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네집 강아지 이름은 다비였다.
몸집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얼굴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털색깔은 누렁이인 명백한 똥개였다. 모든게 흔했지만 다비는 발만 흔치않은 다정한 하얀 양말을 신고 있었다. 다비는 일본어로 양말이라고 했다. 맞는 말인지 아닌지 확인은 안해봤지만 모두가 강아지와 그 이름에 감탄하며 좋아했다. 다비 이름과 뜻을 들으면 작은 여우같은 얼굴을 보다 단정한 발을 보게 되는 그런 귀여운 이름이었다.
다비의 강아지 시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비는 내 기억속에 늘 어른이었다. 그 암컷이지만 위엄이 넘쳤고, 차분했고, 반가워도 쉽게 흥분하지도 않고, 곁에 있어도 사람과 교감보다는 본인 관심사로 바빳고 두 눈이 반짝였다. 다비는 늘 안부가 궁금한 강아지였다. 다비는 동네 서열 일위의 강아지였다. 어떤 개도 다비보다 위엄을 가지지 못했다. 다비는 목덜미에 살이 올라와 털이 부숭부숭 서있게 되었는데 갑비싼 모피같다고 이모가 별게 다 기품있다며 즐거워 했다.
다비는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비를 쓰다듬은 기억이 거의 없다. 이모는 나중에 다비를 안쓰러워 하며 집안에 쉬게 하려했지만, 다비는 작고 춥고 더운 신발장 가까이 본인 집을 지켰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비의 애정은 충분하게 기억되었다. 다비는 서로 쓰다듬는 대신 오랫동안 서로를 멀리서 지켜보는 시간을 허락했다. 침묵속에 존재감이 큰 아이. 작은 강아지 주제에 온 동네의 강아지 세계를 평정하고, 늘 단정한 발을 모으고 눈을 반쯤뜨고 멀리 가는 사람을 지켜봤다. 다비의 행동은 말로 하자면 귀여운 내용이 전혀 없지만 모든게 너무 너무 귀여웠다.
다비가 새끼를 낳고 또 다비가 사라지고 난 뒤에 키우던 이모의 많은 똥강아지가 있었지만 그 어떤 강아지도 다비만큼 궁금하지는 않았다. 늘 이모의 강아지는 다비 하나로 남아버렸다.
다비가 이모집에 머물던 시기에 우리집엔 십자매가 있었다.
처음엔 두마리로 시작했다. 나의 엄마는 새들 이름을 짓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가족이 새 이름을 고민하기도 전에 엄마는 아무렇게나 어떤 이름을 붙이고 부르고 있었고, 우린 그냥 그 이름에 적응했다. 처음 두마리는 엄마새 아빠새였다. 오자마자 알을 낳은것도 아닌데 둘이 엄마아빠가 될것을 예감한건지 아무튼 엄마새 아빠새가 되었다.
엄마새는 알을 한번에 6개 정도 낳았고 두세번 정도는 낳고 품고 했던거 같다. 노리끼리, 깜장이, 점박이, 얼룩이, 흰새 등등 다양한 새들이 지나갔다. 엄마새 외에도 그 밑의 자식의 자식도 낳아서 4세대나 걸쳐 키웠으니, 점점 베란다의 합스부르크왕가가 되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아빠새는 이 거대한 십자매 왕국의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
아빠새는 처음부터 아빠새였다. 깃이 고왔고 외모가 단정했으며 노래를 잘불렀다. 수컷 십자매는 평생 한곡조의 노래만 부른다. 근데 그 곡조가 새마다 다르다. 집에 태어난 다양한 십자매의 노래를 비교할 일이 있었는데 아빠새의 울음소리가 기준이 되었다. 다른 새들은 음은 어딘가 플랫되기도 하고 아예 단조로 부르기도 하고, 완성되지 못한 노래만 부르는 새도 있었다. ‘또또 또로로로옹!’ 이게 아빠새라면 다른 새들을 ‘두두 또록’ ‘또르. 또로웅’ 이런 식이었다. 아빠새는 노래로는 빼는 법이 없었다. 노래를 못부르는 자식 놈들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바로 아빠새 타임이었다. 제자리서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부르는 경쾌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아빠새는 오늘도 안녕하네 했다.
아빠새는 어항에 빠져죽고 어디 들어가 껴서죽고 하던 무모한 자식놈들과 달리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밥먹고 노래하고 잠을자고 매일 똑같았다. 늘 꼿꼿하고 날렵해서 청년같았다. 아빠새가 나이가 들었다는걸 알게된 것은 부리바로 위에 깃털중 털이 나지 못한 심지가 쌓여갈때였다. 심지가 무슨 스포츠 머리마냥 간지나게 면적이 넓어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4세대 끝의 자식들은 아빠새가 늙고 별로였던지 둥지를 같이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에겐 너무 낯선 장면이었다.
십자매 더 합스부르크 왕가의 끝은 이러하다. 어느날 부모님은 십자매를 키우지 않기로 결심하셨고, 아파트 통로를 지켜주시던 외로운 할아버지가 십자매를 키워주시기로 했다. 새장이 아닌 베란다 전체를 본인 집처럼 쓰던 십자매들이 하나둘씩 잡혀서 새장으로 들어갔다. 십자매들도 알았을것이다. 이제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리고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는데 자식들이 하나 둘 잡혀 새장에 갇히는 사이 아빠새는 잡히지 않았다. 아빠새는 사람 손을 피해서 그 정확한 길로 베란다 밖으로 탈출해 버렸다. 허튼짓을 안했던 아빠새의 마지막은 미지의 세계로의 대 탈출이었다. 아빠새는 그 통로를 미리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그동안 이집에 머문것은 자신의 왕가가 맘에들어서 였을까.
우리 가족은 오래동안 아빠새는 마지막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탈출이 비극이 아닌 자유와 행복의 순간이 있었길 오래 빌어주었다.
다비와 아빠새. 동물을 키우다 보면 이렇게 대명사가 되어버리는 아가들이 있다. 오래 기억에 남고, 대체가 불가능한 그런 아가들에게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지 생각해보다가 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첫아가라서? 애정을 많이 나눠서? 다양한 이유를 살폈지만 그런 공통점은 아닌거 같고, 그냥 같이 사는 동안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했던 이유가 아닐까 정도를 찾았다.
귀여웠던 나의 그들이 보고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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