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너만 모르는 세계>
차연은 텅 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 구름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도시는 그저 조용했다. 
저 밖에 있는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간은 멈춘 듯 느껴졌다.

손끝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이 가득했다. 

‘기억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그녀의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깊숙이 자리 잡은 그 고통은 끈질기게 차연을 잡아끌었다.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붙잡았다.

“차연아, 나 정말 미안해.”

과거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 그날의 그 눈빛. 

차연은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숨이 막혀왔다. 그와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밤늦게 차 안에서 나눈 그 마지막 대화. 그녀의 눈물에 담겼던 절망.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없어." 

그의 마지막 말이 차연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바닥을 쳤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차연은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머리로는 그가 떠난 지 오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연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작은 기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짝이는 금속의 차가운 빛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기계는 고통을 끝내줄 수 있는 도구였다. 이 작은 장치만 있으면,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차연 님, 도와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렀다.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차분했고, 동시에 낯설었다. 

차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는 그녀를 무언가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처럼 부드럽게 들렸다.

[기억을 삭제하시겠습니까?]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 이 순간, 이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을까? 

그 모든 아픈 순간들이 사라지면,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사랑에 대한 감정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걸까?

“지워줘.”

차연은 마침내 짧게 답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기계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응답했다. 차연은 잠시 눈을 감으며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한 거리에 서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낡은 카페 간판, 좁은 골목길. 모든 것이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리고, 거기서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최태윤.

나의 엑스보이프랜드.

그는 카페 앞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서 그를 보면서도 곁에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하.’

가까이 가면 다시 상처받을 것 같아서.

[이 기억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계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저절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래……지워줘.”

이 말을 뱉자마자, 태윤의 모습은 서서히 흐릿해졌다. 동시에 내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그와의 추억이, 사라져간다.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그것을 이겨내고 싶었다.

***

차연은 깨어났다.

“……!”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기억을 지웠는데도, 여전히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더 이상 이 방안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바람은 차가웠다. 

외투를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몇 걸음 걷자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발길이 닿는대로 향한 곳은 동네서점이었다. 

<메모리북스>





그곳은 차연이 자주 찾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책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곳에서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서점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긴 코트를 입고, 창가 쪽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은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그러나 차연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차연과 눈을 마주쳤다.

“…….”

처음 보는 얼굴.

짧고 깔끔하게 정돈된 흑발은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넘겨져 있었고, 차분한 얼굴선이 그의 차가운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짙은 검은 눈동자였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듯했지만,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차연은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숨을 멈췄다.

묘령의 남자는 차연을 깊게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누구세요?” 

차연은 그를 향해 물었다.

남자는 입가에 안온한 미소를 그렸다.

“우연이 아니네요.”

“네?”

“이곳에서 만나다니."

그의 말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지만, 차연은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낯설지만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 그의 태도, 그리고 그가 발산하는 묘한 따뜻함.

“저를 아시나요?”

그러자 남자는 차연의 표정을 천천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신우빈입니다.”

“신우빈…….”

차연은 이 이름을 처음 들었음에도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분명 초면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당신 기억에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차연은 자신이 아는 인맥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떠올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분명한 초면이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차연의 마음속에 의문을 던졌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차연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신우빈은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차연님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차연은 그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리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말에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뭐야…….”

그는 한 발자국 다가서며 말했다. 

“잊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기억하고 싶으신가요?”

그 마지막 질문은 차연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마치 그가 차연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알고 있지?’

오전에 손을 댔던 차가운 금속 기계가 떠올랐다. 

차연은 기억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에, 그 기계를 손에 쥐었었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린 순간조차도, 자신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당신, 누구야.’

차연은 한순간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는 한순간에 캄캄한 어둠으로 덮였다. 눈꺼풀 뒤에서 드리워진 어둠은 마치 끝없는 공간처럼 넓고, 차가운 고독이 스며들었다.

차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흐르는 차가운 땀방울이 그녀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어둠은 끝이 없는 미로처럼 그녀를 삼킬 듯 다가오고,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

방금까지 눈앞에 서 있던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차연은 당황스러움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서점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창가 쪽으로 비치는 햇살은 그대로였고,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점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아까까지 그 남자가 서 있던 자리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방금 전의 대화는 너무도 생생했지만, 그가 사라진 순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차라리 꿈속의 일 같았다.

‘정말 여기에 있긴 했던 걸까?’

그때, 그녀의 시야 한쪽에 무언가 작은 것이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직사각형, 반짝이는 명함 한 장이었다.

차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몸을 숙여 그 명함을 집어 들었다. 명함의 표면은 매끄럽고 고급스러웠으며, 은은하게 반짝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명함을 뒤집어 앞면을 확인했다. 눈에 들어온 글씨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신우빈’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래에 적힌 다른 글자도 확인했다.

‘크로닉스 CTO (최고 기술 책임자)’

크로닉스라. 어딘가 들어본 듯한 회사 이름이었다.

차연은 머리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크로닉스는 최근 각종 기술 잡지와 뉴스에서 떠오르고 있는 대형 IT 회사였다. 신경망 인터페이스, 기억 조작 기술, 감정 분석 등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로 유명했다.

바로 휴대폰 검색을 했다.

‘기억을 조작하고 감정을 분석하는 회사…….’

그가 서점에 온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계획적인 것이었을까?

차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느껴지는 명함의 촉감은 차가웠지만, 가슴은 무섭게 들끓고 있었다.

***

차연은 공방 창가에 서서 붓을 들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캔버스는 푸른 물감으로 점차 채워지고 있었지만, 손끝은 계속 멈춰졌다.

칠해진 짙은 파란색이 마치 제 마음 같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날 서점에서 만난 남자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떠올랐다.

‘신우빈…….’

이상하게도 뇌리에 깊히 박히는 이름.

하지만 신우빈이라는 남자는 과연 실존하는 인물이었을까?

그의 말투, 눈빛, 그리고 그가 건넨 명함.

그 모든 것이 너무 생생했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그저 피곤한 어느 날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남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차연은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려 했다. 

그러나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묘령의 존재가 끊임없이 스쳐가며, 그림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연아!”

하지만 차연은 듣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은 여전히 그날의 서점 안에 머물러 있었다. 신우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그의 미묘한 미소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차연아!” 

다시 한 번 더 큰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차연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니 친구 윤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연은 순간 당황해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물감이 캔버스에 묻은 채 그대로 말라버렸다.

“뭐해? 몇 번을 불렀는데.”

“어, 윤경아. 왔어?”

“나 커피 마시러 가려고. 같이 가자. 카페인 흡입하고 작업 시작해줘야지.”

차연은 잠시 윤경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커피 마시러 가자.”

차연은 붓을 치우고 윤경을 따라 공방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하자 윤경이 가장 자주 앉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느린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속에서 차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윤경은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지만, 차연은 거의 듣지 못하고 있었다. 윤경의 목소리는 미안하게도 그저 먼 배경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 참. 너 최태윤 소식 들었어?”

그 순간, 커피잔을 잡고 있던 차연의 손이 힘을 잃었다.

“어?”

최태윤.

잊으려 했던 이름이 어느날 갑자기 다시 들릴 때면, 가슴 한구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윤경은 눈치채지 못한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 걔, 메디핏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대. 취업도 그냥 프리패스인 것 같더라.” 

“…….”

“메디핏, 너도 알지? 헬스케어 쪽에서 엄청 주목받는 기업이잖아. 그것도 피트니스 솔루션 개발 팀에 들어갔대. 완전 핫하지.”

차연은 윤경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가슴 속 어딘가가 와르륵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 미안해.”

윤경은 차연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리고 말끝을 흐렸다. 

“너 아직도 그 사람 못 잊었던 거야?”

“…….”

“나는 너네 쿨하게 헤어진 줄 알았는데…….”

차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괜찮아.”

“진짜 괜찮아?”

“응, 진짜 괜찮아.”

차연은 그렇게 답하면서도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기억 삭제 기계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자,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다 잊을거야.’

윤경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차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긴……잊어버리기 쉬운 건 아니지. 특히 너네는 꽤 오래 만났잖아.”

차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쓴맛이 혀 끝에서 맴돌았지만, 그것조차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

카페에서 윤경과 헤어진 후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끝을 차는 저녁 공기는 선선했지만, 차연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윤경이 무심코 꺼냈던 최태윤의 이름.

그리고 그가 취업 성공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

차연은 애써 가라앉은 표정으로 거리의 가로등을 하나하나 지나쳤다. 

최태윤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희미해져 가는 그날의 기억은 전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언제 헤어졌더라?’

갑자기 그날의 감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의 퍼즐에서 중요한 한 조각이 빠진 듯, 그와의 마지막 순간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가슴 속 어딘가에선 분명 큰 고통이 남아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비어 있었다.

걸음을 멈춘 차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해야 할 거리와 상점들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뭐지?’

차연은 무심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차가운 금속을 만지작거렸다. 그 작은 기억 삭제 기계가 손끝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하아.”

차연은 주저앉고 싶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지우려 했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이제는 너무 흐릿해져, 마치 그녀 자신도 그 기억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그날, 최태윤과 정말 어떻게 이별했던 걸까?

메디핏 그룹에 취직한 그의 소식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다시 한 번 더듬어 그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 중요한 장면들은 전부 빈자리만 남겨진 채였다.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던 차연은 문득 주변의 모든 소리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의 발소리,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마저도 멀어져 갔다. 마치 세상이 그녀를 둘러싼 기억 속에 고립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연아!”






놀란 차연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뇌리를 스쳐간 얼굴. 

최태윤.

그는 분명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손아귀 안의 기계를 더 꽉 쥐었다.

‘이 기계가 모든 걸 지운 걸까?’

지우고자 했던 기억은 사라졌어야 했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자꾸만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최태윤과의 마지막 말, 그가 떠나던 순간……마치 빠져나가 버린 기억들 사이로 실체 없는 감정만 남아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

차연은 마침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벤치에 주저앉았다.

***

자정이 넘은 시간, 차연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차연은 맥주캔을 한 모금 마시고, 눈앞의 아이맥 모니터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검색창에 입력된 이름, 신우빈.

차연은 마우스를 움직여 신우빈에 대한 검색 결과를 천천히 스크롤했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첫 번째 기사 제목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기억 삭제 기술의 천재, 신우빈 – IT 업계를 뒤흔든 혁신가’

차연은 떨리는 손끝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화면에 뜬 사진 속의 남자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짧게 정돈된 머리, 차가운 눈빛을 가진 그의 얼굴. 

‘28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IT 기업 크로닉스의 최고 기술 책임자(CTO)로 활동 중인 신우빈. 그는 기억 조작 및 감정 조작 프로그램을 개발한 천재 개발자로, 그가 이끄는 연구팀은 인간의 기억을 삭제하거나 재구성하는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은 특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주는 혁신적인 솔루션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 조작.

차연은 그 단어에 멈칫했다.

이 기계를 구입할 때까지만 해도 기억의 삭제를 도와주는 줄만 알았지, 감정까지 관여할 줄은 전혀 몰랐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맥주캔을 단숨에 들이켜며 화면을 더 내려봤다. 신우빈의 인터뷰가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었다.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은 때때로 인간을 파괴할 수 있죠. 제 기술은 그런 기억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조정하여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지만, 차연은 그 속에 깔린 차가운 계산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마우스를 놓고 잠시 모니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크로닉스 기억 삭제 서비스 – 상담 예약 안내]

***

새벽의 어스름이 물러가고, 햇빛이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크로닉스 타워의 창문 너머로 도시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냈다. 서울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간, 그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고요하게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창가에 서 있는 신우빈. 

그가 바라보는 도시는 그저 하나의 계산된 그림처럼, 완벽한 배열을 이루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성된 그 세계는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우빈의 시선은 다시 한번 모니터로 향했다. 

수많은 데이터와 정보가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오직 하나의 파일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차연.’

우빈의 손끝이 마우스에 닿자, 파일이 열렸다. 

화면에 떠오른 그녀의 정보는 무척 세밀했다. 

나이, 직업, 취미, 인간관계까지. 그녀의 모든 것은 정확한 수치와 데이터로 나열되어 있었다.

이름 : 이차연
나이 : 23세
신분 : 한미예술 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전남친 : 최태윤 
교제 기간 : 2년
이별 사유 : 차연은 태윤의 이기적인 행동과 감정적 거리감에 지쳤음. 최태윤의 성공 지향적인 성향이 차연의 감수성에 상처를 줌. 결국, 감정의 틈이 점점 벌어졌고, 둘은 서서히 멀어지다 헤어짐.
특이사항 : 예술적 감수성이 매우 뛰어나며, 감정 기복이 크고 표현에 예민함. 본인의 내적 갈등이 외적인 모습과 행동에 자주 드러남. 현재 졸업 전시 준비 중이며, 그 일에 방해받지 받지 않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고 시도함.

신우빈은 화면을 읽어 내려가며 손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얼마 전, 고객 이차연이 기억삭제 기계에 접속하던 순간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기억 속 첫 장면은 어딘가 따뜻했다. 

눈발이 날리던 겨울, 그녀와 최태윤이 처음 마주쳤던 순간. 그 눈빛.

차연의 눈은 반짝였고, 태윤의 미소는 자신감 넘치도록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시간 함께할 것처럼 자연스럽게 웃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흐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차연의 따뜻했던 기억은 곧 차갑고 고통스러운 장면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스며드는 불안감. 

작은 말투의 변화, 태윤이 바라보는 시선이 차연에게서 멀어졌다.

최태윤의 시선은 더 이상 그녀를 향하지 않았고, 대신 개인의 성공이라는 목표만을 좇고 있었다

우빈은 그 순간들을 생생하게 느꼈다.

화면 속의 차연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을 때, 우빈은 덩달아 호흡을 멈추기도 했었다.

‘우린 왜 이렇게 변했을까?’

우빈은 차연이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너무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 그 상처가 그녀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었는지, 그것은 단순한 정보 이상으로 전달되었었다.

“쉽지 않은 고객님이군.”

신우빈은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느끼며,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었다.

차연이 기계를 사용하던 마지막 순간에, 우빈에게 전달된 짧게 스쳐 지나간 문장 하나.

‘내가 자주 가던 서점에 가서 쉬고 싶어.’

메모리북스.

그녀가 안식을 찾고 싶어 했던 그 공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우빈은 미친 듯한 걱정이 앞섰다.

차연이 그토록 괴로워하며 붙잡으려 했던 기억, 그 기억을 지우고 나면 그녀는 어떻게 될까. 

아니, 그녀는 그 기억을 삭제하고 나서도 괜찮을까? 

그 질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내, 우빈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었다. 서점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충동은 전혀 계산적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서점으로 가던 길을 떠올렸다.

평소라면 한 번도 찾지 않았을 서점, 메모리북스.

단순히 고객의 안전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라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원격으로 확인하거나 다른 이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우빈은 직접 실물을 보고 싶었다. 

이차연이라는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그 감정 속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그 절망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처음 맞닥뜨리게 된 차연의 모습은 화면 속에서 보던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저 숫자나 기계로 측정된 기록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사람. 감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깊고 큰 갈색 눈동자…….’

우빈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이 기계를 세상에 내놓을 때의 망설임을.

‘이게 정말 팔릴까?’

기억삭제 기계는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개발한 혁신적 기술이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그 기계가 필요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운다는 발상은 도발적이었고, 동시에 위험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그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첫 주문이 들어왔다.

바로 차연이었다.

‘나의 첫 고객.’

차연이 이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그의 모니터에는 그녀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그날 차연이 느꼈던 고통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지우려 했던 것은 사랑이었고, 동시에 상처였다.

우빈은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지우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그 흥분감에서 분비된 도파민이 여전히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최태윤이라는 놈이 대체 어떤 놈이길래?”

원칙대로라면 우빈은 그녀의 정보만 다뤄야 했다. 그러나 최태윤이라는 이름은 차연의 상처와 너무도 깊이 얽혀 있었다. 

그것이 우빈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그를 붙잡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서 변수를 허용하지 않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태윤이라는 변수를 알고 싶어 했다.

우빈의 손끝이 천천히 키보드를 향했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최태윤이 차연에게 남긴 흔적, 그 상처의 깊이가 어떠한 사건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졌다.

우빈이 조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한순간 멈칫했다.

손님?

예고도 없이 누구일까.

여비서의 말이 신 이사의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그녀가 전한 다음 말이 우빈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성함은 이차연 님이라고 합니다.”

“!”

그녀가 여기로 찾아오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우빈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얽혀들었다. 

이차연이 자신의 앞에 선다면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졌다.

우빈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평소라면 계획에 없던 일에 개입하지 않을 그가, 이번에는 다르게 느꼈다.

“내가 1층으로 내려가겠다고 전해.”

우빈은 천천히 사무실 문을 나섰다.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지만, 어딘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

차연은 로비 한구석에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손에 쥔 명함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침착함을 찾으려 애썼다.

‘결국, 와버렸어, 나.’

명함 하나만 들고 무작정 이곳에 온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만나야만 한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

심장이 고동치며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초조함과 긴장감이 가득한 시간. 

이내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한 남자의 실루엣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차연은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제대로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신우빈은 잠깐 그녀에게 시선을 던진 뒤, 무심하게 말했다.

"따라오세요."

그는 설명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네, 네?”

차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우빈의 뒤를 따랐다.

앞서는 발걸음은 빠르고 거침없었다. 

신우빈의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마치 그녀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면서도 동시에 더 멀리 이끌고 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곧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연의 눈앞에는 고급스러운 외제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체는 낮고 매끈했으며, 깊은 검은색의 윤기가 공간을 압도했다.

우빈은 아무 말 없이 운전석 쪽으로 향하며 문을 열었다.

“타세요.”

차연은 얼떨결에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차 안에는 은은한 가죽 향이 풍겼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우빈은 핸들을 잡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이름은 알고 있으니 다시 통성명할 필요는 없겠죠.”

차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차는 이미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도저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신우빈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곧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잠시 짧은 침묵 끝에 그가 답했다.

“근처에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멕시코 음식 선술집이 있습니다.”

“멕시코 음식이요?”

“그 집 타코가 기가 막힌다고 하더군요.”

순간 차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타코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

엔진 소리가 잦아들며 차가 멈췄다. 주변의 소음이 귓가를 채우기 시작했다.

차연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은 살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좁은 골목길 끝에 자리 잡은 아담한 건물이었다. 간판 하나 없이 벽돌로 지어진 외관은 마치 오래된 비밀을 간직한 듯 했다.

신우빈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의 긴 다리가 우아하게 펴지는 모습을 보며 차연은 잠시 망설였다.

“내리세요.”

우빈의 목소리에 차연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발을 땅에 디디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우빈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섰다.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차연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쿵, 쿵.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우빈이 멈춰 선 곳은 나무 문 앞. 그는 문을 열며 차연을 안으로 이끌었다.

실내는 놀랍도록 아늑했다.

낮은 천장과 따뜻한 조명, 그리고 은은한 음악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벽에는 다양한 멕시코 예술품들이 걸려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 자리는 여깁니다.”

언제 예약까지 한 건지 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벽은 짙은 적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작은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문을 닫으니 보안과 방음은 완벽한 공간이었다.

“앉으세요.”

우빈의 말에 차연은 조심스레 착석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빈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저를 찾아오셨죠? 이차연 씨.”

그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우주의 한 조각 같은 동공에 차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는……그냥…….”

말을 더듬을 게 아닌 게 더듬게 되었다. 차연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왜 크노닉스까지 찾아왔을까?

그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정.

다만 이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있었을 뿐.

우빈은 그녀의 혼란을 눈치챈 듯 했다.

“지금의 상황을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있었다. 얼음 위를 걷는 듯한 그런 느낌.

차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 기억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우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떤 기억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지우려고 했던 그 기억이요.”

“최태윤과의 기억 말씀이군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차연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네. 그 기억이 정말 사라진 건가요?”

“그 기억은 아직 완전히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차연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뜻이죠?”

“크로닉스의 기억 삭제 시스템은 단계적으로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기억의 감정적 요소를 희석시키고, 그 다음 구체적인 사건들을 흐리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완전히 지웁니다.”

서늘한 공기가 방 안을 채우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차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럼 제 기억은 지금 어느 단계인가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감정은 많이 옅어졌지만, 구체적인 사건들은 아직 남아있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문하신 타코와 마가리타 나왔습니다.”

직원이 음식을 내어 놓고 나갔다.

타코의 향긋한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차연은 잠시 그 냄새에 정신이 팔렸다. 오랜만에 맡는 타코향에 그녀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우빈이 차연 쪽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드세요. 맛있다고 들었습니다.”

차연은 호기롭게 타코를 집어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풍부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어떠세요?”

우빈의 물음에 차연은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뉴스 속 그의 모습은 기술력이 뛰어난 천재 개발자였다. 혁신을 통해 부와 명예를 쌓으려는 요즘 흔한 성공가의 전형으로 보였다.

하지만 자꾸만 차연의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

그가 하필 메모리북스 앞에서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 속 인물 너머에 있을 그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졌다.

“신우빈 씨.”

“네.”

처음으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하필 그날, 그 시간에, 메모리북스 앞에 계셨나요?”

“…….”

“우연이라고 하기엔…….”

차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미소였다.

“우연이 아니었죠.”

그가 인정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연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를요? 왜…….”

“차연 씨. 당신은 단순히 기억을 지우러 온 고객이 아닙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크로닉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죠.”

“무슨 뜻이에요?”

차연은 갑자기 식은 땀이 났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큰 일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코의 향이 공간을 채우는 동안, 차연과 우빈 사이의 침묵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벽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차연은 잠자코 음식을 먹으며 우빈을 관찰했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미스테리였다.

우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차연 씨. 기억은 양날의 검과 같아요.”

“…….”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하죠.”

차연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 또한 기억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신우빈 씨.”

“……?”

“제 기억을……하나 더 지워주실 수 있나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차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 속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빈의 표정에서는 내적 갈등이 읽혔다.

“어떤 기억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최태윤과……….”

“!!”

차연의 말을 끝까지 들은 우빈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멈칫했다.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확실합니까?”

그가 조용히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

우빈은 천천히 일어나 차연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으세요.”

차연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빈은 차연의 머리 위로 기계를 가져갔다. 기계가 그녀의 머리 가까이에 닿자, 미세한 전류가 차연의 몸을 향해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뇌파를 측정할 수 있는 가느다란 신호들이 차연의 머리 속으로 파고 들었다.

“하아.”

차연은 살짝 몸을 떨며 그 감각에 적응하려 했다.

우빈의 손가락이 능수능란하게 버튼을 조작하자, 차연은 과거의 기억들이 점차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최태윤과 함께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숨결, 그리고 달콤한 키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다.

최태윤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익숙한 향기를 닮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차연은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남자의 접근을 막을 수는 없었다.

“……!”

공간을 가득 채운 은은한 조명 속에서, 차연은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뺨에 닿았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은 이내 목덜미를 감싸고 부드럽게 당겼다.

“하.”

차연은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품 속으로 이끌렸다.

“흐읍…….”

입술과 입술이 닿았을 때.

세상이 멈췄다.

부드러웠던 혀 놀림은 곧 강렬한 키스로 변모해갔다. 차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갔다.

터치 하나하나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차연은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거친 숨결이 입술 위로 느껴졌고, 체온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투둑, 투둑.

남자는 험난한 손길로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렀다.

어디로든 도망가지 못하도록 차연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남자는 단번에 그 위를 선점하며 올라탔다.

“널 안아야겠어.”

“……!”

다시금 입술 사이로 침투한 혀가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감질맛 나게 윗 입술과 아랫 입술을 오가며 차연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처 눈을 감지 못했는데, 코앞에 닿은 그의 눈망울이 몹시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남자의 손이 차연의 치마 끝자락을 붙들었다.

“거추장스럽군.”

그것을 벗기면서 드러난 뽀얀 허벅지 위로 이빨을 박았다.

그렇게 천천히 몸의 흔적을 새기면서도 차연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부림 치던 차연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온 몸의 세포가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문득, 자신을 비추는 조명이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부, 부끄러워…….”

“딱 좋아. 너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

얼굴을 감추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차연의 윗도리 또한 아래로 벗겨지고 있었다.

남자는 보란 듯이 더욱더 얼굴을 파묻었다.

신기하게도 차연의 민감한 부분을 전부 알고 있어 손길이 닿는 곳 마다 몸서리 쳐졌다.

“아.”

그냥 누워있는 것조차 위태로워서 차연은 몸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각에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디지?’

낯선 장소에서 밀려오는 전율이 차연의 몸을 휘감았다.

벽을 마주 보고 있어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말없이 진동해 오는 그의 힘이 그녀의 입에서 소리를 토하게 했다.

동시에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닿는다.

“내 기억으로 덮어줄게. 너의 과거를.”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숨 가쁜 공기만이 존재하는 가운데 다시 입술이 겹쳐진다. 부드럽게 혀로 얽히며 서로의 긴장을 이완시켰다.

차연은 점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하얗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색채가 너무도 강렬해서.

‘뭐지?’

어느 순간, 차연은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뜨겁게 변해갔다.

우빈은 자신의 손끝이 차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단순히 차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관찰자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관찰이 아닌, 참여였다.

그러나 곧,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빈은 갑작스럽게 그녀에게서 몸을 떼며 눈을 크게 떴다.

“!!”

기다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내 의지가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무슨 일이죠?”

차연은 숨을 내쉬며 물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

우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의도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연의 기억 속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그가, 직접 그 기억을 더럽히고 있었다니.

“차연 씨, 나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저 당황스러웠다.

기술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이 기계 속으로 흘러 들어간 건지,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럼 뭐죠? 방금은……실수였나요?”

차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일부로 그런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의 감각.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던 떨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우빈의 손끝에서 남은 감촉이 아직도 차연의 피부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프로그램의 오류였다.

차연은 혼란스러워하며 뒷걸음질쳤다. 눈빛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신…….’

숨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우빈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나는 오늘 기억을 삭제하려고 당신을 찾아온 것 뿐인데.”

“…….”

“오히려 더 강렬한 기억만 남게 되었어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고,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잘 모르는 남자와 하루아침에 키스를 나누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 왔을까.

차연은 한숨을 쉬며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오늘 신우빈 씨를 찾아온 나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워요.”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무겁게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 공간에서, 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확.

문에 거의 다다르기 직전, 우빈의 손이 가녀린 팔목을 잡았다.

“이차연씨.”

“놔주세요.”

“나도 이러려고 만난 게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건 우빈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바로잡을 시간을 주세요.”

차연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분노와 함께 손을 뿌리쳤다.

“시간? 더는 필요 없어요!”

“잠시만요.”

“당신은 이미 내 기억을 망쳐버렸어요. 어떻게 다시 돌릴 수 있겠어요?”

차연은 주머니 속에 있던 금속 기계를 꺼내어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고, 기계는 차갑게 바닥 위에서 굴렀다.

“이젠 이거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이차연씨!”

“당신도, 이 기계도 다 필요 없어요.”

결국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 방 안에 남은 것은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와 우빈의 고요한 혼란이었다.

“하.”

그는 돌처럼 굳어져서 그녀가 떠난 문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은 아직도 차연을 잡고 있었던 감촉을 잃지 못하고 있었다.

식당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어 트렸다.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방적으로 치고 들어온 이차연의 기억.

차연이 그를 전 남자친구인 최태윤으로 착각하고 행복해 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선명했다.

기억을 지우려던 그녀의 결심과는 너무나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 감정의 잔여물은 우빈의 몸에 강렬히 새겨졌다.

‘잊기 힘들 정도로 그 남자를 사랑했어.’

과연 기계만으로 차연의 결심을 도울 수 있을까?

우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기계가 있는 곳까지 거리는 짧았지만, 그 몇 걸음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금속의 차가운 표면을 스치자, 저절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기계는 이제 더 이상 차연에게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우빈에게는 달랐다.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챙기고는 머지않아 식당에서 자리를 뜨는 그였다.

***

우빈은 회사 정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온갖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데, 그 맥을 끊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없이 회사를 비우고 어디 다녀오는 거야?”

크로닉스의 대표 ‘하은재’가 우빈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 우빈은 차분해진 음성으로 답했다.

“갑자기 미팅이 잡혀서.”

“미팅?”

“별로 중요하진 않으니 신경 쓰지 말고.”

그의 말투는 늘 그랬듯이 무심했다.

은재는 입술을 깨물며 우빈을 따라 걸었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로비 바닥에 부딪히며 울렸다.

“어디서 미팅했는데?”

질문 속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내가 모르는 미팅이 있을 리 없잖아.”

우빈은 그녀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시시콜콜 대화를 나눌 기분이 도무지 아니었다.

“우빈!”

은재가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 그녀의 손에는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이거 봐. 보여줄 게 있어.”

“나중에 볼게.”

우빈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모니터에 여러 화면이 떠오르며 마우스를 바삐 움직였다.

‘최태윤.’

기억 삭제 기계의 로그파일을 열었다.

차연이 기계를 처음 사용했을 때의 기록, 그녀의 뇌파와 감정의 흐름이 차곡차곡 데이터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 데이터를 추적하면, 기억 속에 담겨진 최태윤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화면 위에 코드들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우빈은 그 복잡한 데이터의 흐름을 따라가며 명령어를 입력했다.

화면이 한 번 깜빡이더니, 그의 얼굴과 이름이 화면에 프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이름 : 최태윤
나이 : 23세
직업 : 메디핏(Medifit) 피트니스 솔루션 개발 팀 테크니컬 기획자
학력 : 대한 체육대학 졸업, 운동과학 전공
외모 : 키 181cm, 스포츠맨 답게 건강미 넘치는 외모.
성격 : 리더십이 뛰어나고 도전 정신과 추진력이 강하다.
취미 : 등산, 마라톤, 야외 운동을 즐긴다.
 
이차연의 기억 속 최태윤은 단순한 전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운동을 매개로 끊임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연결된 인물이었다.

우빈은 손가락을 움직여 마지막 데이터를 클릭했다.

최태윤의 SNS주소였다.

클릭.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최태윤의 페이지는 평범한 일상의 사진들로 시작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자, 그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순간들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사진 속의 최태윤은 항상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빈의 미간이 갑자기 좁혀졌다.

‘이차연과 찍은 사진이 여전히 있어?’

태윤과 차연은 함께 등산을 하며 웃고 있었고,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 사진들은 단순한 추억의 기록일 뿐이었을까?

그 물음은 사진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더 깊어져갔다.

잊지 못한 건 차연만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우빈은 그 사실을 직감했다. 갑자기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편들이 말없이 우빈의 마음을 압박했다.

‘내가 왜 이러지?’

저 어둡고 깊은 곳에서 묘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은 마우스 위에서 가볍게 떨렸고, 눈을 가늘게 뜨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우빈은 강제로 눈을 돌리며 화면을 꺼버렸다.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

봄바람이 살랑 거리는 오후, 브런치카페.

최태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달콤한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친구, 서유정은 세상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메디핏에서 사내 연애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이제 막 3개월을 넘긴 참이었다.

“여기 정말 예쁘다.”

저절로 눈이 반짝여지는 카페의 전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았어, 자기야?”

유정의 물음에 태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눈 앞에 불현듯 떠오른 기억 하나. 까만 생머리를 휘날리며 웃던 차연의 모습.

바로 이 자리, 바로 이 테이블에서 차연과 함께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나눈 사소한 대화들과 차연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맴돌았다.

태윤은 그 기억을 속으로만 삼키며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냥 인터넷 검색하다가 봤어. 요즘 핫플이잖아.”

유정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주문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와, 여기 메뉴 하나하나가 다 맛있어 보여. 뭘 먹을지 고민되네.”

“그럼 우리 이거 시그니처 메뉴 시켜서 나눠먹을까?”

“좋아.”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에 자리잡았다. 그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테이블을 감돌았다.

잠시 후, 카페 직원이 커다란 쟁반에 그들의 브런치를 담아 가져왔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유정은 눈을 반짝이며 에그 베네딕트에 포크를 찔러 노른자를 터트렸다. 황금빛 소스가 머핀 위를 천천히 흘러내리며 접시에 고이기 시작했고,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한 입을 입어 넣었다.

“음, 정말 맛있어!”

그러자 태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접시에 있는 베이컨을 집어 들었다. 베이컨의 바삭한 짭짤한 풍미가 그의 입안 가득 퍼졌다.

그때였다.

태윤의 시선이 우연히 창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이 멎는듯 했다.

카페 앞 정원에는 하얀 말티즈 한 마리가 귀엽게 놀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긴 머리가 햇살에 부드럽게 빛나고, 그녀의 움직임에서 익숙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

이차연이었다.

차연은 쭈그려 앉아 강아지와 놀고 있었고, 태윤은 그 장면에 잠식되듯 시선을 고정했다.





“왜 그래? 뭐 보고 있어?”

유정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깨웠다.

태윤은 순간적으로 창밖을 가리키던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자기야. 부장님, 혹시 눈치채신 거 아닐까? 어제 회의때 나를 좀 이상하게 보시던데…….”

“걱정마. 우리가 그렇게 들킬 만큼 어설프진 않잖아. 부장님이야 늘 의심 많은 스타일이니까.”

태윤은 테이블 위에 뻗어져 있는 유정의 손은 은근슬쩍 잡아주었다.

“근데 자기야,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아. 우리 회사 규정 빡세잖아. 들키면 곤란해질 거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태윤은 자꾸만 창밖의 차연이 신경 쓰였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게 떠올랐다.

시선이 자꾸만 창밖의 그림자로 향했다.

차연이 강아지를 향해 미소 짓는 모습.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다시금 떠오르는 감각처럼 태윤을 흔들었다.

유정과의 대화는 더 이상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태윤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정에게 말했다.

“으응? 알겠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봄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차연에게로 향했다. 차연은 이제 강아지와 떨어져,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카페로 들어가려는 듯 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

태윤은 온몸이 얼어붙는듯 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차연은 그를 스쳐지나갔다.

‘어째서?’

그녀의 눈에 태윤은 없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지나치듯, 그렇게.

수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몸을 휩쓸었지만, 차연은 마치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스쳐갔다.

한순간에 태윤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느낌이 정확하다면,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태윤은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내가 안 보인거야?’

어떤 추억도,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은 차연의 눈빛 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태윤은 그 카페 밖에서 담배를 꽤 오랫동안 태웠다.

***

차연의 작은 원룸은 해질녘의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한숨을 쉬며 붓을 들어 올린 차연은 졸업 작품 전시회를 위해 준비 중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깊은 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 과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붓 끝에서 물감이 캔버스에 닿는 순간, 차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붉은색 물감이 흰 캔버스를 물들이는 모습이, 그날 밤 신우빈이 자신의 피부를 적시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

작은 탄식과 함께 차연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숨결이 바로 곁에 있었던 그 순간. 그가 자신의 팔을 살며시 쓸던 감촉. 손끝이 피부 위를 미끄러지던 감각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다.

차연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 기억은 도리어 더 뚜렷하게 몸을 휘감았다.

‘아니야. 생각하지마. 이건 그냥…….’

자신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 그 순간, 신우빈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안돼……집중해야 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점점 더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차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붓을 들었다. 하지만 붓을 든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캔버스 위로 물감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그날 밤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처럼느껴졌다.

차연의 가슴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때, 정적을 가르는 전화벨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차연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화면에 떠오른 번호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친숙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는 그냥 지나쳤을 터였다.

“여보세요?”

짧은 침묵 끝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연아, 잘 지내?]

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 미묘한 울림이 생겼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 하지만 누구인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세요?”

차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야, 최태윤.]

“최태윤……? 아.”

이름을 듣고 나서야, 머릿속의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그와 함게 보냈던 시간들이 아주 흐릿하게나마 한 장면씩 스쳐갔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잠시 멈췄다. 태윤은 기가 막힌듯 말을 잇지 못했다. 차연이 알아듣지 못한 첫 순간에 느낀 감정이 충격을 안겨준듯 했다.

차연도 불편한 침묵을 느끼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 저녁에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뭐?”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났으면 하는데.]

차연은 그 물음에 살짝 당황했다.

왜 이제 와서 그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그리고 왜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지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왜?”

[잠깐이면 돼.]

“…….”

[헤어지기 전에 너한테 돌려주지 못한 것도 있고.]

잠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걸었던 공원의 벚꽃길이 떠올랐다. 손을 잡고 바라봤던 노을.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나누었던 아픈 말들.

차연은 태윤의 말을 곱씹으며 대답을 망설였다.

“알았어.”

[……정말?]

“저녁에 보자.”

[고마워. 늦지 않게 갈게.]

전화가 끊기고, 방 안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차연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돌려주려는 게 뭐지?’

벽시계의 초침이 마지막 바퀴를 돌며 9시를 가리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차연이 옷장 문을 열었다. 큰 망설임 없이 편안한 후드티와 추리닝을 꺼내 입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공원으로 이어졌다. 밤의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날리며 지나갔다.

차연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담담해도 되는 걸까?’

눈앞에 지난 날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태윤을 그리워하며 흘렸던 눈물, 잠 못 이루던 밤들, 그리고 그를 잊으려 애쓰던 자신의 모습.

하지만 지금, 그를 만나기 직전의 자신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니, 차라리 아무렇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차연아!”

공원 입구에서 태윤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재킷에 단정한 셔츠, 구두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이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차연은 눈을 깜빡였다.

‘맞아……내 전남친이 저렇게 생겼었지.’

태윤은 그녀에게 가까이 와닿았고, 차연은 그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다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듯 했지만, 단순한 설렘이나 미련은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태윤아.”

밤 공기가 차가워질 무렵, 태윤의 심장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올랐다.

헤어진 지 벌써 3개월. 처음으로 그녀를 공식적으로 마주했다는 사실이 묘한 설렘과 불안을 일으켰다.

“차연아…….”

태윤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그의 눈빛은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듯 조심스러웠다.

편안한 차림의 그녀는 예전의 차연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그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덩달아 자신 또한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때, 태윤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미리보기 화면엔 유정이 보낸 톡이 떠 있었다.

[자기 뭐해? 어디야?]

그는 잠시 망설이다 메시지를 읽은 척 무시하고 휴대폰을 깊숙이 넣었다. 잠시 얼굴에 미세한 죄책감이 스쳐지나갔다.

차연은 그를 보며 곧장 물었다.

“뭘 돌려주려고 온 거야?”

태윤은 주머니 속에서 USB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네거야.”

“……!”

“정리하다가 찾았어. 열어봤는데, 중요한 파일들이 있더라고.”

“이건…….”

“너 졸업 작품 준비하고 있는 거 잘 아니까.”

차연은 USB를 받아 들고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스쳤다.

“고마워. 정말 필요했는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눈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치한 채 말이다.

“나중에 진로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어?”

태윤이 물었다.

차연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세히 생각해둔 건 없어.”

“그래?”

“한 단계씩 해나가고 싶거든. 졸업전시회부터.”

그녀의 단순한 대답에 태윤은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신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이차연.”

“응?”

“어제 봄날의정원 카페에서 나 못 봤어?”

차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 못 봤는데.”

“흠……”

“너 거기 왔었어?”

태윤의 표정은 한껏 굳어지고야 말았다.

제대로 확인사살 당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정말 자신을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로 외면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날 못 알아볼 수 있어?”

“……아.”

“내가 그렇게 흔한 비주얼이었나?”

“미안.”

차연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 때문에 스스로 놀랐다. 사실, 생각보다 미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묻어두었던 감정이 쏟아져 나올 줄 알았던 순간, 오히려 허탈함만이 태윤을 채웠다.

“나 여자친구랑 거기 갔었거든. 근데 너가 그때 말티즈랑 노는 걸 봤어.”

“아…….”

“나는 너를 바로 알아봤는데 넌 날 그냥 지나쳐 가더라.”

“여자친구 생겼구나. 축하해, 최태윤.”

“고마워. 회사 취업하고 나서 또 새롭게 연애를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네.”

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차연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지만, 그녀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읽기 어려웠다.

알 수 없는 무덤덤함에 태윤은 속으로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렇구나…….”

차연은 태윤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새로운 사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태윤과의 관계가 너무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편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던 순간, 차연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어라.”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스스로도 당황했다. 바로 고개를 숙였지만, 눈물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너울친 탓이었다.

“차연아, 왜 울어?”

태윤도 눈물을 보고 놀라서 정지했다. 하지만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은근 으쓱해했다.

“에이, 설마……아직도 나 못 잊은 거야?”

“…….”

“그래서 우는 거야?”

그가 손을 뻗어 차연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니 그 손길은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고개를 가로 젓는 차연이었다.

“아니야.”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차연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아, 얼굴에 무릎을 묻었다.

“차연아……?”

“너랑 좋았었던 기억이 안나…….”

“뭐……?”

“그게 슬퍼서…….”

“!!”

“그게 슬퍼서 우는 것 같아.”

희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엔 명확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태윤은 당황했다. 차연의 눈물을 마주하며 자신도 모르게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졌고, 입술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차연아, 그때. 예전에 말이야.”

태윤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땐……내가 진짜 너한테 심했어…….”

“…….”

“네가 날 기다리고 있었을 때.”

“…….”

“난 과외하느라, 여행 다니느라, 취업 준비한다고 널 혼자 많이 뒀잖아.”

그의 입에서 떨어진 한 마디, 한마디가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었다. 태윤은 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이제야 명확하게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달렸고, 그 과정에서 차연의 존재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어리석음.

“정말 미안해…….”

“…….”

“그땐 내가 진짜 심했어.”

차연은 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래. 그땐 그랬지.”

예전이었다면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하는 모습에 자신도 미련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차연에겐 외로워하던 시간 마저 오래된 감각처럼 흐려져 있었다.

“새로운 여자친구한텐 잘해줘.”

“……!”

태윤은 그녀의 차분한 대답에 예상치 못하게 당혹스러웠다. 이토록 담담하게 나올 줄 몰랐다.

그가 억눌린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나는 원하던 회사에 들어갔거든. 그래서 이제서야……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겠어.”

“…….”

“그때 네가 혼자 얼마나 버텼을지……난 아무것도 모르고 내 욕심만 쫓았어.”

차연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난 네 옆에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항상 나를 기다려줄 거라고 믿었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

차연의 눈빛 속에는 이제 더 이상 태윤에게 기대하는 감정이 없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그의 한 마디, 그의 표정 한마디에 흔들리고 상처 받았을 텐데, 지금의 차연은 이미 멀리 떠나버린 사람 같았다.

태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 나한테 아무런 미련 없는 건가?’

하지만 그 사실은 인정하는 순간, 자신도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두려웠다.

차연은 서서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

그녀는 태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너한텐 이제 여자친구가 있잖아.”

“…….”

“그러니까 그녀에게 잘해줘. 이번 연애는 예쁘게 결실 맺길 바래.”

“차연아.”

“고마워, 태윤아.”

마지막 말을 남기고 차연은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공원을 벗어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잔잔한 파도가 남아 있었다.

태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선 채,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실루엣은 그의 시야에서 점점 작아졌다.

손끝에서 빠져나가 버린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애쓰지만, 영원히 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

차연은 공원을 벗어나자마자 집으로 가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집 근처 포장마차로 향했다.

소주 한 병을 주문하고, 천천히 잔을 채웠다. 투명한 잔 속의 술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차연은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감각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차연은 술을 계속 들이켰다.

몇 잔을 마셨는지도 모르게, 술기운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알코올이 몸 속에 퍼질수록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

술에 취한 차연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채,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 아주머니의 손길에 의해 깨워졌다.

“아가씨, 이제 마감해야 해.”

차연은 눈을 간신히 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에 취해 어지러웠고,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집으로 가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뜻밖의 방향으로 향했다.

메모리북스 서점 앞에 멈춰섰다.

고요한 밤, 간판 불은 꺼져 있었고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책들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

차연은 그곳에 서서 잠시 서점을 바라보았다.

유일한 나의 안식처.

싸늘한 바람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나갔다. 술기운이 잔뜩 올라 몸은 따뜻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갔다.

차연은 서점의 벽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뭐라고…….”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숨은 밤공기 속으로 가볍게 흩어졌다. 차연은 머리를 흔들며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려 했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차연 씨?"

차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메모리북스 서점 앞에 신우빈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어딘가 서늘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서 뭐 하세요?"

우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차연은 자신이 술에 취한 모습을 들킨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차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술 드셨네요?"

우빈은 그녀의 곁에 천천히 앉았다.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그의 침묵은 다정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밤하늘의 별빛이 은은하게 비쳤고, 서점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차연은 자신도 모르게 우빈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을 느끼며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같이 걸을래요?"

우빈이 낮게 속삭였다. 

차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일어나 서점 앞 작은 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우리네 마음을 두드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밤이었다.







<너만 모르는 세계, 끝>

작품 등록일 : 2024-10-16
최종 수정일 : 20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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