까...... 티아라와 목걸이? 그리고 선물로......."
"한개도 안샀어요. 전남편 말에 따르면, 나백작가에 대대로 물려오는 보석이랑 비슷비슷하다면서, 그냥 있는거 쓰자고 그러더군요. 저는 당시에는 잘 몰라서, 순순히 그러자고 했지요"
"맙소사!"
헨리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듣고 탄식했다. 귀족집안에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보석들은 패밀리오피스에서 관리하는 자산이다. 따라서 이혼하게 되면 원래 가문으로 귀속된다. 나는 이혼하면서 약혼반지까지도 전부 빼서 반환해야 했다. 남에게 보이는 용도의 보석은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져내려오는 것으로 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준 선물은 이혼을 해도 여자의 개인소유물이 된다. 즉 내 전남편은 진짜 싸구려짓을 한것이다. 집안소유인 보석으로 생색만 내고, 내 개인재산으로 남을 선물은 전혀 하지 않는 짓.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드.”
“곧, 사람들이 알게 될거에요.
지금까지 조용한것도 신기해요.
이미, 당신이 이 도시에 올해에만 6번이나 왔는데,
신문에 기사 한줄없네요.
나나나드학교사람들도 아무 소리가 없고요.
직장에서 제 옆책상에 앉아있는,
가십을 너무 사랑하는 친구마저도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없어요.
아?”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남자가 다 막은거야.
무서운 사람이다.
뭐하는 사람이지?
온 도시가 연극을 하고 있었어.
나만 모르게!
“이드……”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무서운 사람이다. 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리면 이 도시를 떠나야 될지도 모르는,
막강한 권력자.
나나나처럼, 그냥 돈많은 귀족정도가 아니야.
자기나라도 아닌데,
도시전체를 극장으로 만들었어.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눈에서 숨길수 없는 두려움을 읽은 것이 분명했다.
슬픈 표정.
그는 슬퍼보였다.
들켜서? 아니면, 내가 두려워하는 걸 알아채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어서.”
그는 순순히 일어났다.
“그럼, 잘자요.”
“안녕히 가세요"
그는 내게 지극히 평범한 비쥬를 하고, 바로 문으로 향했다.
흘깃, 내려다보는 눈이,
슬프다.
“내가 문을 닫자마자,
방범걸쇠를 걸어요.”
“……. 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언제나처럼 살짝 문고리를 비틀어 기척을 내고,
그의 구두가 아파트의 싸구려마감재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 다음에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뒤로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나는 식탁옆에 앉아 울었다.
그는 카드를 두고 갔다.
검은색으로 세련되게 빛나는 카드에는 손도대지 않고,
나는 나나나드가 깰까봐 무서워,
소리죽여 잠깐 울었다.
화장을 해도 울어서 부은 얼굴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
꾸역꾸역 일어나,
나나나드랑 수영장에 다녀온 후,
집안일을 했다.
일요일에는 언제나처럼,
청소기를 돌리고 장을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데이트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야 마땅할텐데,
나나나드는 부은 내 얼굴을 보고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거의 저녁때가 되서야,
레고를 가지고 이것저것 만들던 아이는 문득 말문을 열었다.
“엄마.”
“응?”
“대공말이야. 고모말로는, 스위스전체보다 부자래.”
“그런 것 같더라.”
“근데 그래도 나는 싫어,
엄마가 싫으면.”
“하하하”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나나나드.”
“어?”
“고마워.”
“난, 엄마 우는게 제일 싫어.
엄마가 운다면,
대공도 아빠랑 다를게 뭐야.”
“내가 운건 꼭 대공때문은 아니야.”
“그럼, 뭐야?”
“그런거있어.”
대공은 항상 도시를 떠나면서 내게 메세지를 남겼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다시 돌아올 예정인지.
이번에는 아무런 메세지가 없었다. 나는 바보같이,
그의 메세지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 그가 도시에서 나갔는지,
아니면 도시 안 어딘가에 아직 있는지는 이제 알수없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월요일에 출근한 내 얼굴을 보고,
프레드리히는 초밥을 사주었지만,
밥을 먹는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 경쾌한 친구마저 비밀유지서약서로 침묵하게 만든 남자는 그 뒤로도 오래동안 연락이 없었다.
한 달,
두 달,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나나나드가 한번 더 직장으로 찾아왔지만,
장-바티스타가 이미 리셉션에 언질을 주었는지,
로비에서 바로 쫓겨났다.
오토는 전혀 연락이 없이 조용했다.
사장은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일요일아침, 나나드와 늘 가는 커피숍에서 핫초코렛을 마시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노부인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파리억양. 헨리와 같은 억양의,
파리액센트…… 아니다.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이분은, 관광객인가?
“네, 안녕하세요.”
“여기 어제 도착했는데……
대성당을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아, 파리에서 온 관광객이구나.
나는 그녀가 펼쳐놓은 지도를 보고,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구나. 알겠어요. 고마워요.”
“뭘요. 좋은 시간 되세요.”
일어나서 대성당으로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노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날씨가 좋네요.”
“그러게요. 조금 추워지기는 했지만.”
“어휴, 난 추운건 싫은데.”
“그럼 여기는 왜 오셨어요?
대성당보러?”
노부인은 웃었다.
“실은, 이곳의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었어요.”
“그러셨군요”
“그 뒤로 이곳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돌아온건 거의 60년만이군요.”
“그럼, 여기가 고향이신가요?”
“고향이라.”
그녀는 쓸쓸한 표정이었다.
“나는, 항상 떠돌면서 살아서,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영국도 자주 갔죠.
북부대공국에서도 꽤 오래 살았고.”
“그러시군요.”
“아가씨는, 여기서 산지 오래됬어요?”
“음, 10년 남짓?
한국에서 와서,
근처에있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쭉 여기서 살고 있어요.”
“그렇군요. 아이가 예쁘네요. 안녕.”
“안녕하세요, 마담.”
노부인은 아이를 보고 미소지었다.
“아빠는, 어디있니?”
나나나드는 표정이 변했다.
“그런 거, 없어요.”
“내가 괜한 질문을 한것 같구나.”
“괜찮아요. 저도 아빠같은 거,
필요없어요.”
“저런, 왜?”
“그거야……”
나나나드는 내 얼굴을 한번보고,
매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는, 필요없어요, 나랑 엄마는 우리 둘만으로,
완벽하게 행복해요.”
“오, 그래?”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구나.
아빠따위 없어도”
노부인이 순순히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자,
아이는 풀어진 표정으로 핫초코렛을 마셨다.
나는 조금 더 노부인과 잡담을 나누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주말, 놀랍게도 같은 자리에 노부인이 다시 앉아 있었다.
나와 아이는 그녀와 반갑게 인사했다.
“아직 여기 계셨어요?”
“아아, 어릴때 기억이 나는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만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그러셨군요.”
“참 신기해요…… 어릴때는 엄청나게 커보였는데,
대성당이 의외로 작더군요.”
“하하하!”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나도 웃었다.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를 어른이 되서 가보니 운동장이 얼마나 작던지!
그 때,
문이 열리더니,
찬 바람과 함께 헨리가 들어왔다.
거의 석달만에 그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헨리?”
“이드”
그는 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노부인을 내려보았다.
“어머니.”
“안녕, 헨리.”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노부인이?
헨리의 어머니?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어머, 난 싫다 얘.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고향이라뇨? 어머니는 항상 고향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난 오늘부터 여기를 고향으로 여기기로 했어.”
“어머니!”
“왜 안되니? 여기 성당에서 세례도 받았는데.
주교님께서 나를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셨는지,
아니?”
그는 당혹스러워서인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어머니. 저랑 함께, 지금, 나가시지요.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궁금해서 와봤다. 널 끙끙 앓게 만든 여자가 궁금해서.”
“먼저 저한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물어보면, 알려주려고?”
“……”
“비밀유지서약서를 도시 전체랑 썼니?
아무도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니,
내가 직접 알아낼수밖에.”
“…… 어머니, 제발.”
“네 말이 맞았어.
이드와 이드의 딸은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
그녀는 일어났다.
나는 그제서야,
노부인의 불어억양뿐만아니라,
눈매도 대공과 똑같음을 깨달았다.
“이드”
“네?”
“아들이 신용카드를 줬다지요?”
“네.”
“펑펑 써버려요. 쟤 가난해지게.”
당황한 표정의 헨리가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어머니! 제가, 이러실까봐 그런거에요.
이러실까봐!”
“그럼 뭐 어때?
어차피 여기 다시 올 용기도 없었잖아.
너 맨날 만사에 우물쭈물하는 거,
진짜 질린다 얘.
오늘은 내가 여기서 깽판칠까봐 무서워서 온거니,
아니면 내 핑계로 이드 얼굴 한번 더 보고 싶어서 온거니?”
정곡을 찔렸는지,
그는 조용해졌다.
“…… 둘 다 입니다.”
“이제야 너도,
진실을 말하는구나.”
부인은 나를 돌아보면서,
웃었다. 맙소사! 대공과 웃는 눈매가 정말 똑같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렇게 무서워할거없어요,
아가씨.”
“……”
“내 아들은 물러터진, 용기없는 녀석이에요.
실패할까봐 항상 두려워하는.
돈은 아주 많지만,
매우 물러터진.
저 나이 먹도록 누가 주워가지도 않네.”
“어머니!”
“흥.”
노부인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이드.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도요. 안녕히 가세요.”
부인은 모자를 고쳐쓰고,
문을 나갔다.
아직 서있는 헨리에게,
나는 자리를 권했다.
헨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게 물었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이드?”
“네.”
그는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묘사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이 스쳤다.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둘것을,
당신을 보호한답시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유지각서를 쓰게했어요.”
“그랬군요.”
“이드네 학교 학부형들,
이드의 회사사람들,
마리아네 커피숍,
갔던 식당들,
롱샴부인들과 직원들……
그래요, 한 300명 가까이 될겁니다.
변호사들의 자문을 따르는 것이,
그때는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당신이 나를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이런 적이……"
“그래도, 어디가는지 정도는 문자를 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
“기다렸어요. 문자.”
“아……”
그의 얼굴이 이그러졌다.
“보고싶었어요, 헨리. 잘 지냈나요?”
“예! 예. 저,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보고 싶었는데!”
나나나드가 끼어들었다.
“나 내일 생일인데.
아메리칸 돌이랑 샤워실 세트 가져왔어요?”
헨리는 박장대소끝에 대답했다.
“응. 호텔에 있어. 사실, 내일 엄마 회사로 보낼 생각이었어.”
“그리고, 떠나려고?”
“응.”
나나나드는 울상이 되었다.
“헨리. 가지마. 나, 생일엔 거기 가고 싶어.
천국같은 맛이 난다는 초코렛 무스를 파는 식당.”
“아! 어딘지 알겠다.
내일 갈까?”
“어. 엄마는 날 절대 그런데 안데려가.
자기만 맛있는거 다 먹고.”
“같이 가자.”
“근데 헨리.”
“응?”
“엄만 입을 옷이 없을거야”
“뭐?”
헨리는 다시 박장대소했다.
“나나나드?”
“응?”
“너 정말 재밌다. 내일 그 식당,
같이 가서 저녁먹을래?”
“응!”
“엄마가 입을 옷이 없을테니 그 전에 쇼핑도 해야겠구나.
너도 쇼핑 같이 갈래?”
“물론! 완전 좋아!”
“이드, 내일 시간이 되시나요?”
“예”
“그럼, 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내일, 회사앞에서 뵙지요.
나나나드는 제가 픽업해서,
회사앞에서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그는 행복한 얼굴로 일어났다.
“바래다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집으로 걸어오는 길,
손을 잡고 말없이 그와 걸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지극히 행복했다.
다음날, 쇼핑은 또 롱샴부인과 프라이빗룸에서 했다.
나뿐만 아니라 나나나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휘감겼다.
재빨리 드레스 하나를 고르고 탈의실에서 나온 나와 달리 나나나드는 드레스 세 개를 번갈아가며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다 마음에 든다고 버텨서 대공이 옷을 3벌이나 사게 만들었다. 드레스마다 어울리는 신발이 다르다면서, 신발도 세켤레를 골랐다.
대공에게는 내가 전남편에게 당한 이야기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던것 같다. 유럽 귀족가문 남자가, 여자를 만나면서 그런 싸구려짓을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라서 그런지, 대공은 자기는 전남편과 다르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날 모델들이 걸치고 나온 보석들을 몽땅 쓸어 담았다. 비공식적으로 유럽최고의 부자라는 남자가, 하필 자기 가게에서 작정하고 돈지랄을 하는 걸 보면서, 엘리자베타는 입이 귀에 걸렸다.
게다가 진짜 다이아몬드가 달린 핀을 겨우 여덟살인 나나나드에게도 판 뒤에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식당앞에 도착했을때,
나는 그가 식당 전체를 빌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당 안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나이든 커플중 두어 명이 대공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돌아앉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도시 전체에 소문이 서서히 퍼져갔다.
산에서 내려온 대공이 이곳에 사는 여자를 만나고 다니다는.
대공은 도시에서 일주일내내 머물면서 매일 나를 만나고,
사라졌다가 5일뒤에 다시 나타나 또 1주일간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자신은 엄마랑 둘만으로도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대비전하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던 아이는, 대공에게서 생일선물로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 있는 지점에서 나나나드의 외모를 본따서 주문제작한 아메리칸돌과 샤워실놀이세트 장남감을 받고나더니 완전히 대공편으로 돌아섰다. 매년 새 슈퍼카를 일시불로 사면서, 이혼후에는 딸에게 선물없이 생일카드만 달랑 보내는 아빠에게 쌓인 것이 많았나보다. 이제 나나나드는 내가 대공을 만나러 갈때마다 자진해서 내니와 함께 집에 남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독일어를 전혀 못하는 것을 십분 활용해, 대공에게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그릇, 오페라, 와인, 꽃 등등의 정보를 흘리고, 스위스에서 35캐럿짜리 반지를 새로 사와서 진짜 르느와르가 걸린 방에서 청혼을 하게 부추긴 것도 내 딸이였다.
프레드리히는 한달후, 다시 내게 스시를 사주었다.
“이드야, 사실……”
“괜찮아, 프레드리히.”
“진작 말하고 싶었는데.
미안해.”
“괜찮아. 이해해.”
그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나, 헨리랑 사귀기로 했어.”
“뭐?”
“대공의 경호원중에 키 제일 크고 대머리인…”
“아아!”
“그러니까 대공비전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누가 전하래!”
“왜? 헨리말로는 대공이 자기에게 곧 청혼할것 같다던데?
헨리는 대공을 열살때부터 봐왔으니,
그말이 맞을거야.”
“뭐어? 헨리, 그러니까 경호원 헨리,
도대체 몇살이야?”
“그치? 완전 젊어보이지?”
이제 프리드리히도 예전처럼 진실을 거침없이 말한다.
“헨리, 그러니까 대공 헨리,
나랑 다시만난지 얼마안됬어.”
“내가 장담하건데, 자기, 내 말이 맞을걸.
대공이 자기랑 안만나는 동안 성에만 틀여박혀 있어서,
경호원들도 너무 재미가 없었데.
대공이 좀 돌아다녀야 일하는 맛이있지,
대공성에서 일하고,
운동하고, 서재에 틀여박혀 술마시고,
말타고 숲에 들어가 총질이나 하고.”
“하하하”
“자기 아직도 대공이랑 안잤지?”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안잤네, 안잤어. 대공이 좀 구식이라 청혼먼저 할거 같은데,
반지 받자마자 자버려?”
“어휴……”
“물론, 자게 되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해.”
그는 새침하게 웃었다.
“자기 사생활이니까, 그건 내가 죽을때까지 나만 알고 있을게.
약속.”
“왜? 신문에 팔지.
십만유로는 받을수있을거야.”
“미쳤어? 친구는 안팔아.”
“…… 고마워, 프리드리히.”
“뭘. 근데 알려주기는 해야해?
첫키스는 어디서 했어?”
“프레드리히!”
“맙소사, 키스도 아직 안했구나!
세상에, 요즘 세상에!”
“쉬잇….!”
프레드리히는 아이처럼 웃었다.
가십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친구는 내가 대공과 다시 사귀고,
대공이 더이상 온 도시에 비밀서약서를 걸어두지 않은걸 알고 행복해보였다.
대공은 도시에 자주 들렸다.
자동차로 4시간,
비행기로 45분정도 걸린다고 들었는데,
그는 전용기가 있는데다 세관검사는 받지않아서(무슨 외교특전 그런거라고 했다),
어쩔때는 보고싶다고 하면 두시간만에 도착해서 내 아파트 앞에 서있기도 했다.
그와 불과 한달만에 급히 가까워졌고,
그는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제안을 했다.
“샤프롱이 필요하겠군.”
나는 곧 서른여섯살이되는데,
여덟살짜리 아이도 있는 내가 샤프롱?
나는 전시누이를 쳐다 보았다.
“진짜로요?”
“그럼. 대공성에 샤프롱도 없이 나나나드 데리고 가서 자고 나오면,
북부대공국의 오래된 가신들은 별로 안좋아 할거 같은데.
거기 사람들은 되게 구식이긴해.”
“그렇군요.”
“내가 같이 가줘?”
“부탁드려요.”
“그럼 일단 짐을 같이 싸고,
음, 머리도 좀 손봐야겠어.
준비할게 많네!”
전 시누이는 내가 사는 아파트로 와서 옷장을 뒤집었다. 순순히 샬롯이 시키는 대로 짐을 쌌다. 시누이가 소개준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새로 하고,
패디큐어를 받았다.
“매니큐어는 안하는 건가요?”
“일부러 안하는 거야.
깔끔하게 손질만.
내가 보기엔 그게 이드의 매력포인트야.
일하는 여자,
성실한 엄마,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
뭐랄까, 대공이 꽂히는 포인트가 그거라고 봐.”
“그…… 그래요?”
“그래. 자기는 되게 열심히 살거든.
자기는 아직도 대공을 오후3시 전에는 안만나 주잖아.
아침엔 애 학교보내고 회사가야 되니까.
대공은 순순히 오후 3시까지 기다렸다 애 픽업하면서부터 만나주고.
그게 매력이야.
나도 그래서 자기가 좋아. 딱 자기 기준이 있잖아?”
본인도 백작부인이면서도 시어머니가 취미로 하던 미술품딜러 일을 이어받아 맹렬히 일해서 크게 성공한 시누이다운 말이었다.
“대공을 자기 스케줄에 맞추게 한거는 진짜 잘한거라고 봐.
대공은 어차피 일을 꼭 해야하는 사람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이 본인 스케쥴에 맞춰주는게 워낙 익숙해져 있을테니,
얼마나 신선했겠어.”
“그런가요?”
“하하 의도치 않은 성공이네!
어차피 꽂히면 다 예뻐보이는 거지 뭐.
나는 대공이 자기 바라볼때마다,
아휴 내가 다 죽겠어!
너무 로맨틱해!”
대공과 대공의 어머니는 식구들끼리 저녁 먹는데도 옷을 갖춰입고 모인다는 것을 익히 들었으므로, 드레스가 여러벌 필요해서 할 수 없이 처음으로 대공이 준 카드로 쇼핑을 했다. 샬롯은 과연 미술품딜러다운 미감으로 나와 백화점에 가서, 온갖 아름다운 드레스를 진열대에서 쏙쏙 빼냈다. 속옷 쇼핑은 필요없고, 왁싱도 필요없다고, 필요할 일도 없을거라고 계속 거절했는데 샬롯이 하도 정색을 하는 바람에 먼저 고급속옷가게로 향했다. 직원들이 내 옷을 홀딱 벗기고 치수를 꼼꼼하게 쟀다.
"이거, 이거, 이건 안되고, 저거"
샬롯은 야한 디자인은 전부 물리고 무난한, 내가 평소에 입을 만한 디자인의 속옷만 골라서 탈의실로 집어넣었다.
"샬롯, 어쩌면 내 스타일을 그렇게 잘 알아요?"
"사실 이드 스타일은 별로 안좋아해"
"아니, 싫다면서 왜 이런 것만 다 넣어주세요?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을"
"이드"
"네?"
탈의실의 문을 닫으며 샬롯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공정도되면 발가벗고 덤비는 여자는 없었을것같아?"
"어......."
"내 동생, 나나 정도만 되도 그런 여자들 천지야. 대공이 눈 하나가 아니라 얼굴이 없어도, 그렇게 접근한 여자가 없었을까?"
"......."
"목적에 맞는 쇼핑을 하자. 대공의 마음을 확실히 잡아서 청혼을 받아야지? 내가 그 추운곳까지 샤프롱으로 따라가주는데, 맨손으로 오고싶어?"
"아...... 항상, 항상 고마워요, 샬롯"
"나 자기가 진짜 잘됬으면 좋겠어. 그거 알아?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이 살 많이 보여주면 좋아하잖아? 대공정도 되는 남자는 그게 고마울거같애? 미친년 3백4십오번째 - 그러겠지. 대공에 비하면 내 친정이야 동네 지주수준이지만, 나는 어렸을때 그런 유혹이 없었을것 같아?"
"......."
"대공이 꽂히는 이드의 장점을 살려야되. 열심히 사는 엄마, 섹스어필을 하지 않는 단정함, 진실함, 그런 거. 대공이 여자가 에이전트 프로보캐타 입고 다리 벌리는 거 보고 동할 남자였으면 결혼 열번도 더했지"
"하긴......"
샬롯이 골라준 속옷을 전부 구매한 후, 왁싱살롱으로 끌려갔다.
"혹시 모르잖아? 진도가 확 나갈수도."
"직원들이 항상 옆에서 지켜보는데 어떻게......"
"헨리, 그러니까 경호원헨리랑 궁내성은 이번에 의기투합했어.'피부가 꿀색인 여자'를 밀어주기로. 직원들과 샤프롱인 내가 공조하면.....,"
"마, 맙소사...... 그, 그런 이야기까지......"
"아내가 죽은지 10년이 다 되가는데, 대공이 이러다가 진짜 혼자 늙어죽을라, 일단 장가라도 보내보자, 라고 대비와 가신들도 동의했데"
"진짜요? 가신들이? 전 외국인이고, 평민이고, 이혼녀인데다가, 아이도......"
샬롯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유럽인이고, 귀족이고, 미혼에 아이없던 아내랑은 잘 살았던가? 대공이 자식없이 사망하면 상속권이 누구에게 가는 줄 알아?"
"어........ 가장 가까운 친척........?"
"죽은 첫아내에게 남동생이 있는데, 대공의 친가 외가 모두 피가 섞여있지. 도박쟁이 토마소는 대공의 외사촌 이면서 부계로는 팔촌인가 구촌이고. 스웨덴의 구스타프도 부계로 촌수가 그 정도 될거야. 이 세명이 개싸움을 벌이겠지. 구스타프가 비토리아랑 결혼한거는 이미 알지?"
"마압소사, 그러고 보니"
"대비전하와 가신들도 마음이 급해. 대공이랑 자기가 식탁아래서 몰래 손을 만지작만지작 하는 거를 세번이나 본 나도 급해. 대공은 로맨스에 취해서 지금이 딱 좋은 가 본데, 지켜보는 우리들은 숨넘어가. 그러니까 꿀단지 입구에 털이 있으면 안된다는 말이야"
우리는 차안에서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릴 때 남자보는 눈은 없었지만, 시누이복은 있었다.
ㅈ. 이정도면 됬지?
아무리 창작물이라도 네가 외간남자와 뿅뿅하는 상상을 차마 글로 적을수가!
나도 남자라고는 남편이랑 마크상 딸랑 두명 만나봐서, 야한거 쓰기에는 경험이 일천하여......
죽은 남편보다 삐친 남편이 낫다. 목걸이라도 하나 뜯고 화 풀어.
사랑하는 언니가
이곳은 사랑의 커뮤니티. 댓글 딸라 항상 감사해요.
Would you be my Valent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