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오뚜기 케챱. 잘가,오뚜기
케첩을 처음 먹었던 날은
국민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막내를 유아원에 데려다주느라 길을 좀 걷자니
하늘은 두꺼운 회색 솜으로 꾹꾹 눌러 채운 것 같고
매미들은 고마 더워 못 살것다 우왕 우왕 정신 사납게 아침부터 울어대고
숨을 쉬는 게 이렇게 애쓸 일인가 싶고
숨쉬기가 그 모양이니 걷는 것도, 막내의 손을 잡는 것도,
한쪽 어깨에 울러 맨 유아원 배낭이 미끄러지지 않게 신경 쓰는 것도
뭐하나 쉬운 게 없는 그런 아침이었다
막내의 솜털 같은 머리가 삐죽삐죽한 사이로 머릿 가죽에서 땀이 퐁퐁 솟아나는 게 보였다
그러게나 말게나 이제 4살이라고 고집깨나 부리는 녀석은
걷는 둥 마는 둥
바삐 비 올 채비를 하는 개미 구경에 정신을 쏙 빼고 있었다
도로는 돌아서면 파 재끼고 또 파묻고 도대체 공사를 안 하는 날이 있긴 했던가 싶을 만치 나날이 공사 중이었다.
그때그때 아스콘을 적게 넣고 많게 넣고 딱 표나게 얼룩덜룩 울퉁불퉁 누더기 바닥이 따로 없다.
시커먼 매연을 있는 대로 뿌리면서 쌩하니 달려오던 퍼런 포터가 우리 옆을 지나면서 울퉁에서 그랬는지 불퉁에서 그랬는지 한번 쾅 하고 튕기는 소리를 내더니 뻘건 깡통 하나를 툭 떨어뜨리고 갔다.
"눈나 저거 머아"
바닥에 내리 꽂힌 뻘건 깡통에는 혀를 내밀고 밉살스럽게 웃는 얼굴이 그려져있고
오뚜기 케챺이라고 적혀있었다.
일단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토마토 그림도 있고 이건 필시 먹는 거다 싶어서 우선 왼손 파지하고 옆구리에 낀다.
"이따가 집 오면 같이 열어보자 알겠제?"
개미를 쫓던 눈이 영영 메롱 하는 오뚜기 깡통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막내를 어르고 달래서 유아원에 밀어 넣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좀 걷다 말고 오뚜기를 양손을 쥐고 눈을 맞췄다.
"반갑다 오뚜기케챺."
"있제, 나는 이왕이면 니한테 배불리 몇 끼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들어있었으면 좋겠다."
기대감에 부풀어 묵직한 캔을 몇 번 흔들어 봤다.
아침나절에 친구집에서 EBS교육방송을 듣고 탐구생활숙제를 하고 돌아온 모범생 둘째가 방바닥에 배를 깔고 그림일기를 그리고 있었다.
"야, 니 이거 먼지 아나."
"그,,거? 그걸껄? 케챱?"
"니 먹어봤나."
"정은이 집에서 먹어봤을걸."
"어떻게 먹는건데? 맛있나?"
"어 그거 맛있다 그거 밥에 넣어서 먹는가 그럴걸."
부자 친구 집에서 거의 매끼 먹고 다니는 둘째는 이거 먹어봤다고 한다.
잘은 모르는데 그그 오무라 밥이 있는데 그게 뭐냐며는
계란속에 밥이 있는데, 밥이 주황색이고, 계란위에 더 그려서 먹는다고.
어쩔때는 핫도그에 그려서 먹는다 등등
하여간 오무라도 핫도그도 나는 모르겠는데 응, 응,대충 뭔 느낌인지 알것 같다.
일단은 열어야지 먹지. 어떻게 열까 고민을 했다.
날 보란듯이 메롱하고 있는 이 오뚜기를 보고 있자니 어디한번 열어보라고 놀리는것 같기도 했다.
쌔끼, 내가 니 대가리 딴다.
부엌에가서 식칼을 살펴보니 하나같이 칼끝이 날아가고 없다.
아빠는 술만 먹으면 칼을 들고 죽이니 살리니 맹 똑같은 레파토리다.
언제언제 엄마랑 철공소가서 칼끝을 날려달라고 부탁했던게 기억이 난다.
이래가지고는 저새끼 대가리 못딴다.
대가리를 따는대는 아빠가 제일이지.
아빠가 우리 순이 대가리 딸때 쓰던 끝이 동그란 망치가 생각났다.
아부지 공구통을 뒤집어쏟아보니 동그란 망치는 없고 판판한 망치가 나온다.
쿵하고 치니 더 찌그러지기만 할뿐이다.
어디서 봤더라. 돌을 쪼는 석공을 내가 어디서 봤는지는 몰라도 나는 뭐든 빨리 배운다 좋은거든 나쁜거든.
일자도라이바를 쥐고 망치로 콩콩 내려치니 도라이바 끝이 푹-박힌다 .
그 틈으로 새콤한 향이 콧구멍을 사정없이 후드려팬다.
기침은 덤이다.
야 이거 뭐지?
몇 번 더 구멍을 내니 옴폭 패인 사이로 제법 뻘건 속이 보인다.
일단 스댕 국그릇을 가지고 와서 퍽퍽 퍽퍽 좀 덜어내서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떠먹어 봤다.
턱관절이 찌르르 아프면서 침이 콸콸 쏟아졌다.
나 한입 동생 한 입 묵직한 바디감을 느끼면서 꿀꺽꿀꺽 삼켰다.
물에도 타먹어 보았다.
벌건 국물이 든 유리잔을 짠 부딪히며 어른 놀이도 하고 배는 터질 것 같은데 자꾸만 마시게 되는 케챺쥬스다.
우리 종아리 길이쯤 되는 식빵 봉투를 까서 몇 장이나 발라먹었는지 모르겠다.
막내가 돌아올 시간이다. 유아원에서 집까지 올때는 차량이 있어서 사거리까지만 나가면 된다.
"눈나 아까 그거 머아."
"아 그거 케챺이더라. 니 케챺아나"
"어 잠자티기(감자튀김) 먹으때 머근거"
나만 빼고 다들 먹어본 모양이다.
케챺은 일단 비밀로 간직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들었다.
검은 비닐에 둘둘 싸서 개미가 안 다니는 찬장에 일단 넣어 두었다.
이제 오무라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은대로 밥에 케챺을 넣고 비빈 다음에 계란후라이를 위에 덮는 거다.
둘째한테 보여주니 이거 맞다고 맛있다고 했다.
이제 감자튀김이다.
나는 또 도둑질을 한다.
청과물 시장을 빙빙 돌면서 감자 두 개를 훔쳤다.
막내는 자기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길쭉하고 네모라고 알려줬다.
둘째는 자기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아니 이 정도는 길다고 했다.
내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이만하냐고 물어보니 어어, 그게 맞는거 같다고 했다.
감자를 그래 내 손가락만큼 잘라서 후라이판에 구웠다.
기름은 아주 비싼 것이다. 조금만 줄어도 엄마가 금방 안다.
그래서 후라이판은 설거지를 하면 안 된다.
남은 기름을 다음에도 몇 번이고 써야 하기 때문이다.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었을 때 나는 눈물만큼만 기름을 떨어뜨리고, 감자를 구웠다.
요리조리 돌려가면서 누리끼리하다가 약간 갈색으로 변하다가 조금 타기도 할 만큼.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게 무슨 감자튀김 발꿈치에 닿기라도 하겠냐마는 우리는 타다만 서걱거리는 감자튀김을 아껴아껴 먹으며 케챺만큼은 한 움큼씩 듬뿍듬뿍 찍어 먹었다.
느닷없이 울음보가 터진 막내에게 케챺한잔 타주면 눈물 뚝 그쳤다.
정은이 집에만 가면 함흥차사던 둘째도 케챺주스한잔에 케챂바른 식빵을 먹으러 일찍 돌아왔다.
아무래도 근데 해결되지 않는 것은 분명히 둘째가 그랬다. 케챺을 그려서 먹는다고.
주로 낙서할 때 쓰는 전화번호부를 휙휙 넘겨 낙서 없는 쪽을 편 뒤 둘째가 그림을 그려서 설명했다.
그림은 영 못 알아보겠지만 메커니즘을 알았다.
질긴 비닐봉투에 케챱 한 국자를 퍼넣고 봉투 끝을 살짝 튿고 살살 몸통을 누르니 케챱이 그려졌다.
밥 위에 계란후라이 위에 손가락 위에 팔뚝에 열심히 그려서 먹었다.
니 팔뚝 내 팔뚝도 핥아먹고 막내 코에 짜서 코도 핥아먹고 막내는 까르르 좋다고 뒤로 벌러덩 넘어간다.
그럼 또 배방구도 해야되고 막내의 웃는 소리가 그해 여름을 가득 채웠다.
매미보다 더 크게 우리는 많이 웃었다.
어차피 씻을 거, 온 얼굴에 몸에 칠하고 죽는 시늉도 하고 머리 터진 시체 놀이도 하고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놀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개미들은 경로를 바꾸어 우리 케챺통으로 전진했고,
앵간하면 먹겠지만 개미들이 꺼멓게 떼죽음을 당한 그 꼴을 보고는 차마 못 먹겠기에
부엌 벽에 달린 무거운 쇠문을 열었다.
옆으로 누운 오뚜기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뚜기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케챺 마른 자국이 꼭 피같아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빡빡 문질러 닦았다.
"잘가, 오뚜기"
시커먼 어둠 속으로 오뚜기를 밀어 넣고, 손을 떼고, 깊고 깊은 아래로 떨어뜨렸다.
(옛날 아파트에는 쓰레기 버리는 구멍이 벽에 있었음)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방학 일기에는 케챺을 오늘은 어떻게 먹었는지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케챺이야기만 가득했던 것 같다.
온통 시뻘건 그림일기였다.
드문드문 아빠가 칼을 휘두르고 엄마는 목에서 피가 나고 나는 벽에 매다 꽂혀서 대가리가 깨진 날의 일기도 있었지만
온통 시뻘겋고 맹 케챺이야기 뿐인 일기라 선생님은 몰랐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