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내 친구? 봄꽃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제 겨울을 주장할 수는 없겠어. 남쪽에서 너는 나보다 먼저 봄을 맛보았겠구나. 지난달부터 내가 시달린 단어가 ‘유축기’라고 하면, 넌 웃을까?
글쎄. 차라리 웃어넘기고 싶은데, 도통 얼굴 근육이 풀리질 않네. 고향 친구 수진이한테 전해들은 그 단어, ‘유축기’는 우리가 절교했던 지난 8년을 그야말로 '압축'하고 있었거든. 수진이도, 보건소에 취직한 건너건너 동창생으로부터 전해들었다지. 네가 보건소에 그걸 빌리러 왔었다고 말이야. ‘유축기’라니 대충 무슨 단어인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위키백과의 힘을 빌었지.
유축기(乳蓄器)란 수유보조도구의 하나로 아기의 엄마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에게 직접 젖을 줄 수 없을 때 미리 모유를 짜내어 저장하는 도구를 말한다. 수동식과 전동식이 있다.
수동식과 전동식이 있다.
수동식과 전동식이 있다.
수동식과 전동식이 있다.
수동식과 전동식이 있다.
다섯 번을 읽으니까 그럭저럭 이해가 됐어. 그래도, 인정은 할 수 없었지. 이해는 머리로 하는 거고 인정은 가슴이 하는...... 그래. 아이를 낳았구나. 축하해.
나는 다른 검색결과를 통해서 유축기 개봉 전과 후, 심지어 모유로 추정되는 노란 액체가 담긴 팩까지도 구경할 수 있었지. 친절한 정보의 세계에 경의를 표해야 할 지경이었어. 블로그 주인은 물론 네가 아니었지만, 그게 꼭 네가 아닐 것도 없지 않나,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구나. 평범하디 평범한 20대 주부... 그 여자는 매일의 요리, 새로 산 청소도구의 리뷰, 육아의 고충 따위를 끄적거려 놓았고 사람들로부터 꽤 많은 ‘따봉’을 받고 있었어.
네 목격담을 들은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유축기’라는 단어가 나를 맴돌았어. 미혼인 나하고는 도무지 관계가 없을 텐데도. 전두엽 어딘가에 꽉 눌어붙은 압인처럼 너와의 기억도 그렇단다. 잘 살고 있다가도 느닷없이 충전이 끝난 전기드릴처럼 몸속을 헤집기 시작한단다. 움직일 때는 대략 cok. cok. tik. ta. cok. 하고 듣도 보도 못한 외계어로 집요하게 말을 거는데, 나는 어금니를 깨질 정도로 꽉 다물고 통증을 참아내지.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더라? .... 정말 8년이 맞을까?
한때 우리 뜨거웠잖아. 좋았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남자 같은 건 영원히 사귀지 말자고 맹세했었던 기억도 내겐 남아있는데...
이쯤 읽었으면 그동안 얘 돌아버린 거야? 주소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하면서 편지를 당장 구겨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뭐, 어쩔 수 없지. 나로서는 ||
:유축기:||
와 작별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일이 필요했거든.
똑같은 꿈을 사흘 연속 꿔본 적 있니?
나는 있어. 바로 오늘 새벽에도 꿨는걸. 분명히 자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야릇한 느낌이 들어서 침대에 누운 채로 아래를 내려다봤지. 검은 입술이 빨아 당기고 있는 건... 내 다리에서 자라난 거대한 유방이었어.
응, 실제 내게 달린 것보다 네 배 정도는 더 큰 가슴이었지. 굳이 비유하자면 핸드볼만 했을 거야. 핑크색 젖꼭지가 솟아 있었지. 나는 긴장한 채로 입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애썼어. 하지만 초점을 맞추기 전에 다른 쪽 다리에서 또다시 그게 올라왔어! 유방 말이야. 그리고 점점 더 빨리, 배에서도 불쑥, 허리에서도 불쑥, 불쑥, 불쑥!
느닷없는 몸의 변화에 나는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지. 뒷머리랑 등에서도 유방이 튀어나왔거든. 아니, 나는 놀라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어. 발바닥에서 솟지 않은 게 어디야, 하는 겸허한 마음뿐이었지.
나는 식은땀에 절은 채로 눈을 떴어. 꿈에도 그리던 기네스북에 오르나 싶었는데, 실패였지. 창문을 여니까 거짓말처럼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있더구나.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입을 꽉 다물고 있더니 말이야. 멍하게 개나리를 쳐다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쓰고 나면 불태울 게 뻔한 편지를 벌써 이만큼이나 쓴 거 있지. 어쩌자고... 우리가 절교한 것도 까먹고 말이야.
혹시, 아기 이름은 지었어? 뭐라고 지었니? 재미삼아 나도 유축기를 가슴에 한 번 대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구나. 올 초에 오른쪽까지 전이가 됐어. 그래서... 나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 모든 게 괜찮다고 믿었는데.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말이야...
죽기 전에 찾아와 달라는 부탁은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아. 괜찮다면 답장으로 네 가족사진 좀 보내줄래? 마지막으로 행복한 꿈 하나만 가져가고 싶어. 딱 한 장면이면 돼. 딱 한 장면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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