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와 된장녀 by reiha
“오늘 하늘 봤어요? 날씨 너무 좋네요, 이거 딱 출근하고 싶은 날인데, 내가 아침부터 그러면서 다 왔다니까요.”
모니터를 두드리고 있던 차 대리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다. 차 대리의 무심한 표정에 비해 다른 사원들은 벌써부터 그녀의 등장에 환해진 표정이다.
“아주 난 아침부터 신영 씨만 보면 기분이 다 좋아져. 딴 사람도 이렇게 좀 해봐요, 조옴.”
“부장님, 제가 그러면 아침부터 정신 산란하다고 그러실 거면서.”
환해진 김 부장과 이건 차별이야, 라며 퉁퉁 불은 윤 대리의 대화 속에서, 혼자 고고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화제의 이신영은 탁, 하고 소리도 발랄하게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흥, 저것 좀 보라지. 누가 된장녀 아니랄까봐 아침부터 스타벅스 커피는 무슨.
남들 다 출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 와중에 커피 살 시간은 있었나보지?
“아, 차경원씨”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 못마땅한 눈매로 그녀의 커피컵을 보고 있던 차 대리는 갑작스런 신영의 말에 깜짝 놀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긋 웃는 이신영.
“담부턴 차경원씨 커피도 아침에 같이 사올까 봐요. 커피 좋아한다고 전에 그랬었죠?”
“…난 스타벅스 커피 안 마셔요.”
“어머,”
갑자기 다시 웃는 이신영.
“이거 스타벅스 커피 아닌데요? 커피빈에서 사온 건데. 컵 로고가 틀리잖아요.”
“…….”
졸지에 스타벅스 컵과 커피빈 컵도 구분 못하는 촌놈이 된 차 대리는 애꿎은 모니터만 노려보았다. 정말 맘에 안 든다, 이신영.
화제로 둘러싸인 신영이 이 컨설팅 회사에 입사한 것은 올해 3월. 쭉쭉빵빵한 몸매에 얼굴까지 남부럽지 않은 그녀(그래, 얼굴만은 내가 인정한다.) 가 그 외모만으로도 이 작은 컨설팅 회사 내에서 화제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정말 입이 딱 벌어진 것은 그녀의 경력이 알려지고 나서였다. 어쩐지 첫 입사치고는 나이가 좀 많다 했더니,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한 유통회사에 입사, 3년간 높은 실적을 올린 후, 우리 회사로 와주십사 하는 수많은 헤드헌터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한국에 돌아와 (항간에 의하면 “제 조국은 한국이니까요.” 라는 명언을 남겼단다. 아주 연예인 나셨다!!!) 여태까지의 경력이 아닌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해보겠다며 이 컨설팅회사에 입사한 것이다.
“차경원씨 또 웹서핑 하시네. 자꾸 딴 짓 하면 부장님한테 일러줄 거예요.”
웃음이 섞인 신영의 작은 목소리에 차 대리는 다시 흥, 하고 무시한다. 이런 여자,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바로 옆 자리라 사사건건 간섭하기 때문에 더 짜증이 난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는 거예요?”
옆자리 신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차 대리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황급히 키를 눌러 화면을 꺼버리는 차 대리.
“이신영씨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네요.”
“어머, 드디어 이쪽 보고 말씀 하셨네요. 일주일 만에 얼굴 보는 것 같아요.”
신영은 다시 방긋 웃는다. 살짝 머리를 흔들며 웃는 그 미소에, 양쪽 귀에 앙증맞게 매달린작은 큐빅 귀걸이가 흔들린다. 머리칼에서는 옅은 꽃향기가 풍긴다. 순간 차 대리는, 그 귀걸이는 얼마죠? 그것도 명품관 가면 파나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했다.
“근무시간에 떠드는 거, 안 좋아합니다.”
“근무시간뿐만 아니라, 점심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이 쪽 보고 말씀 안 하시잖아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았죠.”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자신은 아무 잘못 없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하는 거지. 물론 그녀가 대체 무슨 차 대리에게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도 할 말은 없었다.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문제였으니까. 아마도 맘에 안 드는 것은, 그녀의 반짝이는 귀걸이와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커피 컵과, 상당한 가격으로 보이는 치마 정장 사이에서 빠져나온 쭉 뻗은 다리---아니 이건 아니고, 좀 더 단순하게, “난 당신이 된장녀라서 맘에 안 들어!!!” 라고 말해 버릴 수 있다면 좋을 문제였을 것이다.
“이신영씨, 신경쓰지 마. 차 대리는 원래 좀 무뚝뚝하거든. 경상도 싸나이라서.”
몰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 대리가 끼어든다.
“경상도? 그럼 부산 사람?”
“…네.”
내키지 않게 대답하는 차 대리의 얼굴 위로, 신영의 웃음소리가 다시 흐른다.
“어쩐지, 정말 무뚝뚝하더라. 부산 사람이라 그랬구나아….”
후후후,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에도 가격을 매겨보고 싶은 기분을 다시 꾹 누르며, 모니터를 향하는 차 대리의 옆으로 신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난, 아무래도 나한테만 무뚝뚝한 것 같아.”
“아, 차 대리, 그 커피 내가 사지.”
동전을 넣으려는데, 김 부장의 느물느물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말릴 틈도 없이, 짠돌이 김 부장의 주머니에서 300원이 나와 자판기 안으로 떨어진다.
“고맙습니다만,”
“왜 내가 사냐고? 뭐 별 거 있나, 부하직원이랑 오랜만에 대화 좀 해볼까 해서 그러지. 딱 300원 어치만“
뭔 말씀 하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어디 할 테면 해보시죠, 라는 얼굴의 차 대리.
“이신영씨한테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제가 어떻게 했는데요?”
“아니, 차 대리야 원래 무뚝뚝하기로 유명하지만, 이신영씨한테는 유별나게 심한 것 같아서.
이번에 베니아 프로젝트건도, 차 대리가 이신영씨랑 팀하기 싫다고 윤 대리한테 넘겼다면서.“
“…그래서 이신영씨가 뭐라고 그래요?”
“아니 신영씨가 뭐 그럴 사람인가? 얼마나 이뻐, 사람 싹싹하고 얼굴 반반하고 능력 있고.
근데 자네도 말이지, 이유 없이 사람 싫어하는 타입은 아니잖아? 대체 뭐가 맘에 안 들어서 그래? 신영씨가 너무 럭셔리해서 그런가?“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하핫 하며 김 부장은 멋쩍게 웃는다.
“네, 그래요. 너무 럭셔리해서.”
헉…. 창창 얼어붙은 김 부장을 뒤로 하고, 차 대리는 다 마신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신영은 일을 마무리하고, 기지개를 펴고, 종이컵에 조금 남은 커피를 마셨다. 사실 자신은 스타벅스 커피도 커피빈 커피도 자판기 커피도 좋아한다. 특별히 가리지는 않는다. 다 마신 컵을 휴지통에 버리면서 신영은 차 대리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때도 유별나게 무뚝뚝했던 차 대리. 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 이 사람 대하기가 쉽지는 않겠구나, 생각하며 긴장했었다. 그래서였다. 차 대리가 건넨 자판기 커피를 마시려고 하다, 너무 뜨거워서 비명을 지르며 쏟았던 것은.
“괘, 괜찮으세요?”
그리고 차 대리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마 신영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여자 앞에서 말을 더듬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예, 괜찮아요. 커피가 뜨겁네요. 자판기 커피는 처음이라서.”
아마 설명을 덧붙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자판기 커피는 마셔본 적이 없다고.
“스타벅스에서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면 뚜껑을 덮어서 주거든요. 그래서….”
“아, 그렇군요.”
그 대답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져서, 신영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걸까 생각했었다. 그 후로 다른
사원들에게, 차 대리는 경상도 남자라 원래 무뚝뚝하다는 얘기를 듣고 적당히 납득했을 뿐.
그리고 조금 더 많이 신경 쓰게 되었다. 무뚝뚝한 차 대리가 가끔 보여주는 다정다감함에. 백인들과는 다른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그 이중적인 부드러움에.
‘내일은 같이 밥 먹자는 얘길 해 볼까? 잠깐, 한국에선 여자가 먼저 그러면 매력 없는 거라고 하던데.’
퇴근 후 차 대리는 방에서 컴퓨터를 켰다. 집에까지 와서 일을 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건 일은 아니었으니까. 능력 있는 여자 이신영은, 차 대리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가 이중적인 남자라는 것. 차 대리는 자주 들어가는 포털 사이트의 화면을 노려보았다. 얼마 전 ‘된장녀’ 가 화두가 된 이후 아직도 포털 사이트에서는 된장녀 논란이 한창이었다. 이신영이 자판기 커피가 뭔지 알고 있기만 했었어도, 차 대리가 설레는 가슴으로 건넨 자판기 커피를 엎지른 후 스타벅스 얘기를 꺼내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렇게 예쁘고 당당하고 럭셔리하지만 않았어도 차 대리가 한밤중에 집에서 몰래 컴퓨터를 켜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의 원가가 얼마인지 아는가? 한 손에 스타벅스 로고가 자랑스럽게 보이도록 컵을 들고 다닌다고 다 뉴요커가 되는 것이 아니다.>>
메인 화면에 떠 있는 된장녀 관련 기사 아래에, 무뚝뚝한 차 대리는 입을 꽉 다물고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도 그런 여자 하나 있다. 아침마다 스타벅슨지 커피빈인지 무슨 컵을 들고 출근하면서 명품만 밝히는 자칭 뉴요커. 일이나 제대로 하면 말을 안 해, 얼굴엔 화장품을 잔뜩 쳐바르고, 돈 많은 남자만 밝히는... ...자판기 커피는 못 먹는댄다. 웃겨서 정말.>
그렇다. 문제는 바로 자판기 커피와 스타벅스 커피의 차이였다.
가격의 차이가 아니라, 자존심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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