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일기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하교직전 담임이 일기 중 감명 깊은 글이 있어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렇기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다.”

 

이 문장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면서 박수까지 쳐주었다. 누구의 글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다. 바로 내가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무척 뿌듯했고 그때부터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각종 매체 등에서도 '나는 특별하다' 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였고 곧 자존감이 높은 사람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평범하다라는 말은 그 반대로, 스스로에게 관심이 없고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어감으로 쓰였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10년 후 정말 내가 특별한 사람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날씨가 사계절 맑기로 유명한 칭다오의 하늘은 그날따라 더욱 흐렸다. 내가 칭다오에 온지 3개월이 되어가던 날이었다. 한 한국인 직원은 내가 온 후부터 이상하게 칭다오에 비가 많이 내리고 흐리다며 불평했다. 아무래도 칭다오에서의 나의 생활이 흐리기만 했기 때문에 그 말은 내게 와 박혔다.

 

스무 살, 1학기 만에 왕따를 당해 대학을 자퇴하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아주 조금 관심이 있었던 패션계로 접어들어 패션스쿨에서 쥬얼리 디자인을 전공했다. 생애 처음으로 접해보는 단어들과 공부의 흐름을 열심히 따라가 보려 노력했지만, 디자인은 나와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패션마케팅쪽으로 취업하려 했으나 모두 대졸자를 원했으므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디자인회사에도 지원을 했고 공교롭게도 해외에서만 세 군데에서 연락이 와 그 중 가장 가깝고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주는 중국 칭다오에 있는 한국회사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첫 취업을 해외로 한다는 것이 겁이 났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이미 대학자퇴라는 큰 실패를 경험했고 그 후 선택한 패션의 길도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 대학자퇴 그리고 쥬얼리 디자이너와 해외취업.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렇게 흘러온 것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57, 칭다오 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나있는 딸이 걱정되었던 아버지는 내가 입사한 회사가 정말 괜찮은 곳인지 확인하기 위해 같이 비행기를 타고 칭다오로 향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낯선 느낌에 아버지가 경직된 모습으로 앞을 응시했다. 나는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점점 멀어져가는 한국땅을 네모난 창을 통해 바라봤다. 그렇게 손 꼭 잡고 칭다오에 도착해 차를 타고 회사로 들어서니 새로운 얼굴 등장에 주변에 있던 중국인들을 비롯해 회사에서 키우고 있던 시베리안 허스키 7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 중 한 마리가 내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파란 눈으로 올려다봤다. 처음 본 대형견에 흠칫 놀라자 배가 불룩한 경비아저씨가 야야.’ 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 개의 이름이었다.

 

(7마리 허스키 중 1마리)

 

그 이 후 사장과 면담하고 회사내부도 둘러보고 기숙사로 짐을 옮기는데 아버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짐을 풀고 먼지가 쌓인 서랍과 책상을 털고 거미줄이 친 창문을 열어 바깥풍경을 바라봤다. 붉은색 지붕의 낮은 건물들. 회사는 인조진주 생산 공장과 붙어있어 넓고 직원들도 많았다. 내가 상상했던 회사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괜찮다고 생각하며 얼룩이 진 소파위에 물건들을 턱턱 올려놓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꼭 여기 다녀야하겠니. 한국으로 돌아갈래?”

“....취업난에 언제 취업될 줄 알고. 게다가 고졸인데. 여기서 경력 쌓아야지.”

 

그러자 아버지는 말없이 젖은 걸레로 바닥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 화장실 샤워기 수압이 약하다며 샤워기 헤드를 사다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는 꼭 버티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그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에 도착하고 나서)


내가 칭다오에 오고 난 다음날부터가 중국에서 맞이하는 큰 명절이었다. 그래서 기숙사에는 주방아줌마가 오지 않았고 한국인 직원들도 어디론가 놀러가 기숙사에는 나 혼자였다. 당황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혼자 돌아다니기도 겁나고 무엇보다 아직 환전 전이었기 때문에 가진 돈이 없어 음식을 사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샤워기 헤드와 함께 사다주신 과자와 빵으로 버텼다. 2일까지는 어떻게 버텼는데, 마지막 3일째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굶어야 했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갈증이었다. 중국의 수돗물에는 회석 질이 섞여있어 그냥 마시지 못하는데 정수기 물도 다 떨어져 갈증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칭다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사람을 급히 뽑았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일하던 직원이 한국으로 도망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첫날 아버지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악수를 청했던 사장은 알수록 괴팍한 성격에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 곳에나 던져 가끔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사장의 아버지이자 회사 설립자인 회장은 중국인을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사람으로 내게 중국인 직원이 일하다 휴대폰을 보면 등짝을 때리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그 회사는 일할 때, 사비를 쓰게 하였고 제때 청산해주지 않아 갈수록 직원이 빚이 생기게 되는 구조였다. 나 역시 일을 시작하면서 점점 빚이 쌓이게 되었고, 적성에 맞지 않는 디자인 일과 더불어 한국인 직원들의 몰상식한 행동, 시도 때도 없이 끊기는 수도와 전기, 들끓는 쥐 그리고 향수병 등 여러 복합적인 상황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러나 참아야했다.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만 버텨내야만 했다. 대학을 자퇴하고 나서 6개월 간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났다. 12년 동안 대학이 최종목표인 것처럼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1학기 만에 대학을 자퇴하고 나니 엄청난 상실감과 좌절감 그리고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퇴사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실패한 사람이 되어 손가락질 당할 것 같았다.

 

회사 재정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고 불만이 쌓인 중국인들이 우수수 퇴사를 하기 시작했다. 일하며 친해진 한 중국인 직원은 2년 전만해도 중국인이 지금의 두 배가 더 많았다면서 자신도 애를 낳고 나면 바로 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나이도 어린데 이런 안 좋은 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단 하나, 주변 사람들에게 실패하는 모습을 또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말 낙인이 찍혀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도 그렇게 힘든 시간을 꾸역꾸역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입사하고 3개월이 되면 여행용 비자발급이 만료되어 취업비자로 재발급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이 되기 열흘 전, 옆 책상을 쓰는 한국인 직원이 내가 온 후부터 이상하게 칭다오에 비가 많이 내리고 흐리다며 불평하면서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다.

 

아침부터 흐리던 칭다오의 하늘은 점심때까지 풀어질 줄 몰랐다. 나는 입맛도 없고 발목도 퉁퉁 부어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전날 밤 쥐들이 습격해 이빨자국이 무성한 츄파츕스 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발목을 찌르는 듯 한 통증에 발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2주 전에 줄넘기를 하다가 다친 발목이 병원비가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상태가 점차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더 욱신거리는 듯 했다. 곧 한국에 들르게 되면 가장 먼저 정형외과를 들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10년을 일했다는 조선족 여직원이 검은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첫날 사장실에 커피를 가져다주던 모습처럼 언제나 검은 옷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차가운 인상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여행비자 회사에서 사비로 연장 신청했어. 그러니 한국에 굳이 들르지 않아도 돼.”

“...? 그러면 저 한국에 못가는 건가요?”

. 다음 주에 비자 연장하러 가야되니까 알고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순식간에 내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고 가만히 보고 있던 여직원은 다시 검은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기숙사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워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마치 지옥에라도 갇힌 듯 했다. 정말 내 인생 뜻대로 되는 게 없다면서 오래토록 울었다. 그러는 동안 대학에서 왕따 당했던 시간, 자퇴 후 홀로 이겨내야만 했던 고독의 시간 그리고 현재까지 일련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아직은 이르다는 마음이 격렬히 충돌했다.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듣게 될 사람들의 말들이 무서웠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대학도 1학기 만에 자퇴하더니 퇴사도 그렇게 빨리 하냐.’, ‘네가 그렇지 뭐.’

 

13살부터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특별한 사람이다.’ 라는 오랜 신념으로 살아왔던 나는 여느 영화 주인공처럼 시련 뒤 반드시 해가 뜰 거라고 여기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였다. 더는 인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 붉어진 눈가를 휴지로 대충 닦아내고 기숙사를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공장 옆 공터 한 쪽 수풀 속에 숨어있던 시베리안 허스키 야야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갑작스레 홍역이 돌아 모두 안락사 되었고 야야와 그의 아내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만이 남았다. 5마리가 한꺼번에 안락사 되던 날, 옆자리 여직원은 2년 동안 잘 지내던 개들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어느 날부터 칭다오가 날씨도 안 좋아지고 여러모로 이상해졌다고 말하면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내게 다가온 야야가 더위에 헥헥거리며 내 앞에 앉았다. 갈수록 말라가는 모습에 멀리 있는 사료 통을 내다보자 얼마 전 내린 빗물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 빵을 가지고 나와 던져주었겠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다.

 

야야, 너는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니?”

 

야야의 순수한 파란 눈이 내게 뭐라고 말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야야를 지나쳐 사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한국인 직원들이 아무도 없었고 건너편 샘플 실에서 중국인들이 기계처럼 실에 구슬을 꿰고 캐스팅에 인조진주를 붙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국 포털사이트에 접속하자 몇 달 전 터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사와 얼마 전 터진 화재사고, 교통사고 등이 메인에 떴다. 세월호 참사로 몇 명 사망, 화재사고로 몇 명 사망. 사망자의 숫자들이 화면 위로 떠다녔다.

 

그때, 갑자기 사무실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보니 야야가 옆으로 누워 심하게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왔고 목은 뒤로 꺾일 듯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겁에 질린 파란 눈이 내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놀란 나는 바로 사무실로 달려가 중국인 직원들에게 동물병원 전화번호를 물었다. 누군가 건네 준 전화번호부를 펼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동물병원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번호를 누르려 하는데 한 직원이 다급한 내 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야야, 죽었어.”

 

손에서 전화번호부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일어나 사무실 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야의 까맣고 푸석푸석한 꼬리가 갈라진 콘크리트 위에 축 늘어져있었다. 경비 아저씨들이 몰려들어 우왕좌왕하며 야야의 사체 주변을 분주히 움직였다. 도저히 야야의 죽은 모습을 더 볼 자신이 없어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망연하게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며 야야가 아침에 죽은 쥐의 사체를 가지고 놀던 걸 봤다면서 아마도 쥐약을 먹고 죽은 쥐를 먹어서 죽은 게 아니냐고 했다. 전날 저녁 옆자리 여직원이 복도 여기저기에 쥐약을 뿌려놓던 모습이 떠올랐다. 야야는 그렇게 사망 ‘1’이 되었다.


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야야는 사람들에게서 잊혔다. 야야는 그저 5년 전 칭다오에서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쥐약을 먹고 죽은 평범한 개였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야야의 짧은 5년간의 인생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젖은 흙이 묻은 수풀 위에서 자는 걸 좋아하는지,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지,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는지...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녀석의 파란 눈은 그렇게 영원히 흙속에 묻혔다.


야야가 죽은 이후로 내 눈은 마치 흐린 칭다오의 하늘같았다. 그 날 역시 멍하게 모니터의 화면보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장 난 선풍기가 삐거덕대며 돌아가고 있었고 매미울음소리가 나 홀로 남은 사무실 안까지 파고들어왔다. 내 다리는 이제 거의 걷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중국인 직원에게 돈을 빌려 옆 동네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의원에 다녀왔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샘플을 구하러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좁은 사무실에 남아있어야만 했다. 한국인 직원들이 나만 이 더운 날씨에 사무실에 남아있다며 눈치를 줬지만 더는 어찌할 수 없었다.

 

무료함에 한국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여전히 사건사고가 많이 터지는지 무슨 사고 사망자 몇 명, 이라는 기사만 눈에 띄었다. 그렇게 가만히 기사들을 훑다가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사망자 5, 사상자 17.....“

 

내가 만일 이 사고의 사망자였다면, 나도 사망자 숫자 ‘1’에 불과하겠지. 저 사망자도 숫자 ‘1’, 나도 숫자 ‘1’....

 

그리고 칭다오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리고 의자에 구부정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래. 모든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죽는 거야. 내가 지금 죽어도 사망자 숫자 ‘1’일 뿐이야. 사람들은 숫자 ‘1’의 인생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아.

깨달음을 얻은 나는 나를 꽁꽁 옥죄고 있던 끈들을 끊어낸 듯 한 해방감을 느꼈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리고 5분 전의 인생과 현재의 인생이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마 소재의 검은 민소매를 입은 조선족 여직원이 들어와 내게 말했다.

 

사장님께 듣기론 너 발목을 다쳐서 못 걷는다며.”

“....”

병원에 가볼 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검은 머리칼이 휘날리도록 몸을 홱 돌려 나간 여직원을 보고 서둘러 가방을 메고 뒤따라나갔다. 발목이 좋지 않아 절뚝거리며 따라가자 한참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던 조선족 여직원이 잠시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먼저 앞서가 빵차 문을 열고 기다려주었다. 내가 올라타자 자신도 따라 올라타고는 기사 아저씨에게 중국어로 출발하라고 했다.

 

중국은 워낙 땅이 커서 조금 큰 병원이 있는 곳이면 차로 1시간가량이 걸렸다. 그다지 승차감이 좋지 않은 빵차가 고르지 못한 땅 위를 달릴 때면 이리저리 흔들려 발목이 찌르듯이 아팠다. 내가 발목을 손으로 감싸자 말없이 옆에 앉아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못 걸을 정도까지 뭐했어? 여태까지 참으면서 일한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네 몸 희생해가면서 일하면 누가 알아줄 것 같니? 아니. 아무도 안 알아줘. 네 발목이 아프던 네가 못 걷게 되던 아무도 관심 없어. 여기뿐만 아니야 그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한테 관심 없어.”

 

사람들은 너한테 관심 없어.’라는 말이 어쩐지 반갑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어떠한 일을 포기하거나 실패해도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한국..돌아가고 싶지.”

 

나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돼. 네가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할 수 없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대답대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차갑다고만 여겼던 그녀의 눈에서 야야의 순수한 파란 눈이 보였다.


그때의 나는 빵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목을 다친 평범한 스물 두 살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길고 검은 머리칼을 가진 평범한 서른 두 살의 여성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둘러싼 특별함.’이라는 카메라들을 치우고 자유롭게 홀로 서 있는 내 인생의 평범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스스로 특별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숫자 ‘1’이고 내 옆에 있는 조선족 여직원도 숫자 ‘1'이고 야야도 숫자 ‘1’이다.

 

나는 그렇게 한 달 후 한국에 귀국했다. 그리고 한 달이 더 지나 발목수술을 받았고 현재까지 숫자 ‘1’로 살고 있다.

 

(회사 앞) 

작품 등록일 : 2018-08-29
잘 봤어요 복숭씨
an****   
잘읽었어 잘쓴다
dd*****   
글 끝내준다 언니가 쓴 다른 글들도 읽고 싶다. 문학관에 더 올려줘!
irue   
숫자1 또 봐도 멋있어
tl**********   
고생했어 1 화이팅
asam1020   
회사에서 울었다
do******   
잘 봤습니다
gl***   
베스트에 뽑힌거 보고 나서 즙짜고 또 본다. 쓰니언니 앞으로 잘 될거고 행복할거야 ㅠㅠ!
시진핑 사생팬   
와 대박 문학이네
모자 쓴 소녀   
잘 사시오.
sa*****   
그와중에 아버지 걱정되서 딸이랑 비행기 타고 직장까지 가신거, 말없이 청소해주신거 너무 감동적인듯. 쓰니 한국 돌아올 때 가장 반기신 분이 아버지 였을것같아
살랑   
숫자 1...
전두엽을 때리고 갑니다.
뜨뜨미지근   
잘읽었습니다아.넘 생생히 잘읽힌다
댓글보고 알았는데
남자옹동이 글은 몬가요 안보여서 아쉽네요 ㅎㅎㅎㅎ
다른글도 읽어야지!
말캉말캉 시크릿   
ㅠㅠㅠㅠㅠㅠㅠ
선생님 행복하세요 존경스럽습니다
호랑이   
행복했으면
em*******   
숫자 1 이다.
kk****   
글이 너무 좋다
al*****   
좋다..... 글 왜이렇게 잘써
발목을 수술할 정도로 참은거면 대체 ㅜㅜ

칭다오가 나와서 놀랐다 ㅋㅋㅋㅋ 아이고
고생많았다.
RMB 버는 여자   
넘 좋다.진짜
sh****   
ㅠㅠㅠㅠㅠ 감동이다
treasure   
미친글이다. 너무 좋다는 뜻이다.
su*****   
잘했어
do****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lu*********   
너무 좋다!!!
털쟁이   
멋진 글이다...
비타오백   
지금 나에게 너무너무 필요했던 글...
잘 살아보자. 고마워.
na******   
너무 좋다.

혼자서 그걸 깨달았다는게 참 대단해
그 시간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도 안된다

잘 살아보자 우리
부끄꼼   
휴....
Darian   
엉엉 나는 특별하지 않다 ㅠㅠ 근데 내리니까 저밑에 남자 댓글 뭐야 ㅋㅋㅋㅋㅋㅋ
개줌마   
감동적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까지 방황하던걸 현대 버전으로 보는것 같아요 언니 잘 살고 있기를
선우   
이글을 읽고 10분동안 멍때림
sa*****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부처가 한 말을 처음 들었을때는
잘난척 오지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 말뜻을 알겠더라고.
아무도 나만큼 내 맘 모른다는 그 뜻인 거 같애

발목이 잘 아물기를 바란다.
cl********   
감사합니다
Jen   
#
ng*****   
고생하셨습니다
상고   
니미 언니한테 너무 감동받아서 충전해따 ㅠㅠㅠ
내 소박한 돈을 받으시와여
사랑합니다
개비개비   
글 왤케 잘쓰냐 뭔데 눈물남 ㅜㅜ 다음편도 써주라!!!
sk****   
ㅋㅋㅋㅋㅋㅋㅋㅋㅋ감동받고 댓글보고 파괴
정의는나의것   
글읽고 감동받아서 작가 다른글 누르면 남자 엉덩이 100명 때리기 나옴
감자튀김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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