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싫은 일 = 하고 싶은 일(27)
lu**** 2023-04-07
홍민지

SBS 디지털뉴스랩에서 PD로 일하며 「문명특급」을 만들고 있다.
『꿈은 없고요, 그냥 성공하고 싶습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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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은 한통속이다.
가끔 인터뷰나 강연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 원고의 청탁 메일을 받았을 때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 같은 모습이라 이렇게 제안을 주셨다고 한다. ‘서울, 방송국, PD’라는 솔깃한 키워드 덕분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보면… 그냥 ‘먹고살려고 하는 일’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원래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싫어하는 반찬이 올라오는 날에는 급식을 포기했고, 흥미 없는 과목은 절대 공부하지 않았다. 취향이 아닌 노래는 절대 듣지 않았고, 관심 없는 분야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하기 싫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도 같다. 그런데 회사원 7년차, 하기 싫은 일을 매일 한다. 회사는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은지 안 하고 싶은지 신경 쓰지 않는다. 회사에 다닌다는 건, 월급을 받는다는 건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이건 하기 싫은 일이건 주어진 일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고 생각할까.

돌아보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아주 하기 싫은 일에 더 가까웠다. 학과 선배들이 방송국 PD로 입사하고 나날이 피폐해지는 걸 보면서 절대 방송국 근처에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광고 일이였다. 그런데 대형 광고회사 두곳의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취업을 준비한다고 학원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둔 상태라 생활비가 없었다. 취직을 시켜주는 곳은 없고 생활비는 점점 떨어져가고 해서 지원한 곳이 SBS 뉴미디어국의 ‘스브스뉴스’ 인턴자리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내 또래를 ‘88만원 세대’라고 불렀는데 그에도 못 미치는 87만원을 받는 자리였다. 그래도 목동 SBS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서 교통비를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정규직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인턴 자리였다. 회사에서도 인턴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레거시 방송국에서 ‘뉴미디어’라는 직무는 메인 디시가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의 품격을 실추시키지만 않으면 다행인, 테스트 메뉴 같은 존재였다. 회사 선배들은 뉴미디어는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아직 젊을 때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하고 싶던 일도 아니었고, 안정적인 일자리도 아니었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다른 선택지도 없는데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나를 가장 괴롭게 한 일은 기획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제작비를 정산하는 일도 아닌 바로 편집이었다. 긴 시간이 걸리는 파일 백업, 싱크 맞추기, 자막 달기, 모두 전혀 재미있지 않다. 밤을 새워야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장시간 모니터를 보며 편집을 하다보니 눈도 나빠지고 귀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처음 편집한 영상은 세계 기록을 세운 다이버에 대한 30초 내외의 영상이었다. 관심 있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팀장님이 시키니까 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싫어하던 과목이 체육과 정치였다. 하필 내가 인턴으로 근무하던 시절 월드컵도 있었고 정권도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스포츠와 정치에 대한 콘텐츠를 수도 없이 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에 얍삽하게 순응하는 것이 나의 장점이다. 어쩌겠는가.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군말없이 편집을 했는데 이왕 하는 거 잘하려고 애썼다. 편집을 잘하고 싶어서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다. 엉성한 실력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엉덩이 싸움밖에 없었다. 그래야 적어도 편집 기술 하나 정도는 얻어갈 수 있지 않은가. 그랬더니 이상하게 내가 편집을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하기 싫은 것만 시키던 팀장님이 새로운 기회를 던져줬다. 프로그램 하나를 단독으로 연출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획을 시작한 것이 「문명특급」이라는 프로그램이다. 그제서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하기 싫은 일만 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다.

내가 편집보다 더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글쓰기다.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덮었다 열었다를 반복한다. 방송사 시험 준비를 할 때도 작문 연습을 할 때 가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순간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 퇴근 후 휴식 시간, 가족과의 여행을 모두 포기하며 노트북을 붙잡고 매달린 결과다. 글을 쓰는 건 싫지만, 내 이야기는 전하고 싶었다. 내 책은 우리 가족 사이에서 한동안 소소하게 논란이었다. 논술 학원은 다니기 싫다고 그렇게 땡땡이를 치더니 어떻게 책을 쓴 거냐며 대필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책을 찬찬히 읽어보신 부모님께서는 대필이라기엔 글솜씨가 빼어나지 않다며 다행히 의심을 거두셨다.) 원고를 쓰는 시간은 지긋지긋했지만 출간 후 독자들이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후기를 들을 때면 도파민이 폭발한다.

학교라는 우물 안에서 나와 사회에서 직업인으로 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현실에서는 원하는 것만 갖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은 1+1 행사 상품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했다. 하기 싫은 일을 잘할 때까지 하다보니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기 싫은 편집을 하고 쓰기 싫은 글을 썼더니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좋은 동료들과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회사원 7년차, 나는 이제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나누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하는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염세적으로 들린다면 틀렸다. 눈앞에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게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는 걸 안다. 싫어하던 깻잎을 먹어보니 맛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처럼, 하기 싫은 영어 공부를 했더니 자막이 없는 영화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하기 싫은 일이 주어지면 이 일이 나를 어떤 좋은 일로 이끌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버티려고 노력 중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은 어차피 한통속이다.
매력쩐다
fu**********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좋다
cs******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좋다
eu****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책 제목부터가 개간지네 ㅋ
ka****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멋진 글이다
장코*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15℃)     
와 글 좋네
gl***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좋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은 어차피 한통속이다
ho****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15℃)     
브라보.
ch*********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좋네
hj******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이 일이 나를 어떤 좋은 일로 이끌지 몰라
엑스라지 2023-04-07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와우
br****** 2023-04-08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오.. 요즘 회사 다니면서 느끼는 것들임
co****** 2023-04-08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초ㅔ고최고
as****** 2023-04-08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나도 먹고살려고 시작한일에서 버티다보니
하고싶은일도 조금씩 하게돼서 공감돼
글고마워♡
게미 2023-04-08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홍민지 대학이 어디야? 왜 아무리 쳐도 안 나오노
so****** 2023-04-08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와 글 좋다
pa**** 2024-03-04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좋다
bb******** 2024-03-04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스크랩함 좋다
ma******* 2024-03-04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이 글 재밌네. 스크랩했다가 다시 읽어봐야지
t********* 2024-03-04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좋은글
cc****** 2024-03-05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이 글 원본 보고싶다
mangotango 2024-03-05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마지막 문단 너무 좋다
am***** 2024-03-05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되게 솔직한 글이다 공감간다..ㅎㅎ
mi**** 2024-03-05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ㅜㅜ
별이다섯개 2024-03-05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글이 너무 좋아.. 미쳤어
h2*** 2024-03-05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하기싫은 일이 주어지면 이 일이 나를 어떤 좋은 일로 이끌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버티려고 노력 중이다
지화자 2024-03-11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0℃)     
굿 나도 요새들어 느끼는 것들임
ep***** 2024-03-11 이 답글 돈주기    이 글 튀겨버리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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