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몸뚱아리, 늙어가는 부모님
아버지는 늙어가고 어머니는 몸이 계속 안좋아지신다. 두 분 다 현실에서의 행동 제약이 몸에 의해 이뤄진다. 늙어가는 몸. 세월은 계속해서 흐르는데 흩날리는 모래들이 정교한 톱니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흘러들어가 서서히 말썽을 일으키듯, 두 분 내 부모님의 몸은 쌓여가는 세월 앞에서 여지껏 누려온 즐거움보다 고통이 훨씬 더 커져가는 부채를 떠안고 가신다. 

아버지는 예전만큼 제대로 운전을 하시지 못한다. 30년 무사고 경력의 아버지가 얼마전엔 늦어지는 반사신경 때문에 접촉사고를 일으키셨다며 나에게 말을 해주셨는데, 나를 태우고 운전하신 엊그제의 상황에서는 4번씩이나 반응이 떨어지셔서 잘못된 차도로 들어서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희어지신지 오래 되었건만 이제야 모든 몸에서 물이 빠져나가 새하얗게 말라 비틀어지듯 기억도 반사신경도 웃으시는 표정도 말라 비틀어지고 계시다. 

어머니는 오랜 일이지만 갑상선 암 치료하신 이후로부터 면역체계가 고장나셔서 온 몸이 고통 투성이다. 겉은 아버지보다 멀쩡해 보일수 있지만 속은 훨씬 일찍 망가지셨기에 온 몸을 짓누르는 고통을 커다란 항아리째 머리에 이고 다니신다. 등푸른 생선구이를 잘 하는 유명 생선구이 정식집에 데리고 가 밥을 사드리고 싶었는데, 건강 때문에 등푸른 생선은 드실 수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항상 손에 면역수라 새겨진 물을 들고 계셨다. 입 안이 계속 건조해져 침이 안 나오게 되었기에 하루에 물을 4리터나 마셔야 했는데, 그렇게 항상 건조해지 일쑤인 구강환경 때문에 대부분의 이에 충치가 자리잡아 잇몸마저도 곳곳이 내려앉았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나를 보러 오신 두 분은 차를 운전하시며 길을 수차례나 헤메었고, 30분 간 화장실을 두 세 차례나 가셔야 했다.

아버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본인과 똑같이 늙어가는 몸뚱이에 갇혀 하루하루 부식중인 나를 보시고는, 요즘사람들은 결혼해서 애를 낳아 키우는 대신 개를 데리고 산다지? 이해가 안 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지 사람보다 개를 사랑한다는건 세상말세인거야. 아무리 사람이 못 미덥고 때론 배신을 한다지만, 개가 항상 꼬릴 흔들며 시림 좋다고 반긴다지만, 사람보다 개를 소중히 할 순 없는거야, 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떠올렸다. 과거 개를 키운 적 있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개를 좋아하셨고, 개도 누구보다 아버지를 가장 잘 따르곤 했던 그때의 순간들을 말이다. 나보다는 개를 한 마리 더 키우셨더라면 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미소를 많이 지으셨을테고 경제적으로도 본인과 아내인 어머니를 위해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행복한 노후생활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부모님 두 분이 겪어야만 했던 감정적인 힘듦은, 좋았던 감정을 압도하고도 남았으리라.

몇 달 전엔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교회 모임의 동년배들 기도제목엔 하나같이 부모님의 건강회복과 수술 무사기원들이 들어가 있다. 나는 불효자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 아들 낳아서 뭐 하느냐를 이젠 더 이상 내 앞에서 꺼내어 말하지 않게 되셨는데 그렇게 된 지 꽤 되었다. 이젠 한탄보단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그 점이 훨씬 나를 슬프게 만든다. 왜 나는 지금껏 이렇게 부모님의 기대를 단 한 순간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고 내 하고픈 대로만 내내 살아왔던 걸까. 

며칠 전엔 주마등처럼 나의 살아온 인생이 회상되어지기도 했다. 최초의 기억, 어린 시절 돌자갈 밭에 주저앉아 있던 어린 내 모습부터 시작해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을 거치고 대학생에까지 이른 후 최근의 내 모습에까지. 그간 나의 우여곡절 많았던 사건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사시사철 늘 불어올 것만 같던 열대우림의 습기 머금은 공기-온갖 동식물 곤충들이 생명의 몸부림을 치고 울부짖으며 꽃들이 마구 피어나던 그 모든 꿈틀거림을 한 가득 머금은 습한 공기는 더이상 불어오지 않게 되었는데, 사람의 인생이 자신의 무덤 위 묘비에 새겨질 글귀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긴 여행길이라 친다면 나는 열대우림을 오래전에 지나쳐 왔던 것이고 이제 나는 내 앞의 뜨거운 열풍, 메마른 모래바람이 불어닥치기만 할 뿐인 단색의 사막만을 배경삼아 홀로 횡단하는 중인 것이다.

내 몸에도 이제는 내가 눈으로 그 변화과정을 꾸준히 지켜봐 올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몸과 다를바 없듯,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작은 모래입자가 틈틈이 그리고 꾸준히 내려앉아 나의 관절들 사이로 혈관들 사이로 부식을 일으키며 들러붙는 중이다. 더는 삶에서 큰 기쁨 느낄수 있길 바라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이젠 그러한 큰 기쁨보단 내 행동이 보람있었다는 식의 감각 바로 그것만을 유일하게 느끼고 싶은 욕구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내가 한 노력만큼의 합당한 결과를 얻어내는 기쁨, 내가 세상에 무언가 나만의 흔적을 남기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 외 다른 모든 감정들, 젊을적 자꾸만 손에 쥐려 했던 그 모든 다른 감정의 색들은 바래지고 있고 심지어 슬픔과 괴로움의 검은색 마저도 점점 희미해져 이미 퇴화되어버린 여타 다른 감정의 색들처럼 점점 회색빛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오직 내 행동들, 내가 행했던 그 모든 것들에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믿게 만드는 보람 만큼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희미해지지 않는 것을 넘어 보람이라는 그 감정의 색 만큼은 예외적으로 오히려 더 선명해져 가는 듯 싶다. 어찌보면 늙어가는 몸뚱이와 함께 퇴색되어가는 총천연색 감정의 색들은 몸과 함께 흘러가는 순간의 것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찰나의 기쁨들인 것이며 오직 자기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만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추구하게 될 가장 보편의 인간다운 감정이자 본능인 것은 아닐까.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인간만의 사회, 문명을 건설했다. 자기의 존재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나 역시 젊음이라는 자연을 벗어나 늙어가는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 나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믿고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만들어주신 두 분이 먼저 횡단하고 계시는 모래사막과 그 뒤를 뒤따르는 나.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에 갖혀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채 세월과 함께 부식되어가기만 하는 삶의 종착지는 너무나도 슬프다. 부모님은 나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 그런 삶을 자초하셨고, 종착지에 이르른 후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가버리면 결국엔 두 분의 묘비마저 치워져 다른 이의 묘비로 대체될 것이며 세상에 남아 두 분을 기억하는 이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다. 

왜? 나 때문에? 그 점이 너무 슬프다. 아버지는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셨다 이미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서 열대우림을 걸어가시던 그 순간에 나를 낳아 직장생활을 하고 계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하셨다. 자아실현보다는 나를 자신의 삶 일부로 완전히 끌어안아 생각하시곤 하셨기에, 온전히 자신의 속에 나라는 타인의 감정 그 모든 것을 그대로 품어 안으셨기에, 나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나의 슬픔을 본인의 슬픔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렇게 어머니도 자아실현을 이루지 못하셨다. 사람과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다. 그 점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나는 두 분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 자신도 속절없이 부식되어만 갈 뿐인 인생을 살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셋이서 나란히 모래무덤 속으로 빨려들어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세상 속에서 고통만 짊어진 채로 살다 입자단위로 분해되어 영영 사라지는, 한 줌씩의 먼지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결말은 너무나 비통하다. 슬프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아버지는 나 대신 개를 키우셨어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 대신 개를 자신의 마음에 품으셨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을테고 서로가 서로를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한 결속의 지지대가 되어주었을 것이며, 결코 잊히지 않는 순간들로써 세상의 일부가 되어 최소단위의 입자가 된 후에라도 공간속에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잊더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옅은 흔적의 세 모서리 꼭지점과 그 사이 사이를 잇는 끈끈한 유대의 기억, 그 순간들, 찰나가 서로를 영원으로 엮어놓을 끈. 

아직은 부모님 두 분과 나, 3명의 삶이 어느하나 종착지에 이르진 않은 상태이니 내가 뭔가를 더 해 볼 시간이 남아있다. 이대로 두 분을 떠나 보내기엔 받기만 한 것이 너무나 크다는 내 부채의식이 너무 크다. 나는 전혀 살아오면서 도덕적이라거나 효를 강조하는 삶을 살아온 적 없지만, 부모님 생일조차 제대로 챙겨드린 적 없지만, 받기만 한 삶이 너무나 커져버리면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변하나 보다. 나를 낳으신 두 분의 몸뚱이와 감정의 색채들 사이에 모래가 내려앉아 자꾸만 삐걱대는데 그러한 와중에도 수십년째 여전히 두 눈으로 나를 말없이 지켜보시고 계시는 저 서글픈 시선, 생선처럼 날이 갈 수록 빛이 바래 흐려져 가기만 할 뿐인 노쇠한 눈망울의 저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를 바라보는 저 혼탁한 눈망울들이 이번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의 망막에 아주 또렷이 비친다는 것 바로 그 사실 하나가 나를 깊은 슬픔에 빠져들게 만든다. 아주 서서히 우리 셋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모래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나를 바라보기에 슬픈 저 두 눈을 보고 이내 슬퍼지는 나의 눈을 저 두 분은 또 바라보시고, 그래서 더욱 더 슬퍼지며 혼탁해지는 저 눈망울들을 다시 한 번 또렷이 망막에 새기곤 해버리는 나. 끝없다 거울이 거울을 바라보듯 그 속에 무한히 맺혀나가는 반복되는 슬픈 상들이 나를 그리고 부모님 두 분을 계속해서 슬프게 만든다. 

... 



여기저기서 쌓여가는 잔잔한 슬픔들. 무딘 슬픔은 세월과 함께 켜켜이 쌓여간다. 살아있을 동안 계속 될 크고 작은 일상의 불행들. 그렇다 하더라도 마냥 좌절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때 누구를 슬프게 했을 감정들은 뒤돌아 보면 어느새 빛 바랜 회색의 굳어버린 페인트 자국 쯤으로만 남아있게 될 테니까. 옅어질 대로 옅어진 슬픔은 더이상 슬픔이 아니다. 슬프기는 했었던 과거의 어느 날 기억 그 끄트머리 어딘가 쯤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언젠가는 슬프려 해도 슬퍼할 수 없을 날들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 올 거란 것. 어떠한 장면조차 인상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될 때, 매순간 기억하고 맘에 새겨보려는 것 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때. 충분히 무감각해질 나의 몸, 충분히 무신경해질 나의 감각들. 사용기한을 완전히 지나버린 몸뚱이가 숨 만큼은 여전히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할 때, 그 직전까진 내 일상을 빼곡히 채울 옅은 사건들은 결코 부정적인 감정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나를 부정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나를 떠올려 본다. 모든 것들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져 새롭게 관찰되어지곤 했는데, 때론 미화되고 때론 합리화되기도 했던 것이다. 매번 기억의 파편들은 조명의 각도를 새롭게 해서 전에 없던 장면들로 재구성되어지곤 했다. 내가 의도할 마지막 결론, 그 하나를 위해 그 전까지 존재했던 무수한 장면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언제나 나에게 유리한 방향의 해석으로만 일관하곤 했는데, 글로 끄집어내기 위한 기억의 편집 과정에선 그렇게나 미워했고 또 미움받았던 사람들 조차 예외없이 단막극의 극적 긴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명배우들로 탈바꿈하곤 했으며 나 자신은 그것을 한 발짝 떨어져 말없이 지켜보는 관객 겸 편집감독이 되어 있었다. 다양한 역을 맡아야만 했던 수많은 배우들. 그들은 언제나 나의 시선이 다시 가닿는 그 순간엔 내가 반드시 그 심정과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고 해석해내야만 하는 여느 문학작품에 등장할 법한 현실감 충만한 캐릭터들로 바뀌곤 했다. 그러니까, 내 몸이 완전히 나를 져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전까진 어떠한 경험들이라 하더라도 내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전해지기에 충분히 괜찮을 이야기들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무엇이라도 괜찮을 것이다. 이때까지도 나는 늘 괜찮게 되는 결론만을 맞이했으니까.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짧다. 결국엔 흩어지게 될 몸뚱아리를 부여안은 내가 남아있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내게 의미가 있을 일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여느 힘든 감정들을 겪을수 밖에 없다 치더라도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누군가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며, 나 또한 상대방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때로는 상대방에게 특별한 존재로 계속해서 남아있기 위해 나 자신이 스스로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될 것을 각오해 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님이 내게 그러했듯이.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별 볼일 없는 삶이라고 불리워진다 할지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만큼은 비할 바 없이 특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삶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늙어가는 몸뚱이의 문제는 이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꽃은 피면 진다. 시들어가는 꽃.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일테다. 하지만 꽃을 기억하는 이는 져버린 꽃을 떠올리지 않는 법이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무의미하게만 비치던 내 삶에서 스스로가 찾아낼 중요한 의미들과 그 순간들. 그냥 저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조금만 더, 아니 사실은 조금은 더 오래 내 앞날 현재의 나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고 믿어보기로 하는 중이다. 만에 하나, 나의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데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괜찮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살아만 있다면 희망은 있으니까. 소중한 사람의 특별한 삶을 위해 그 삶의 배경 어디쯤을 차지하는 자그마한 소품 정도는 나도 되어 줄 수도 있을테니까. 나의 부모님이 내게 그러했듯이. 아, 실수했다. 정정하겠다. 부모님은 내 삶의 배경 어디쯤의 자그마한 소품 한 두개 쯤이 아니다. 내 삶의 배경에 가만히 자리잡고 움직이지 않는 별 두 개, 어두운 밤하늘을 언제까지고 비춰주는 빛나는 별이다.
작품 등록일 : 2022-12-22
글이 참 좋다.
뭉끼   
충분히 공감되고 몰입해서 읽었어
그냥사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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