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100일이 지났어. 지난 2월, 푸틴이 돈바스의 분리 독립을 승인하며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명령했을 때만 해도 이 전쟁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거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북부의 수도 키이우로 위풍당당하게 진격했지만 되려 흠씬 두들겨맞다 패퇴하고 말았어.
키이우 전투에서 퇴각한 이후 러시아는 병력을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일대인 돈바스로 집결시켰어. 더 이상 승산이 없는 북부 공략보다는 어느 정도 영토를 확보한 동남부만이라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전략목표를 대폭 수정한 거지. 수도 일대인 북부에선 우크라군의 시가전과 게릴라전이 유효했지만 동부는 지형적 특성상 러시아의 주특기인 화력전에 매우 유리하거든.
화력전이란 상대를 압도하는 화력무기로 목표 지역을 말끔히 초토화시킨 후 보병이 들어가서 장악하는 것을 말해. 구소련부터 대규모 화력전을 전투 수행의 기본개념으로 인식하여 포병을 매우 중시했고, 그 교리가 후신인 러시아까지 이어져 현재는 로켓과 미사일을 매우 중시하고 있지. 대를 이어 내려온 러시아군의 전통 비법이자 든든한 국밥이라고나 할까.
'평탄화'라고도 불리는 이 화력전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는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전투수행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어. 체첸 전쟁은 90년대 분리독립을 선언한 체첸을 러시아가 두 차례에 걸쳐 무력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야. 옐친 정권 때 1차 전은 인간병기라 불리는 체첸군과 시가전의 거대한 늪에 빠진 러시아군의 대굴욕으로 끝났지만, 옐친의 뒤를 이어 집권한 푸틴이 2차 전에서 제대로 설욕하며 체첸 진압에 성공하게 돼.
2차 전에 나선 러시아군은 이전 패배에 대한 해결책으로 화력무기에 몰빵한 후 민간인을 고려하지 않은 대량포격을 쏟아부었어. 마치 대패질하듯이 도시 하나를 '평탄화'하는 작업이었지.
현재 러시아는 병력을 몇 배로 투입하고 화력무기를 압도적으로 배치해서 맹공을 퍼부으면 이전까지의 고전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어. 동부 전선에서 크게 승리한다면 그 여세를 몰아 향후 우크라이나 전역을 다시 노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테니 말이야.
물론 우크라군 역시 키이우의 승리를 돈바스와 크림반도의 완전한 수복까지 이어가겠다는 목표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어. 하지만 러시아군의 주특기인 강력한 화력투사와 물량을 동원한 공세에 이전과 달리 힘에 부치는 모양새야. 전쟁 기간이 길어지고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되면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우크라군 역시 막대한 피해와 사상자를 내는 중이지.
거기에 개전 초부터 서방이 온갖 제재를 동원해 러시아의 경제를 옥죄려 했지만 러시아는 '원래부터 망한 경제'라는 특유의 맷집으로 버텨내는 중이야. 이번 전쟁의 여파가 전세계적인 식량 위기와 에너지 사태를 불러오자 이대로 가면 결국 실질적 승자는 '최대 자원보유국'인 러시아가 아니냐는 인식까지 퍼지고 있지.
저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번 전쟁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상수를 제시하고자 해. 러시아는 이미 졌어. 그리고 그건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바뀌든지, 승패가 어떻게 결정되든지 하등 상관없는 일이야. 왜냐고? 애초에 전쟁을 일으킨 원목적, 젤렌스키 정권을 전복하고 괴뢰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대전략 달성에 실패했거든.
전쟁의 승패는 적군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얼마나 넓은 땅을 차지했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 들였는지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대전략. 즉, 무력을 동원한 군사적 전략목표를 달성한 후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느냐 아니냐로 결정되지. 예를 들어볼까?
공산진영이 몰락하고 냉전에서 승리했을 무렵의 미국은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자 인류 역사에 다시 없을 무적의 제국이었어. 물론 지금도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이지만 이 땐 그야말로 G1으로서 미국의 슈퍼파워가 독주하던 시기지.
그런 미국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실패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들 해. 두 전쟁 모두 군사적으로만 보면 지구방위사령부 천조국의 위력을 제대로 과시했던 승전이야. 대체 왜 실패한 전쟁이라고 하는 걸까?
전쟁사를 관통하는 진리 중 하나는 점령보다 통치가 훨씬 어렵다는 거야. 두 전쟁 모두 수도를 빠르게 점령하고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어. 점령지의 전후처리와 민심수습에 실패했거든.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반군은 지형의 힘을 빌어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펼쳤고, 부패한 아프간 정부에게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도 의지도 없었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안정과 치안 유지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키고, 추가 파병을 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지만 모두 허사였지. 늘어가는 재정 부담과 자국군의 희생을 감당할 수 없었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
미국이 철수를 시작하자 아프간 정부는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고, 수도 카불이 다시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는 장면을 전세계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됐어. 전쟁의 시작은 천조국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며 매우 화려했지만, 점령지를 안정화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착 시킨다는 정치적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실패로 끝난거야.
설령 러시아가 동남부 지역에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선 수십만의 병력 주둔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어. 현재 러시아는 눈앞의 인구절벽을 감수하면서까지 부족한 병력을 닥닥 긁어모으고 있는 실정이야.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규모 병력을 동남부에 주둔시켜야 한다고? 전후처리와 군대유지 비용은? 점령지에 그만한 생산활동 인구가 묶여있는 동안 자국 경제는? 도대체 몇 년 동안? 시간은 결코 러시아의 편이 아니야.
지금은 2차세계대전 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것도 감안해야 해. 독소전 당시 스탈린이 말 그대로 소련군을 고기방패로 갈아넣고 인민들에게 무한정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던 건 소련이 엄연히 침략 당한 쪽이었기 때문이야.
아무리 인명 경시가 패시브인 러시아라 할지라도 전쟁을 일으킨 쪽이 자국민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의 위하여!'같은 전시 프로파간다 이외에 국민들이 흘린 피에 상응하는 성과가 반드시 뒤따라야 해. 그래야 장기적으로 정권이 위협받지 않고 유지될 수 있거든. 그리고 지금 러시아에겐 그게 전무하지.
전쟁이 한창인 이 순간조차 러시아는 이미 죽어있어. 젤렌스키가 수도에 남아서 항전을 선포하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다시는 러시아에 가축처럼 굴종하지 않겠다는 길을 택한 순간부터. 푸틴이 먼저 죽느냐 러시아가 먼저 죽느냐의 싸움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